한번은 오찬회에 참석했는데, 어떻게 앉다 보니 우리 동네 장의사 옆에 앉게 되었다. 나는 그 사람과 전에도 만난 적이 있었지만 그건 사무적인, 아주 간단한 만남이었다. 왜냐하면 장례식 때면 우리 둘 다 각자 할 일이 있는데다 사실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여종업원이 음식을 천천히 가져오는 바람에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장의사에게 뭐라고 말한담?
나는 우리가 보통 만났을 때 하는 인사, 가령 “사업은 잘되어 가십니까?”라든가 “하시는 일이 바쁘십니까?”라는 말을 함으로써 대화를 시작하려 했다. 그러나 그런 인사말은 장의사에게 별로 합당한 인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요즈음은 불경기라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그것과 관련된 말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불경기가 계속되고 있는데, 경기가 바로 회복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렇죠?” 그런데 막상 말을 하고 나서 생각하니까 이건 그의 사업을 위해서는 별로 좋은 소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아차” 싶었다.
얼마 전에, 그가 경영하는 장의사에서 신문에 광고를 낸 적이 있는데 - 그건 손에 수표를 들고 달려가서 투자를 하게 만드는 그런 광고는 아니고 - 만일 올해 죽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150달러에 해당되는 아치형 매장지에 거저 묻어 주겠다는 내용의 광고였다. 물론 그가 이처럼 좋은 제안을 한 것에 대해 적어도 치하는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거기서 이야기할 만한 주제는 못 되는 것 같았다. 나는 그가 혹시 계약금을 주고 예약했다 잔액을 완불한 후에 물건을 받게 되어 있는 구매 방식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왠지 “선불 상품”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려 말하지 않았다.
이래서 평생 처음으로 설교자인 내 입에서 말이 나오지 않아 입을 꾹 다물고 있어야만 했다. 나는 여종업원이 속히 음식이나 가져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적어도 음식에 대해서나 함께 불평할 수 있지 않겠는가?
정말 서로 대화할 공통 화제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건지 이때 절감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 장의사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 사람도 좋은 화젯거리가 있어서 신바람 나게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 그 사람도 도대체 목사에게 뭐라고 말한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는 언젠가 만화에 나왔던 것처럼 “이 세상이 목사님이 일하시기에 충분할 만큼 악한가요?”라고 말할까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주말에는 무얼 하시죠?”라고 물어볼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게 질문했다면 뻔한 대답을 듣고는 멋쩍은 생각이 들었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거기 그렇게 앉아 있었다. 다 자란 사람 둘이 각자 살고 있는 다른 두 세계가 만들어낸 틈을 메우기 위해 속으로 궁리만 하며 입을 꾹 다문 채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오늘날 온 세계가 안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흑인과 백인, 젊은이와 노인, 부자와 가난한 자, 노동자와 경영인, 긴 머리와 짧은 머리, 부모와 자녀, 이 모든 것 사이에는 갭이 있다. 그런데 상대방의 문제에 대해 조금만 더 알게 되면 대부분의 경우 그 갭을 메울 수 있다. 우리는 너무 자신의 세계에만 골몰해 있기 때문에 상대방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다. 우리가 종종 인용하기도 하는 인디언의 기도를 들어 보면, 그 안에서 지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대주재시여, 내가 이웃의 모카신을 신고 1마일을 걸어보기 전에는 절대 이웃을 비판하지 않게 해주소서.”
한 가지는 아주 분명하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의 삶을 나누기 시작한다면 그리스도를 위해 하고자 하는 우리의 증거가 백 배는 더 효과적일 거라는 점이다. 우리는 에스겔처럼 되어 “거하는 자들에게 나아가……”야만 한다(겔 3:15 참조).
- 웬델 켄트-
하나님 이야기는 항상 끝이 좋다
바이올라 왈덴 저. 생명의말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