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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타이(Altai), 투바(Tuva)共和國등은 함경도(咸鏡道)지방 (제1편)
烏粱海(오량해)=兀良哈(올량합)의 正體(정체)
○ ‘투바(Tuva)공화국’의 호수(湖水) 안(內)에 있는 미스테리 「섬 요새(要塞)」에 대한 글을 접했다.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이 ‘고황제(高皇帝)’가 홍무(洪武) 22년에 설치한 〈삼위(三衛)[타안(朶顔).복여(福餘).태녕(泰寧)]〉와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유학자(儒學者)들의 문집(文集)속에 셀 수 없을 만 큼 등장(登場)하는, 〈올량합(兀良哈)〉에 관한 이야기가 떠오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 투바공화국(共和國) 호수(湖水)안의 섬 요새(要塞)
수년(數年) 전(前), 이미 게재(揭載)한 바 있는, 「올량합(兀良哈)=오량해(烏粱海)」에 관한 원전(原典) 설명(說明)과 그들의 근거지(根據地)였던 당노산맥(唐努山脈) 주변에, 바로 문제(問題)의 “섬 요새(要塞)”가 있는 “투바((Tuva)공화국”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 투바공화국
당노오량해 (唐努烏梁海)
○ 탕누우량하이(당노오량해(唐努烏粱海)) / 출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탕누우량하이【唐努烏梁海 : 唐努乌梁海, 병음 : Tángnǔ Wūliánghǎi】는 몽골 서북쪽에 위치한 지역의 중국어 명칭이다. 원래는 중국 외몽고의 일부였다가 몽골이 중국에서 독립할 때에 소련에 편입되었다.
지역 대부분은 러시아 ‘투바 공화국’에 속하며, 일부는 러시아 알타이 공화국과 몽골의 흐브스글 주에 편입되어 있다. 통상적으로 투바 공화국을 지칭한다.
1912년 : 러시아 제국, 몽골이 청나라 멸망 직후 독립을 시도할 때에 탕누우량하이 합병 / 1918년 ~ 1919년 : 중국, 러시아 내전을 기회로 탕누우량하이를 탈환하고 군사기지 구축 / 1920년 : 소련, 탕누우량하이 재점령 /1921년 : 몽골 독립. 형식적 독립국인 '투바 인민 공화국' 수립. / 1931년 : 중국, '몽고맹부기조직법(蒙古盟部旗組織法)'을 제정하고 제4조제2항에 탕누우량하이 포함. / 1941년: 투바 인민공화국, 소련의 지시로 독소 전쟁에 참전. / 1944년 10월: 소련, 투바 인민공화국을 병합하고 '투바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 공화국'으로 개칭. / 1992년: 소련 해체. 러시아 투바 공화국으로 편입.
현재 / 중화인민공화국은 투바 공화국이 러시아 영토임을 승인하였으나, 중화민국 정부는 자국 영토로 주장하고 있다. - 출처(出處) : 위키백과 인용 / 끝 -
○ 이곳은 본시(本是),〈조선왕조(朝鮮王朝)의 함경도(咸鏡道) 북방지대(北方地帶)이며, 고려(高麗)때 윤관(尹瓘)장군이 여진족(女眞族)을 몰아내고, 개척(開拓)한 곳이다.〉 그 증거(證據) 또는 근거(根據)와 원전(原典)기록(記錄) 하나하나를 고증(考證)해 보기로 하겠다.
【이미 우리 카페(Cafe)에서, 수차례에 걸쳐 게재(揭載)된 바 있으나, “미스테리(mystery) 섬 요새(要塞)” 기사(記事)에 덧붙여 보충(補充), 보완(補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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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량해(烏粱海)는 곧 올량합(兀良哈)」
(1) 欽定滿洲源流考 / 卷十四 / 山川 一 :《通典,唐乾封二年薛仁貴破髙麗於金山進拔夫餘城. : 통전(通典), 당(唐)건봉(乾封) 2년, 설인귀(薛仁貴)가 고려(高麗)【고구려(高駒驪)】를 깨뜨린 곳으로, 금산(金山)에서 진격하여 부여성(扶餘城)을 쳐 빼앗은 곳이다.【注:案夫餘城東接挹婁西接鮮卑在遼為通州金為威平府地 : 상고해보면, 부여성(扶餘城)은 동(東)쪽으로 읍루(挹婁)와 접했고, 서(西)쪽으로는 선비(鮮卑)와 접해 있었는데, 요(遼)의 통주(通州)요, 금(金)의 함평(咸平) 땅이다.】明統志金山在開原西北三百五十里遼河北岸又西北三十里曰東金山又二十里曰西金山三山緜亘三百餘里與烏梁海接境. : 명통지(明統志)에서 이르기를, 금산(金山)은 개원(開原)서북(西北) 350리 요하(遼河)의 북안(北岸)에 있고, 또 서북 30 리에 동금산(東金山)이 있고, 또 20 리에 서금산(西金山)이 있는데, 이 세 산(山)의 뻗친 줄기가 3백 여리에 달하는데, ‘오량해(烏粱海)’와 접경을 이루고 있다.》고 하였다.
➤ 위의 기록(記錄)을 보면 :〈금산(金山), 부여성(扶餘城), 요하(遼河), 오량해(烏粱海)〉등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 지명(地名)들은 조선사(朝鮮史)에서 아주 비중(比重)이 높다고 볼 수 있는 것들이다.
금산(金山)【Altai(알타이山)=金山=阿爾泰山=長白山=백두산(白頭山)】은 바로 〈알타이산(Altai山)이요, 아이태산(阿爾泰山)이며, 옛 불함산(不咸山)이요, 장백산(長白山)이며, 백두산(白頭山)〉으로 알려진 산(山)이다.
이곳에서 동북(東北)쪽으로 뻗어나간 산맥(山脈)이 바로 당노산맥(唐努山脈)이며, 이곳 산맥(山脈)의 북(北)쪽에 ‘오량해(烏粱海)=올량합(兀良哈)’이 있었다.
《阿爾泰山:亦作阿勒壇.又作阿爾但.蒙古爲金爲阿爾但.故又稱金山.天山北出之脈.中略. : 아이태산(阿爾泰山) : 또한 아륵단(阿勒壇)이다. 또 아이단(阿爾但)인데, 몽고(蒙古)에서는 금(金)을 아이단(阿爾但)이라고 하는데, 이로 인해 예로부터 또 부르기를 금산(金山)이라고 했다. 천산(天山)이 북(北)쪽으로 뻗은 줄기이다. 중략(中略).》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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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오량해(烏粱海)〉/ 出處 : 中國古今地名大辭典 :《烏粱海亦作兀良哈,明時居直隷長城外.卽蒙古東部地方,爲朶顔.福餘.泰寧三衛,後徙外蒙古西北部,其種爲突闕族,語言風俗,則以喀爾喀人,自稱東巴. : 오량해(烏粱海)는 또 올량합(兀良哈)이다. 명(明)때에 직례 장성(長城)밖에서 살았다. 곧 몽고(蒙古) 동부지방인데, 타안(朶顏)·복여(福餘)·태녕(泰寧) 삼위(三衛)로, 뒤에 몽고(蒙古) 서북부(西北部)로 옮겨갔다. 그 부족(部族)은 돌궐(突厥)족으로, 언어(言語)와 풍속(風俗)등이 객이객(客爾客)사람들로, 스스로 동파(東巴)라고 불렀다. 居唐努山,阿爾泰山之間.分爲三部,一曰唐努烏梁海,二曰阿爾泰烏梁海,三曰阿爾泰諾爾烏粱海. : 당노산(唐努山)과 아이태산(阿爾泰山)사이에서 살며, 삼부(三部)로 나누어져, 첫째는 당노오량해(唐努烏粱海)요, 둘째는 아이태오량해(阿爾泰烏粱海)요, 셋째는 아이태낙이오량해(阿爾泰諾爾烏粱海)이다.》
➊ 당노산(唐努山)은 :《外蒙古唐努烏梁海南境.阿爾泰山之大支幹也.唐書作唐麓嶺. : 외몽고 당노(唐努)오량해(烏粱海) 남(南)쪽 지경에 있다. 아이태산(阿爾泰山)의 큰 줄기이다. 당서(唐書)의 당록령(唐麓嶺)이다.》라고 하였으며,
➋ 당노오량해부(唐努烏粱海部)는 :《唐努烏粱海部, 外蒙古西北境. : 당노(唐努)오량해(烏粱海)부는, 외몽고(外蒙古) 서북(西北) 지경에 있다.》고 하였다.
➌ 아이태산(阿爾泰山)은 :《阿爾泰山 : 亦作阿勒壇.又作阿爾但.蒙古爲金爲阿爾但.故又稱金山.天山北出之脈.中略. : 아이태산(阿爾泰山)은 또 아륵단(阿勒壇)이다. 또 아이단(阿爾但)이다. 몽고(蒙古)에서는 금(金)을 아이단(阿爾但)이라고 하여, 옛 부터 부르기를 금산(金山)이라고 하였는데, 천산(天山)이 북쪽 뻗은 줄기이다. 중략(中略).》라고 하였다.
‘오량해(烏粱海)는 곧 올량합(兀良哈)’을 말한다. 〈반도(半島) 조선사(朝鮮史)에서 함경도(咸鏡道) 북방지대(北方地帶)의 두만강(豆滿江)이북(以北)에 있었다.〉고 설명(說明)한다. 그러나 ‘위키백과’를 검색(檢索)만 해봐도, 〈오량해(烏粱海)=올량합(兀良哈)은 외몽고(外蒙古) 서북방(西北方)지대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위의 지도(地圖)에서…
ⓐ ‘당노오랍산(唐努烏拉山)’이 ‘당노산맥(唐努山脈)’이다. 〈금산(金山)=아이태산(阿爾泰山)=불함산(不咸山)=장백산(長白山)=백두산(白頭山)〉에서 러시아(Russia)와 외몽고(外蒙古) 국경선(國境線)을 따라 동북(東北)쪽으로 뻗어 내린 산(山)이 바로 당노산(唐努山)맥이다. 당(唐)나라 때는, 이 산(山)을 당록령(唐麓嶺)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고, 이 산맥(山脈)의 북(北)쪽 지방에 「오량해(烏梁海) 곧 올량합(兀良哈)이 살았다.」는 이야기다.
ⓑ 조선사(朝鮮史)【고려사(高麗史)·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유학자(儒學者)들의 각종(各種) 문집(文集)등의 조선사(朝鮮史)를 다룬 대부분(大部分)의 기록(記錄)】을 보면 : 올량합(兀良哈)은, 함경도(咸鏡道) 두만강(豆滿江) 이북(以北)에 살고 있었던 야인(野人)들이며, 고려(高麗) 윤관(尹瓘)장군(將軍)이 이들을 토벌(討伐)하고, 영토(領土)를 개척(開拓)했다고 한 곳이다.
➤ 그러나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은, 여전히 반도(半島) 함경도(咸鏡道) 두만강(豆滿江)이북(以北)에서 살던 야인(野人)들이라고 뻔뻔하게 주장(主張)하고 있다.
왜곡(歪曲)된, 조작(造作)된 조선사(朝鮮史)를 철면피(鐵面皮)처럼 주장(主張)하는 반도(半島)식민사학자(植民史學者)들은, 이제부터라도 꿈속에서 깨어나, 자기성찰(自己省察)을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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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 《遼 金 所 置 眀 屬 烏 梁 海 其 稱 故 建 州 者 : 요(遼)와 금(金)이 둔 바 있는 명(明)에 속했던 오량해(烏粱海)는 옛 건주(建州)사람들을 일컫는다.》라는 기록(記錄)이 있다. 이 말은 곧 「건주(建州 : 심양(瀋陽)에 살고 있었던 자(者)들이 바로 오량해(烏粱海)=올량합(兀良哈)이었다.」라는 이야기다.
➤ <건주(建州)>는 <金>의 발생지(發生地)이며, 이곳 주위에 장백산(長白山) 곧 백두산(白頭山)이 있었고, 이곳으로부터 발흥(發興)한 금(金)은 세력(勢力)을 키워 북방(北方)지역을 호령(號令)하게 되는데, <건주(建州)>는, 중원(中原)서북방(西北方) 아이태산(阿爾泰山)주변(周邊)에 기원(起源)한다.〉는 것이다.
특히 후금(後金)의 노이합적(누루하치=애신각라)은 백두산(白頭山) 곧 장백산(長白山) 동남(東南)쪽에서 흥성(興盛)하여, 건주(建州) 곧 심양(瀋陽)에 입성(入城)하게 된다.
위 글 (2)에서 〈오량해(烏粱海)은, 올량합(兀良哈)으로 돌궐족(突厥族)이며, 언어(言語)와 풍속(風俗)등이 객이객(客爾客)인이며, 스스로 동파(東巴)라고 불렀다.〉고 하였으니, 〈객이객(客爾客)은 돌궐족(突厥族)〉이란 뜻이다. 청사(淸史)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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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淸史志五十三.地理二十五.外蒙古:外蒙古喀爾喀:古北狄地.唐·虞,山戎.夏,獯鬻.周,玁狁.秦,漢曰匈奴.漢初冒頓並有漠南,旋復北徙. : 외몽고(外蒙古) 객이객(客爾客) : 옛 북적(北狄) 땅이다. 당(唐)과 우(虞)때의 산융(山戎)이요, 하(夏) 때의 훈죽(獯鬻)이며, 주(周)때의 험윤(玁狁)이며, 진(秦)한(漢)때의 흉노(匈奴)다. 한(漢)초에 모돈(冒頓)이 나란히 막남(漠南)에 있다가, 다시 북쪽으로 되돌아갔다. 後漢仍為北匈奴地.元魏曰蠕蠕,後入突厥.唐初入回紇.貞觀四年來朝,以其地為瀚海·燕然·金微·幽陵·龜林·盧山六都督府,又置皋蘭·高闕·雞田·榆溪·雞鹿·蹛林·寘顏等七州,皆隸燕然都護府. : 후한(後漢)때는 거듭 북흉노 땅이었고, 원위(元魏)때는 연연(蠕蠕)이, 뒤에 돌궐(突厥)이 들어왔다. 당(唐)초에는 회흘(回紇)이 들어왔고, 정관(貞觀)4년 입조하니, 그 땅에 한해(瀚海)·연연(燕然)·금징(金徵)·유릉(幽陵)·구림(龜林)·노산(盧山)등의 6개 도독부를 두고, 또 고란(皐蘭)·고궐(高闕)·계전(雞田)·유계(楡溪)·계록(雞鹿)·전안(窴顔)등 7주(州)를 두고, 모두 연연도호부(燕然都護府)에 붙였다. 其後並有九姓諸部,盡得匈奴故地.五代至宋,回紇漸衰,與室韋嫗厥律諸部散居其地,羈屬於遼. : 그 뒤로 나란히 9성(姓)의 여러 부가 있었고, 흉노의 옛 땅을 얻었다. 오대(五代)에서 송(宋)에 이르기 까지, 회흘(回紇)은 점점 쇠퇴하고, 실위(室韋)와 구궐율(嫗闕律)의 여러 부(部)가 그 땅에 흩어져 살았는데, 요(遼)에 매어 있었다.》고 한다.
위에서 말하는 지역(地域)을 보면 : 중원(中原)서북방(西北方)으로부터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북방지대(北方地帶)를 일컫고 있다는 사실(事實)이다. 이는 곧 오량해(烏粱海)=올량합(兀良哈)은 객이객(客爾客)이고, 이들은 돌궐족(突厥族)이다.
‘반도조선(半島朝鮮)논자(論者)’들은, 이들을 가리켜 : 반도(半島) 땅 두만강(豆滿江)과 압록강(鴨綠江) 북(北)쪽의 건주위(建州衛)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고 허면서 조선왕조(朝鮮王朝)에 들어와서는 이들을 가리켜 야인(野人)이라 불렀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들은 반도조선(半島朝鮮)왕조(王朝)와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그림자도 비칠 수 없는, 저 먼 서북방(西北方) 지대에서 살던 자(者)들이다.
올량합(兀良哈)에 대한 조선사(朝鮮史) 기록(記錄)은, 손으로 세기에 벅찰 정도로 많이 기록(記錄)되어 있는데, 조선의 함경도(咸境道)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주로 있었다. 아래의 예문(例文) 몇 개를 보자. (제 2 편으로 계속(繼續)됩니다.)
2018년 03월 24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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