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소사란 절에는 중들이 어찌도 많이 사는지 월급을 주고 공양주를 부릴 정도였다.
하루는 더벅머리 총각이 오더니
“나는 돈을 안주어도 좋으니 틈틈이 고승석덕(高僧碩德)들의 법문을 들게 해 주십시오.” 라고 사정해 함께 살게 되었다.
공양주 총각은 뭐가 그리 기쁜지 나무할 때도 싱글벙글,
아궁이에 불을 때면서도 싱글벙글,
밥을 하고 청소를 하면서도 싱글벙글,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하였다.
승려들은 무보수로 공양주 노릇하는 총각을 보고
“중도 아니고 속인도 아니다.”고 비아냥거렸다.
공양주 총각은 그때마다 “나야 밭에서 죽으면 밭 임자가 치울 것이요,
산에서 죽으면 산 임자가 치울 것이며,
물에서 죽으면 물 임자가 치울 것 아니오?”라고 말했다.
그는 중노동을 감내하면서도 약속대로 고승들의 법문만은 다 청법하였다.
스님들은 시주 받고 노는 것 등으로 세월을 보낼 뿐
누구 하나 하찮은 공양주에게 눈을 돌리지 않았다.
여러 해가 지난 어느 날,
갑자기 공양주가 아무 말 없이 사라져 버리자 스님들은 공양주를 찾기 시작하였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때 대웅전 뒤 담장 옆에서 서기가 방광했다.
스님들이 모두 서기가 방광하는 곳으로 달려가보니
더벅머리 공양주는 이미 앉은 채로 열반에 든 상태였다.
그제야 스님들은 공양주가 큰 도인이였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대종사는 제자들에게 “내소사 공양주의 정신을 닮으라”고 당부하면서
내소사 공양주를 여래라고 하였다.
대종사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 공양주는 평생 동안 대중에게 공양주 노릇만 하느라 선(禪)공부는 한번도 안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공양주는 그 속에서 항상 낙도생활을 하여 불평하는 마음이 없이 살았다 하니, 그는 마음 가운데에 참 공부길을 대중 잡고
수 십년 동안 동정일여 공부를 속깊게 한 것이다.
하루는 공양주가 없어져 찾아보니 뒷 담장 옆에서 앉은채 열반하였고 서기가 비쳤다고 한다.
그것이 좌탈입망이니 공양주가 큰 도인이다.
너희들도 평생 똥지게만 지고 일만 하라 한다면 불평없이 살겠는가 대조하여 보아라.”
대종사님 당대 제자들은 “내소사 공양주 이야기는 대종사님께서 즐겨 사용하였던 예화중의 하나.”라고 증언하고 있다.
대종사 당대 제자인 묵타원 권우연 교무가<월간원광>에 연재한 “대종사님 그때 그말씀”에도 기록되어 있다.
내소사는 어떤 절인가?
내소사는 전북 부안군 변산반도에 자리한 절로 백제 무왕34년(633) 혜구두타가 창건하였다. 일주문에서 천왕문에 이르는 600m 가량의 전나무 숲길로 유명하다.
대종사께서도 몇 차례 방문한 적이 있다.
대종사는 영산에서 봉래정사에 가실 때 내소사를 들러 가셨다.
대종사는 내소사 인근인 보안면 종곡에 살고 있는 이춘풍의 집에 머무신 후 이춘풍과 함께 내소사를 둘러보고 내소사 산내 암자인 청련암(靑蓮庵) 비탈길을 넘어 도학골을 거쳐 봉래정사에 오셨다.
<대종경>수행품 34장 법문은 이때 나온 법문이다.
대종사 이춘풍으로 더불어 청련암 뒷산 험한 재를 넘으시다가 말씀하시기를
“험한 길을 당하니 일심 공부가 저절로 되는 도다.
그러므로, 길을 가되 험한 곳에서는 오히려 실수가 적고 평탄한 곳에서는 실수가 있기 쉬우며,
일을 하되 어려운 일에는 오히려 실수가 적고 쉬운 일에 도리어 실수가 있기 쉽나니,
공부하는 사람이 험하고 평탄한 곳이나 어렵고 쉬운 일에 대중이 한결같아야 일행삼매(一行三昧)의 공부를 성취하나니라.”
이진사의 청법공덕
‘이진사가 청법공덕이 인연이 되어 도를 이룬 성도담’은
대종사께서 평소 자주 사용하셨던 예화이다.
범산 이공전 등 대종사 당대 제자들의 증언이다.
옛날 이진사라는 사람은 세속락을 누리며 살던 유학자로 불교에 대해 좋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봄 날 화전놀이를 다녀오다가 마침 비가 와 어느 절 문에 의지해 비를 피하게 되었다.
그때 절 안에서 “대방광불 화엄경 대방광불 화엄경”하고 경 읽는 소리가 나는지라
“체, 대방광불화엄경이 다 뭐야.”하고 빈정거렸다.
비가 그친 뒤에 집에 돌아와 낮잠을 자던 이진사는
머슴들의 장작 패는 소리에 까무라쳐버렸다.
갑작스런 일에 온 집안 식구들은 울고 야단이 났다.
이진사는 까무러친 채 무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무사들이 있는 곳을 벗어나 한참을 가다보니 신선 두 명이 바둑을 두고 있고,
한 신선은 옆에서 훈수를 두는 모습을 보게 됐다.
이진사는 그 모습이 어찌나 보기 좋은지
‘나도 당장 저런 도포를 입고 바둑이나 두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세 사람 가운데 흰 도포를 입은 신선이 옷을 벗어주며
“내 대신 여기서 바둑을 두겠느냐.”고 하였다.
이진사가 그 옷을 받아서 막 걸치려고 하는데 별안간 공중에서
“대방광불화엄경 한 번만 외운 사람도 축생보에 떨어지지 않는데 너는 왜 축생의 가죽을 둘러쓰려고 하느냐?”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진사는 그 소리에 깜짝 놀라 도포를 입으려다 멈추었다.
다시 한참을 걷다보니 예쁜 기생들이 노래와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됐다.
이진사는 ‘나도 저기에서 기생들과 같이 노래하고 춤을 추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기생들이 와서 “같이 놀자”고 하는지라 마악 그곳으로 가려는데
또 공중에서 “이진사야! 대방광불화엄경 한번만 외운 사람도 축생보에 떨어지지 않는데 너는 왜 축생의 굴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느냐.”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깨어보니 집안 식구들이 모두 이진사 옆에 앉아 울고 있었다.
이진사는 머슴을 시켜 꿈에 보았던 집안 구석구석을 찾아보라 하였다.
강아지 세 마리가 금방 태어났는데 그 중 흰 강아지는 죽어있었고
집 뒤에는 개구리들이 모여서 울고 있었다 한다.
강아지 세 마리는 신선이고, 개구리들은 기생들이었던 것이다.
이진사는 그 길로 출가를 단행하여 입산수도를 하였다.
부인과 자녀들이 물어물어 찾아와도 산봉우리 위로 올라가 만나주지 않았다.
그가 열심히 수도하여 깨닫고 보니
과거에 자기가 까무라쳐 제일 먼저 만난 무사들은 벌떼들이었고,
예쁜 기생들은 개구리요, 바둑 두는 신선들은 강아지였음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이진사는 부안 줄포에 살았던 유학자였고,
절 문에서 비를 피하며 “대방광불화엄경”하고 경 읽는 소리를 들은 곳은 내소사라 한다. 또 이진사가 출가수도한 곳은 내변산으로,
지금도 이진사가 수도하던 골짜기를 도학골이라 부르고 있다.
도학골은 원불교 변산성지 본래정사 맞은편 골짜기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