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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원상의 진리를 신앙하는 동시에 수행의 표본을 삼아서 일원상과 같이 원만 구족(圓滿具足)하고 지공 무사(至公無私)한 각자의 마음을 알자는 것이며, 또는 일원상과 같이 원만 구족하고 지공 무사한 각자의 마음을 양성하자는 것이며, 또는 일원상과 같이 원만 구족하고 지공 무사한 각자의 마음을 사용하자는 것이 곧 일원상의 수행이니라. |
<<1부>>
[‘일원상의 수행’ 의미]
오늘은 일원상의 수행을 공부하겠습니다.
제2 교의편(敎義編) ○ 제1장 일원상(一圓相)
* 수(修) : 닦을수(葺기울즙理), 옳게할수(正也), 꾸밀수(飾也), 다스릴수(理也), 엮을수(編纂) * 행(行) : 길행(道路), 행실행(身之所), 갈행(往也), 다닐행(步也), 쓸행(用也), 행서행(書體) * 수행 : 종교적인 절대적 인격을 이루기 위하여 성현의 가르침대로 실천 궁행(躬行)하는 것. 삼학 수행을 병진하는 것. 도덕적으로 완성된 인격을 이루기 위하여 행실을 닦아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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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원상의 수행’에서 ‘일원상의’라는 말은 ‘일원상 진리 자체의’ 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수행은 ‘일원상 진리 자체의 수행’이라는 뜻입니다.
‘수행’에서 ‘수(修)’는 흔히 ‘닦을 수’로 이해하지만, ‘때운다’, ‘메꾼다’, ‘옷의 헤진 부분을 기운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행(行)’은 몸으로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행에서 ‘수(修)’는 ‘지혜를 닦는 것’, ‘행’은 ‘복덕을 쌓는 것’이라 이해하기도 합니다. 신앙/수행을 구분하기도 하지만, 수행이라는 말 자체에 신앙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 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과 동시에 수행해야]
일원상의 진리를 신앙하는 동시에 수행의 표본(標本)을 삼아서 |
“일원상의 진리를 신앙하는 동시에 수행의 표본을 삼아서”라 하셨습니다. 일원상의 수행이라 하면, 수양/연구/취사만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신앙하는 동시에’가 전제로 있음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깨치지 못한 사람은 신앙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원불교의 신앙은 일원상의 신앙, 사은 신앙, 처처불상의 신앙, 인과에 대한 신앙, 스승에 대한 신앙이지요. 이러한 신앙을 하면서 수행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3절 일원상의 수행’ 앞에 ‘제2절 일원상의 신앙’이 먼저 나왔지요. 그 일원상의 신앙에 바탕해서 일원상의 수행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내가 좌선을 하더라도, 신앙과 동시에 수행하는 것과, 신앙을 빼고 수행하는 것은 표정부터 다릅니다. 신앙하는 동시에 수행하는 사람은 사은의 은혜를 생각하다보니 감사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수행하지요. 그래서 은은한 모나리자의 미소에 바탕한 수행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신앙을 빼고 수행을 하면, 그저 몰아붙이는 수행을 하다보니 찡그리면서 수행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배운 내용 잠깐 복습하겠습니다. 일원상의 신앙은 무엇입니까? 일원상의 진리를 신앙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일원상의 진리는 무엇입니까? ‘우주만유의 본원’이면서 ‘내 참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우주만유는 내 참 마음이 나타난 바입니다. 내 참 마음을 생각해보면 일원상의 진리를 알 수 있습니다.
내 참 마음에는 세 가지 속성이 있습니다. ①텅 비었다는 것입니다. ②빈 가운데 신령스럽게 아는 공적영지의 광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③진공묘유가 조화를 이루어 은현자재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저를 보고 ‘제원교무님이구나’라고 아는 그것이 마음인데, 그 마음은 ‘텅 비어서 훤히 아는 것’입니다. 이를 ‘진공묘유’라 부릅니다. ‘나’라는 실체가 있어서 ‘훤히 안다’고 잘못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들어 아는가 보았더니, 텅 비었지요. 하지만, 나라는 것은 사실 없는 것이고 빈 것입니다. 나라는 게 없이 훤히 아는 것이지요.
현대인들은 탐진치로 삽니다. 오늘날 세계에서는 탐진치가 강한 사람이 경쟁에서 앞서고, 그런 사람이 잘난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나’라는 게 늘 들어있지요. 부모로부터 몸 받은 것을 ‘나’라고 생각하거나, 무언가 ‘나’라는 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부처님들이나 성자들에게는 ‘나’가 없습니다. 임금 자리도 던져버립니다. 억울한 누명을 써도 ‘그런갑다’ 생각하고 말아버립니다. ‘나’라는 게 없으니까 누명을 써도 억울하지 않고 화가 나지 않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나는 없다’, ‘무아이다’, ‘오온이 개공이다’, ‘없으면서 있는 것이지 있으면서 있는 것이 아니다’를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안은 없는 것은 볼 수 없고, 우리가 육안으로 밖으로 나타난 대상만 보고 살기 때문에, 나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살다가 죽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저는 그게 제일 억울한 일 같습니다. 누군가 나를 배신하는 게 억울한 일이 아니에요. 진짜 무엇이 나인지도 모르고 살다가 죽는 것이 가장 억울한 일입니다. 자기가 무엇인줄도 모르면서 나를 위해 산다고 하는 사람들이 가장 바보같은 사람입니다. 일원상의 진리를 안다는 것은 내가 무엇인지를 안다는 것입니다.
[수행의 표본을 삼아서]
* 표(標) : 표할표(表), 나타낼표, 기록할표(記錄), 표(標)를할표, 적을표, 가지표, 표(標: 같은 종류의 다른 사물과 분간할 수 있도록 하는 그 사물만의 두드러진 특징). * 본(本) : 근본(根本), 뿌리본, 줄기본, 원래본(元來ㆍ原來), 근원(根源)본, 본원본(本源) 본성본(本性), 주(主)가되는본, 바탕본, 자기본(自己). 조상(祖上), 근거(根據)로 삼을 본. * 표본(標本, sample) : · 본보기가 되고 표준이 되는 것. 표준된 본보기. 체본(體本) · 본보기가 되는 물건. 학습에 쓰이는 실물 견본. · 하나를 가지고 같은 종류의 물건의 표준을 삼을만한 물건. · 다른 물건(物件)의 표준(標準)으로 보이는 주장(主將) · 본보기가 되거나 표준(標準)으로 삼을 만한 물건(物件) * 삼다 : 어떤 대상과 인연을 맺어 자기와 관계있는 사람으로 만들다. 무엇을 무엇이 되게 하거나 여기다. 무엇을 무엇으로 가정하다. |
‘수행의 표본을 삼아서’라 하셨습니다. ‘표본’의 의미를 ‘본보기가 되고 표준이 되는 것’이라 하긴 했는데, ‘표본’과 ‘표준’을 다르게 이해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표준은 소 자리만을 의미하고, 표본은 대 자리, 소 자리가 모두 포함된 의미로 이해하셔야합니다.
‘수행의 표준’을 삼는다면, 소 자리에서 어느 뛰어난 개인을 표준으로 삼아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나를 그 사람과 자꾸 비교하게 되고 나를 학대하게 되지요. 반면, ‘수행의 표본’을 삼는 것은 ‘누구는 좌선할 때 이렇게 했다더라, 누구는 저렇게 했다더라’하면서 개인을 하나의 본보기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삼다’라는 말은 인연을 맺는다는 말입니다. ‘며느리로 삼는다’는 말도 있지요. 붓글씨의 체본을 두는 것과 같습니다.
[일원상과 같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
일원상과 같이 원만 구족(圓滿具足)하고 지공 무사(至公無私)한 각자의 마음을 |
‘일원상과 같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을’이라 하셨습니다.
‘일원상과 같은’이라 하시지 않고 ‘일원상과 같이’라 표현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일원상과 같이’라는 말에는 동적인 의미가 있고, 점차적인 방법이라는 뉘앙스가 들어 있습니다. ‘일원상과 같은’은 정적인 의미로 ‘지금 내가 일원상과 똑같다’는 뉘앙스인데, 내 마음이 일원상과 같지 않을 때가 있잖아요.
[원만구족한 각자의 마음]
* 원(圓) : 둥글원(方之對), 원만할원(圓滿), 둘레원(周也), 온전원(全也), 돈원(貨幣單位) * 만(滿) : 가득할만(充也), 찰만, 넘칠만(盈謚) * 원만(圓滿)=마음행태(深大廣心)·내용(空). 막힘이 없는 것. * 구족(具足) 갖출구. 넉넉할족 : = 지혜 빈마음에 다 갖추어 있음, 온전히 갖추어 있음. 유와 무를 다 갖추고 있는 경지. * 원만구족 : 진리를 나타내는 말, 모자라거나 결함됨이 없이 모든 것을 두루 갖추었다는 뜻, 곧 일원상의 진리의 전체를 설명하는 말. 원만 구족한 일원상의 진리를 체받아 일상 생 활에 그대로 활용하는 불보살의 인격, 일원의 위력을 얻고 일원의 체상에 합한 경지. 육근동작에 법도가 맞다는 뜻. 본자구족(本自具足) |
‘원만구족’에 대해 보겠습니다.
‘원만(圓滿)’은 ‘원만할 원’, ‘가득할 만’입니다. 원만은 ‘텅 빈 충만’이라는 뜻입니다. ‘심대광심(心大廣心)(깊을 심, 클 대, 넓을 광, 마음 심)ㅡ 깊고 크고 넓은 마음’이라 풀기도 합니다. 이때 ‘깊다’는 얕다의 반대말이 아닙니다. 깊고 얕을 것도 없이 깊다는 뜻입니다. ‘크다’는 작다의 반대말이 아니라, 크다 작다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마음은 텅 비어서 툭 트인 것인데, 그 깊이가 깊다 얕다할 것이 어디 있겠고, 그 크기가 크다 작다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선거를 하면, 지역별, 세대별로 투표결과가 차이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역별, 세대별로 끌린 것이 있고, 걸리고 막힌 게 있기 때문입니다. 걸리고 막히는 것이 없는 것이 원만입니다. 지금 저를 보고 훤히 아는 이 마음은 걸리고 막힘이 없습니다.
‘구족(具足)’은 빈 마음에 다 갖추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마음은 심대광심이기 때문에, 텅 비어서 훤한 가운데 우주도 손바닥만 한 것이 되어 버리거든요. 우주만유 모든 것이 다 우리 마음이 만든 것입니다. 물질세계는 마음세계가 나타난 바입니다. 마음 안에 빠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일원상 진리 전체 덩어리는 원만구족입니다. 텅 비었고, 텅 비었기 때문에 꽉 차고 다 갖추어졌습니다. 원만구족을 자신의 마음에 대래 말하자면, ‘본자구족(本資具足)’이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저를 보고 ‘제원 교무님이구나’ 아는 이 마음은 텅 비어서 본래 다 갖추어져있습니다. 빠질 것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
* 지(至) : 지극할지(極也), 이를지(到也), 절기지(節氣冬至) * 공(公) : 공변할공(平分無私), 마을공(官所), 밝을공(明白), 공작공(五爵之首), 존칭할공(尊稱), 한가지공(共也), 벼슬공(官也), 아비공(父也), 시아버지공(婦謂舅) * 무(無) : 없을무(有之對), 소리무(音譯), 빌무(虛空), 아닐무(不也), 말무(勿也), 풀이름무. * 사(私) : 사사사(不公), 나사(己稱), 사정사, 간사사(自爲姦私) * 지공무사 : 지극히 공평하여 사사로움이 전혀 없음. 일원상 진리의 작용적 한 측면, 곧 일원상의 진리를 공·원·정으로 파악할 때의 정(正), 탐착을 끊으며 모든 일에 과불급이 없이 행동하는 것. 중용·중도. 멸사봉공(滅私奉公) |
‘지공무사’에 대해 보겠습니다. ‘지공’은 ‘지극히 공변되다’는 뜻입니다. 텅 비었기[空] 때문에 ‘공변될 공(公)’이 되고, ‘전체[全]’가 됩니다(빌 공 空=공변될 공 公=온전 전 全). 그래서 ‘무사’입니다. 여기서 ‘사’는 ‘아(我, 나 아)’입니다. 즉 ‘무사’는 ‘나라는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결국, ‘지공무사’는 ‘지극히 공변되어 나라는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지공무사는 우리 마음의 실체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제 목소리를 듣고 압니다. 보통 사람들은 ‘나라는 것, 식이라는 것이 있어서 듣고 안다’고 오해합니다. ‘유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는 게 있으면 찾아보십시오. 찾으려니, 없지요. 보고 듣고 훤히 아는 이것은 ‘없이 있는 것’입니다. 이를 ‘공적영지’라 표현합니다. 신령스럽게 알지만, 공적하다는 뜻입니다. 공적을 떠나지 않은 영지인 것입니다. ‘진공묘유’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훤히 있는데, 텅 비어서 있다는 것이지요.
‘나라는 것’이 있으면 ‘너’가 있겠지요. 상대의 세계입니다. 반면, ‘나’가 없으면, ‘너’도 없습니다. 이것이 절대의 세계입니다. 본래 ‘나’는 절대자입니다. ‘너’와 ‘나’의 상대의 세계에서 ‘나’가 아닙니다. 주관인 나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객관도 없습니다.
가정에서 지공무사한 분은 어머니들인데요. 어머니가 가장 헌신적으로 자녀들을 대하시죠. 맛있는 걸 봐도 자기는 맛없다고 하면서. 자식들을 먹이지요. 그러나 그러한 어머니들도 집밖을 나서면, 지공무사가 안 되는 경우가 많지요. ‘나라는 게 있다’는 생각, ‘유아’라는 생각으로 살면, 상대의 세계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육안은 상대의 세계를 보고 살기 때문에, ‘절대의 나’로 살기보다는 ‘상대의 나’로 살기 쉽지요. 상대의 세계가 분명히 있기는 하지만, 없이 있거든요. 지공무사가 진리이므로, 작업취사를 할 때 지공무사로 작업취사해야하는 것입니다.
신심을 내고 서원을 세우는 것은 공(公)을 위해 살겠다는 것입니다. 공을 위한 믿음을 내는 것이 신심이고, 공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서원입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사를 위해 살겠다는 사람은 신심이 없는 사람이고 서원이 아니라 욕심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이지요. 그런 사람은 ‘소아주의’ㅡ‘작은 나로 살겠다’는 사람입니다.
대아로 사는 것이 쉽지는 않지요. 생각만으로는 절대 안 됩니다. 수양이 있어야 합니다. 빈 자리, 한 생각 이전자리, 돈공한 자리에 수양을 통해 들어가보지 않은 사람은 결국 속게 되어 있거든요. 수양을 통해 ‘무아의 세계에 합일하겠다’, ‘참 나의 세계에서 떠나지 않고 살아보겠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무아의 세계는 원만구족이어서, 걸리고 막힘이 없는 세계입니다. 수행을 통해 그 자리에 가면, 알고자 하는 것들이 그냥 알아지고, 얻고자 하는 것을 그냥 얻게 됩니다. 쫓아가면 모르는데 놓아버리면 알게 되는 이치가 있고, 잡으려 하면면 도망가는데 놓아버리면 얻게 되는 이치가 있습니다.
· 선공후사(先公後私) : 공(公)을 우선으로 하고 사(私)를 뒤로 한다는 것. 선당후사(先黨後私) · 선사후공(先私後公) : 사(私)를 우선으로 하고 공(公)을 뒤로 한다는 것. · 빙공영사(憑公營私) : 관청의 일이나 혹은 공적(公的)인 일을 빙자하여 개인의 이익을 꾀함. |
보통 사람들은 지공무사뿐만 아니라, 선공후사로 살기도 어렵습니다. 참 나를 모르는 사람은 욕심의 세계에 걸려서 대체로 선사후공 또는 빙공영사로 살지요. 권력을 잡으려고 각종 선거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 선공후사로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권력이든, 명예든, 재산이든 화무십일홍인데요.
우리가 살면서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가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 즉 ‘참 나’를 아는 것입니다. 이걸 모르고 살면, 가짜의 나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일생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실상 남의 다리만 긁다가 죽는 격입니다. 얼마나 원통한가요.
진짜 내가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으신가요? 부모로부터 받은 이 몸이 나인지, 죽으면 나는 없어지는 것인지, 영혼이라는 것이 있는 것인지, 꿈도 없이 잠잘 때 나는 어디 갔는지 ㅡ 어떤 것이 나인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어린아이입니다. 나라는 존재를 모르면, 이 회상에 들어와서도 언젠가는 사라지게 됩니다.
<<2부>>
[알자, 양성하자, 사용하자]
이제, 일원상과 같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을 ‘알자’, ‘양성하자’, ‘사용하자’는 것을 차례로 보겠습니다.
일원상과 같이 원만 구족(圓滿具足)하고 지공 무사(至公無私)한 각자의 마음을 알자는 것이며, |
또는, 일원상과 같이 원만 구족(圓滿具足)하고 지공 무사(至公無私)한 각자의 마음을 양성(養性)하자는 것이며, |
또는, 일원상과 같이 원만 구족(圓滿具足)하고 지공 무사(至公無私)한 각자의 마음을 사용하자는 것이 |
곧 일원상의 수행이니라 |
‘알자’가 ‘양성하자’보다 먼저 나온 이유가 무엇일까요? 알아야지만, 양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집을 지을 때 설계도를 모르고 집을 지으려 하면 건축비만 더 들고 고생만 하잖아요. 이와 마찬가지로, 마음의 원리를 모르고 수행을 하는 것은 오렴수(汚染修, 더러움으로 더러움을 닦는 수행)이어서, 오히려 곤란해질 수도 있습니다. 이 마음을 모르고 수행하면,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습니다.
멀리서 찾을 게 없습니다. 내 마음이 원만구족 지공무사입니다. 이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하기의 중요성]
정견(正見), 정사(正思) ex) 1583년 - 이이의 〈10만 양병설〉- 남왜 북호의 침입대처를 위해 1591년 봄 일본에서 돌아와 상사-황윤길(서인) : "머지않아 전쟁이 일어날 것" 부사 김성일 : “신은 그렇게 느끼지 못했나이다. 황윤길이 공연히 인심을 현혹시키고 있사옵니다.” 서애 유성룡 : “그대 의견이 상사와 전혀 다르니 만일 전쟁이 일어나면 어쩌려고 그러오?” 부사 김성일 : “저 역시 일본이 절대 쳐들어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황윤길의 말이 너무 강경해서 잘못하면 나라안 인심이 동요될까봐 일부러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1592년4월~1598년 (임진왜란) : 20만 일본대군. 20일 만에 한양점령, 평양성까지. |
임진왜란 때 일을 적어놓았습니다. 율곡 이이 선생이 영통하신 분입니다. 남쪽에서 왜구가, 북쪽에서 오랑캐가 쳐들어올 것 같으니, 십만 군사를 미리 양성하자고 주장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이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이이는 산야로 들어가 버립니다. 견성을 한 사람이 말을 해도 사람들이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찌할 수 없는 일이지요.
조선이 1591년경 일본으로 사신을 보냈습니다. 일본이 ‘명을 치러 갈 것인데, 길을 터달라’는 말을 계속 했거든요. 상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이 일본의 상황을 보러 다녀왔습니다. 황윤길은 일본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눈치챘지요. 황윤길이 선조에게 머지않아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 말했습니다. 그런데 부사 김성일은 “신은 그렇게 느끼지 못했나이다. 황윤길이 공연히 인심을 현혹시키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좌의정 유성룡이 나중에 조용히 김성일에게 물었습니다. “그대 의견이 상사와 전혀 다르니 만일 전쟁이 일어나면 어쩌려고 그러오?”. 부사 김성일이 말하길 “저 역시 일본이 절대 쳐들어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황윤길의 말이 너무 강경해서 잘못하면 나라 안 인심이 동요될까봐 일부러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황윤길은 서인이고, 김성일은 동인이었는데, 당시 정권은 동인이 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김성일의 말이 받아들여졌지요. 결국 그 다음 해 일본이 쳐들어와서 임진왜란이 일어났습니다.
1760~1830년. 영국 1차 산업혁명 1866년. 흥선대원군-쇄국정책 1868년. 일본 명치유신 1894년. 동학 농민 운동 1910년. 한일합방 |
다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영국에서는 1760~1830년경 제1차 산업혁명이 있었습니다. 일본은 1868년 명치유신으로 개화했습니다. 이때, 흥선대원군은 1866년 쇄국정책을 했고, 결국 조선이1910년 한일합방으로 멸망하지요.
제대로 아는 것[정견], 제대로 생각하는 것[정사]가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싶어서 몇 가지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 판단 하나 잘못하면 나라도 망하고, 회사도 망하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심대광심의 마음으로 세계를 바라보지 못하고, 좁은 마음으로, 편착된 마음으로, 가리고 끌린 마음으로 세계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나라가 망한 것입니다.
정견, 정사를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일에 대해서는 알아나가야 하고, 이치에 대해서는 비워나가야 합니다. 과학은 쌓는 것이고, 도학은 비우는 것이거든요. 과학으로 쌓을 줄만 알고, 도학으로 비울 줄 모르면, 전쟁만 일어나게 됩니다.
[수양과 일심]
문 “바둑을 두고 앉아 있으면 마음이 온전해서 저절로 일심이 되는데 이것은 수양 아닙니까?” 정산종사 답: “그것은 사심을 갖고 있는 것만 못하다” |
어느 사람이 “바둑을 두고 앉아 있으면 마음이 온전해서 저절로 일심이 되는데 이것은 수양 아닙니까?”라고 묻자, 정산종사님께서 “그것은 사심을 갖고 있는 것만 못하다” 대답하셨습니다. 바둑 20년 둔다고 해서 도를 깨치는 게 아니거든요. 차라리, 사심을 가진 사람은 ‘내가 잘못하고 있구나’ 참회하는 마음이라도 가질 수 있지만, 바둑에 빠진 사람은 그러지 않으니까요.
수양은 본래 참 마음 자리를 그대로 지키는 것입니다. 분별로 분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분별을 넘어선 무분별 자리에 합일하는 것이 수양입니다. ‘일심’이 곧 ‘수양’인 것이 아닙니다. 일념미생전 자리, 돈공한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 수양입니다.
[공/원/정의 공부표준]
일원상의 속성을 ‘공/원/정’이라 표현합니다.
일원상과 같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음을 ‘알자’는 것에서, ‘알자’는 ‘견성’을 의미하는데요. 그 견성에서, ‘공’에 대한 아는 것이 있고, ‘원’에 대해 아는 것, ‘정’에 대해 아는 것이 있습니다.
각자의 마음을 ‘양성하자’는 것에서도, ‘공’에 대한 양성, ‘원’에 대한 양성, ‘정’에 대한 양성이 있습니다.
각자의 마음을 ‘사용하자’는 것은 ‘솔성’인데, 여기서도 ‘공’에 대한 솔성, ‘원’에 대한 솔성, ‘정’에 대한 솔성이 있습니다.
하나씩 보겠습니다.
(1) 견성에 있어 공/원/정
①견성에서 공 자리 : 일원의 진리가 철저하여 언어의 도가 끊어지고 심행처가 없는 자리를 아는 것이 공 자리를 견성하는 것입니다.
②견성에서 원 자리 : 견성을 해서 원 자리에 들어가면 지량이 광대해서 막힘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대종사님이 김남천, 송적벽 선진님이 싸울 것을 미리 알았던 일화가 있지요(대종경 실시품 3장).
③견성에서 정 자리 : 견성의 정 자리는 아는 것이 적실하여 모든 사물을 바르게 보고 바르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임진왜란 일화에서, 율곡 이이는 조선이 어떻게 될 줄을 알고 바르게 판단했지만, 선조는 그러지 못했지요. 세계가 어떻게 바뀔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가 원불교 청소년 교화를 강조하고 있는데요. ‘원불교가 10년 뒤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20년 뒤, 30년 뒤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원불교의 미래는 어떻게 되겠는가’ 생각하자니, 청소년 교화를 아니할 수 없어서입니다.
(2) 양성에 있어 공/원/정
①양성에서 공 자리 : 양성에서 공 자리는 유무초월한 자리를 관하는 것입니다. 이 자리는 생각을 넘어선 자리입니다. 이 자리는 안으로 향할 때 관할 수 있습니다. 좌선을 할 때, 눈을 확 뜨지도 말고 확 감지도 말고, 반만 뜨고 반만 감으라고 하는데요. 눈을 확 감으면 어두워지고, 눈을 확 뜨면 밖에 마음을 뺏기기 때문입니다.
②양성에서 원 자리 : 양성에서 원 자리는 마음에 거래가 없는 것입니다. 심무거래(心無去來)입니다. ‘이것’이라는 게 있어야 거래가 있을텐데, ‘이것’이라는 게 없으니까요. 의두요목 1조(“세존이 도솔천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이미 왕궁가에 내리시며 모태 중에서 중생 제도하기를 마치셨다 하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가 마음은 거래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③양성에서 정 자리 : 양성에서 정 자리는 마음이 기울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사에 끌리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참 마음을 여의지 않는 자리입니다. 참 지혜가 밝아지는 과정은 수양을 통해 양성 자리에 갔을 때 그 안에서 노곤노곤 익는 것입니다. 머리가 좋고 나쁘고, 학벌이 좋고 나쁜 것과 관계 없습니다. 수양은 머리로 하는 게 아니잖아요. 무분별한 자리에 가면 지혜가 솟아오르거든요. 원불교 교도들은 ‘수양은 안 빼놓고 하겠다’라는 마음을 정하면 좋겠습니다. 수양을 안 하게 되는 사람은 먼저 환경을 만드세요. 교당 가까이 사신다거나, 수양을 함께 할 동지를 만드세요.
(3)솔성에 있어 공/원/정
①솔성에서 공 자리 : 솔성에서 공 자리는 무념행입니다.
②솔성에서 원 자리 : 솔성에서 원 자리는 무착행입니다. 본래 마음은 걸림이 없고 막힘이 없거든요.
③솔성에서 정 자리 : 솔성에서 정 자리는 중도행입니다. 중도행은 때를 잘 맞추는 것입니다. ‘시중’이라 하지요.
아래 자료로 정리했습니다. 정성들여서 만든 자료니, 꼭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 공(空) · 원(圓) · 정(正)의 공부표준 ❂ - 대종경 교의품7장(97p) | |||
| 공(空) 텅비어 고요한 마음 | 원(圓) 밝고 두렷하 마음 | 정(正) 부드럽고 바른 마음 |
養 性
廻光 返照 | 유무초월한 자리를 관하는 것 觀有無超越 | 마음의 거래 없는 것(의두1조-모태) 心無去來, 空去來 公去來 | 마음이 기울어지지 않는것 心不偏倚 |
住 一念未生前處 유도 아니요 무도 아닌 그 자리에 마음을 두는 것 | 一定心 外無生滅心 책임을 원만하고 충실하게 이행하되 무관사에 부동 | 一直心 而無偏着 사사에 흐르지 않는 마음이요, 선악염정·동정간 치우침이 없는 마음 | |
圓寂無別한 眞境 | 惺惺寂寂 무위자연의 본래면목 | 一心行 正義行 不離自性 | |
見 性 | 일원의 진리가 철저하여 언어의 도가 끊어지고 심행처가 없는 자리를 아는 것 /頓悟空寂, (의두10조-꿈) | 지량(知量)이 광대하여 막힘이 없는것 /知量無邊 사통오달 | 아는것이 적실하여 모든 사물을 바르게 보고 바르게 판단하는 것 /正見事物 |
点頭自悟一念未生前處 천지미분전소식과 일념미생전 소식을 自悟 | 無碍大小有無 是非利害 심성과 우주의 대소유무 육근작용과 世事의 시비이해 | 正見 因果의 變化 사물의 先後本末 是非曲直을 정확히 판단하는 것 | |
大자리를 아는것 진공의 소식을 아는 것 | 小자리를 아는것(知恩) 묘유의 진리를 보는것 | 시비이해를 적실히 알고 판단하는 것 | |
率 性 | 모든 일에 무념행을 하는 것 每事無念行 | 모든 일에 무착행을 하는 것 每事無着行 | 모든 일에 중도행을 하는 것 每事中道行 |
자성불괴(不壞) | 자성불매(不昧) | 자성불염(不染) | |
心不念着 應用無念 육식이 육진 중에 출입하되 섞이지도 않고 물들지도 않으며 정신·육신·물질로 보시한 뒤 관념과 상이 없는것.무아봉공 | 無執着 無固執 의식주나 모든 사물에 집착하지 않고 자기 의견이나 사상을 고집하지 않는 마음 원근친소에 치우치지 않는 것 | 圓滿行이요 時中行, 德風 때와 곳과 힘에 맞고 도(진리)에 어긋남이 없는 행 無過不及, 有念공부 참회대조, 報恩佛供 | |
應用無念, 爲法忘軀 爲公忘私 | 無有定法 | 應無所住 而生其心 | |
| 觀空 · 養空 · 行空 | 觀圓 · 養圓 · 行圓 | 觀正 · 養正 · 行正 |
원 리 | 일원의 진리를 요약 = 공.원.정 공.원.정 =3학(수양 ·연구 ·취사) 양성 중 3학 · 견성 중 3학 · 솔성 중 3학 = 3학 병진의 근거 공―――양성―――정신수양―――영통 원―――견성―――사리연구―――도통 정―――솔성―――작업취사―――법통―――대원정각(삼대력) |
[대/소/유무]
대소유무에 관한 표는 지난 시간에 드렸습니다. 헷갈리는 내용만 다시 보겠습니다.
대(大) | 소(小) | 유무(有無) | ||
진공 = 언어도단의 입정처 | 묘유의 상모(相貌) | 유무초월의 생사문 | 묘유의 조화 = 인과의 변화 | |
전체신앙의 근거 허공법계를 통하여 법신불게 드리는 진리불공 | 사실신앙의 근거
당처에 드리는 실지불공 | 인과신앙의 근거
이치에 맞는 합리적 불공 |
공(대 자리)는 진공입니다. 원(소 자리)과 정(유무 자리)을 합해서 묘유라 합니다. 묘유 중 상모는 원(소 자리)이고, 묘유의 조화는 정(유무 자리)입니다.
일원상의 수행에서 ‘신앙하는 동시에’라 하셨지요. 대 자리에서 전체신앙이 나오고, 진리불공이 나옵니다. 소 자리에서 사실신앙이 나오고, 당처에 드리는 실지불공이 나옵니다. 유무자리에서 인과신앙이 나오고, 인과 이치에 맞게 합리적 불공을 해야한다는 것이 나옵니다.
대(大) | 소(小) | 유무(有無) |
무소부재(無所不在) | 전지(全知) | 전능(全能) |
기독교 교리도 원불교 신앙과 다르지 않습니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이 무소부재하시다는 말은 대 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는 말은 소 자리, 유무 자리를 의미합니다.
[과거의 그릇된 수행, 원불교 수행]
과거의 그릇된 수행과 원불교 수행 특징을 적어놓았으니 꼭 참고하십시오.
* 과거의 그릇된 수행
1. 삼학 편수(編修) : 기형적 조각도인을 만들게 되고, 편협한 인격이 이루어지게 되며, 종파가 형성되기 쉽다. ① 수양에 치우치면 : 성격이 게을러지고 사물에 어두워지기 쉽고, 단전배만 나오는 도인이 된다. ② 연구에 치우치면 : 경솔해지고, 공리공론만 일삼기 쉬우며, 머리만 크는 도인이 된다. ③ 취사에 취우치면 : 계율에 얽매이고, 옹졸해지기 쉬우며, 다리만 크는 도인이 된다. ex) 선종, 교종, 율종의 종파가 형성되어 파벌과 분쟁이 생기기 쉽고, 계시종교, 이론종교, 실천종교로 분열되기 쉽다. 2. 영혼 구제에 치중 : 죽는 공부에 치우치고, 사는 공부를 등한히 하여 내세주의 신비주의에 떨어질 염려가 있다. 3. 이치 공부에 치중 : 현실을 무시하기 쉽고 이상주의에 흘러 공리공론을 일삼기 쉽다.-이판승 4. 사물에 치중 : 현실에 파묻혀 허덕이기 쉽고 이상을 무시하고 현실주의에 흘러 배금주의화 할 염려가 많다. 5. 정(靜)에 치중 : 정시공부에 치우쳐 둔세주의, 탈세속주의화 하여 세상에 무용지물이 되기 쉽고, 독선에 빠질 염려가 많다. 6. 동(動)에 치중 : 동시공부에 치우쳐 세속주의화 하여 자행자지하는 데 떨어지기 쉽고, 자칫하면 세상을 욕되게 하는 인물이 될 염려가 많다. |
* 원불교 수행의 특징
1. 사실적 도덕의 훈련이다 (정기훈련, 상시훈련) 2. 신앙과 수행을 함께 밝혔다 3. 진공묘유의 수행(일원상의 진리 그대로의 수행) ① 삼학병진의 원만한 수행 - 온전한 인격, 종파관념이 없고, 분열이 예방, 무시무처선 ② 이사병행의 원만한 수행 - 공부하는 사업인, 일하는 공부인 ③ 영육쌍전의 원만한 수행 - 수도와 생활, 현세와 미래를 병진 ④ 동정일여의 원만한 수행 - 유용한 인물, 세계를 향도할 수 있는 실력있는 인격인 |
진리는 심외무불(心外無佛)이니, 심외멱불(心外覓佛) 하지마라. 신묘하기로 하면 : 이루 헤아릴 수 없이 기기묘묘하여 무량 무궁한 것이요, 쉽기로 말하면 : 말이나 생각이나 동작이나 형상을 떠나서 따로 있는 것이 아니요, 간명하기로 하면 : 시와 종이 분명하고 본과 말이 분명하며 능히 놓고 잡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쉬운데서 가까운데서 마음에서 찾아 실생활에 활용해야 산 진리가 된다.
원만한 진리에 근거하지 못한 신앙은 : 우상이나 개체신앙에 떨어지기 쉽고, 실천과 각증(覺證)이 없는 신앙은 : 미신이나 맹신이 되기 쉽다.
진리에 근거하지 못한 수행은 : 참 수행이 될 수 없고, 수행할 수 없는 원리나 이론은 : 공리공론에 불과하다. |
심외무불은 마음 밖에 부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심외멱불 ㅡ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는 것을 하지 마십시오.
오늘 조금 어려우셨을 텐데요, 앞으로 계속 반복해서 설명드릴 테니 이해가 안 된다고 할지라도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계속 참석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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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완벽하게 초고를 보내주신 김지원,배성해교도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