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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막 9:49)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들어가는 말 : “지옥-hell”이라 불리는 실제의 장소가 있습니까? 사람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가 바로 지옥(地獄:hell)이라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과 많은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흔하게 사용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옥(地獄)을 실제적인 장소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대부분 상상의 장소이거나 영적인 장소로서 비유적인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지옥(地獄)은 [땅 속에 있는 감옥]이라는 의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땅 속에 있는 감옥]을 지옥(地獄)이라고 부르면서도 지옥(地獄)이 실제로 [땅 속에 있는 감옥]이라고 믿지는 않습니다. 스스로 믿지 않을지라도 지옥(地獄)이 [땅 속에 있는 감옥]인 것은 확실합니다. 만약 지옥(地獄)이 [땅 아래에 있는 실제적인 장소]가 아니라면 성경은 거짓의 책이며, 예수님께서는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지옥(地獄) 역시 사실이며, 실제적인 장소입니다.
모든 성경 기록은 문자적인 기록이며, 문자적 사실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모두 54구절에서 지옥(地獄)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는데 이 중에 16구절이 예수님께서 직접 지옥(地獄)에 대하여 말씀하신 구절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 한 번도 지옥(地獄)을 상상의 장소, 또는 영적이고 비유적인 장소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옥(地獄)을 항상 실제적인 장소로서 말씀하셨고 지옥(地獄)에 가지 않도록 가장 강력하게 경고하셨습니다. 만약 지옥(地獄)이 실제적인 장소가 아닌 상상의 장소라면 예수님께서는 거짓말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실 이유가 있습니까? 성경 기록이 사실이며, 육체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말씀이 사실이라고 믿는다면 지옥(地獄)이 어디에 있으며, 어떤 곳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지옥은 확실히 있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에 “거짓말하면 지옥 간다.”라는 말을 종종 들었습니다. 세계 각국의 동화, 신화, 전설 등에도 공통적으로 지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지옥에나 떨어져라.”라는 말을 들으면 화를 냅니다. 만약에 지옥이 없다면 그런 말을 들어도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지옥이 있기 때문에 심히 불쾌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은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9장 43절)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을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나으니라”
사람이 죽으면 그의 몸은 땅에 묻혀 썩어 버리지만, 그의 영은 창조주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전도서 12장 7절). 그리고 사람의 본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혼은 둘 중 한 곳으로 가게 됩니다. 자기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구원을 받은 혼은 낙원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죄가 있는 자는 지옥에 들어가 꺼지지 않는 불 속에서 영원토록 고통을 받게 됩니다.
누가복음 16장 19-31절 말씀에는 천국에 들어간 거지 나사로와 지옥에 들어간 어느 부자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옥의 실제 상황을 생생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비유나 상징이 아니라 실화입니다. 지옥은 정말로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의 마음이 평안하면 극락이요, 걱정과 번민이 가득하면 지옥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지옥은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형벌의 장소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종교단체에서는 지옥은 존재하지 않으며 무덤이 곧 지옥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죄인들이 형벌을 받으며 고통을 당하는 지옥이 분명히 있다고 합니다.
지옥이 정말로 있다면 그것은 어디에 있습니까?
첫째, 지옥(地獄)이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땅 속의 감옥”이라는 뜻입니다. 지옥은 저 먼 우주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의 아래, 땅의 중심부에 있습니다. (잠언 15장 24절) “지혜로운 자는 위로 향한 생명 길로 말미암음으로 그 아래에 있는 스올을 떠나게 되느니라” (아모스 9장 2절) “그들이 파고 스올로 들어갈지라도 내 손이 거기서 그들을 붙잡으리라…” 지옥은 꺼지지 않는 불로 타오르는 곳인데(마가복음 9장 43-48절), 죄인들은 뜨거운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으며(누가복음 16장 23-24절, 28절), 그 형벌은 영원토록 계속되며(마가복음 9장 44절 ,46절, 48절), 한 번 거기에 들어가면 아무도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누가복음 16장 26절).
그러므로 여러분 중 어느 누구도 이 고통 받는 지옥에 가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지옥에 가면 안 되는 이유는, 첫째로 여러분 중에 지옥에 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간혹 “나를 그냥 내버려두어라. 난 차라리 지옥에 가겠다.”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실제로 지옥에 가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둘째, 이미 지옥에 가 있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지옥에 오지 말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옛날 민담이나 공포 영화에서는 이 세상에서 한을 품고 죽은 자가 지천을 떠돌다가 사람들을 유혹하여 함께 지옥에 데려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꾸며낸 이야기이지 사실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지옥에 간 어떤 부자가 제발 자기 형제들은 이 고통 받는 형벌의 장소로 오지 않게 해 달라고 간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지옥에 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6장 28절) “내게 다섯 형제가 있사오니 그들에게 증언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장소로 오지 않게 하소서”
셋째, 지옥은 사람이 참고 견딜만한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따뜻한 목욕탕 물에 몸을 담글 수 있고, 60~80도 정도의 찜질방에서도 땀을 빼느라고 더운 것을 어느 정도 참을 수 있지만, 105도 정도 되는 한증막에서는 10분을 버티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지옥은 건강을 위한 찜질방도 아니고, 극기 체험 훈련장도 아닙니다. 그 곳은 고통과 형벌의 장소이며, 사람이 견딜 수 없는 뜨거운 불로 끊임없이 태워지는 곳입니다. 그 곳에는 더위를 식혀 줄 물수건도 없고, 시원한 식혜나 냉커피도 없습니다. 그 곳은 감옥이기 때문에 뜨겁다고 뛰쳐나올 수 없습니다. 이처럼 지옥은 사람 살 곳이 못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절대 지옥에 가면 안 됩니다.
넷째, 지옥은 사람들을 위해 준비된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옥은 하나님께 반역한 마귀와 마귀의 부하 천사들에게 형벌을 주기 위해 예비한 곳이지, 사람들을 위해서 만든 곳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부인하며, 하나님을 싫어하고, 마귀를 따르며 죄를 짓는 자들은 마귀와 그의 부하들과 함께 형벌의 장소에 들어가게 됩니다. (마태복음 25장 41절)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사람이 지옥에 가는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면 지옥의 형벌을 피할 수 있습니다. 죄인들은 자기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 자기 죄의 문제를 맡기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자기 죄를 대신 담당하신 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베드로전서 1장 9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줄거리 : 성경은 지옥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첫째, 지옥은 죄인이 죽은 후에 가는 곳으로(시편 9장 17절, 마태복음 23장 15절, 33절, 잠언 9정 18절, 요한계시록 20장 13절, 누가복음 12장 5절), 불타는 가운데 고통받는 형벌의 장소입니다. 성경은 지옥에 대해, “지옥의 고통”(시편 116편 3절),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에”(누가복음 16장 23절),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고”(누가복음 16장 24절), “꺼지지 않는 불속인 지옥”(마가복음 9장 43-49절), “지옥의 불에서 태우느니라.”(야고보서 3장 6절)고 말씀하고 있으며 그 참혹함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고통을 받는 것은 지옥에 가는 존재가 “혼”(Soul)이기 때문입니다. 혼은 영원히 죽지 않으면서 불에 타며 고통을 느끼는 존재입니다(요나 2장 2절, 누가복음 16장 23-24절, 27-30절).
바로 이 지옥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3일 낮과 3일 밤을 고통받으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확증하시기 위해 부활하신 것입니다(시편 16장10절, 사도행전 2장 27절, 31절). 주님의 사랑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감수하신 것뿐만 아니라 지옥 불도 친히 감내하시고 이겨내신 것입니다. 이 큰 사랑과 구원을 어떻게 소홀히 여기며, 잊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죄인들을 위해, 바로 자신들을 위해 주님께서 겪으신 지옥의 고통을 제거하며 믿지 않는 사람들이 주님의 사랑을 얼마나 알 수 있겠습니까?
둘째, 지옥은 위치적으로 “가장 낮은” 곳으로(신명기 32장 22절) 땅 속, 즉 땅의 심장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마태복음 12장 40절). 그래서 성경은 지옥을 설명할 때, “가장 낮은 지옥”(시편 86편 13절), “아래 있는”(잠언 15장 24절, 이사야 14장9절), “땅의 아랫부분”(에스겔 3장1절, 16-18절, 32장 18-30절), “지옥의 깊은 곳들”(잠언 9장 18절), “지옥으로 내려간다”(시편 55편 15절, 에스겔 31장 17절, 32장 21절), “지옥으로 끌어내려 진다”(이사야 14장 15절, 57장 9절, 누가복음 10장 15절), “지옥으로 파고 들어간다”(아모스 9장 2절), “지옥까지 낮아진다”(마태복음 11장 23절)는 등의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8-10절 말씀에서도 “8)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아 갔고 사람들에게는 은사들을 주셨다.”고 하셨느니라. 9) 따라서 그가 올라가셨다는 것은 그가 땅의 더 낮은 부분들로 먼저 내려가셨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10) 내려가셨던 그가 모든 하늘들 위로 올라가신 바로 그분이니 그가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시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지옥이 땅 속에 실제로 있는 장소임을 묘사하시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셋째, 지옥은 구조적으로 볼 때, 여러 부분들로 구분되어 있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지옥에 문들이 있으며(마태복음 16장 18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옥의 열쇠들을 가지고 계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요한계시록 1장18절). 특히 지옥 중에는 특별한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영들이 있는 장소입니다(베드로전서 3장 19절). 이곳은 지옥과 분리된 별개의 장소가 아니라 “지옥 안에 있는” 특정한 장소로, 성경이 “감옥,” “흑암의 사슬,” “영원한 사슬,” “흑암” 등으로 표현하는 곳에 죄를 지은 천사들이 갇혀 있는 것입니다(베드로후서 2장 4절, 유다서 6절).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천사들조차 아끼지 않으시고 지옥에 던져서 흑암의 사슬에 내어 주어 심판 때까지 가두어 두셨으며”(베드로후서 2장 4절). “또 자기들의 처음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신들의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주께서 영원한 사슬로 묶어 큰 날의 심판 때까지 흑암 속에 가두어 두셨느니라”(유다서 1장 6절). 또 구약의 성도들이 거하던 낙원과의 사이에 커다란 구렁으로 분리되어 있던 곳이 지옥입니다(누가복음 16장 26절). 지옥을 뜻하는 단어 “스올,” “하데스,” “게헨나” 외에 “타타루스”(Tartarus)가 있는데, ‘베드로후서 2장 4절 말씀에서 한 번 나옵니다. 보통 “지옥”이라는 표현보다 “타타루스”라고 부르는데, 이곳은 지옥과 분리된 곳이 아니라 지옥 안에 있는 특정한 장소를 말합니다.
지옥은 가득차지 않으며(잠언 27장 20절), 스스로 확장하여 한없이 입을 벌리고 있습니다(이사야 5장 14절). 그래서 성경은 사람이 만족할 줄 모르고 욕심을 부리는 것에 대해 지옥이 스스로 넓히는 것처럼 욕심을 넓힌다고 말씀합니다(하박국 2장 5절). 혹자는 지옥에 갈 사람이 부족해서 자신이 가겠다고 두려움 없이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의 허황된 말에 우롱당하지 않으십니다. 누구든지 지옥에게 한 번 물어보십시오. 그곳이 가득차려면 얼마나 남았는가를…
넷째, 지옥은 시대에 따라 그 위치와 상태가 다르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구약과 현재 교회 시대에는 죄인들의 몸(Body)은 흙으로 가고, 혼(Soul)은 고통받는 형벌의 장소인 지옥에 가지만, 천년왕국 때에는 몸과 혼이 동시에 지옥 불에 던져져서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마태복음 5장 22절, 29-30절, 10장 28절, 18장 9절, 마가복음 9장 43-47절). 백 보좌 심판 이후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지옥이 불 못으로 불리며(요한계시록 20장 15절, 21장 8절), 더 이상 땅속에 있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시대에는 지옥설교가 행방불명 되었습니다
천국과 지옥의 언급은 불신자들에게는 허무맹랑한 소리로만 들려집니다. 천국과 지옥이라는 단어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살 때 착한 일을 많이 하고 나쁜 일을 뿌리치도록 하기 위해서 특정 종교가 만들어 낸 교리에 불과하다며 일거에 적대감을 드러내곤 합니다.
아마, 여러분은 벽에 그려진 사자를 보고서는 절대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그림일 뿐 당신은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쉽사리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천국은 세상에서 착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이 가는 곳이고, 지옥은 나쁜 일을 많이 한 사람이 가는 곳이라고 단순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정도입니다. 하지만 천국과 지옥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당신 지옥 간다”라고 말하면 당장 반발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럼에도 왜, 사람들은 지옥이라는 엄중한 테마에 무사태평 반응하는 것입니까?
다시 말씀드리면 아마, 여러분은 벽에 그려진 사자를 보고서는 절대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그림일 뿐 당신은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쉽사리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홀로 밀림 지대에 남겨지면서 바로 눈앞에서 격렬하게 으르렁거리는 진짜 사자를 만난다면 극심한 공포로 떨 수밖에 없을 것 아니겠습니까?
교회에서 지옥의 엄청난 두려움에 대해 진지하게 그 사실을 꾸준히 전달하여 왔다면, 사람들의 양심이 그림 속의 사자를 보는 것과 같이 그처럼 무감각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빈번하게 지옥에 관해 성경에서 듣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누구보다 이 지옥에 대해 토로하였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진정으로 지옥의 존재를 믿지 않으면서 거부하는 것입니까? 왜 사람들이 지옥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까? 바로 그것은 지옥의 큰 고통에 대한 불신 때문입니다.
원인을 소급하면, 그것은 분명 지옥에 관해 충분히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옥에 관한 바른 진실을 인내심을 가지고 전달하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합니다. 이것은 무분별한 공포심을 조성하여 역효과를 초래하는 것과는 근본을 달리하는 것입니다. 만일 누가 알지 못하고 절벽 끝으로 가는 것을 보면 마음이 혼비백산하여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엄중 경고해 주지 않겠습니까? 영원한 지옥이 몇 발자국 목전에 있는데, 그런 참혹함 속에서 어찌 침묵만 지킬 수 있을 것입니까?
오늘의 설교에서 사라진 지옥
성경의 첫 도입부는 태초로 시작하고, 마지막은 주님의 재림으로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창조와 심판이 성경의 핵심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성경은 마지막 때는 분명히 심판이 있으며, 그 이후에는 영원한 지옥과 천국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비타협적으로 확고하게 전언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분초를 다투어 심각하게 들어야 할 설교 중에 하나가 지옥에 관한 설교입니다. 이보다 더 심각하고 긴박한 설교가 어디 있겠습니까? 당연히 지옥에 대한 설교는 성경의 핵심으로 그 무엇보다도 최우선 순위를 차지해야 합니다.
역사상 하나님의 도구로 사랑받았던 사역자들은 하나같이 지옥을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유독 극성스런 긍정적 사고와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것이 미덕이 되어 버린 우리 시대에 와서는 강단에서조차 지옥이 실종되어 버렸습니다. 현 세대의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보다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더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사랑의 하나님에만 목을 매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지옥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단순히 죄의 경험에 대한 심리적인 고뇌를 묘사한 것으로 또는 죄인들의 영원한 형벌이 아니라, 그들의 일시적 고난이나 파멸에 대해 가르치는 것으로 축소시킴으로써 성경을 재해석하고자 시도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상이 교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지옥은 비유의 처지로 전락
미국의 저명한 복음주의자 A.C. 딕슨(Dixon)은 이제 지옥이라는 말은 비유의 처지로 전락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지옥에 대해 증거하기를 중지한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어쩌면 설교자들 스스로가 지옥에 대해 믿지 않거나, 믿더라도 무감각해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미국의 저명한 복음주의자 A.C. 딕슨(Dixon, 1854-1925) 박사는 “우리가 강단에서 지옥에 관한 설교를 더 많이 했더라면 우리 사회에서 최소한 지옥과 같은 현실이 더 적어졌을 것입니다”라고 통탄하고 있습니다.
어떤 교양 있는 여성이 목사님께 “저는 지옥의 사상을 단호히 거부합니다.”라는 당돌함에 목사님은 “사람들이 형무소를 싫어하고 전기의자나 교수형 같은 사형을 싫어하지만, 정부에서 만들어 놓은 것과 같습니다.”라고 답변하였다고 합니다. 또 어떤 목사님이 지옥 설교를 마치자마자 한 교인이 다가와 “요즘 목사님들은 성경에서 지옥을 뽑아버린 것도 모릅니까?라며 따지고 들었습니다. 그 때 목사님이 지혜롭게 응답하기를 “지옥이란 제목을 뽑아버릴 수는 있어도 지옥의 장소를 없게 할 수 없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의사는 환자가 적극적으로 피하려고 해도 주사를 놓아야 할 때는 놓고,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해도 수술을 해야 하듯 사역자들이 이런 엄청난 책무를 내팽개치고 사탕발림 식의 감칠맛 나는 설교만 취사선택한다면 이는 엄청난 직무유기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통스러운 진리”(Painful Truth)
일찍이 지옥의 두려움에 관해 탁월한 설교자 중의 하나로 미국이 낳은 최고의 신학자이자 사상가이자 프린스턴 대학 총장까지 지낸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 1703-1758) 목사님을 들 수 있습니다. “성난 하나님의 손안에 떨어진 죄인들”이라는 설교에서 그는 죄인들에게 내릴 하나님 저주의 모습을 마치 그 현장에 있는 듯 한 착각이 들 정도로 날카롭고도 섬뜩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에만 과도하게 매달려있던 사람들은 이 설교를 통해 그처럼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구구절절이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라도 죄인들을 지옥으로 던져 버릴 수 있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회오리바람 앞의 먼지와 같이 날려 버리시며 활활 타오르는 불기둥 앞의 마른 검불 신세와 같이 태워 버리십니다.” “지옥의 용광로는 이미 뜨겁게 달아올라 여러분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비참한 세계, 끝없이 타오르고 있는 유황 불 못은 지금 여러분의 발밑에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이처럼 현기증 나는 설교를 듣고 누가 교회에 남아 있겠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부득불 교회에 사람이 더 모여들게 하고 머물게 하기 위한 교회성장 프로그램에서는 지옥을 배제할 수밖에 없고, 그들의 육신적이고 감각적인 필요만을 연거푸 채워주는 세속화에 가깝게 다가서는 것입니다. 전도에 있어서도 역시 지옥에 대한 메시지를 생략합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에게 지옥이라는 말을 하여 거부감을 주지 않아 교회의 문턱으로 인도하겠다는 명분에서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믿을 때에 얻는 복만을 유독 강조합니다.
미국에서 무디 성경학교 교장을 지낸 R.A.토레이(1856-1928)는 지옥에 대해 설교하면서, 그것을 “고통스러운 진리”(painful truth)라고 규정했습니다. 하나님을 영접하지 못하면 즉, 구원을 받지 못하면 바로 “당신”이 바로 “내”가 그 비참한 지옥에 가야 한다는 경악스런 사실 때문입니다. D.L.무디(Moody)는 “만일 지옥이 없다면 많은 시간을 들여 성경 읽을 필요도 없고,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예배당을 지을 필요가 없다”라고 단언했습니다.
영원토록 희망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그 곳, 끝도 정해져 있지 않고 단 한 치의 고통도 감소되지 않는 그 곳에 가야 한다는 엄연한 사실 자체가 바로 “고통스러운 진리”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세대의 현실은 정반대이기 때문에 너무 말문이 막일 정도입니다. 많은 교회들 또한 말로만 지옥을 인정하지 실제로는 지옥을 믿지 않는 기현상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현대교회의 성도들이 죄인들의 구원 문제를 위한 수고와 정열을 외면해 버린 것은 자가당착일지 모릅니다. 이유인즉, 저들이 지옥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을 망각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는 설교자에게 결정적 책임이 있습니다. 지옥에 관한 설교를 분명히 해주었더라면, 성도들이 더 많이 전도했을 것이며, 더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받았을 것입니다. 요체인즉, 오늘날 목자들이 지옥에 관한 설교를 많이 했더라면 지옥에 가는 사람이 많이 줄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옥의 설교” 당연히 최우선 순위
사회가 도덕적 윤리적으로 부패와 부정과 무질서가 극성을 부리면서 가치관이 땅에 떨어질 정도로 혼란스러운 것은 바로 지옥(교도소)에 대해서 너무나도 무지하여서 오는 불치병이기 때문입니다. 현대 강단에서 성경의 지옥에 관한 진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욱 강력하게 더욱 필사적으로 전파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세상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악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도덕적으로 부패하고 윤리적 질병이 날로 심각해지는 것은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거의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회가 도덕적 윤리적으로 부패와 부정과 무질서가 극성을 부리면서 가치관이 땅에 떨어질 정도로 혼란스러운 것은 바로 지옥에 대해서 너무나도 무지하여서 오는 불치병이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지옥의 교의를 강조하는 것은 사람들을 겁주는 데에 불과하지, 진실한 신앙을 받아들이는 데에 좋지 않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지옥에 대하여 진실을 말한다면 세상은 복음의 의미를 더욱 깊이 생각할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지옥에 가지 않지만, 지옥의 실체와 그 두려움에 대해서는 더 잘 압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 지옥 자체의 본질에 대해 거듭 상기시킬 때, 그들은 자신들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더욱 찬양하고 감사하게 될 것이며, 구원받지 못한 주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뜨거운 열정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거듭 강조하면, 지옥은 복음 설교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 다음의 핵심이 되어야 할 뿐 아니라 병행하여 맹렬하게 강조되어야 합니다.
구원을 받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피 흘려 죽으셨다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인데,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피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죄인 됨을 느끼지 않고는 구원의 필요성을 느낄 수 없고, 죄인이 지옥에서 형벌 받는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는 하늘에 대한 소망도 갖지 못합니다. 지옥의 형벌이 없는데 왜 죄의 용서가 필요하며, 어찌 하늘인 천국을 갈망할 수 있겠습니까?
1865년 창립한 구세군의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사관들이 신학교에서 4년 동안 공부하느라 고생하지만, 내가 진정으로 가장 행하고 싶은 일은 사관생들을 단 10분 동안만이라도 지옥에 끌고 가서 그 참혹한 체험을 하도록 함으로써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정으로 불타게 하는 것입니다” 영국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는 지옥 설교에서 “여러분의 손가락을 불에다 대고 있어 보십시오. 잠시동안도 견디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고통은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온몸이 불에 들어가 죽지도 않고 영원히 있을 것을 생각해 보라.”고 했습니다.
지옥이 없다면 예수님을 꼭 믿을 필요도 없고 전도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고 영접해야만 지옥을 피하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목숨 걸고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입니다. 이에 지옥의 설교는 상대방이 어떠한 마음을 갖든지 어디서든 우렁차게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거짓 선지자요 사기꾼 목자이자 사이비 신자임에 다름 아닙니다.
반드시 지옥에 대한 메시지가 선포되어야합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고 위임하신 사도행전 1장 8정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래서 사도들을 비롯한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의 종들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수많은 영혼들의 눈을 뜨게 하여 흑암에서 광명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도구들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1900년 이후부터는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배교자들의 범람으로 주님의 가장 중요한 사역인 영혼 구제를 뒤로하고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 다른 일들에 눈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구제 사업, 범죄 퇴치 운동, 남북한 교류, 총기 회수 운동, 북한 국수 공장 설립, 찬양과 경배, 크리스천 록 뮤직, 방언, “귀신” 쫓기, 병 고침, 빈야드 운동, 세계 종교 통합 운동 등…)
이 세대의 비극 가운데 하나는 “지옥 불”에 대한 설교가 강단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옥 설교를 중점적으로 하셨고, 요한 웨슬리, 빌리 선데이, D.L. 무디, 샘 존스, 스펄전 등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들이 지옥 설교로 수많은 영혼들을 그 무서운 마귀의 세력으로부터 구출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배교자들은 영원히 불타는 실제적인 장소인 지옥에 대해 설교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게 되었고 그들이 두려워하기 때문에 이 진리는 비이성적이며, 비논리적이고, 지적이지 못한 것으로, 이 진리를 전하면 구닥다리, 광신자 내지는 “미운 오리새끼”로 낙인찍힐 것이기에 잠자코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위기가 오늘날 상식으로 통하며, 소위 “사도신경”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지옥에 대한 언급이 빠져 있습니다. 또한 성경에서 지옥의 존재를 제거하기란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지옥이란 단어를 “죽음” “무덤” “스올” “하데스” “음부” 등으로 대체시킴으로써 독자를 단어의 혼란 속에 빠뜨려 뚜렷하게 제시된 지옥의 심각성을 희석시켜 버렸습니다(사도행전 2장 27절, 2장 31절, 마태복음 11장 23절, 16장 18절, 누가복음 10장 15절, 16장 23절, 요한계시록 1장 18절, 6장 8절, 20장 13-14절 등). 더욱이 이런 성경들은 예수님이 지옥에 대하여 이사야서 66장 24절 말씀을 3번이나 반복해서 인용하신 것 중 두 번을 삭제함으로써 주님께서 이 구절들에서 강조하신 부정적인 메시지를 없애 버렸습니다(마가복음 9장 44절, 46절).
성경은 아주 단호한 어조로 영원한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지옥은 실재하는 곳이며, 무시무시한 사실입니다. 아무리 여호와의 증인들이나, 안식교 같은 사람들이 사사로운 성경 해석으로 지옥을 없애 버리려고 해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신약성경에는 회개하지 않는 자를 기다리고 있는 무시무시한 파멸에 대해 162여 곳에서 언급하고 있으며 이 중 70번 이상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지옥은 하나님의 임재로부터의 추방입니다.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으로부터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데살로니가후서 1장 9절). 지옥은 고통과 형벌의 장소입니다. “그 부자도 죽어서 장사되었더라.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에 눈을 들어…”(누가복음 16장 22-23절). “…또 그 사람은 거룩한 천사들의 면전과 어린 양의 면전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통을 받으리니”(요한계시록 14장 10절).
지옥은 원래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해 준비된 곳이었습니다. “너희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마태복음 25정 41절). 그렇다면 지옥은 인간을 보내려고 만든 곳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사함 받고 하늘나라 가는 것을 거부하고 지옥에 가기를 끝까지 고집한다면 그때에는 영원토록 그들의 아비 마귀와 함께 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한복음 1장 12절).
지옥, 절대로 가면 안 되는 곳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기가 싫은 것은 없다고 말하던지 아니면 부인하려고 애를 씁니다. “천국이 있다”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긍정을 하는데 무시무시한 “지옥이 있다”라고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잘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니 없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예를 들면 지옥입니다. 전도하는 사람이 예수를 믿으라고 해도 빈정거리면서 하는 말이 “천국이 어디 있는지 당신 가보았습니까? 지옥은 정말 있습니까? 가보았습니까?”라고 놀려댑니다. 그래서 전도자가 짓궂은 생각이 들어서 그 사람을 향해서 한마디 해 주었습니다. “당신 같은 사람은 지옥에나 가시요!”라고 했더니 그 사람이 펄쩍 뛰면서 하는 말이 “왜 내가 지옥에 갑니까?”라고 하더랍니다.
사람들이 천국에 대해서 설교하는 것은 좋아하지만 지옥에 대해서 설교하면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지옥에 관한 말씀을 읽으면 절대로 지옥 가서는 안 되며 반드시 천국에 가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눈이 범죄 하면 눈을 빼버리라고 말씀합니다.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한 눈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나은 일이라고 말합니다.
지옥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곳입니다.
사람들은 “지옥이 있다”라고 하는 것을 믿기는 하지만 그렇게 좋으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지옥을 만드셨겠느냐?”고 의아해합니다. 참 좋으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지옥을 만드실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신 사랑을 가지신 분이시면서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 때문에 지옥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지옥을 만드신 하나님은 사실 사람들이 지옥에 가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공의를 만족하게 하시기 위해서 지옥을 만드시기는 했어도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인들이 지옥 가는 것을 원치 않으셔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지옥형벌을 면하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거절하고 악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공의의 법에 의해서 지옥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국가는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할 필요가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가만 내버려두면 선량한 사람들에게 피해가 있습니다. 그래서 국가는 형무소를 만들어서 죄를 범한 사람들을 가둬두는 것입니다. 만약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살 수 있게 한다면 그것은 사랑의 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지옥을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에 대해서 징벌하기 위해서 지옥을 만드셨습니다.
지옥은 엄청난 고통의 장소입니다.
마가복음 9장 49절 말씀에 지옥을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고 말씀합니다. 무서운 말입니다. 과거에 연탄불을 피우던 시절에 굵은 소금을 연탄불에 집어넣어 보면 “탁 탁”소리를 내며 튑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사람이 지옥 불에 떨어집니다. 그 사람이 불에 소금을 넣는 것과 같이 됩니다. 이것을 조금 더 실감나게 말씀드리면 추어탕을 해 먹기 위해서 미꾸라지를 요리하는 과정에서 먼저 하는 일은 미꾸라지에 소금을 뿌립니다. 그때 어떻게 됩니까? 미꾸라지들이 꼬부라졌다, 펴졌다 하면서 야단법석을 떱니다. “지옥이 마치 그와 같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로서 소금 치듯 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끔직한 일입니다.
요한 웨슬리(John Wesley)목사님은 지옥 설교를 하시다가 “여러분의 손가락을 불에다 대고 있어 보십시오. 잠시동안도 견디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 보다 더 큰 고통은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온 몸이 불에 들어가 죽지도 않고 영원히 있을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4-15절 말씀에 불 못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불 못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을 말하는 것입니다. 100도가 넘는 사우나에 들어가서 견디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도 지옥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생각하면서 모험 삼아 들어가 보지만 5분도 견디지 못합니다. 그런데 지옥은 사우나 정도나 찜질방 정도가 아닙니다. 불 못입니다. 그곳에서 영원히 있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끔직한 일입니다.
누가복음 16장 말씀에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나옵니다. 부자가 죽어서 간 곳은 음부입니다. 그 곳의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아브라함에게 부르짖습니다. 아브라함의 품에서 안식하고 있는 나사로를 보내서 손끝에 물 한 방울만 찍어서 자신의 혀를 서늘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지옥에서는 물 한 방울 구할 수 없습니다. 무더운 여름 뜨거운 태양 빛이 내리쬐는 오후에 운동장에서 물을 먹지 못하고 땀을 흘리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런데 지옥에서는 불구덩이 속에 있으면서도 물 한 사발도 아닌 한 방울도 구할 수도 먹을 수도 없으니 그 고통을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옥의 고통은 영원합니다.
지옥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영원한 절망이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지옥 고통이 얼마나 큰지 죽으려고 해도 죽을 수 없는 곳입니다. 구더기는 얼마나 연약한 존재입니까? 사람이 한 손가락으로 살짝 눌러도 배가 터져서 죽는 연약한 존재인데 지옥에서는 그런 연약한 존재도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말씀에서 보면 지옥과 천국 사이에는 큰 구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으로 가거나 천국에서 지옥으로 갈 수 없습니다. 음부에서 너무나 고통스러운 부자가 나사로를 보내 달라고 청하지만 거절당합니다. 그 이유는 음부와 낙원 사이에는 큰 구렁이 있어서 서로 왕래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천주교에는 연옥설이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는 곳입니다. 대죄가 아닌 소죄를 지은 사람들이 가서 불로서 그 죄를 정화하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오랜 시간 고통을 당하거나 아니면 지상에 있는 사람들이 연옥에 있는 사람을 위하여 공로를 쌓으면 천국으로 옮겨진다는 설입니다. 하지만 이설은 성경적이지 못합니다. 성경은 그런 주장을 하는 곳이 한 곳도 없습니다. 지옥에 있는 사람이 천국으로 이사 갈 수 있다는 말을 한 곳은 한 곳도 없습니다. 지옥은 한번 들어가면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고통의 장소입니다. 단테의 신곡에 지옥문에 “이 문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은 소망을 버리라”는 글귀가 씌어 있습니다. 지옥 속에는 영원히 소망이 없습니다. 영원한 죄인들의 수용소인 지옥의 불 못은 잠시의 휴식도 취할 수 없는 곳입니다. 밤낮 쉼을 얻지 못하는 대신, 세세토록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는 곳입니다. 자살할 권리도 박탈당한 곳입니다.
지옥을 면하는 길은 예수 믿는 것입니다.
어느 집사님이 돌리는 이상한 전도지가 있었습니다. 그 전도지에는 “지옥에 가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제목이 적혀 있습니다. 집사님은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 전도지를 주면서 “그 뒤를 보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거기에는 별 다른 내용이 없습니다. 큰 글씨로 “아무 것도 없다”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옥에 가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흉악한 사람만 지옥에 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인류는 아담 안에서 이미 모두가 죄인입니다. 인류 전체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구원의 길을 가지 않으면 모두 지옥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바다를 항해하다가 배가 침몰을 당하였습니다. 구조선이 왔습니다. 그러나 침몰한 배를 그대로 타고 있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배와 함께 물에 빠지는 것과 같습니다. 배가 침몰하여 점점 가라앉고 있는 것을 안다면 어서 구조선으로 옮겨 타야 합니다. 구조선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안에 영생이 있고 생명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제 실례를 들어 드리는 것은 성경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책에서 본 한 실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버마의 미얀마에 사는 한 독실한 불교 승려가 황열병과 말라리아 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그래서 삼일 후에 화장하기 위해 장작을 쌓아 놓고 불을 붙이려고 하는 순간에 살아났습니다. 그는 3일 동안 천국과 지옥을 보고 온 사실을 간증하면서 다니다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의 이름은 파울루입니다. 파울루는 1958년에 델타라는 곳에서 태어났는데, 부모의 권면으로 17살 때 수도원에 들어가서 19살 때 정식승려가 되었는데, 그 때 받은 이름이 아쉰트라야입니다. 그 때에 가장 존경받는 승려가 사얀다우 승려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파울루가 수도원에 들어간 지 6년째 되던 해에 황열병과 말라리아 병에 걸려서 죽은 것입니다. 그가 3일 동안 죽은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몸이 부패해서 냄새가 나고 관에는 송장 물이 흥건히 흘렀습니다. 화장하기 직전에 살아나서 관에서 벌떡 일어나니까 모두 놀라서 도망을 갔습니다.
그가 죽어있는 동안에 환상을 보았는데 강한 폭풍이 불어오더니 모든 나무가 다 쓰러진 뒤에 강 건너편을 바라보니까! 무시무시한 지옥 불이 보이더랍니다. 그 지옥에 가까이 가서 보니까 지옥의 사자가 있는데 얼굴이 사자 같고 발은 뱀 같고 머리에는 뿔이 있더랍니다. 이름이 뭐냐고 물으니까, “나는 지옥의 왕, 파괴자다”하더니 지옥을 보라고 해서 들여다보니까 그 나라에서 가장 존경받던 사얀다우 승려가 있더랍니다. 사얀다우는 얼마 전 교통사고로 죽었는데 지옥에 와 있더랍니다. “그 훌륭한 분이 왜 이 끔찍한 지옥 불에 들어왔느냐”고 물어보니까, “그는 좋은 선생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지옥에 왔다.”고 하더랍니다. 또 한 곳에 보니까 긴 머리칼이 덮인 분이 머리를 왼손으로 감싸 쥐고 번민하고 고통하는것을 보고 누구냐고 하니까, “네가 숭배하던 가우타마(부처)다.” 하더랍니다. “부처님은 훌륭한 윤리와 도덕의 사람인데 왜 지옥에서 고통을 받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얼마나 착한가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지옥에 온 것이다.”라고 하더랍니다. 또 한 곳을 보니까 그 나라에서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이며 혁명가인 아웅산 수지가 있더랍니다. “그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죽였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하더랍니다.
그 외에 많은 사람을 보다가 갈래 길이 나왔는데 한쪽은 지옥으로 가는 길인데 크고 넓은 길이고, 다른 한 쪽은 좁고 험한 길인데 빛이 환하게 비취더랍니다. 그 쪽으로 가는데 베드로라는 분을 만났는데 더 이상 못 간다 하더니, “앞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지상의 명령을 다 행한 후에 가게 된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가고 안 믿으면 지옥에 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가 지금까지 본 것을 세상에 나가 전하라.”고 하더랍니다. 그는 불교 나라에서 기독교를 전하다가 많은 핍박을 받다가 감옥에 들어갔는데 지금은 생사를 알지 못합니다. 요한계시록 7장 말씀에 구원받은 백성들이 흰옷을 입고 종려가지를 흔들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 때 장로 중에 한 명이 요한에게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어디서 왔느냐”라고 묻자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가 요한에게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고 대답합니다.
그 내용을 다시 정리해 봅시다. 구원받은 백성들 즉 지옥 가지 않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자들이 흰옷을 입었는데 그 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진 옷이라는 말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의지하는 사람만이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간다는 말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옥을 면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마무리 : 성경의 경고를 무시하거나 멸시하지 마십시오. 물고기 두 마리가 싱싱한 지렁이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한 물고기가 그것을 집어삼키려고 하자 다른 물고기가 타이릅니다. “저 지렁이는 낚시 바늘에 걸려 있는 거야. 저것을 잘못 삼키면 바늘에 걸려 사람들의 식탁에 오르는 신세가 되고 말아.” 그러나 다른 물고기는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누가 믿어? 아무도 그것을 증명하지 못했잖아. 어디 사람들의 식탁까지 갔다 온 물고기가 있으면 증명해 봐. 네가 저 지렁이를 욕심내는 거지?” 그 물고기는 덥석 지렁이를 삼켰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바다로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지옥과 천국을 말할 때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천국이나 지옥에 갔다 온 사람이 있으면 내게 그 증거를 보여줘. 그러면 믿을 테니까.” 이런 사람들은 끝내 하늘을 보지 못합니다. 지렁이를 삼킨 물고기처럼 후회해도 이미 늦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신에서 싹튼 교만은 사람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어 멸망의 길로 인도할 뿐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내용들이 종종 나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이야기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고 롯을 구출해 주시기로 했습니다. 천사를 소돔성에 보내셔서 소돔성의 멸망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천사의 경고를 들은 롯은 자신의 두 딸과 사위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사위들과 딸들의 반응은 상반되었습니다. 딸들은 아버지의 경고를 듣고 아버지 집으로 와서 천사들의 인도로 소돔 성을 빠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사위들은 장인이 전달한 천사들의 메시지를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결국 두 사위는 소돔성과 함께 불 심판을 받아 죽고 말았습니다.
성경의 지옥에 대한 경고에 대해서 사람들은 의심합니다. 그리고 부인합니다. “지옥이 있으면 보여 줘라.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라고 말하며 농담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리석은 롯의 사위들과 같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옥에 대한 성경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드려 이 땅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날마다 믿음으로 살아 영원한 세계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모든 성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시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지옥과 상관없는 천국의 백성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출처]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작성자 우림과둠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