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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이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보여도
그것을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에 대하여..
먼저 이전에 올린
<주님을 믿는 믿음의 능력에 대해 3 / 믿음이 작아 낙심될 때>
라는 글 중반 이후에 인용된 스베덴보리 글들을
짧게 요약하여 옮겨본다.
<천비 6324
.. 그들은 또한 사람이 가진 모든 생각이나 애정이
다른 곳에서 그에게 흘러 들어온(유입) 것이라는 의견에 대해
스스로 추론하면서
만일 이 생각이 사실이라면
어떤 범죄에 대해서도 유죄가 되거나(found guilty)
벌을 받게 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다음과 같은 답변을 받았다.
‘만일 어떤 사람이 모든 선하고 참된 것은 주님에게서 나오고
모든 악하고 거짓된 것은 지옥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진실로 믿는다면
그는 어떤 범죄에 대해서도 유죄가 될 수 없을 것이고
악이 그 자신에게 돌려질 수도 없을 것이다.
(he could not have been found guilty of any offence
or had evil ascribed(imputed) to himself.)
그러나 그는 악이 자신에게서
시작된다고(자신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악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며(appropriate,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며)
이 믿음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고
따라서 악은 그에게 고착되어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천비 6325
‘.. 주님께서 하늘과 땅을 다스리신다는 것은 영원한 진리이고
또한 주님 외에 아무도 스스로 존재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생명의 모든 것, 즉 생명의 선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악은 지옥으로부터 흘러 들어온다는 것도 영원한 진리이다.
이것이 천국에 있는 자들의 믿음인데
사람이 이 믿음에 있을 때
(그가 선에 있을 때 그는 이 믿음 안에 있을 수 있다.)
악은 자신에게서 비롯되지 않고
지옥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악이 그에게 고착될(fastened, attached 달라붙을) 수 없고
또 그에게 받아들여질(accepted, appropriated 그의 것으로 삼아질)
수도 없다.
사람이 이 상태에 있을 때 평화가 그에게 주어지게 된다.
이는 그가 주님만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인애에서 비롯된 이 믿음 안에 있는 사람들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평화가 주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 끊임없이 불안감을 불러일으키는
근심꺼리와 악한 욕망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천비 6206
‘..모든 악은 지옥에서 흘러들고,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거쳐서 사람에게 흘러든다.
그러나 악이 어떤 사람의 것이 되는 이유는
그가 그것을 ‘스스로’ 생각하고 행한다고 믿고 확신하기 때문이며
이런 식으로 그는 악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만일 그가 악이 지옥에서 흘러든다는 것을 믿는다면,
악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이 그의 것이 될 것이다.
그 까닭은 만일 그가 악이 지옥에서 흘러든다는 것을 믿으면
악이 흘러드는 그 순간 그는 그 악이 자신에게 와있는
악한 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그가 그렇게 생각함으로 인해서
천사들이 악을 물리쳐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천사들로부터 오는 입류는
사람이 알고 믿는 것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는 것이지
사람이 모르거나 믿지 않는 것 안으로는 들어올 수 없는 까닭이다..’
하나님의 섭리 320
‘..만일 사람이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그리고 모든 악과 거짓은 지옥으로부터 온다고 진실로 믿는다면
그는 선을 자신에게 돌려
그것을 공로로 주장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악을 자신에게 돌려
자신을 죄인으로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
주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나
악을 죄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이런 식으로 믿고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이 두 가지를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가능하다..
(주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그분과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으로부터 생각한다고 믿는다.
또 악을 죄로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게도 불가능한데 그 이유는
그런 자들은 지옥으로부터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성한 섭리는 선과 악을 아무에게도 돌리지 않으나
오히려 사람 자신의 분별력(own prudence)이 선과 악을
그에게 돌리게 만드는 것이다..’
천국과 지옥 547
‘이상으로 확실해진 사실은,
사람은 지옥으로 말미암아 악을 행하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선을 행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자기가 행하는 것은 무엇이든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 결과 그가 행하는 악은 그 자신의 것으로 그에게 고착된다.’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악에 대한 책임을 주님이 아닌 사람이 져야 하는 이유이다.’
(반대로, 악이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허용된 외관(겉모습의 진리)에 불과할 뿐,
실제로는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고 지옥에서 흘러들어온 것이라는
주님의 계시(참 진리)를 믿는다면
그 믿음과 그 믿음으로 인해 알고 있는 사실로 인해
악이 흘러드는 순간 그는 '이것은 주님께 맞서는 악이다.' 라는
인식 속에 천사의 도움을 받아
악을 자기 것 삼지 않게 될 것이고
따라서 그가 이 믿음 안에 있는 한 악은 그에게 고착되지 않을 것이다.)>
- - - - -
여기 인용된 스베덴보리의 글들을 보면..
악이 인간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믿는 자는
그 믿음으로 인해 악을 내 것 삼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저서 다른 부분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기꺼이 동의하여 악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즐기며 행하는 자가 그것을 자기 것 삼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이 둘은 서로 상이하여 조화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악을 내 것 삼게 되는 원인에 대해
하나는 그의 이해성 계열인 믿음 탓으로,
다른 하나는 그의 의지 계열인 사랑(애정) 탓으로 돌리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이 악을 내 것 삼게 되는 주된 원인으로
우리가 익히 배워 알고 있는 것은 후자이기에
그것을 단순히 믿음 때문이라고 한다면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위에 인용된 저서 몇 부분을 한정해
그 내용을 충실히 읽는다면
‘사람이 악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게 되는 원인은
그가 어떻게 믿는가.. 하는 그의 믿음이 주된 원인으로
읽혀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것을 천비 6206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모든 악은 지옥에서 흘러들고,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거쳐서 사람에게 흘러든다.
그러나 악이 어떤 사람의 것이 되는 이유는
그가 그것을 ‘스스로’ 생각하고 행한다고 믿고 확신하기 때문이며
이런 식으로 그는 악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만일 그가 악이 지옥에서 흘러든다는 것을 믿는다면,
악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이 그의 것이 될 것이다.
그 까닭은 만일 그가 악이 지옥에서 흘러든다는 것을 믿으면
악이 흘러드는 그 순간 그는 그 악이 자신에게 와있는
악한 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그가 그렇게 생각함으로 인해서
천사들이 악을 물리쳐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천사들로부터 오는 입류는
사람이 알고 믿는 것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는 것이지
사람이 모르거나 믿지 않는 것 안으로는 들어올 수 없는 까닭이다..’
여기 쓰인 ‘자기 것 삼는다.(전유)’는 말은
자신 안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것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외부에서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선과 악을
사람이 즐거움과 기쁨으로 받아들이면
소통이 그 안에서 이루어짐에 따라 악이 점차 고착되어
분리될 수 없는 상태(결합)에 이르게 되는 것을 뜻한다.
(천비 2187, 2343, 3503, 3513)
악이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으면
그것은 오직 악에 지나지 않는 자신의 자아로부터 나온
자기지혜로 믿는 것이기에
겉으로는 진리로 보이지만 실은 외관에 불과한
겉보기의 진리를 참된 진리로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악이 자신에게서 나온다는
외관을 진리인양 믿음으로 자신을 악의 근원으로 만들고
그로 인해 천사의 도움 대신 그 믿음과 연결된 지옥의 영들을
끌어들여 그들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 말이 얼핏 보기에는 악이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잘못 아는 것 때문에 악을 자기 것 삼게 되는 것 같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다.
악이 자신에게서 비롯된다는 잘못된 믿음을 가질 때 그
믿음이라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오해가 아니라
거기 의지와 동반된 이해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잘못된 지식 정도가 아니다.
그런 믿음을 가능케 한 것은 의지의 동의에서 나온 생각이다.
악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잘못 아는 것 때문에
악이 내 것이 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단순한 무지는 사람에게 악을 고착시키지 않는다.
믿음은 아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안다고 다 믿지는 않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참고글 천비 4319
‘.. 그러나 그들은 실제적 체험들을 통해
(이런 체험은 다음 세상에서는 가능하지만 이 세상에서는 불가능하다)
악한 자들의 생각과 의지와 행위의 근원은 지옥이며,
선한 자들의 근원은 천국, 곧 천국을 통해 역사하시는
주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악이나 선은
그들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실제적 체험들을 통해 알게 된 것은
기독교인들이 말씀의 가르침으로 아는 바
모든 악은 마귀로부터,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교리였지만
이를 그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이 생각하고 의지하며 행하는 악들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make their own)
.. 스스로 독립적으로 살아간다고 확신하며
자신의 생각과 의지, 행동이
모두 자신 안에서 비롯된다고 믿는 악한 사람들은
교리가 가르치는 바가 진실임을 보여줄 때
이를 믿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아는 것’이 곧 ‘믿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알려졌다.
믿음은 내적인 것이며
선과 진리에 대한 애정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고
따라서 이웃에 대한 사랑의 선에 의해 다스려지는 자들에게만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악을 자기 것 삼게 만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온 계시를 믿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 지혜로 믿는 믿음에 의해서이다.
그런 믿음으로 이끄는 눈을
하나님의 섭리에서는 인간 고유의 분별력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의 눈을 밝게 해준 것이
바로 이 인간 고유의 분별력이다.
<참고 글 : 하나님의 섭리
321. 이제 제시된 순서대로 이것들을 설명하고자 한다.
[1]
첫째, 지혜와 분별력이 사람에게서 비롯되고
사람 안에서 마치 그의 것처럼 있는 이 외관(appearance)을
스스로 확증하는 자는
그것이 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나 조각상처럼 보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만 실상은 그 반대이다.
신성한 섭리의 법칙에 따르면
사람은 마치 자기 자신으로부터 생각하고
분별력 있게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그것을 주님으로부터 그렇게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사람은 누구나
마치 자기 자신으로부터 생각하고 행동하되,
동시에 그것을 주님께로부터 한다고 인정해야 하고
자신의 모든 생각과 행위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다고 확증해서는 안 된다.
또 지혜와 분별력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것은
사람은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지만
여전히 그들의 유입만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앞의 것이 짐승과 같다면 뒤의 것은 조각상과 같다.
단순히 유입만을 기다리는 자가 조각상처럼 되는 것이 분명한 것은
그는 움직이지 못하고 서 있거나 앉아 있어야 하며,
손은 늘어뜨려져 있고, 눈은 깜박이지 않고 감겨 있거나
뜬 채로 있어야 하며, 생각도 생기도 없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안에 어떤 생명이 있겠는가?
..
[3]
무언가가 자기 안으로 흘러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에 대해
조금 더 말할 필요가 있다.
이런 부류 가운데 실제로 무언가를 받는 사람은
깊이 그것을 갈망하는 소수에 불과하다.
그들은 때때로 생생한 인상이나 미묘한 마음속의 음성 같은 방식으로
일종의 응답을 받기도 하지만, 명백한 방식으로는 거의 받지 못한다.
어쨌든 그들에게 응답으로 남겨지는 것은
자신이 원하고 할 수 있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내버려두어진다는 것,
따라서 그들이 지혜롭게 행하면 지혜롭게 되고
어리석게 행하면 어리석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직접적으로 알려주지는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인간적 이성과 자유가 파괴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모든 것은 그들이 자유롭고 이성적으로 일을 처리하도록,
그리고 외관상 스스로 하는 듯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조율된다.
만약 어떤 유입이 우리에게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지시한다면
그것은 주님이나 천국의 천사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퀘이커교도(Quaker)나 모라비안(Moravian)같은 광신적인 영이
우리를 미혹하는 것이다.
주님에게서 오는 모든 유입은 이해를 비추어 주는 방식으로,
실제로는 진리에 대한 애정을 통해
이해 안으로 흘러드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4]
둘째,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오고
모든 악과 거짓이 지옥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진실처럼 믿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인간적인 원리이며
따라서 천사적인 원리이기도 하다.
모든 선과 진리가 하나님에게서 온다고 믿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이는 신학적 신앙과 일치하기에
그 반대로 생각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악과 거짓이
지옥에서 온다고 믿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렇게 믿는다면 사람은 자신이 전혀
스스로 생각할 수 없다고 믿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그들의 생각이 어떤 근원에서 오든지 간에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것처럼 보이도록 허락하시기 때문에
사람은 비록 지옥으로부터 온다 할지라도
그것이 마치 자기 자신으로부터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은 사람으로서 살 수 없을 것이며
위에서 여러 번 보여주었듯이
지옥에서 천국으로 인도되어 개혁될 수도 없을 것이다.
[5]
이와 같이하여 주님께서는 사람이 악 안에 있을 때
자신이 지옥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시고
악으로부터 생각할 때
지옥으로부터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시며
또 그것으로부터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하신다.
주님은 또한 사람이 어떻게 지옥에서 나와
(더 이상)그것으로부터 생각하지 않고 천국에 들어가
거기서 주님으로부터 생각할 수 있는지 그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게 하신다.
그리고 주님은 또한 그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셔서
이로부터 사람은 마치 자기 자신으로부터 악과 거짓을 생각하며
또 이것저것이 악이고 거짓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사람이 이것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외관일 뿐이다.
그러나 이 외관이 없으면 사람은 사람이 될 수 없다.
진리로부터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적 원리이며 따라서 천사적 원리이다.
그리고 그 진리는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 자신으로부터인 것처럼 생각하도록
주님께서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과 천사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마치 자기 자신으로부터인 것처럼 생각하는 존재라는 것,
주께서 그의 개혁을 위해 그렇게 허락하신 만큼
인간은 그것을 진리로 믿고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이 진리를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의 감각에 느껴지는 대로 악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생각하고 행하는 것으로 믿는다면 그는 그 악을 자기 것으로 여겨
악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고 그로 인해 악을 버릴 수 없게 된다.
반대로 사람은 악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을 때
오히려 그 악과 싸울 영적 자유를 되찾아
악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다.)
[6]
셋째, 이렇게 믿고 생각하는 것은
주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거나 또 악을 죄로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불가능하지만 이 둘을 인정하는 자들에게는 가능하다.
주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게 불가능한 이유는
오직 주님만이 사람이 생각하고 의지할 수 있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그분과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으로부터 생각한다고 믿는다.
또 악을 죄로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게도 불가능한데 그 이유는
그런 자들은 지옥으로부터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옥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생각한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인정하는 자들에게는 가능한데 이는
위에서 이미 충분히 다루었다.(288–294)
[7]
넷째, 이 두 가지를 인정하는 자들은
죄로서 악을 피하고 멀리하기까지 자신 안의 악을 돌아보고
그것을 그것이 나온 지옥으로 내던지기만 하면 된다.
모든 사람은 악은 지옥에서, 선은 천국에서
온다는 것을 알거나 알 수 있다.
따라서 누구든지 악을 피하고 멀리하는 만큼
지옥을 피하고 멀리한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마찬가지로
악을 피하고 멀리하는 만큼
선을 원하고 사랑한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그는 주님에 의해 지옥으로부터 구출되고
천국으로 인도된다.
이것은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볼 수 있다.
다만 그가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 그리고 악과 선이 각기
그 고유한 근원에서 온다는 것을 안다면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신 안의 악을 돌아보고
(이는 곧 자신을 살피는 것이다) 그것을 피한다면,
그는 자신을 지옥에서 벗어나 그것을 등 뒤로 던지고
자신을 천국으로 이끌며 그곳에서 주님을 얼굴을 맞대고 보게 된다.
물론 이것을 사람이 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마치 자기 자신으로부터 하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주님께로부터 하는 것이다.
사람이 선한 마음과 경건한 믿음으로 이 진리를 인식할 때
그것은 그가 나중에 마치 자신에게서 나온 것처럼 생각하고 행하는
모든 것 안에 내적으로 숨겨져 있게 된다.
이는 마치 씨앗 속의 생식 원리가 새로운 씨앗에 이르기까지
성장 전체를 내적으로 동반하는 것과 같고
또는 사람이 한때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인정한 음식에 대한
식욕의 즐거움이 그러한 것과 같다.
한 마디로 그것은 그가 마치 자기로부터 생각하고 행하는
모든 것 속의 심장이나 영혼과 같다.
(선은 천국에서 또 악은 지옥에서 온다는 믿음은 중요하다.
만일 그가 모든 악이 지옥에서 비롯된다고 믿지 않는다면
지옥이 자신을 악으로 내몰고 있다고 믿지 않고
그 악이 자신에게서 비롯된다고 생각할 것이고
그리하여 그는 악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반대로 만일 악이 주님과 반대되는 지옥에서 온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악의 근원이 자신이 아니라 지옥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악을 지옥으로 내던져
자신을 천국으로 이끌 것이다.
물론 이것을 사람은 마치 자기로부터 하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주님께로부터 하는 것이다.
사람이 선한 마음과 경건한 믿음으로 이 진리를 인정한다면
이후 그가 모든 것을 마치 자기로부터 생각하고 행할지라도
그 속에는 그러한 믿음이 여전히 내적으로 깃들어 있다.
이는 마치 씨앗 속의 생식 원리가 새로운 씨앗에 이르기까지
성장 전체를 내적으로 동반하는 것과 같다.)
[8]
다섯째, 따라서 신성한 섭리는
악이나 선을 그 누구에게도 귀속시키지(내 것 삼게 하지) 않으며
오히려 사람의 분별력이 이 둘을 (자신에게)귀속시킨다.
이것이 지금까지 말해진 모든 것으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이다.
선은 신성한 섭리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신성한 섭리는 모든 활동에서 그것(선)을 의도한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선을 그 누구에게도 귀속시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선은 공로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악을 그 누구에게도 귀속시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사람은 악에 대해 유죄가 되기 때문이다.
(죄책감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이 둘을 자기 자아로부터 귀속시킨다.
왜냐하면 자아(proprium)는 오직 악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 자신의 것 중 의지에 속한 것은 자아 사랑이고
이해에 속한 것은 자기 지혜에 대한 교만이다.
그리고 여기서 인간 고유의 분별력이 나온다.>
- - - - -
주님으로부터 인간에게 주어진 그 고유의 분별력이란
인간에게 허용된 외관, 즉 진리의 겉모습을
진리로 믿는 것을 뜻한다.
선은 주님으로부터, 그리고 악은 지옥으로부터 유입되는 것이지만
인간은 이를 마치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다시 말해 의지의 자유 속에서
자기 스스로 그들을 생각하고 행하는 것으로 느끼도록
허용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인간이 선택한 악은
다른 무엇보다 자신이 애지중지 사랑하여
즐거움 속에 받아들이고 행한 것이다.
따라서 그 악은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고 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허용된
겉모습의 진리일 뿐 참 진리는 아니다.
그러므로 만일 인간이 그런 외관을 고집하여 믿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살려는 악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악이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믿고 확신한다면
그 믿음으로 인해 그는 악을 자기 것 삼게 된다고 말하는 이유다.
실제로 악은 지옥으로부터 사람에게 유입되지만
만일 인간이 이 진리를 무시하고
자신의 분별력에 의지해 악이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고집한다면
그 믿음으로 인해 그는 자신을 악의 근원으로 만들어
악한 영들의 영향력을 끌어들이고 악을 내 것 삼게 된다.
자기가 행하는 것은 무엇이든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라고
자신의 눈에 보이는 외관을 따라가기 때문에
그가 행하는 악은 그 자신의 것으로 고착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악과 친근한 한 통속이 되어 악이 그에게 고착되어 갈수록
그는 악을 그의 일부인양 여겨 자신과 동일시하기에 이르게 된다.
반면 악이 자신의 외부, 곧 지옥으로부터 유입된 것이라고 믿으면
그 믿음으로 인해 그는 천사의 도움을 받아
악한 영들의 영향력을 물리치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이 그의 것이 된다.
왜냐하면 악이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고
자신이 사랑하는 주님과 반대되는 지옥으로부터
흘러든다고 믿을 경우
그 믿음으로 인해 그는 주님과의 교류가 일어나고 대신
악은 그 자신에게서 분리되어 이질적인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는 악을 사랑하거나 친근한 존재로 여기지 않고
자신을 악과 동일시하지도 않게 된다.
여기서 혼동되기 쉬운 두 가지 명제가 있다.
하나는, 선과 악을 생각하고 행하는 것은
나 자신이라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선과 악을 생각하고 행하는 것은
분명 나 자신이지만
그들은 내게서 나온(근원)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유입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전자는 인간의 외관에서 보이는 겉모습의 진리이고
후자는 주님이 밝히신 참된 진리로, 이 둘은 구별되어야 한다.
악은 내가 생각하고 행함으로 그것이 나 자신에게서 나온 것처럼,
즉 악의 근원이 나 자신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그렇게 보이도록 주님으로부터 허용된 외관이고
실제로 악은 나 자신이 아닌 지옥으로부터 유입된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이 이 외관만 보고 그렇게 믿는다면,
즉 그가 ‘참 진리’ 대신 외관에 속한 ‘겉모습의 진리’를 믿는다면
그는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을 부정하고
자신이 생명의 주인이 되어 자기 마음대로 살게 된다.
이처럼 주님의 인도를 받지 않고
자기 스스로의 생명인양 마음대로 살게 될 경우
그는 자신의 악한 본성을 제어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악에 끌려
그것을 사랑하고 즐김으로 고착시키게 되어 결국
악과 그 책임이 자신에 귀속되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을 내 것 삼지 않도록
겉으로 보이는 결과보다 그 속 원인을 중시해야 한다.
실제로 악한 생각이 떠오를 때
그것이 자신에게서 나온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주님으로부터 온 진리를 믿음으로
이를 부인해야 한다.
그것은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주님께 반대되는 지옥에서 유입된 것으로, 그래서 그것이
자신에 속하지 않은 별개의 것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할 때 그 악을 사랑하여 친근하게 여기거나
우호적으로 대하는 것에서 돌이켜
오히려 적극적으로 저항하고 거부함으로
그것이 자신과 동일시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사람이 악이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믿게 되는 이유는
스스로 생각하고 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외관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지옥의 영들이 가지는 믿음과 같아서
영혼에 큰 해가 된다..
이와 관련된 경고의 내용을 저서에서 옮겨본다.
하나님의 섭리
288
하늘의 모든 천사들은
아무도 스스로 생각할 수 없고
오직 주님을 통해서만 생각할 수 있다고 인정하지만
지옥의 모든 영들은
자신들 외에는 생각이 다른 누구에게서도 나올 수 없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흘러들어오는 선이 지옥에서는 악으로,
진리는 거짓으로 변한다는 것,
따라서 지옥에서는 모든 것이 그 반대가 된다는 것이다..
모든 악한 사람에게도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적으로 지옥에 있기 때문이다.
289
나는 지옥에 있는 어느 누구도
스스로 생각을 일으키지 못한다는 것을 자주 보았다.
그들 모두는 주위의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는데,
그들 또한 생각을 스스로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이들에게 의존한다.
사람들이 저 스스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그들의 생각과 욕망은 한 사회에서 다른 사회로 옮겨간다..
이런 일은 라이프니츠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일어났다..
그들 모두 천국에서의 유입으로 생각하고,
천국도 주님의 유입으로부터 생각한다고 확신했다.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한 일부 사람들은
이 진리가 너무나 놀라워서, 사물의 겉모습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에
누구도 이를 믿도록 강요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부정할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이 진리는 완전히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놀라움 속에서 그것은 곧
자신들이 악을 생각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처럼 보였으며
또 악이 마치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처럼 보였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또 그들은 주님 홀로 어떻게
우리 모두 다르게 생각하도록
일을 처리하실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했다.
(They did not understand how the Lord alone could work things out
so that we all think differently, either.)
293
여기에 나는 인간의 의지와 지성에 대한 천사적 관점을 덧붙이겠다.
즉, 어떤 인간에게도 그 고유의 의지나 분별력이
티끌만큼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그러한 것들이 누군가에게 티끌만큼이라도 존재할 수 있다면
천국도 지옥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온 인류가 멸망할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또 그들은 본질적인 신성은
스스로로부터 생각하고 의지하는 것이며,
본질적인 인간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생각하고 의지하는 것이라고 한다.
본질적인 신성은 어떤 사람에게도 그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으니,
만약 그 자신의 것 삼게 된다면 그 사람은 신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294
.. 이러한 세 가지 의견은 오직 결과(현상)에서만 생각하고
원인에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의 생각 속에
필연적으로 흘러들 수밖에 없기에
이제 그것들을 원인에서부터 다루고 설명할 필요가 있다.
첫째: 그렇다면 악을 행해도 책망 받을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살펴보자.
만일 사람이 생각하는 모든 것이 다른 이들로부터 유입된다면,
책망은 그것이 오는 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 책망은
그것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돌아간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이 자기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하고
또 알기를 원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 살기를 원하고
자기 스스로에게 인도되기를 원하며,
특히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 내리기를 원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 각자에게 자기 자신의 것처럼 느껴지는
자유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만일 자기가 생각하고 의도하는 것이
다른 이로부터 유입된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그는 마치 결박되어 포로가 된 것처럼 여길 것이며
더 이상 자기의 주인이 아니라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또 그렇게 되면 삶의 모든 기쁨이 소멸되고
결국 인간성마저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 사실임을 나는 여러 번 보았다.
일부 사람들에게, 그들이 다른 이들에게서 인도되고 있음을
지각하고 느끼도록 한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몹시 격분하여 모든 자제력을 잃었고
만일 자신들의 생각에 따라 생각할 수 없고
자신들의 의지에 따라 의지할 수 없다면
차라리 지옥에 묶여 있는 편이 낫겠다고 말했다.
이렇게 자신들이 스스로 할 수 없게 되는 것을
그들은 자기 생명 자체가 묶이는 것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몸이 결박되는 것보다도 더 힘들고 참기 어렵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스스로)생각하고 의도하는 것을
말하거나 행하는 것이 제지되는 것에 대해서는
똑같이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을 제지하는 것은 시민적, 도덕적 삶의 즐거움이었고
이것이 제약을 더 쉽게 견딜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 - - - -
이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늘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행하는 듯 여겨지는 외관은
자연적인 인간은 물론 기독교인일지라도
주님의 계시로 깨우쳐지지 않는 한 부정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오고
악과 거짓이 지옥으로부터 온다는 것은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억 속의 지식에 불과할 뿐
실제에 있어서는 악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믿는다.
그리고 외관을 믿는 그 믿음으로 인해 그는 악을 내 것 삼게 된다.
관건은, 위에서 언급한 인간 고유의 분별력으로 인해
악은 사람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외부(지옥)에서 그에게 유입된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근본적으로 믿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생명은 자신의 것이기에 저 스스로 살려는 것과 같고
또 생명을 받는 그릇과 같은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결과적으로 주님의 인도를 받지 않고
스스로 자신을 인도하겠다는 것과도 같다.
인간이 만일 주님의 인도를 받지 않고 저 스스로 살려할 경우
그는 선과 마찬가지로 악도 그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믿게 되어 공로를 주장하거나 아니면
자신을 악과 동일시하며 정죄하게 된다.
사실 ‘악’은 외부 영향으로 시작되지만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이면 그것은 그의 것이 된다.
악한 생각이나 욕망은
인간 내부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지옥으로부터 들어오는 외적 영향력이다.
하지만 그러한 악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여
자신 것으로 만들 때
그것은 비로소 ‘자기 것’이 되며 책임 또한 자신에게 돌아간다.
그것은 인간이 가진 이성과 자유의지의 선택에 의해
악이 그 사람 속에 고착되기 때문이다.
본래 선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악은 지옥으로부터 오지만
사람이 선 대신 악을 선택하고 사랑할 때
악은 그의 의지와 사랑에 의해 그의 것이 된다.
이때 그것은 단순한 외부의 유입이 아니라
그의 일부로까지 자리 잡게 된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인도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선 안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등을 돌려
자기 자신에 의해 인도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선 안에 있지 않는다.
이것으로부터 분명한 것은
사람 그 자신이 악의 기원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기원은
창조 때 사람 안에 불어넣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에게로 돌아섬으로써
스스로에게 불어넣은 것이다.
선악과로 눈이 밝아진 것은 아담의 선택이었다.
이후 인간에게 악이 들어오게 되었고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는 참 진리 대신
그것이 자기 것이라는 겉모습의 진리를 선택하여 살게 되었다.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눈은 밝아진 인간이
이제라도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은 흐트러진 질서를 바로잡는 것,
즉 자기 생명으로 보이는 겉모습을 진리로 인정하며
저 스스로 살려는 생각을 버리고
자신은 생명을 받는 그릇이라는 참 진리에 서서
주님의 계시와 인도를 받아 사는 길밖에 없다.
그러나 외견상 스스로 사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자신에게서 나오는 악이
외부에서 흘러들어온다고 하면 이를 실제로 믿기 어렵다.
그런 식으로 살면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느껴져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몰려오기 때문이다.
내가 삶의 주체가 되지 않으면,
내가 내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게 뭔가..
도대체 나는 무엇인가.. 누가 내 삶을 살아준다는 말인가..
순간순간 내가 생각하고 내가 고민하며
취하던지 버리던지 모두 내가 결정해온 내 삶이요 내 생명 아닌가..
선을 행하는 것도 또 악을 행하는 것도 모두 나 자신인 것을
내가 분명히 알고 또 생생하게 느끼는데 그걸 부정하라고?
생명도 내 것이 아니고 선과 진리도 내게서 비롯된 것이 아닌
그 근원이 외부에서 흘러들어오는 것이라면
나는 인격체가 아닌 기계 아니던가..
그러나 실상인즉, 생명이 인간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는
바로 그것이 아담이 선택한 겉모습의 진리였고
그로부터 악이 그 안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그 진리로 눈이 밝아진 인간은 더 이상 주님의 인도를 받지 않고
스스로 사는 악한 삶을 즐기게 되었다.
생명이 자신의 것이라는 생각은
겉모습의 진리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사람이 내 삶은 전적으로 내 것이라고 고집하며
하나님의 계시와 인도를 받으려 하지 않을 때,
그리하여 나보다 더 높은 기준(하나님, 진리, 양심, 법 등) 앞에서
자신의 삶을 책임지려 하지 않을 때
그 순간부터 악의 근원을 자기 안에 만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인간의 자율성을 부정하려는 게 아니라
자율성을 더 큰 진리와 책임 속에 두지 않으면
그 순간부터 악이 내 것이 되는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겉보기의 진리(apparent truth) 안에 사는 우리에게는
삶과 능력이 전부 내 것처럼 느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선은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
그리고 악은 지옥으로부터 흘러들고
우리는 그 사이에서 어느 편을 선택하느냐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
인간의 자율성과 자기책임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내 삶은 내 것’만을 절대화 하면 스스로를 궁극 기준으로 세우게 된다.
높은 기준, 즉 법, 양심, 공동체의 선, 하나님 같은
나보다 큰 규범 앞에서 책임지길 거부하면
들어오는 악한 충동을 ‘내 생각, 내 선택’으로 승인하게 되고
그때 그 악은 더 이상 외부의 유혹이 아니라
내 것으로 삼아지게(appropriation) 된다.
그러므로 악은 원래 인간 본성의 필수 요소가 아니라
동의와 정당화를 통해 내 것으로 삼을 때
내 안의 근원처럼 자리 잡게 된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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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Ormond Odhner 목사의
‘악, 외부의 영향력’ 이라는 글을 읽어보자.
* 악, 외부의 영향력 / Ormond Odhner 목사
“무엇이든 사람 밖에서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오직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가복음 7:15; 마태복음 15:18 참조)
악은 사람 밖에 있는 것이다.
단순히 사람 속으로 들어온다고 해서 그를 더럽히지 못한다.
오직 그 악이 마음에서 나올 때에만 사람을 더럽히고
그를 지옥에 정죄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읽는다.
‘만약 사람이 이것을 사실로 믿는다면, 다시 말해
선과 진리는 모두 주님으로부터 오고
악과 거짓은 모두 지옥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는 어떤 범죄에 대해서도 유죄가 될 수 없을 것이며
악이 그의 책임으로 돌려질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악이 자기 자신에게서 온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는 악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
이것이 그의 믿음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믿음이 그러한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악은 그에게 들러붙어 분리할 수 없게 된다.’
(AC 6324)
우리의 악한 생각과 욕망은 우리 자신에게서 비롯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지옥에서 비롯되며 외부에서 우리에게 흘러들어온다.
외부 영향력으로서의 악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그것들을 즐겁게 받아들여(welcome)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을 때에만 우리를 정죄한다.
이는 심지어 우리의 유전악,
곧 악을 즐기려는 유전적인 경향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다른 어떤 악보다도
유전악이 더 우리 자신의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에 오랫동안 길들여져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전악에 관하여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악, 즉 유전악이라고 불리는 것은
사람 ‘안에서(in)’ 그리고 사람 ‘에게(into)’ 작용한다.
마찬가지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도 같은 방식으로 작용한다.
“만일 악이 (직접)사람을 통해(through) 작용한다면
그는 개혁될 수도 없고 책망을 받지도 않을 것이다.
또 만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이 (직접)사람을 통해
작용한다고 해도 그는 개혁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선과 악 모두 사람의 자유로운 선택에 달려 있기 때문에
그가 스스로 악으로부터 행동한다면 유죄가 되고
스스로 선으로부터 행동한다면 책망받을 이유가 없다.”
(참고 TCR 154:4
.. If the evil acted through man, he would neither
be capable of reformation, nor blameable;
or if good from the Lord acted through man,
he would be incapable of reformation;
but as both good and evil depend upon man's free choice,
he becomes guilty when he acts of himself from evil,
and is blameless when he acts of himself from good.")
(스베덴보리는 우리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악(유전악)이
우리를 통해 직접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대신 그 악은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 ‘에게’
작용하는 외부의 영향력일 뿐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쉽게 비유하자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악'은 우리 안에 있는 잠재적인 에너지나 성향과 같다.
이 에너지는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하도록 계속해서 부추기지만
실제로 행동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선'도 마찬가지로 우리 안으로 흘러들어온다.
이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한 영향력으로 우리가 옳은 선택을
하도록 격려하는 힘이다.
이 두 가지 영향력(악과 선)은
항상 우리 안에서 서로 균형을 이루며 작용한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할지 결정하는 자유 의지가
바로 우리에게 있다.
만약 악이 우리를 통해 직접 행동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저 악의 꼭두각시일 뿐이므로
개혁될 수도 없고 책임도 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악은 우리에게 영향을 줄 뿐이고
그 영향에 따라 행동할지 말지는 우리 스스로 선택한다.
결론적으로 이 부분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악은 우리에게 영향을 주지만
우리가 악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M
우리가 악을 선택하고 그에 따라 행동할 때만 죄가 생기고
반대로 우리가 선을 선택하고 그에 따라 행동할 때에는
책망 받을 이유가 없다.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이 바로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어떤 삶을 살 것인지를 결정한다.
악은 단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뿐이며
그 영향을 받아들일지 거부할지는 순전히 우리의 몫인 것이다.)
여기서 몇 가지를 주목해본다.
악, 심지어 당신의 유전악조차 당신을 통해, 당신을 수단으로,
당신을 그 손에 든 죽은 도구삼아 행동하지 않는다.
악은 당신 안에서, 그리고 당신에게 작용한다.
이는 곧 악이 당신 자신이 아님을 보여준다.
당신은 인간이며 악이라는 외부 영향력보다 위에 있고
그것과는 구별된다.
악은 당신 안에서, 당신에게 작용하지만
당신이 그것의 급박한 충동에 대해 자유로 동의할지라도
그때조차 여전히 당신이 악으로부터 행하는 것이지
악이 당신을 통해 또는 당신을 수단으로 행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당신이 자유와 이성적으로 악으로부터 행하기 전에는
결코 그것이 당신을 정죄할 수 없다.
(허용된 주님의 섭리에 의해
설령 악이 나 자신에게서 나온 것처럼 보일지라도
자신을 악과 동일시하지 말아야 할 것은
실제로는 악이 외부에서,
그것도 주님을 반대하는 지옥에서 흘러들어온 것이고
나는 그것과 분리된 더 상위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선과 악이 급박하고 강력한 영향력으로 작용하는 상태에서
사람이 그것에 동의한 결과
그들이 나를 통해, 또는 나를 수단으로 행동하는 듯 보일지라도
실제 행동하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왜냐하면 그들과 분리되어 자유와 이성으로
그들을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은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본문을 보면, 밖에서 사람에게 들어가는 것(이 경우 악)은
암시적으로 음식에 비유되고 있다.
왜냐하면 입을 통해 위장으로 들어가지만
마음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은
사람을 부정하게 만들지 않는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밖에서(입을 통해) 사람에게 들어오는 악이
먼저, 또는 처음 의식적으로, 생각(위)을 거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생각이 단순히 생각일 뿐
아직 의도가 아니고 애정과 결합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실제로 사람의 일부가 아니다.
그것은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 사람의 일부가 아니다.
마치 여전히 소화관 속에 있는 음식이
아직 사람의 일부가 아닌 것과 같다.
그러므로 악이 처음 사람의 생각 속에 들어올 때
그것은 아직 전혀 그 사람의 일부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것이 그를 정죄할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하여 AC 6204 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생각 속으로 들어온 악은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악은 지옥의 영들로부터 끊임없이 불어넣어지고
천사들에 의해 끊임없이 물리쳐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이 의지 속으로 들어가면, 그때는 해를 끼친다.
그 이유는 외적 속박이 그를 억제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언제나
악이 행동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악이 의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그것이 생각 속에 머물러 동의를 얻으며
특히 행동과 그에 따른 즐거움으로 이어질 때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미 읽었던 말씀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가 이미 읽은 것처럼,
‘모든 선하고 참된 것은 주님에게서 나오고
모든 악하고 거짓된 것은 지옥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사람이 사실 그대로 믿었다면
그는 어떤 범죄에 대해서도 유죄가 될 수 없을 것이고
악이 그 자신에게 돌려질 수도 없을 것이다.’(AC 6324)
그렇다면 우리가 이 진리를 믿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려울까?
그것을 믿는 것이 우리에게는 오히려 명백히 유리한 것임에도
특히 ‘의지로’ 믿는 것이 왜 그토록 어려운 것일까?
어쩌면 그러한 믿음이 우리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릴까를
우리가 두려워하기 때문은 아닐까?
그것은 참으로 끔찍한 두려움임에 틀림없다.
(비록 이 경우에는 근거가 없는 두려움이겠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을 허상으로(out of existence) 만들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본성에 전혀 맞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모든 선과 진리는 하나님에게서 오고
자신에게서 오지 않는다고 믿는 것은 비교적 쉽다.
그것은 그들이 어린 시절부터 들어온 교회 교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은 그 속 깊이
함축된 의미까지 파고들지 않는다면 어렵지 않다.
선이 우리 자신에게서 오지 않는다는 것은 비교적 받아들이기 쉽다.
하지만, 만약 악도 우리 자신에게서 오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선의 근원도 아니고 악의 근원도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인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가?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지옥이 그렇게 보이기를 바라는 방식이다.
왜냐하면 그 터무니없는 대답의 근원은 지옥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그것은 주님의 가장 깊은 뜻이 아니다.
주님은 사람이 항상 생명을 자기 것으로 느끼기를 바라신다.
그 느낌이 없다면 우리는 인간일 수 없다.
바로 그 느낌 위에 우리의 자유와 개별적 사고가 세워져 있다.
어떤 삶을 살든, 우리는 그 삶을 자기 것으로 느낄 것이며
그것은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다.
우리가 영원한 삶을 지옥에서 보내기로 선택한다면
우리는 지옥의 삶을 자기 것으로 느낄 것이다.
반대로, 천국에서 영원히 살기를 선택한다면
우리는 천국의 삶을 자기 것으로 느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저술들이 천국적인 자아(proprium)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것은 중생한 천국의 삶이며 우리 자신의 것으로 느껴지는 상태다.
이것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다.
모든 사람의 경험이 말해주듯
그는 자신의 생명을 자기 것으로 느낀다.
선한 일을 할 때 그는 자신이 그것을 행한다고 느낀다.
다른 식으로 느낄 수 없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는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 그에게
흘러 들어오는 선으로부터 행동하고 있다.)
악한 일을 할 때에도 그는 자신이 그것을 행한다고 느낀다.
(실제로는, 그는 지옥으로부터 그에게 흘러 들어오는
악으로부터 행동하고 있다.)
두 경우 모두 그는 생명을 자신의 것으로 느끼지만,
두 경우 모두 그의 생명은 실제로는 그에게 흘러 들어오는 것이다.
한 경우에는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 흘러 들어오고
다른 경우에는 (그의 의식된 삶에 있어)
지옥의 왜곡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것이다.
모든 생명, 모든 사랑은 외부에서 사람에게 흘러 들어오며
만약 그것이 흘러 들어오는 것을 멈춘다면
사람은 마치 전력의 근원으로부터 끊긴 백열전구와 같을 것이다.
그는 죽는 것이 아니라, 아예 존재를 멈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이 선의 근원도 아니고 악의 근원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는 아니다.
그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그릇이며 자유와 이성의 능력을 부여받았고
따라서 어떤 종류의 삶을 살지 결정할 수 있는 그릇이다.
게다가 이런 결정은 실제로 그가
생명을 받아들이는 그릇의 형태 자체를 변화시킨다.
이렇게 하여 그는 자신만의 독특하고 개별적인 인격을 형성해 나간다.
악한 생각과 욕망을 보면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서 비롯되지 않는다.
때로는 우리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도 이 진실을 볼 수 있다.
때때로 아주 사악한 생각이 우리 마음속에 불쑥 떠오르는데
그 생각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고
확실히 우리가 의식적으로 원해서 생긴 것도 아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생각이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을 안다.
진실은 바로 그것이다.
그 생각은 지옥에서 우리에게 온 것이다.
보통 우리는 그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 있다.
그렇지만 언제나 한순간의 결정이 필요한 때도 있다.
그때 우리는 그 생각을 기꺼이 받아들여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그리되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일부가 되고
생명을 받아들이는 그릇의 형태인 우리를 영원히 바꿔놓을 수도 있다.
우리는 악한 생각과 욕망의 근원이 아니다.
지옥이 바로 그 근원이다.
하지만 (스베덴보리의) 저술들은
악의 기원(신학적 용어로는 원죄)이 다른 곳에서가 아닌
오직 인간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분명히 가르친다.
이 또한 진실이다.
악이 사람 안에서 시작된 것은 사람이 자유의지와 자기 이성으로,
하나님이 계시해주신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흘러든다는 진리’ 대신
하나님이 주신 ‘생명은 자기 것이라는 겉모습(appearance)’을
믿기로 처음 선택했을 때였다.
두 가지 모두 인간에게는 호감이 가는 것이었지만
그는 자유와 자신의 이성에 따라
진리 대신 겉모습을 믿기로 선택했고 이것이 아담의 죄였다.
이렇게 하여 원죄가 세상에 들어왔으며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모든 사람 안에서 악이 시작되는 기원이다.
그는 생명이 자신의 것이라는 겉모습의 진리를 고집스럽게 믿으며
자신보다 더 높은 존재나 어떤 원리에도
자기 삶의 행실에 대한 책임을 지려 하지 않을 때
악의 근원을 자신 안에 만들게 된다.
(He makes the origin of evil in himself when he insists on
believing in the apparent truth that life is his own,
and is unwilling to hold himself responsible for the conduct
of his life to anyone or anything higher than himself.)
이렇게 하여 모든 사람은 자기 안에 악의 기원을 만든다.
그는 스스로 하듯 행동하며
생명이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믿도록 부추기는
지옥의 충동을 따르기로 선택하지만
이는 모든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그에게 흘러들어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천국의 균형 잡힌 영향력과는 반대되는 선택이다.
그리고 (생명이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믿는) 이런 일은
그의 남은 삶 전체에 걸쳐 계속된다.
결코 그렇게 할 필요는 없는 것이지만
지옥으로부터 그에게 들어와 그 안에서 작용하는
악으로부터 행동할 자유는 언제나 그에게 있다.
따라서 바로 그렇게 할 때만 그는 악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그것에 대해 죄를 짓고, 그 책임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게 된다.
(악의 작용을 느끼더라도 반드시 따라야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동시에, 지옥에서 흘러들어와 그 안에서 작용하는
악을 따라 행동할 자유도 그에게 늘 있다.
즉 선택의 가능성도 늘 열려져 있다.
따라서 바로 그렇게 행동할 때만,
즉 악을 실제로 선택하여 행할 때만 그는 악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He never need do it; but he is always free to act from the evil
that acts in him and into him from hell. Thus,
and thus only, does he make evil his own, become guilty of it,
and make himself to blame for it.)
그러나 악이 지옥으로부터 자신에게 작용하는
외부의 영향력일 뿐이며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로 선택하기 전까지는
사실상 자신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을 인간이 인정하기만 한다면
그는 결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으며, 그렇게 하지도 않을 것이다.
(악은 원래 자기 안에 있는 게 아니라
지옥에서 자기에게 작용하는 외부적 영향력일 뿐이며
자신이 그것을 받아들여 선택하기 전까지는
결코 자기 일부가 아님을 인정할 때
그는 악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을 것이다.
즉, 악이 들어온다고 해서 내 본성 자체가 악한 건 아니다.
내가 선택해야만 그것이 내 것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만일 그가 주님의 인성을 신성으로 인정하고
악행이 그분에 대한 죄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는 실제로 이러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배웠다.
악을 주님에 대한 죄로 믿는다는 것은
악이 우리를 주님의 뜻으로부터 분리시킨다고 믿는 것이다.
악을 주님에 대한 죄로 여기고 멀리하는 것은
악이 몸과 마음 모두에서 우리를 그분과 분리시키기 때문에
그것을 떠난다는 뜻이다.
그리고 주님의 인성이 신성이라고 믿는 것은
그분의 인간적인 모습에서도 그분이 하나님, 곧 우리의 하나님이며,
우리가 삶속에서 다른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정말로 그분이 우리의 하나님이라면
우리는 그분의 뜻에서 우리를 분리시키는 일을 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주님의 인성을 신성으로 인정하고
악을 그분에 대한 죄로 믿는 것은
지옥이 우리의 생각을 이끌어가려는 것만큼 그렇게 어렵지 않다.
우리가 단지 영생에 대해 생각한다면(AC 6201 e 참조)
영원히 지속되는 축복을
지상에서의 짧은 생애 동안만 지속되는 축복에 비교할 때
그것은 모든 것과 아무것도 없는 것 사이의 차이처럼
크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이런 식으로 생각할 때
그것은 그가 주님으로부터 생각하고 있는 것인바,
그러면 주님은 모든 생명이 외부로부터 그에게 흘러 들어온다는 것을
그가 인정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다.
즉, 악과 거짓은 지옥에서,
선과 진리는 천국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오며
이 둘 모두 그 안에서 그리고 그에게 작용하며
따라서 그가 이편 또는 저편으로부터 행동하도록
선택할 자유를 주고,
그가 선택한 삶을 자신의 것이라고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그때 주님은 또한 그에게
악을 거부하고 선을 선택할 지혜와 의지를 주시며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진정으로 천국적인 자아,
즉 영원히 자신의 것으로 느껴지는 천사의 거듭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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