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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역사היסטוריה של ישראל
거룩한 땅 또는 팔레스타인으로 알려진 이스라엘 땅은 유대인의 출생지이고 마지막 형태의 히브리어 성경이 엮인 장소이며 유대교와 기독교가 탄생한 장소이다. 유대교, 사마리아 신앙, 기독교, 이슬람교, 드루즈, 바하이 신앙에 성지들이 포함되어 있다.
후기 청동기 시대 (1550–1150 BCE)
가나안 사람들은 중기 청동기 시대 (기원전 2100-1550년) 에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었다[1]. 후기 청동기 시대 (기원전 1550-1200년) 동안 가나안의 대부분은 이집트 신왕국 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을 형성했다[2]. 후기 청동기 시대의 붕괴 로 가나안은 혼란에 빠졌고 이집트의 지배권은 완전히 무너졌다[3][4]. 하솔, 벧스안, 므깃도, 에크론, 아쉬돗 및 아스글론은 손상되거나 파괴되었다[5].
이스라엘인의 조상은 가나안 지역에 뿌리를 둔 고대 셈어를 사용하는 민족으로 추정된다.[6] 기원전 1200년경 무렵, 기후 변화와 사회 변화로 인해 고원 지대에서 유목 생활을 하며 도시인들에게서 곡물을 사먹던 유목민들이 도시들이 쇠락하자 곡물을 자체적으로 생산해야 해서 정착 생활로 바꾸어 정착하게 된 것이 이스라엘의 시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7]. 유목민이 주류였지만, 가나안의 도시 왕국들에서 이탈한 사회 하층민 계층("하비루 Habiru / 아피루 Apiru"는 사회적 하층민을 가리키는 명칭) 역시 초기 이스라엘의 일부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역의 사람들은 성서의 창세기의 족장들이나 출애굽기의 이스라엘 족속처럼 기근을 피하거나 직업을 얻기 위해 이집트로 이주하거나 이집트에서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했었으며, 이는 중왕국 시대의 이집트 내의 셈족 도시 아바리스와 베니 하산 무덤 벽화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MacGregor plaque, 제1왕조의 파라오 카아의 Abydos ivory tablet를 통해 고왕국 시대 이전부터 이집트로 노예나 포로로 끌려왔었기도 하였으며, 나일 삼각주의 동부 국경으로 이주하였었음이 밝혀졌다. 현대 고고학 기록에 따르면, 이스라엘인과 그들의 문화는 가나안 민족과 그들의 문화에서 발전된 독특한 단일신 신앙을 통해 분리되었다.[8][9][10] 이들은 성서 히브리어로 알려진 고대 히브리어를 사용했다.[11]
데이비드 일란은 아브람, 이스라엘, 에서, 이스마엘, 미가엘 등의 이름이 기원전 3천년기(기원전 3000-2000년)의 기록인 에블라 문서(Ebla archive; 기원전 2600-2300년)에 등장한다는 것과 고대 시대부터 상인들이 메소포타미아와 가나안을 오갔다는 것을 근거로 족장 이야기가 특정한 한 시대 뿐 아니라 여러 시대에 들어맞으며, 낙타, 블레셋인, 지명 등 시대착오적인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12]
'이스라엘'이라는 존재가 최초로 확인되는 기록은 기원전 1200년경의 고대 이집트 비문인 메르넵타 석비이다.[13]
이스라엘이 메르넵타 비문에 등장한 시기인 기원전 1200년경과 비슷한 시기부터 블레셋 사람들은 남쪽 해안 평야에 정착했다[14].
철기 시대 I (기원전 1150-950년)
고고학자 Paula McNutt 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아마도 철기 시대의 (가나안)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이스라엘인'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혼인 금지, 가족사 및 계보, 종교 등을 통해 이웃과 차별화 하였을 것입니다"[15].
후기 청동기 시대에는 고지대에 약 25개 정도의 마을이 있었지만 1차 철기 시대 말에는 300개 이상으로 증가했고 정착 인구는 20,000명에서 40,000명으로 두 배가 되었다[16]. 마을은 북쪽에 더 많고 더 컸으며 아마도 유적을 남기지 않은 목가적 유목민과 고원을 공유했을 것이다[17]. 이 마을 사람들의 기원을 추적하려는 고고학자와 역사가들은 그들을 특별히 이스라엘인 으로 정의할 수 있는 어떤 특징도 식별 할 수 없음을 발견했다[18]. 이스라엘 사이트를 구별하는 데 사용되었던 네방형(four-room) 집이나 collared-rim 항아리들은 고지대 밖에서도 확인되었기에 이스라엘 사이트를 구별하는 데 사용될 수 없게 되었다[18]. 고지대 마을의 도자기는 저지대 가나안 지역의 도자기보다 훨씬 제한적이지만 유형적으로는 이전의 가나안 도자기에서 발전했다[19]. 이스라엘 핀켈슈타인(Israel Finkelstein)은 초기 고지대 일부를 구별하는 타원형 또는 원형 레이아웃과 언덕 지역에서 눈에 띄는 돼지 뼈의 부재가 인종의 표식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제안했지만 다른 학자들은 이것이 " 고지 생활에 대한 상식적인 "적응이며 반드시 기원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하였다[20]. 다른 아람 유적지도 초기 가나안 및 후기 블레셋 발굴과 달리 그 당시 돼지 유해가 동시대에 없었다는 것을 보여다.
The Bible Unearthed (2001) 에서 Finkelstein과 Silberman은 최근 연구를 요약했다. 그들은 1967년까지 팔레스타인 서부 고원지대에 있는 이스라엘의 심장부가 사실상 고고학적 미지의 땅 이었다고 설명했다 . 그 이후로 유다 지파, 베냐민 지파, 에브라임 지파, 므낫세 지파의 전통적인 영토를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이러한 조사는 철기 시대 초기에 이스라엘 땅에 존재했던 블레셋과 가나안 사회와 대조되는 새로운 문화의 갑작스러운 출현을 드러냈다[21]. 이 새로운 문화는 돼지고기가 부족하고(어디서나 블레셋 식단의 20%를 돼지고기가 차지함), 고도로 장식된 도자기를 사용하는 블레셋/가나안 관습을 포기하고 할례를 시행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은 출애굽과 그에 따른 정복 이 아니라 기존 가나안-블레셋 문화의 변형에서 비롯되었다[22].
따라서 현대 학자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고지에 있던 기존 백성들로부터 평화롭게 내부적으로 발생했다고 본다[23].
광범위한 고고학적 발굴은 초기 철기 시대 동안 이스라엘 사회의 모습을 제공했다. 고고학적 증거는 마을과 같은 사회를 나타내지만 자원이 더 제한적이고 인구가 적습니다.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인들은 주로 작은 마을에 살았는데, 그 중 가장 큰 마을은 인구가 300~400명 정도였다[24]. 그들의 마을은 언덕 꼭대기에 지어졌다. 그들의 집은 공동 뜰 주위에 무리지어 지어졌다. 그들은 돌 기초와 때로는 나무로 만든 2층이 있는 흙벽돌로 방이 서너 개 있는 집을 지었습니다. 주민들은 농사와 목축업을 하며 살았다. 그들은 산비탈에 테라스를 만들어 농사를 짓고 다양한 작물을 심고 과수원을 유지했다. 마을은 대체로 경제적으로 자급자족했고 경제적 교류가 만연했다. 성경에 따르면, 이스라엘 왕정이 일어나기 전에 초기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경에 나오는 재판관들 에 의해 인도되었다. 학자들은 이 기록의 역사성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지역 추장과 정치가 보안을 제공했을 가능성이 있다. 작은 마을은 성벽이 없었지만 그 지역의 주요 도시의 주체였을 가능성이 높습다. 기록 및 문자의 사용은 작은 사이트/지역에도 보급되었고 기록이 가능해졌다[25].
현대 학계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가드 림몬(Tel Gerisa)과 같은 여호수아 21장의 레위인들의 성읍과 가나안의 이집트 식민지 요새의 위치가 동일하다는 것, 후기 청동기 붕괴기 동안 이집트 군대가 가나안에서 철군할 때 떠나지 않고 남은 이집트인들이 있었으며 이러한 사실이 유물을 통해서 고고학적으로 증명된다는 것과 레위 지파 출신의 인물들의 이름들이 이집트어 이름이라는 것을 근거로 레위 지파가 사실 이스라엘인이 아니라 가나안에 남은 이집트인들과 그들의 후손들이었다고 보고 있으며, 텔 단 유적지의 유물들이 에게 해 양식이라는 것과 기원전 12세기의 이집트 기록들에서 덴옌, 아셀(’šr), 스부리(sbrj), 잇체컬(“체커/티예커의 사람들”이라는 뜻)이라는 이름의 그리스계 해상 민족들을 언급한다는 것을 근거로 단, 아셀, 잇사갈, 스불론 지파가 후기 청동기 붕괴기에 가나안으로 이주한 바다 민족으로 추정한다. 유다 지파에 대해서는 이 지역의 유적지들이 대체로 기원전 10세기는 되어서야 세워졌으며 이 지역의 인구가 성장한 것이 이 시기부터였다는 것을 근거로 유다 지파가 남부 광야의 유목민 부족 연합으로서 기원전 10세기가 되어서야 형성되었을 것으로, 갓 지파에 대해서는 기원전 9세기의 메사 석비의 기록을 근거로 갓 지파가 모압인의 일파였을 것으로, 베냐민 지파에 대해서는 기원전 18세기의 메소포타미아 기록에 등장하는 아모리인의 일파인 베냐민 부족과 동일한 민족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성서 전승의 역사성을 인정하는 이들 중에는 이러한 비평학계의 견해를 고려하지만 동시에 성서의 역사성과 권위를 위해서 출애굽을 최소한 기원전 20세기 보다 이전에 발생했다고 보고, 레위인들이 후대에 가나안으로 오게 된 이집트인들과 섞이며 그들에게 동화되었고 해상 지파들이 무역을 하며 바다 민족의 조상들과 섞여 이들의 이름의 기원이 되어주었을 것이고 나머지 지파들은 가나안의 원주민들에게 흡수되었을 것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26][27][28][29]
야훼 신앙은 기원전 10세기부터 이스라엘로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네게브 지역 등 남부 광야 지역의 인구 유입과 정착지 건립이 기원전 10세기 부터라는 것과 가장 오래되고 확실한 이스라엘과 겐족의 교류의 증거가 기원전 10세기 텔 마소스 (Tel Masos) 유적지의 II 층의 유물들이라는 것, 그리고 이스라엘이 야훼 신앙을 따른다는 가장 오래된 문헌학적 증거가 기원전 9세기의 메사 석비라는 것을 근거로 한다. 이스라엘의 야훼 신앙에 대한 가장 오래된 성서의 기록이 드보라의 노래(사사기 5장)이기에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녀가 활동하던 시기부터 야훼 신앙이 이스라엘로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성서를 따르는 이들은 야훼 신앙이 전파된 것이 아니라 사사기에서 다루어지는 내용처럼 이스라엘이 야훼를 잊었다가 이 시기부터 겐족과의 교류 덕분에 다시 야훼를 믿게 되었을 것으로 해석한다.[30] 참고로, 기원전 14세기의 아멘호테프 3세의 기록 속 “야후의 샤수”는 미디안의 겐 족속을 가리키며 이스라엘은 물론 가나안과는 아예 무관한 기록이다.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의 초기 존재와 그 범위와 권세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31]. 이스라엘 연합 왕국이 있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통일 이스라엘 왕국에 대해 현대 고고학에서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는 이론은 이스라엘 핀켈슈타인이 제시한 '저연대Low Chronology' 이론이다.[32][33]: 59–61 이 이론에서 제시하는 층서학적 모델에 따르면, 그동안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것으로 인식되던 유물이나 유적들(게셀, 므깃도, 하솔의 마병장)은 기원전 10세기가 아닌 기원전 9세기로 비정되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다윗 왕은 기원전 10세기~9세기로 비정하는데, 강한 왕권을 가졌다기 보단 유다의 소규모 부족의 족장 수준의 인물로 북이스라엘 왕국과는 무관하다고 본다.[34][35][36][37] 기원전 10세기에 기브온-기브아 고원을 기반으로 급작스럽게 정치 세력(사울 왕조)이 형성되고 성서의 시삭인 쇼솅크 1세에 의해 파괴된 후 작은 도시 국가들로 분열되어 회귀하였으며,[38] 이후 기원전 950년에서 900년 사이에 또 다른 정치 세력(여로보암 왕조)이 북부 고지대에서 나타나 결국 이스라엘 왕국의 전신으로 간주될 수 있는 디르사를 수도로 삼았다.[39]
세겜과 실로는 기원전 11세기 말인 기원전 1000년경 무렵에 파괴되었고, 해당 파괴는 사사기 9장의 아비멜렉 이야기와 연관지어지는데, 사울 왕조는 기원전 10세기 (c. 1000-900 BC) 내에서 기브온 인근인 벧엘과 라마 사이에서 활동한 선지자 드보라의 므깃도 파괴(c. 985 BC) 이후에 등장한 것으로 여겨지며, 이스라엘 핀켈슈타인을 포함한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의 왕조를 기브온-기브아 고원을 기반으로 형성된 정치 세력과 연결한다. 다윗 이야기 속 도시 가드는 기원전 10세기 중엽(c. 950 BC)부터 블레셋의 중심이 되어 기원전 9세기에 아람 왕 하사엘에 의해 파괴되었기에 학자들은 다윗 이야기의 배경을 기원전 10세기 중엽과 기원전 9세기 사이로 보고 있다.[40] 다윗의 손자 르호보암의 치세 때 셰숑크 1세가 예루살렘을 침공한 것은 기원전 925년 무렵의 일이다.
참고로, 성서의 북이스라엘 왕국과 남유다의 분열 당시 유다 왕국은 유다와 베냐민으로 이루어진 2지파 세력으로, 북이스라엘 왕국은 나머지 10지파로 구성되어 있다고 알려졌지만, 시므온 지파는 유다 지파의 영토의 내부에 위치하였기에 북이스라엘이 되기 어렵다. 시므온은 인구가 희박한 지파였기에 이미 유다 지파에 흡수되었다고 보아 유다 왕국의 지파를 3지파가 아니라 2지파로 볼 수 있지만, 여전히 북이스라엘이 10지파인 것을 설명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 이때 해결책을 주는 것이 요셉 지파이다. 에브라임 지파와 므나쎄 지파가 자신들이 요셉의 자손이지만 다른 지파들의 일원을 포함시키기 위해 이스라엘 지파들 내에서 지파 간 연합을 결성해 요셉이라는 새로운 세력을 구성했다. 실제로, 스가랴 10:6을 포함한 구약의 여러 구절들에서 요셉의 집을 유다의 집에 경쟁 세력으로 기록한 것, 사무엘하 19:20에서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베냐민 지파 출신이면서 심지어 북쪽 지역도 아닌 남쪽의 예루살렘 인근 지역인 바후림(Bahurim) 사람이고 자신을 요셉 족속이라 소개하기도 하는데, 당시에는 에브라임의 여로보암이 왕조를 개창하기도 이전이기에 유다를 제외한 이스라엘을 요셉의 집이나 요셉 족속이라 칭할 수 없는 시기라는 것을 근거로 현대 학계에서는 요셉 지파나 요셉의 집을 므나쎄나 에브라임과는 무관한 독립적 세력이자 아마르나 서신 속 이집트의 지배 아래 가나안(가나안의 중앙집권화되지 않은 지역)에서 권력을 누렸던 다국적/다민족/다지파 조직이나 연합과 비슷한 세력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많은 지지를 얻고 있다.[41] 북이스라엘 왕국을, 요셉, 므나쎄, 에브라임, 르우벤, 갓, 아셀, 단, 스불론, 잇사갈, 납달리로 이루어진 10지파 왕국으로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현대의 역사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은 북쪽 이스라엘 왕국이 ca. 기원전 900년에는[21], 그리고 유다 왕국은 ca. 기원전 850년[42]에는 존재했을 것으로 본다.
철기 시대 II (기원전 950–587년)
이스라엘 왕국은 두 왕국 중 더 번영했고 곧 지역 강국으로 발전했다. 오므리 왕조 시대 이스라엘은 사마리아 , 갈릴리, 요단 계곡 상류, 샤론 및 트랜스요르단의 대부분을 통제했다[43]. 사마리아는 레반트에서 가장 큰 철기 시대 구조물 중 하나의 본거지였다[44].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8세기에 아시리아의 살마네세르 5세와 사르곤 2세에 의해 멸망하였다. 실제로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 샬마네세르 5세, 사르곤 2세에 의해 강제이주를 당한 것은 북이스라엘의 전체 인구의 5분의 1에 불과한 약 40,000명이었으며,[45] 대부분의 북이스라엘의 사람들은 남유다로 피난을 갔고, 이 때문에 당시 남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의 인구와 규모는 급격히 성장하게 되었다. 예루살렘은 이 시기 동안 규모가 5배로 확장되었고, 남유다 왕 히스기야는 새로운 성벽을 건설하고 새로운 수원(실로암)을 마련해야 했다[46]. 더욱이 역대기 30장 1-11절은 아시리아의 침략에서 살아남은 북이스라엘 사람들, 특히 단, 에브라임, 므나세, 아셀, 스불론 지파 사람들을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아셀과 스불론 지파 사람들은 그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 돌아와 예배를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10지파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유다로 이주해 남부 지파들(유다, 베냐민)에 흡수된 것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10지파가 이러한 남부 지파들에 흡수되었다고 보고 있다. 유다 지파와 레위 지파(코헨)로 이루어진 오늘날 유대인들은 유다 지파와 레위 지파(코헨) 뿐 아니라 동시에 나머지 10지파의 후예이기도 하다.
남유다에서 유다 지파가 규모가 작은 시므온 지파를 흡수한 것처럼 북이스라엘에서 므낫세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는 북이스라엘의 멸망 이전부터 이미 규모가 작은 다른 지파들을 어느 정도 흡수하였었다. 대부분의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왕국이 멸망하자 남유다로 이주하였지만, 북이스라엘에 남은 이들도 있으며, 이들은 오늘날의 사마리아인들의 조상이 되었다. 사마리아인들은 므낫세 지파, 에브라임 지파, 레위 지파(코헨)로 이루어져 있다.
기원전 586년에는 신바빌로니아의 왕이었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제1차 성전을 파괴하였으며 남유다의 지배층을 추방하였다.
고전 시대
신바빌로니아 기원전 539년에 페르시아 제국에 멸망하며,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 2세에 의해 바빌론으로 끌려간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했다. 그 후 이 지역은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 중에 정복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사후, 마케도니아는 분열하여, 팔레스타인과 유대 지역을 셀레우코스 제국(시리아 왕국)와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이집트)이 각각 다른 시기에 지배하게 되며, 마카베오 전쟁을 거쳐 유대인의 왕국 하스몬 왕조가 세워졌다.[47]: 53~59
기원전 1세기경 하스몬 왕조는 로마 제국의 보호국이 되며, 그 후 로마 제국의 속주인 유대 속주가 된다.[47]: 63~64 기원후 66년 제1차 유다 전쟁이 발발하나, 70년 로마 제국에 의해 진압된다.[47]: 75~79 132년 바르 코크바의 난(제3차 유다 전쟁)이 일어나, 135년 다시 로마 제국에 진압되어, 시리아의 속주가 되었다.[47]: 82~89 [48][49] 이후 유다인들은 중동 전역으로 흩어지며, 난민들이 세운 디아스포라가 다수 발생하게 된다.[47]: 98~99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제3차 유대-로마 전쟁(바르 코크바의 난) 이후 유대 지방의 명칭을 “유대(Judea)”에서 “시리아 ・ 팔레스티나(Syria Palaestina)”로 바꾸었고, 상당수의 유대인들을 이 지방에서 추방하고 유대교를 금지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수의 유대인들은 유대를 떠나지 않고 남아 자신들의 종교와 문화를 지키고 보존하였으며, 이는 사마리아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이후 이 지역으로 유입된 아랍인(현대의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선주민으로 인식되었다. 정복민인 아랍인들에 의해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끊임없이 탄압을 받았으며, 비교적 근대까지 이들을 향한 학살이 있어왔다.
오스만 제국 시절의 주목할 만한 학살은 다음과 같다:
이름날짜위치책임 당사자사망자Notes
이스라엘 건국 이전에 일어난 학살은 다음과 같다:
이름날짜사망자notes
| 1920년 네비 무사 폭동 | 1920년 4월 4일~7일 | 9 | 유대인 5명, 아랍인 4명 사망; 유대인 216명, 아랍인 18명, 영국인 7명 부상.[54][55] 아랍 집회에서 선동적인 언어로 시작됨. 폭력의 기원은 불확실하지만 목격자는 아랍인들이 돌을 던졌다고 보고함. |
| 1929년 팔레스타인 폭동 | 1929년 8월 23일~29일 | 249 | 유대인 133명, 아랍인 116명 사망; 유대인 339명, 아랍인 232명 부상;[56][57][58] 1929 헤브론 학살(유대인 67명 사망, 유대인 58명 부상)과 1929 사페드 학살(유대인 18~20명 사망, 유대인 80명 부상[59])이 포함된다. 대부분 아랍인이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폭력 행위였다. |
| 야구르 키부츠에서 발생한 검은 손의 살인 사건 | 1931년 4월 11일 | 3 | 야구르 키부츠의 유대인 3명이 사망하였다.[60] |
| 1931-1932년 검은 손의 공격 | 1931-1932 | 6 | 유대인 6명이 사망하였다.[61] |
| 야파 폭동 (1936년 4월) | 1936년 4월 19일~20일 | 21 | 야파에서 아랍인의 공격으로 유대인 9명이 사망하고 40명이 부상당했으며(11명은 중상), 경찰은 공격자 2명을 사살했다. 다음 날 추가로 유대인 7명과 아랍인 3명이 사망했다.[62][63][64] |
| NA | 1937년 8월 13일 | 4 | 사페드에 있는 집에 침입한 아랍인들에 의해 유대인 가족 4명(어린이 3명)이 총에 맞아 사망했다.[65] |
| NA | 1937년 11월 9일 | 5 | 케렌 카예멧(Keren Kayemet)의 유대인 노동자 5명이 하르 하루아흐 근처에서 아랍 매복 공격으로 사망했습니다. 마알레하하미샤(Ma'ale HaHamisha)는 그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습니다.[66] |
| N/A | 1938년 3월 28일 | 6 | 하이파에서 사페드로 이동하던 유대인 승객 6명이 아랍인들에게 살해당했다. |
| N/A | 1938년 8월 16일 | 3 | Atlit에서 유대인 가족이 아랍인들에게 납치되었다. 3명이 사망했다.[67][68] |
| 1938년 티베리아스 학살 | 1938년 10월 2일 | 19 | 19명의 유대인이 살해되었는데 그중 11명이 어린이였다.[69] |
| 이탈리아의 텔아비브 폭격 | 1940년 9월 9일 | 137 | 폭격으로 유대인 130명이 사망했다.[70] |
| N/A | 1946년 11월 3일 | 5 | 네오트 모르데차이(Neot Mordechai) 건설 중 공격으로 유대인 2명이 살해되고 아랍 공격자 3명이 사망했다.[71] |
| N/A | 1946년 11월 9일 | 3 | 예루살렘 의 다비드 거리에서 지뢰로 유대인 8명과 영국 장교 3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당했다.[72] |
| N/A | 1947년 7월 31일 | 5 | 영국군의 총격으로 유대인 남성 2명, 유대인 여성 2명, 유대인 소년 1명이 사망했다.[73] |
| N/A | 1947년 7월 31일 | 5 | 유대인 5명이 사망하고 여러 명이 부상당했다.[74] |
| N/A | 1947년 8월 11일 | 5 | 카페에서 아랍인 무리에 의해 유대인 5명이 살해됨[75] |
| 파자 버스 공격 | 1947년 11월 30일 | 7 | 총격으로 인한 두 건의 사건에서 유대인 7명이 사망함[76] |
| 1947 Jerusalem riots | 1947년 12월 2일 | 14 | 유대인 8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고됨[77] |
| N/A | 1947년 12월 6일 | 3 | 3명의 유대인이 아랍인에 의해 저격당했다[78] |
| N/A | 1947년 12월 7일 | 5 | 유대인 4명 사망, 5명 부상. 아랍인 1명 사망[79] |
| N/A | 1947년 12월 7일 | 6 | 유대인 5명, 아랍인 1명이 사망했다. 유대인 사상자 중 한 명은 저격수에게 살해당한 소녀였다.[80] |
| N/A | 1947년 12월 8일 | 19 | 유대인 14명, 아랍인 3명, 영국 군인 2명이 사망했다.[81] |
| N/A | 1947년 12월 8일 | 4 | 아랍인의 공격 중에 유대인 4명이 살해되거나 산 채로 불에 타 죽었다[82] |
| N/A | 1947년 12월 8일 | 6 | 유대인 4명, 아랍인 1명, 영국인 1명이 사망했다.[83] |
| N/A | 1947년 12월 8일 | 6 | 야파에서 유대인 6명이 사망함[84] |
| N/A | 1947년 12월 9일 | 6 | Gvulot에서 아랍 폭도에 의해 6명의 십대 유대인(한 명은 소녀)이 살해됨[85] |
| N/A | 1947년 12월 10일 | 4 | 유대인 3명, 아랍인 공격자 1명 사망[86] |
| N/A | 1947년 12월 10일 | 6 | 아랍인에 의해 유대인 6명이 총에 맞고 칼에 찔려 사망함[87] |
| N/A | 1947년 12월 11일 | 10 | 아랍인이 유대인 호송대를 공격하여 유대인 10명이 사망함[88] |
| N/A | 1947년 12월 12일 | 3 | 아랍인에 의해 살해된 유대인 3명. 그중 2명은 영국 해외항공 직원이었고 1명은 요리사였다. Lydda에서 살해됨[89] |
| N/A | 1947년 12월 12일 | 3 | 파이프를 검사하던 중 아랍인에 의해 살해된 유대인 3명[90] |
| N/A | 1947년 12월 12일 | 20 | 다마스쿠스 문에서 배럴 폭탄으로 20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당했다.[91] |
| N/A | 1947년 12월 12일 | 3 | 아랍인의 공격으로 유대인 3명이 사망하고 4명이 실종됨[92] |
| N/A | 1947년 12월 13일 | 3 | 아랍인의 공격에 맞서 방어하던 중 유대인 3명이 사망함[93] |
| N/A | 1947년 12월 14일 | 14 | 벤 셰멘 청소년 마을(Ben Shemen Youth Village)에 물자 를 공급하던 중 아랍 군단의 사격 으로 유대인 14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당했다.[94] |
| N/A | 1947년 12월 24일 | 8 | 하이파에서 저격수에 의해 유대인 4명이 사망하고 보복으로 아랍인 4명이 사망했다.[95] |
| N/A | 1947년 12월 26일 | 7 | 예루살렘으로 가는 호송대에서 7명의 유대인이 사망했습니다. 그중에는 유대인 인도주의 단체인 청년 알리야(Youth Aliyah)의 지도자도 있었다.[96] |
| N/A | 1947년 12월 28일 | 10 | 바브엘와드(Bab el Wad)에서 저격수에 의해 유대인 5명이 사망하고 보복으로 아랍인 5명이 사망했다.[97] |
| 하이파 정유 공장 학살 | 1947년 12월 30일 | 39 | 이르군 폭격(Irgun bombing)으로 6명이 사망한 후 아랍인에 의해 유대인 39명이 구타당해 사망하고 49명이 부상당했다.[98] |
| N/A | December 31, 1947 | 3 | 아랍인들의 공격으로 유대인 3명이 사망함[99] |
| N/A | 1948년 1월 10일 | 11 | 11명의 유대인이 살해되었고 1명이 Yavne 근처에서 참수되었다.[100] |
| N/A | 1948년 1월 14일 | 7 | 아랍 폭탄으로 하이파에서 유대인 7명, 영국인 2명이 사망했다.[101] |
| N/A | 1948년 1월 20일 | 8 | 예히암(Yehiam)에서 유대인 8명이 사망하고 9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2명이 경상을 입었다.[102] |
| N/A | 1948년 1월 22일 | 7 | Yazur 근처에서 유대인 7명이 사망함[103] |
| N/A | 1948년 1월 25일 | 10 | 유대인 10명 사망[104] |
| N/A | 1948년 2월 3일 | 6 | 하이파에서 버스를 타고 가던 유대인 6명이 사망했다.[105] |
| N/A | 1948년 2월 12일 | 4 | 예루살렘에서 유대인 4명이 사망함[106] |
| N/A | 1948년 2월 19일 | 4 | 하이파에서 버스를 타고 가던 유대인 4명이 사망했다.[107] |
| 벤 예후다 거리 폭탄 테러 | 1948년 2월 22일 | 49-58 | 49~58명의 유대인 민간인이 사망[108][109]하고 140~200명이 부상당함[110][111][112][113] |
| N/A | 1948년 2월 25일 | 3 | Ramle과 Tel Aviv 사이 도로에서 유대인 3명이 사망함[114] |
| N/A | 1948년 3월 1일 | 4 | 텔아비브-예루살렘 도로에서 유대인 4명 사망[115] |
| N/A | 1948년 3월 4일 | 16 | 예루살렘-아타롯(Jerusalem-Atarot) 도로에서 유대인 16명이 사망함[116] |
| 유대인 기관 폭격 사건 | 1948년 3월 11일 | 13 | 유대인 13명 사망[117] |
| N/A | 1948년 3월 14일 | 7 | 팔루자(Faluja) 근처에서 유대인 7명이 사망함[118] |
| N/A | 1948년 3월 18일 | 9 | 아크레(Acre) 근처 호송대에서 영국인 5명과 유대인 4명이 사망함[119] |
| N/A | 1948년 3월 20일 | 7 | 아인하로드(Ein Harod)에서 유대인 7명이 사망했다.[120] |
| N/A | 1948년 3월 21일 | 6 | Rosh Pinna-Safed 도로에서 유대인 6명이 사망했다.[121] |
| N/A | 1948년 3월 30일 | 10 | 야파(Jaffa)에서 도망치던 중 유대인 8명과 영국인 2명이 사망했다.[122] |
| 하다사 의료 수송대 학살 | 1948년 4월 13일 | 79 | 78명의 유대인(간호사, 의사, 환자)과 1명의 영국 군인이 사망했다.[123][124] 사망자 중에는 하다사 병원 원장인 하임 야스키도 있었다.[125] |
| 하이파 차량 폭탄 테러 | 15 April 1948 | 8 | 유대인 6명, 영국인 2명이 사망했다. 인근의 붐비는 버스 두 대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부상을 입었다.[126] |
| 크파르 에치온 학살 | May 13, 1948 | 129 | 127~157명의 유대인이 살해됨[127] |
중세
예루살렘 공방전(1099년)
636년 동로마 제국이 정통 칼리파에 패배한 이래, 오스만 제국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의 패권은 거의 이슬람 국가 밑에 놓이게 된다. 1099년 제1차 십자군 전쟁 시기에,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교 국가 예루살렘 왕국이 세워지기도 하였으나, 1187년 하틴 전투에서 아이유브 술탄국에 의해 예루살렘은 다시 점령되어, 1200년 즈음에는 예루살렘 왕국의 세력은 지중해 연안으로 국한되게 된다. 예루살렘 왕국은 1291년 맘루크 술탄국에게 패하여 멸망하며, 1517년 오스만 제국이 맘루크 술탄국을 멸망시키고 이 지역을 지배한다.[128]
현대 이스라엘
1948년 텔 아비브에서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언한 다비드 벤구리온. 그는 이스라엘의 총리였다.
제1차 세계 대전에 동맹국으로 참전하여 패전한 오스만 제국은 현재의 터키를 제외한 중동 지역 대부분을 영국과 프랑스에 내주게 되며, 트랜스요르단 (지금의 이스라엘이 위치한 곳이며 지금은 팔레스타인으로 불림) 지역은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오스만의 세금 정책에 의해 황무지가 되었던 트랜스요르단은 유대인들과 아랍 유민들이 유입되어 여기저기 공동체 마을들이 형성되었다.
현대 이스라엘은 19세기의 시온주의 운동과 20세기 제 2차 세계대전 중 발생한 유대인 학살을 배경으로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지역을 위임 통치하던 영국은 이중적으로 아랍 측에게 맥마흔 선언을 하여, 샤리프 후세인에게 아랍인들이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면 칼리프 중심의 아랍인의 나라를 이 땅에 지어주겠다는 보장을 하였고, 1916년 6월 5일을 기하여 봉기를 일으켜 스스로 아랍의 왕임을 자처했다. 이후 1917년, 유대인의 지원을 받기 위하여 영국의 외무장관 밸푸어가 가나안 지역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지지하는 밸푸어 선언을 하여, 1920년 영국의 공식 외교 정책이 되었다.
하지만 아랍과 유대인에게 이중적인 약속을 함에 따라, 추후에 유대인과 아랍인 간의 갈등을 유발하게 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영국군이 위임통치령 지역을 철수하기 이전부터 이주 유대인과 아랍인 간 테러와 학살같은 국지적인 충돌이 있었고, 유대인과 아랍인들은 자치 민병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이후, 영국의 공식적인 철군이 이뤄진 다음날, 이스라엘은 공화국을 선포하였고 그 동시에 아랍인들의 물리적인 침공을 받게 된다. 이것이 제1차 중동 전쟁이다. 이후 유대인들은 기존 이르군과 하가나 등 극우 시온주의 민병대를 확대하여 방위력을 증강시켰다. 이스라엘은 서방으로부터의 무기지원을 받아 아랍 연맹을 물리치고 제1차 중동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제 1차 중동 전쟁의 경우에는 미국을 포함한 서방의 지원은 없었고, 되려 전후 피로감에 영국, 프랑스, 미국 어느 나라도 이스라엘에 무기 지원은커녕 판매조차 소극적이었던 탓에 쏟아지던 전후 물자들을 매입하여 방위력 공백을 메꾸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후 제2차 중동 전쟁(시나이 전쟁)과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차후 중동 전쟁들에서 서방의 지원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아랍국가들은 아라비아 지역에서의 유대인 국가 건설에 부정적이었고, 이후 유대인-아랍인 간의 충돌은 지속되었다. 한편, 팔레스티나 지역(가나안 연안)의 아랍인들은 스스로를 팔레스타인 주민, 그들의 거주 구역을 팔레스타인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는 팔레스타인이라는 공동체가 본래 토착민으로서 거주하고있던 것이 아니라, 20세기 유대인들의 이주와 동시에 이 지역으로 밀려들어온 아랍인들을 뜻한다.
장기간에 걸친 팔레스타인과의 분쟁 결과, 1993년에 PLO와 자치에 합의하여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가자 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지구에 세워졌으나 현재까지도 분쟁은 계속되고 있다.
이스라엘에 복수를 다짐하던 안와르 사다트가 이집트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다시 중동에는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1973년 10월 6일, 드디어 이집트는 유대인들의 속죄일 욤키푸르 당일 이스라엘이 점령중이던 시나이반도를 기습을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제 4차 중동전쟁)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집트 방면으로는 본토까지 시나이반도 지역이 완충지 역할을 하였으나, 북부 골란고원을 넘어서는 시리아군은 바로 본토로 들어오기 때문에, 전략상 시리아군이 포진한 곳을 공습하면서 전세를 역전하기에 이르렀으며 끝내 제4차 중동전쟁(욤키푸르 전쟁)까지 승리로 이끌어냈다. 하지만 이 전쟁으로 이스라엘 또한 많은 피해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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