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신] 인간시장(7권) 74. 쥔 자의 횡포

[물 안 개]

쥔 자의 횡포 "다혜가 온댄다." 새벽 등산을 끝내고 들어서자 은주 누나가 이렇게 말했다. 침착한 어조였지만 나는 직감으로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늙은이 희롱하면 안 돼." "너 산에 가고 나서 바로 전화 왔었다. 몸이 나빠져서 이번 학기를 쉬기로 했대. 너만 살판 났구나." "공갈 치지 마." "얘는 내 말이라면 도대체 믿질 않으니 원." 믿어지지 않았다. 넉넉하지 못한 유학생이 국제전화를 걸어 귀국하겠다는 뜻을 밝힐 리 없었다. 프랑스에 가 있는 않았다. 내가 납치되었다가 풀려났을 때 궁금해서 내 목소리를 확인하고 바로 끊은 것 뿐이었다. 지난 학기부터 건강이 썩 좋지 않다는 사연을 보내왔지만 공부를 중단하고 귀국한다는 얘기를 국제전화로 알릴 것 같지는 않았다. "언제 온다는 거야?" "휴학계를 제출해서 허가를 막 받았대. 정리하고 그러면 열흘쯤 걸릴 거라더라. 자세한 건 편지 한댔어. 몇 마디 못하고 끊겼다. 얼마나 좋으면 새벽인 줄 빤히 알면서 너한테 먼저 전화를 했겠니?" "지금 질투하는 거야?" "쬐끔." 은주 누나는 그렇게 말하고 환하게 웃었다. 어떤 때는 문득문득 은주 누나가 나보다 나이가 어린 여인이었기를 바란 적도 있었다. "다른 말은 없었어?" "동전 넣고 하는 전화였나 봐. 그 말밖에 안 했어. 너 오늘부터 밥맛이 나겠다." 은주 누나도 내가 얼마나 다혜를 좋아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은주 누나의 마음 속에는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조금은 차가운 냄새를 풍기는 다혜보다 상냥하고 고분고분한 미나 쪽에 더 관심을 가졌다는 걸 알고 있었다. 몇 번이나 미나 쪽에 마음이 쏠린다는 얘기를 했었다. "이제 그런 때는 지났어." "내가 무슨 말을 해도 화 안 내지?" 은주 누나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무슨 일 있었구나. 그렇지?" 전화를 해 봐라." "그럼 무슨 소리 하려고 그래? 괜히 전화 요금 많이 나온다고 투덜거리면서." 내가 가끔 다혜한테 전화를 거느라고 전화 요금이 많이 나오면 요금 때문이 아니라 다혜를 조금쯤 싫어하는 마음에서 차라리 프랑스로 유학을 가는게 어떠냐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우리 가게 일 돕는 것도 한계가 있잖니. 취직은 죽어도 싫어하고. 사업을 해 보라고 해도 두 다리를 뻗고. 젊은 사람이 무엇이든 해얄 거 아니냐. 남들은 군대 가서 시간 빼앗겼지만 너는 그 시간에 아무 일도 안 한 꼴이잖아. 사업을 한다면 은행에 묶어두느니 나랑 동업하면 되잖니. 넌 무엇을 하든 성공할 수 있어." "그게 네 재산 아니니?" "아직은 일러. 조금 더 기다려 보겠어." "나도 억지로 해 보란 얘긴 아냐. 어차피 난 여유가 있고 너는 뭔가를 해야 될 사람이니까 하는 소리야. 아직 사업하기 이르다면 차라리 그 시간을 좀 벌어라." "나는 지금 노는 게 버는 거야. 이 궁리 저 궁리 안 하는게 아니잖아. 조금만 기다려 봐. 멋드러지게 사업을 벌일 테니까. 좀스런 녀석들처럼 제 배만 불러 나가려고 남의 가슴 도려내 가며 하는 짓 않고는 멋지게 벌 테니까." "그러니까 우선 공부를 좀 해 둬라. 다혜는 외국에서 학위를 받는 판인데...... 너는 이러고 있을 거니? 난 그런 게 싫어. 다혜가 석사되면 넌 박사가 돼야지." 공부하기 틀린 놈야. 공부하려면 진작에 했지. 대학교엘 간신히 들어가서 겨우 졸업한 놈더러 또 공부를 하라니...... 진짜 공부할 놈이나 하는 거야. 나 같은 놈은 대학 졸업장만도 황송해. 다혜가 박사 아니라 박사 할애비가 돼도 기죽지 않을 테니까 염려 마." 은주 누나가 걱정해 주는 뜻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친동생보다 더 아끼는 내가 다혜의 외국 유학 때문에 기죽게 될까봐 걱정하는 것이었다. 흔히 여자네가 학벌이 높거나 경제력이 월등할 때 기가 승한 여자 주장을 은주 누나도 걱정하는 것이었다. 누나가 다혜보다 미나를 아하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래도 그런 게 아니다. 네가 아무리 게 아니다. 결혼하기 전에야 사랑하고 좋아하고 그러니까 모르지만 일단 결혼하고 나면 변하는 거란다. 결국은 사람사는 일이란 그런 거란다. 등록금은 걱정 마라. 아무려면 내가 네 학비 대 주고 낯세우려고 하겠니. 네 말마따나 법률 공부가 지겨우면 다른 걸 해 봐라. 네 적성에 맞지도 않는 걸 공부하라고 하진 않을 테니까. 경영대학원이나 행정대학원 같은 데는 어떠니?" "그것도 아직은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더 생각해 보고 결심이 서면 얘길 할께. 난 도대체 적성에 맞는 게 없어. 산 속에 들어가 무초 스님 밑에서 공부를 하거나 화판을 둘러메고 다니며 그림이나 그렸으면 좋겠어." "좋은 선생님 만나서 공부나 하렴. 정말 네가 한다면 비용 걱정은 말고." "내 걱정 그만하고 누나 걱정이나 해. 더 나이 들기 전에 시집이나 가란 말야." "난 이제 틀렸어. 배고프지 않으니까 그러는 건 아니다. 이렁저렁 살다가 좋은 일이나 하고 내 새끼들한테 애비 없어도 에미 구실이나 제대로 했다는 소리나 들을란다. 저애들을 어떻게 하고 시집을 가겠니?" "애들이야 친정에 맡겨도 되잖아. 누나 인생은 누나가 찾아야지." "너두 당분간은 내 걱정 마라." "그럼 말야. 시집은 안 가도 좋으니까 괜찮은 남자하고 연애라도 해 보지 그래?" "너 말고 괜찮은 남자가 어디 있니?" "농담도 못하니?" 은주 누나는 혼자 사는 여자치고 명랑한 편이었다. 어떤 때는 농담도 나보다 한 술 더 뜨는 경우가 있었다. 가게 일도 억척스럽게 매달렸고 이것저것 취미생활도 다양하게 했다. 자신의 외로움을 그렇게 다스리는 것 같았다. 화장실에 가려고 신문지를 들고 일어서자 은주 누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신문 보니까 가엾은 사람 있더라. 내가 도와 줬으면 좋겠는데......" "뭔데 그래?" "읽어 봐라. 세상에 그런 사람도 있더라." 나는 은주 누나가 얘기한 기사를 찾아보려고 뒤적거렸다. 그런 기사는 쉽게 감추지 못했다. 광화문 네거리 지하도 일대에서 유골을 메고 시위하는 가엾은 사연이 담겨져 있었다. 신문에 난 기사대로라면, 얼마나 통탄할 일이면 몇년 전에 교통사고를 당해 죽은 남편의 유골을 묻지 않은 채 메고 다니며 호소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 다른 신문도 좀 줘 봐." 은주 누나는 내가 흥분했으리라는 걸 짐작한 듯 신문지를 던져 주었다. 두 개의 조간 신문의 내용은 거의 비슷했다. 유골이 든 라면상자를 등에 지고 광화문 지하도에 나선 사람들은 몇 년 전에 교통사고를 당해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가족이며 괜찮은 고급 아파트에 사는 어떤 기업체의 사장이 직접 몰던 고급 승용차에 치었는데도보상금을 한푼도 주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두 개의 조간신문을 찢어 뒷주머니에 넣었다.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사고를 저지르고도 뻔뻔스러운 박 사장의 주소를 알아내리란 결심을 했다. 그래서 얼굴 두꺼운 박 사장의 얼굴을 얇게 만들어 놓고 싶었다. 아무리 호소해도 통하지 않았다는 유가족의 증언은 결국 사건 당시의 경찰관이나 법관이 돈 있는 사장 편을 들었거나 얼마간의 촌지를 챙겼으리란 가정도 할 수 있었다. 요새 세상이 돈 가지고 안 되는 게 없는 세상이라지만 이건 아무래도 지나치다는 생각이 가시지 않았다. 내가 듣고 보아 온 세상살이에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들이 가진 자와 쥔 자에게 얼마나 당하는지를 알기 편하지 않을 것 같았다. 가진 자와 쥔 자가 편리한 세상. 그건 용서할 수 없는 일인데도 아직까지 그런 것이 통용되고 있다. 나는 원철이가 한 말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여러 해 동안 외국으로만 돈벌이를 하느라 쏘다닌 녀석이 나와 오랜만에 해후를 하면서 무슨 얘기 끝에 한 말이었다. 독일에 있을 때였지. 서류를 넣는데 아무래도 찝찝해서 에따 밑져야 본전이니까 하고 서류를 내밀면서 봉투에다 돈을 넣어서 같이 디밀었지. 공무원 녀석이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사방을 둘레둘레 훑어보더니 재빨리 서랍 속에 넣더라 이거야. 속으로 에라 독일놈들도 별수 없구나. 돈 싫다는 놈이 가슴 주욱 펴고 기다렸지. 십여 분쯤 있으니까 독일 녀석이 나오더니 나를 부르잖아. 내가 내민 서류에 사인을 딱 해 들고 서서 빙긋이 웃더라. 녀석이 나를 화장실로 데리고 가기에 이 녀석이 잘 봐 줬으니까 돈을 더 달라고 이러나 부다 싶더라. 까짓거 더 주지 뭐. 독일놈도 돈 앞에서는 별수 없구나 하는 걸 배웠으니 그 값을 한 셈이다 싶었지. 그 녀석이 화장실 안으로 데리고 가더니 내가 줬던 봉투를 내밀면서 이렇게 말하더라. "우리나라에선 정당한 일이면 거지가 와도 해 주고 부당한 일이면 대통령이 와도 안해 줍니다. 내가 이 돈을 받아 넣은 것은 그 자리에서 되돌려 주면 당신이 창피해 그러더니 휑하니 가 버렸다. 나는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내가 우리나라에 있을 때 봉투 내밀고 슥삭슥삭 해치우던 걸 생각하니 한심한 생각이 들고 내 서류에 대한민국 사람이란게 씌여 있으니 나라 망신 시켰다는 생각도 들고...... 그런데 여기 와서 사업좀 해 보려고 뛰어다니니까 별수 없이 그 짓을 않고는 안 되겠더라 이거다. 겉으로는 청렴결백하고 국민의 심부름꾼이지만 속으로야 그게 아니더란 말이다. 그러니 나도 살겠다고 나선 놈이니 어쩌겠니? 어떤 회사의 사보를 보니까 미국 친구가 쓴 글에 이런 내용의 얘기가 있더라. 한국에서 여러 해를 살면서 터득한 것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운전하면서 않고 설령 세웠더라도 일부러 한국말을 모르는 척하면 그냥 보내 주기 때문에 미국인들은 모였을 때 한국 경찰 속여먹은 얘기를 자랑으로 떠들고 길을 달릴 때 마음 놓고 자기들 마음대로 달릴 수 있어서 미국보다 한국이 살기 편하다고 실토한 내용이었다. 내 좁은 소견이다만 차라리 봐 주려면 먹고 살기에 허덕이는 우리나라 사람 봐주어야지 않겠니? 법규를 위반하면 미국 놈이든 높은 놈이든 가리지 말아야 하지 않겠니? 그런 식으로 하자면 법을 서민만 지키라는 얘기밖에 더 되느냐 이거다. 나는 원철이의 말에 동감이었다. 물론 누구나 동감을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아침밥을 먹고 신문사에 전화를 걸었지만 그 기사를 쓴 기자가 자리에 없다며 가해자인 박 사장네 주소나 전화번호를 알려 주지 않았다. 몇 번이나 이 신문사와 저 신문사를 번갈아가며 전화질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답답한 마음이었지만 신문사에서 알려 주지 않으려는 의도라는 걸 안 이상 더 이상 조를 수도 없었다. 나는 몇 군데 전화를 걸어 유골을 메고 다니는 사람이 나타나면 알려 달라고 부탁을 해 두었다. "광화문 지하도에서 그랬으면 이번엔 사람이 더 많이 모이는 곳에 나타나지 않을까요?" "그래. 한번 알아봐라. 서울역이나 "저도 읽었는데 정말 화가 치밀더군요. 없는 놈이면 없어서나 그렇다고 하죠.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놈이 그 돈 아까워서 그랬으니 말이죠." "보도대로라면 그렇게 되도록 봐 준 공무원 놈들이 더 괘씸한 거다. 얼마를 처먹었는지 모르지만 괘씸해서 견딜 수가 없다. 그리고 몇년 전 사건인데 이제사 그런 사연이 보도가 된다니 알 수가 없다." "아무튼 찾아보겠습니다." 애들에게 신신당부를 했지만 석간신문에 또 보도된 걸 읽고 신문사마다 전화를 걸었다. 석간신문을 발행하는 신문사에서도 마찬가지의 반응이었다. 석간신문에는 사진까지 실려 있었고, 담당 경찰관이 공문서를 허위로 조작해서 있었다. 피해자 유족의 주소가 시골이어서 당장 뛰어 내려 갈 수도 없었다. 은주 누나네 가게 일 때문에도 그랬고 일이 해결될 때까지 내려가지 않을 것 같은 피해자 가족들의 행동 때문에도 그랬다. 서울 어디에선가 노숙을 할 것 같아서 애들한테 연락 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석간신문 가운데 한 신문은 박 사장의 이름이 박성준이며 박 사장이 사는 아파트 이름까지 적혀 있었다. 나는 그 아파트에 가서 박성준이란 사장의 이름을 대고 집집마다 확인해 볼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고급 아파트 지역의 인심과 무관심을 나는 짐작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비단 그들 한 가족 뿐만은 아니리라. 내 눈으로 확인하고 목격한 것만도 수십 건은 넘었다. 법은 있으되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무지하고 가난하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법을 집행하는 사람에게 따돌림을 받아 허망한 인생이 되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건 부정하기 어려웠다. 정확하게 이틀 뒤였다. 은주 누나네 가게로 전화를 건 녀석의 목소리가 대뜸 유가족의 침묵 시위현장을 포착했을 거라는 기대를 갖게 했다. "찾았냐?" "예. 지금 방송국 앞에 있습니다. 아침부터 떨고 있었나 봐요." "왜 거기 있는 거냐? 방송에 내보내 달라는 거겠지?" "라디오 방송엔 잠깐 나간 모양입니다. 친구가 그러는데 들었대요." "다른 데 못 가게 붙잡을 수 없겠냐? 내가 쫓아갈 동안만이라도." "제가 직접 본 건 아니고 애들한테 연락이 왔어요. 방송국 경비 아저씨들이 비켜 서라고 해도 정문 앞에 버티고 있다나 봐요." "알았다. 수고했다. 내가 지금 그리로 가마." "저도 갈까요?" "됐다." 전화를 끊고 누나에게 자동차 열쇠를 빌렸다. 밖으로 급하게 뛰어나가려는 나를 불러세우고 핸드백에서 돈을 꺼냈다. 봉투에 넣어 내밀며 은주 누나가 씨익 웃었다. 채가지 않다니." "저 앞에 파출소 보이지?" "보여." "가서 늙은이 희롱죄로 자진신고하고 가라." "광명 찾기 포기할래." 나는 정신없이 차를 몰았다. 그 가엾은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가기 전에 이 사건의 진상을 알아야 했고, 박성준 사장이란 작자가 사는 아파트의 정확한 주소를 알아내야만 했다. 남편을 그 지경이 되도록 매장도 않고 메고 다니는 서인숙 여인의 가엾은 얼굴, 가난에 찌든 모습이 자꾸 뇌리에 맴돌았다. 방송국 앞에서 차를 돌리며 살펴 보았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뛰어갔다. 서 여인은 울고 있었고 사람들은 서 여인을 둘러싼 채 등에 멘 글씨를 읽고 있었다. 몇 마디 말을 시켜 봤지만 이미 말할 정신은 아닌 것 같았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 봐도 신통찮은 대답 뿐이었다. 신문에 난대로 침묵 시위밖에 할 수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울컥 치미는 분노를 삭일 수가 없었다. 아무리 얘기를 시켜 봐도 대꾸하지 않는 그들의 한맺힌 사연을 나는 짐작하고 있었다. 메모지를 꺼내 그들의 하소연이 적힌 글귀를 베끼기 시작했다. 나는 한 자 한 자 써 내려가며 박성준 사장의 자동차 번호와 집주소와 사건의 전모, 검사의 이름과 경찰관의 이름, 써 내려갔다. 봉투를 몇 번이나 만지작거렸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돈봉투를 꺼내 준다는게 어쩐지 낯간지럽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몇 푼의 동정을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따뜻하게 잠자고 먹는 일을 해결해 주는 일이 급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것저것 생각을 해 봐도 당장엔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가장 좋은 방법은 이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박성준 사장을 만나 피해자의 억울한 사연을 낱낱이 캐내어 보상금을 내 주게 하는 방법이 최선책이라고 생각했다. 내 머릿속을 대번에 휘감는 것은 이미 몇 년 전 사건이며 법적으로 완전하게 과연 어떻게 사건의 전모를 캘 수 있느냐 하는 문제였다. 웬만한 심증만 잡히면 우격다짐으로 사건의 전말을 알아내어 누구에게 얼마나 돈을 먹여서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캐 나갈 수 있지만 전혀 심증이 잡히지 않을 때는 괜히 이 일에 참견한 나 자신만 도리어 덤터기를 쓸 수 있는 사건이었다. 그렇다고 그냥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쉽게 파고들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확증만 잡아내고 박 사장에게 돈과 향응을 받아먹고 봐 준 검사나 경찰관이 드러나기만 하면 내 성질대로 치도곤을 낼 작정이었다. 중앙의 일간지에 특별하게 다루어진 이 없을 테고 조만간 무슨 일이 터지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내 감정으로 이 사건을 그냥 참아 나가기엔 떨떠름했다. 114에 전화를 걸어 박성준 사장의 아파트 주소와 이름을 대고 전화번호를 찾아 달라고 사정을 했다. 내 사정을 끝까지 들은 목소리 고운 여자가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박성준 사장네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 나는 평소에 관공서나 친절과 봉사를 간판으로 내세우는 곳을 별로 좋아한 편이 아니었다. 관공서에 주민등록초본 한장 떼러 가도 정당한 시민으로 정당한 권리 행사를 하러 간다는 기분보다는 무엇인지 모르지만 사정하러 간다는 느낌이 들었고, 나처럼 양복이나 넥타이를 싫어하는 사류 한장 하러 갔다가 무시받는 게 아닐까 싶어 그냥 주눅이 들어 버리는 체질은 관공서나 공공기관에 대해 일종의 불신 같은 걸 느끼고 있었다. 언젠가는 동사무소에 인감증명서 한 장 떼러 갔다가 대민창구 앞에 '참자 참자 참자' 라는 구호를 써 붙인 걸 보고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도대체 무엇을 참자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동직원들을 향해 걸어 놓은 구호가 아니라 드나드는 동민들 쪽으로 써 붙여 놓아서 주민들에게 서류가 늦어도 참으라는 뜻인지 한참을 생각했었다. 한마디 해 주고 싶은 마음 때문에 기다리는 시간이 몹시 지루했다. "여보세요. 뭘 참으라고 써 붙인 내가 결국은 참을성 없이 물었다. 동직원은 내 위아래를 훑어보고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지은채 대꾸를 하지 않았다. "누가 써 붙였는지 걸작품입니다. 세세년년 걸어 두셨다가 국민을 이렇게 우롱한 시절이 있었다는 걸 후손에게 알리면 좋겠습니다." 나는 빈정거리듯 말했고 그 직원도 거기 써 붙인 글귀가 별로 옳지 않았다는 걸 알았던지 대꾸없이 빙긋이 웃고 말았다. 허튼 말대꾸라도 했다면 내 성질에 그놈의 '참자 참자 참자' 라는 구호판을 때려 부쉈을 터이고 나는 공무집행 방해에 관공서 기물파손으로, 그 잘난 놈의 기물파손으로 고생을 했을 게 뻔했다. 친절한 목소리를 들은 내 마음 속에 그 뿌리 깊은 불신이 확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면서도 왠지 그 친절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건 내 불신의 덩어리가 아직도 잠재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나를 나무라는 사람이 있겠지만 그런 일을 당하며 살아가는 서민들의 가슴을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이해하지 않고 배기지 못할 것이다 박성준 사장 집 전화는 불통이었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게 확실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열심히 한 전화 번호를 수없이 돌려 보기는 처음이었다. 전화를 걸지 않고 찾아가는 방법도 생각해 보았지만 통화를 한 후에 통화 내용과는 상관없이 쳐들어갈 배짱이었다. 신호음이 울렸다. "여보세요. 박성준 사장님 댁입니까?" 나는 일부러 점잖게 물었다. "누구시죠?" 목소리가 침참되어 있었다. 여자의 목소리는 힘이 없어 보였다. "박 사장님 계시면 바꾸어 주세요." 나는 누구냐는 질문에 답변하지 않고 긴한 얘기가 있는 사람처럼 말했다. "지금 안 계신데...... 누구시죠?" "계신거 알고 했습니다. 바꿔 주세요." "누구시냐고 묻잖아요?" 짜증스런 대꾸였다. 나 같은 사람들이 꽤 많았으리라. 박 사장이란 사람은 안방 어디에선가 방 안 가득하게 담배를 피워문 채 전화를 받지 않으리라. 이젠 후회하고 푼 쥐어 줬으면 편했을텐데 라는 생각을 하겠지. 피해자 가족들이 몇 년이 지난 뒤에 이런 짓을 하리라곤 상상조차 못했겠지. 논 두어 마지기와 밭뙈기 부쳐먹는 순박한 농사꾼에게 기백만 원을 주어 입을 틀어막았으면 이런 꼴을 당하진 않았을 거라고 후회하고 있겠지. "박 사장님께 긴히 할 말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름은 장총찬이라고 합니다. 들어오시면 이쪽으로 전화를 주십사 하고 전해 주시죠. 여기 전화번호는......" 나는 믿음을 주기 위해 내 이름과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 그렇지 않으면 바꾸어 주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박 사장님과 언제 연락하셨죠?" "어제 연락했는데, 오늘 중으로 전화해 "여보세요. 박 사장님은 일본 가신 지 일주일이 넘었는데 어떻게 연락이 됐다는 겁니까? 댁은 누구세요?" 언성이 높았다. 나는 그 순간 내 거짓말이 탄로났다는 것과 박 사장이 자리에 없기 때문에 이 일이 쉽게 해결될 수 없다는 걸 짐작했다. 아마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는 판단을 하고 외국으로 도피를 했는지도 모른다. "실례지만 사모님이신가요?" 나는 얼른 말을 바꾸었다. "그래요." 아직 박 사장 마누라까지는 도피하지 않은 것 같았다. "박 사장님 안 계시다니가 사실대로 말하겠습니다. 드릴 말씀이 있는데 만나 "도대체 댁은 누구세요? 어째서 말이 왔다갔다 그래요. 할 얘기가 있으면 하고 그렇지 않으면 끊으세요." 여느 부인네와는 달랐다. 그만한 배짱이 있으니까 불쌍한 사람 내팽개치고 고급 아파트에서 편히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습니다. 이왕 전화 했으니 할 말 하겠습니다. 언젠가는 내가 박 사장님 만나서 해결할 일이니까요." "정 씨네 식구예요?" 나는 그렇게 묻는 저의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녹음 테이프를 걸어 협박하는 내용을 증거로 나중에 되받아치는 고소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닙니다. 그러나 그 일에 몹시 흥분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참 뻔뻔스러운 여자였다. 신문에 크게 터졌는데도, 더구나 중앙 일간지의 조간과 석간신문에 떠들썩하게 터졌는데도 무슨 흥분이냐고 물었다. "그렇게 해서 부자로 살면 뭣하고 그런다고 천년 만년 살아지는 겁니까? 오늘 신문 봤습니까? 아침 신문 두 개, 저녁 신문 두 개를 봤냐 이 말입니다." "봤어요." 상대하기 거북스런 여자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그렇게 태연하게 거침없이 받아넘길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좀 따지려고 전화했습니다. 이만하면 아시겠죠? 박 사장님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만 나도 질긴 놈입니다. 보통 질긴 게 아니라 못된 사람들 피가 놈입니다. 찰거머리죠." "여보세요. 우리가 피해자예요. 알고나 전화를 하든지 협박을 하든지 하세요. 댁은 이 사건의 진상을 아나요?" "알다마다요." "신문기사만 봤죠?" "그렇습니다만...... 이건 강에 가서 물 보듯 빤한 거 아닙니까?" "우리가 먹고 살 만하니까 돈으로 해결했다 이건가요?" "역시 해 본 솜씨시군요." "그렇게 자신 있으시면 법원에 가서 판결문이나 읽어 보고 큰소리를 치세요." "세상에 무슨 할 짓이 없어서 그런 걸 읽습니까?" "여보세요. 정말 우리가 사고를 냈다면 죽은 사람이 준고속도로를 가로질러 갔기 때문에 쌍방과실인 데다 우리는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그 시간에 그 옆을 지나갔다는 것하고 사람이 다쳤으니 지나가는 택시에 사람을 실어준 죄밖에 없어요. 더구나 진짜 사고를 낸 사람은 법적으로 실형을 선고받아서 복역하고 나왔어요. 그 사람을 친 사람이 내가 쳤다고 그 자리에서 자수했고 재판까지 받아 감옥살이까지 했어요. 우리 차에 치이지 않았다는 증인이 살아 있어요. 생각해 보세요. 정말 친 사람은 복역하고 나와서 잘 사는데 어째서 털끝 하나 건드린 적 없는 우리가 댁 같은 사람한테 이런 모욕을 당해야 하는지. 이 나라엔 법도 없나요? 그래 사람 치어 죽인 사람이 몇 년 사업도 할 수 있다고 댁은 생각하나요? 댁 같은 사람이 많기를 나도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같이 억울하게 당하는 사람도 좀 기를 펴고 살아 봤으면 좋겠습니다, 여보세요. 그래, 검사나 경찰관이 돈을 받아먹었다고 칩시다. 사람 치어 죽였으니 한두 푼 가지고 봐 줄 수야 없잖겠습니까? 그러느니 그 돈으로 그 불쌍한 사람한테 줘서 생색이라도 내는 게 편할 겁니다. 어차피 보험에서 처리해 줄 거고 말입니다." "......" 나는 잠시 그녀의 논리적인 말에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이 왠지 배짱만은 아닌, 자신의 억울함이 내게 설득력 있게 들렸다. 검사나 경찰간부가 친구이거나 인척일 수도 있고 살인자라는 누명보다는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신문이 한쪽 말만 믿고 엉터리 보도를 해서 사람을 이렇게 생매장할 때 우린 그럼 다 약먹고 죽으라는 겁니까? 아니면 한강에 가서 우리 식구 모두 빠져 죽으라는 얘깁니까? 하나님이 이 사정 알거 아닙니까? 우리 배고픈 사람 아닙니다. 남 못지 않게 차도 굴리고 회사도 갖고 있고 집도 있어요. 그 사람들이 요구하는 천여만 원쯤 내줘도 끄떡없어요. 그러나 아무 죄없이 왜 줍니까? 차라리 그 돈을 양로원이나 정박아 학교나 불쌍한 사람들에게 주면 줬지 우린 그짓 않습니다. 사 년간 시달렸으면 어떻게 시달렸는지 아시죠? 아파트 안에다 유골 갖다 놓고 우리 식구 다 죽인다고 협박할 때도 우린 남편이 칼 맞아 죽을 뻔했는데도, 이사 가는 곳마다 찾아다녀 동네 창피해도, 학교 다니는 어린애들을 죽일까 봐 마음 졸이면서도 왜 버텼는지 댁은 아세요? 하늘을 우러러 한점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댁은 신문만 보고, 그 엉터리 기사만 보고 지금 따집니다만 우린 지금 피가 끓습니다. 댁이 누군지 모르지만 칼을 들고 와서 우릴 죽여 보십쇼. 우리가 털끝 만큼도 죄가 없는데 댁한테 빌 줄 아십니까? 정말 댁이 정의가 있는 사람이라면 사실을 알고 신문사에 대들어야 합니다. 정당하게 살고 있는 시민이 큰 힘을 가진, 엄청나게 큰 힘을 가진 그 신문사들의 횡포에 이렇게 초죽음을 당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자신 있으면 오세요. 물론 그 전에 이 지금 누구라도 붙잡고 하소연할 입장이니까 와서 우리의 답답한 사정 좀 들어 주세요." 금세라도 울음이 쏟아질 것 같은 목소리였다. 나는 하늘을 우러러 한점 죄가 없다는 말과 큰 힘을 가진 신문사의 횡포 때문에 당하고 있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당당했다. 신문이 기사대로라면 정말 말 한마디 해서도 안 되는 죄인인데 너무나 당당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었다. "신문사에서 확인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목소리를 낮추어 되도록 공손하게 말했다. "우리가 하는 말이 그겁니다. 싸운 사람들이 있을 때 한 쪽 말만 들으면 그 쪽이 다 옳지요. 우리한테는 확인조차 않고 없는데 회사 사람들은 신문 보고 일곱 명이나 그만뒀구요, 원자재 공급하던 회사가 물건을 안 줘요. 어음 받은 거래처에선 물건을 되찾아가고요, 그뿐인 줄 아세요? 이웃 사람들이 마주쳐도 인사도 안 해요." 나는 뭔지 딱한 처지에 놓여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한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할 때 내 행위는 참으로 어리숙하고 멍청한 정의감이었다고 밖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신문에 난 사실만 믿고 대든 내 어리석음을 찾을 길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의 말을 그대로 믿기에는 신문마다 너무 크게 다룬 것이었다. "이왕 전화 드렸으니 몇 가지 물어도 "그러세요. 우리도 답답해서 누구에게든 얘기하고 싶어요." "정말 박 사장님이 치지 않았다면 어째서 그런 덤터기를 쓰셨습니까?" "이미 다른 사람 차에 치였을 때 우리 남편은 그 옆을 통과하다가 중앙선을 넘어오는 뉴코티나한테 차가 받히기까지 했어요. 뉴코티나 운전하던 분이 돈없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형을 살았어요. 그런데 엉뚱하게 우리한테 이중으로 치였다면서 목격자를 내세우고 달겨든 거예요. 나중에 목격자들의 증언이 위증이었다는 게 드러났어요. 설명하자면 길어요." 한숨을 길게 내쉬는 그녀의 가라앉은 목소리엔 분노도 일고 있었다. "그럼 사 년동안 어째서 그걸 해결하지 "생각해 보세요. 무식하게 무조건 돈 내놓으라고 달려드는 사람과 얘기가 통합니까? 그동안 세 번씩이나 법에 호소했지만 우리는 세 번 다 죄가 없다는 게 밝혀졌어요. 그 당시 사고를 낸 장본인도 우리 남편은 전혀 무관하다며 자신이 쳤다는 걸 시인했구요. 그러나 헛일예요. 담당 검사나 경찰관까지도 머리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그 사람들이 청와대, 국가보위, 경찰국, 경찰서, 법원, 검찰청, 신문사 등에다 고소장과 진정서를 수십 차례나 해서 그때마다 우리 남편이 불려가 조사를 받았지만 모두 무혐의이고 그쪽이 무고죄라는 게 밝혀졌으니까 당신도 한번 우리 입장이 돼 보십쇼. 그렇게 준엄하다는 곳에서조차 재조사를 해봐도 이게 뭡니까? 신문사에서 책임 없게 쓴 기사로 우리같이 억울하게 당하는 사람을 더 짓밟다니...... 이것이 민주 국가고 양식 있는 사회며 국민의 대변을 해 줘야 할 신문사의 횡포는 과연 누가 막아야 한단 말입니까?"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죄송합니다." 나는 그녀의 진지한 말에 일단 이렇게 대꾸했다. 이 사건의 깊은 사실을 알기 전에는 그녀의 주장에 동조하기는 어렵게 되어 있었다. 유을 메고 있던 그 가엾은 사람들의 모습과 서툴지만 사건의 내용을 진술한 글씨와 신문의 기사 때문인지도 모른다. 중앙의 일간지가 거의 다 다루었다고 할 만큼 이 사건의 얘깃거리는 많아진 셈이었다. 법정 기록과 당시 상황에 대한 설명뿐 아니라 확실한 증거들을 보여 드릴 테니까." 박 사장 부인의 이 말은 웬만큼 자신없이 할 수 없는 얘기였다. 나는 갑자기 부끄러움을 느꼈다. 세상의 세속적 진상이 이렇게 허망한 것이라곤 생각하지도 못했다. "죄송합니다. 한번 가겠습니다." "오실 때 전화 먼저 해 주세요." "그러겠습니다." 그녀나 나나 여러가지 얘기를 더 나누었지만 내가 품었던 부자 사장에 대한 맹렬한 미움은 이미 어느 정도 가신 뒤여서 부드러운 말로 주고 받았다. 전화를 끊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쉽게 잠들 수가 없었다. 박 사장 부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신문의 보도 때문에 엄청나게 큰 상처를 입은 가족을 나는 앞뒤의 사정도 들어 보지 않고 맹목적으로 미워한 사내밖에 안 되는 것이었다. 나는 박 사장 모가지를 옭아 쥐고 정신 번쩍 나게 다루려고 별렀었다. 세상엔 이렇게 억울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곗돈 떼이고 하소연 할 데조차 없는 서민들이 얼마나 많을 것이며, 택시 잡는데 새치기 당해도 말 한마디 하지 못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억울한 송사에 걸려 피를 빨리는 사람도 많고 인생을 새치기당한 사람은 더 많겠지. 더구나 우리가 그나마 믿었던 신문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이라면 그녀의 말처럼 하소연할 곳조차 막막할 것이다. 하나님. 신문고 하나 만들어 주십쇼. 그래서 억울한 사람이 달려와 신문고를 두드리면 하나님 당신이 내려다보고 정말 억울한 사연이라면 그 자리에서 명쾌하게 억울한 사정 좀 풀어 주십쇼. 법이 있으니 그리로 가라고 무작정떠밀지 좀 마쇼. 누군 법이 있는 걸 모릅니까? 법치국가라는 것도 알고 민주국가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겠습니까마는 법으로 가져가도 해결 안 되는 게 얼마나 많은지 당신만은 알거 아닙니까. 신문고 하나 만들어 주쇼. 좋은 말할 때 말입니다. 그래서 정말 억울한 사람이 때리면 사람이 치면 북채가 신문고 치러 온 사람을 갈겨 버리게 해 주면 됩니다. 하나님. 정말 좋게 말할 때 신문고 하나 만듭시다. 아마 신문고 하나만 설치했다간 큰일 날 겁니다. 전국에서 신문고 두드리기 위해 달려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줄서 있는 인구가 인산인해일 테고 거기서도 새치기의 명수들은 새치기를 할 것이고 일순위니 이순위니 해서 프리미엄 때문에 또 다른 부조리가 생기겠죠. 가진 자와 쥔 자들이 그놈의 신문고를 누군가를 시켜 박살을 내게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아예 곳곳에 신문고를 설치해서 억울한 사람이 두드리면 바로바로 속시원하게 해결 좀 해 주쇼. 신문고를 만들면 당분간은 귀청이 따가울 겁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하나님 당신이 방관자가 되었기 때문에 이 땅에 억울한 사연을 가진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신문고에 의해 해결되어야 할 문제는 바로 하나님 당신일 겁니다. 정신 좀 차리쇼. 하나님아! 지금 내가 '님'자 붙여 주는 것은 당신이 고유명사라고 해서 붙이는 것 뿐이라는 걸 좀 아쇼. 그렇더라도 신문고만은 어떻게든 좀 만들어 봅시다. 당신은 빼 줄 수도 있으니 말이오. 하나님, 우리 제발 쩨쩨하지 맙시다. 박성준 사장에게서 전화가 왔다는 소리에 그만인데 그쪽에서 먼저 전화를 걸었다는 소리를 들으니 나 같은 강심장도 별수 없었다. "장총찬이라고 합니다." 전화기를 들고 이렇게 말했다. "박성준이라고 합니다. 내 마누라에게 장총찬 씨 얘긴 들었습니다. 오늘 낮에 도착해서 정리 좀 하고 바로 전화를 드리는 겁니다.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좀 만납시다. 만나서 내 답답한 사정이나 좀 하소연합시다. 오죽 하소연할 데가 없으면 이러겠습니까?" 박 사장의 목소리에는 결의가 가득차 있는 것 같았다. "먼저 전화 드렸던 일은 사과드립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주셔서 차라리 나는 반갑습니다. 그렇게 전화 한마디 걸어 주는 사람마저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신문에 난대로 그런 사람이라면 왜 세상 사람들은 우리한테 욕하고 침을 뱉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일본에서 일도 안 끝내고 온건 여기 소식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내 물건 사겠다던 회사가 한국신문을 보고 나하고 거래를 하지 않겠다고 해서 할 수 없이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 참 안됐습니다." "만납시다. 이왕 아셨으니 내 하소연이나 합시다. 그게 아녀도 좋습니다. 그냥 나를 미워하고 욕했던 분이니까 사실을 알고 기분이라도 풉시다." "그러지요." 끊었다. 은주 누나가 호기심이 발동해서 같이 나갈 수 없느냐고 물었다. "누나, 제발 그 호기심은 좀 버려 줘." "궁금하잖니. 도저히 그 사람들 말이 믿어지지 않아. 사 년씩이나 유골을 매장하지 않고 보관하면서 버틸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니? 죽은 사람 시신은 어떤 경우든간에 빨리 매장해서 영혼을 위로해 줘야 한다는 걸 모를 리도 없고 말이다." 은주 누나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누가 생각해도 사 년 동안이나 유골을 매장하지 않은 채 버티고 있다면 그럴 만한 사정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오늘 나가 보면 확실한 걸 알겠지." "조심해라." "누가 아니, 널 이용하려고 그러는지. 세상이 하두 험하니가. 혹시 네 소문을 들었거나 그래서......" "걱정도 팔자라더니. 내가 넘어갈 것 같애서 그래?" "세상은 모르는 거야. 만약에 그 사람들이 정말 여유가 있고 순간적으로 살인죄나 면해 보자고 해서 쳤다는 사람을 매수하고 경찰이나 검사를 매수했다고 가정할 수도 있잖니. 그러니까 괜히 흥분하지 말고 처신을 잘하란 얘기야." "알았어." 약속장소에는 박 사장이 먼저 나와 있었다. 서울 시내의 교통망이 엉망진창이어서 통상 얼마쯤 걸리리라고 예정했던 시간에 도착하려면 항상 늦기 약속시간보다 십분쯤 빨리 들어서던 참이었다. "이렇게 나오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박 사장은 내가 생각했던 살찌고 풍채좋고 유들유들한 사내가 아니었다. 사장이라고 하기엔 조금 마른 편이어서 그에게서 풍기는 인상은 학자풍이었다. 얼핏 보면 대학교 교수 같은 수수하고 이지적인 인상이었다. "제가 오히려 바쁘신 분께 폐가 됐습니다. 사실 저도 신문기자와 그 사람들의 호소문을 읽고 몹시 흥분했었습니다." "이해가 갑니다.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요. 나라도 그랬을 겁니다. 나도 어렵게 살아 봤고 월급쟁이 노릇할 생기면 무조건 가난한 사람 편이었으니까요. 사실이 가난한 사람보다 부자 쪽이 옳지 않을 때가 많았다는 것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무튼 이렇게 오시게 한 건 사심없이, 선입견없이 내 잘못은 내 잘못대로 그 사람의 잘못은 잘못대로 짚고 넘어가 보고 싶어서였습니다. 장총찬 씨가 무엇을 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나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다만 그렇게 우리를 나무라기 위해서 전화를 주신 분이라면 내 하소연도 해 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회사의 직원들도 일곱 명이나 그만뒀습니다. 처음엔 좀 괘씸한 생각이 들었는데 지나 놓고 생각하니 차라리 그런 사람들이 더 이 사회에 필요한 사람이라고 해서 그 일곱 명에게 꼭같은 내용의 편지를 써서 붙이라고 했습니다. 판결문도 복사해서 첨부하라구요. 사실과 다르다는 걸 알아 주든 않든 회사의 사장이 그런 사람이라는 걸 알고 회사를 그만둘 정도의 용기 있는 사람들이라면 내가 찾아가서 진상을 밝혀 주고 다시 채용할 생각을 한 건 순수한 내 심정입니다." "참 잘하셨습니다." 나는 그의 말에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그렇게 용기 있는 직원들이 있다는 데 괜히 내 일처럼 으쓱해졌다. 언젠가 청정하고 줏대 세고 실력 있는 대학교수가 내게 해 준 말이 기억났다. 실력이 있고 청정한 만큼 대학생 사이에는 인기가 있었지만 교수들 사이에선 질투를 학생들의 오해를 잠시 받은 적이 있었다. 그 교수의 성품이고 청정함을 아는 학생들은 말이 없었지만 소수 학생들은 오해를 계속 품고 있었다. 그 교수가 강의실에 들어서자 몇몇 학생이 교수에게 반발하여 강의실을 나가 버렸다. 그때 그 교수는 빙그레 웃으며 나머지 학생들에게 말했다. 배운대로 행하고 가르친대로 행하는 저 학생들 때문에 기분이 좋다고. 오해를 설명하지 않고 지냈던 그 교수의 당당함이 갑자기 생각난 것이었다. "우선 이것부터 보시겠어요?" 박 사장이 내민 것은 한 뭉치나 되는 복사 서류철이었다. 나는 되는대로 위에서부터 펼쳐 보기 시작했다. 조간 신문 먼저 눈에 띄었다. "이건 저도 봤습니다." "일부 주간지에도 나갔고 방송에도 나갔답니다." "이게 소송기록이고 이게 판결문이군요." "그렇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자료 전부입니다. 길게 설명 드릴 필요없이 보시면 대번에 어떻게 된 사건인지 알게 됩니다." 고소장과 각서 사본, 약식 명령과 벌과금 납부증서 따위였다. 나는 세심하게 한 장 한 장 자료를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지방법원의 판결문은 십육절지 크기로 열한 장이었다. 원고 서인숙 여인과 소송대리인인 변호사 두 사람의 이름이 첫 장에 있고 박사장의 죄없음을 인정한 피고들이 주장한 보상금 파결에서 진짜 교통사고를 낸 이경민에게 피해자의 중대한 과실이 인정되어 주장했던 보상금을 호프만식으로 계산해서 그 반으로 지불할 것과 소송비용도 원고측과 실질적인 가해자 이경민이 반분하라고 지시되어 있었다. 박 사장은 아무 죄가 없으니 청구를 기각하고 소송 비용도 원고측이 모두 지불하도록 명시되어 있었다. 더구나 이경민이란 운전사가 몰던 자동차 안에는 두 명의 승객이 있어서 박 사장 차가 이경민의 차에 치인 피해자를 또 치거나 차바퀴에 굴려서 끌고 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들어나 있었다. 원고측이 내세운 증인들의 증언 내용이 실측할 수 없는 거리에 있었거나 현장을 위한 위증이었음이 밝혀져 있었다. 증인들이 두 눈으로 목격했다는 것이 위증이었음은, 도로 양쪽에 나무가 무성하고 목격지점이 도로보다 훨씬 아래쪽이어서 아무리 실측해 보아도 자동차의 윗부분 조금만 보일 뿐 증인들의 주장대로 사람이 누워 있는 장면을 목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경민이 운전하고 가던 방향에서 오토바이에 탄 정수철을 치었을 때 입은 상처임은 밝혀져 박 사장이 재차 치었다는 원고측 주장은 근거 없는 것이라고 못박은 내용이었다. 민사 제일심 소송 기록이나 합의부 판결은 거의 상황이나 낱말이 일치했다. 다 읽고 난 내가 쓰게 웃었다. 박 사장은 "심정이 착잡하시겠습니다." 내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앞뒤 사정을 살피지 않은 채 무조건 한 쪽 편을 들었던 내 편견 때문이었다. 가난한 사람이라는 사실 한 가지 때문에 무조건 그의 말을 믿어 버린 내 용렬함에 대해선 할 말이 없었다. "이 판결문을 못 믿을 수도 물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법관이나 경찰관이 매수돼서 이런 게 아니냐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하도 당해서 이젠 아예 대꾸를 하지 않습니다만. 그 사람들이 진정서를 내거나 호소한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닙니다. 그때마다 불려가서 조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조사를 해서 내가 얻어낸 것은 무혐의였습니다. 안에 같이 탔던 사람이 살아 있고 내 차에 같이 탔던 사람도 살아 있습니다. 적어도 내가 공모를 하려면 현장을 뚜렷하게 본 이 네 명과 꿍짝이 맞아야 됩니다." "그렇다면 박 사장님께서는 억울한 사연을 호소할 데가 없었습니까?" "없었다고 하는게 옳습니다. 고소도 해 봤습니다. 우리 집으로 유골을 메고 들어오기도 했고 나를 죽인다고 칼 빼들고 덤비는 걸 주위 사람들이 겨우 말린 적도 있고...... 나이 어린 자식들이 학교 갔다 돌아올 때까지 마음 졸이며 살았습니다. 대한민국은 법치국가인데 나같은 사람이 이렇게 억울하게 당해도 호소할 데가 없습니다. 반대로 그들은 가난하고 배고프다는 것 때문에 어디 가서든 동정을 "그 사람들이 그렇게 떼를 쓸 수밖에 없는 다른 이유가 있으니까 저럴 거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런 이유가 있습니다." "뭐죠?" 나는 바싹 구미가 당겼다. "이경민이라고 하는 가해자는 돈이 없는 사람이어서 감옥에 가 형을 살고 나왔습니다. 내 짐작입니다만 주위에서 쏙싹거리는 사람들이 돈 있는 나를 붙잡고 늘어지라고 충동질을 했고 변호사도 승산없는 싸움질을 부추긴 것 같습니다. 그동안의 소송 비용이나 경비를 그들은 한 푼도 받지 못했으니 전보다 살기가 더 어려워졌을 게 당연하고 가족들은 귀가 얇아져서 이판사판의 심정이 됐을지도 얼마쯤의 생계비라도 주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차마 줄 수 없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시겠죠? 내가 치었다는 게 사실로 오인받기 싫어서이기도 했지만 나무 억지를 쓰니까 차라리 불쌍한 사람들에게 돈을 주면 줬지 그 사람들에겐 줄 수가 없게 된 겁니다. 내가 그동안 여기저기 끌려다니며 한 고생은 그렇다 칩시다. 마누라가 병이 생기고 아이들이 세상을 두려워하고 주위 사람들이 외면을 할 때, 더구나 이번처럼 사업에 큰 타격을 입게 될 때...... 나는 어쩌란 말입니까?" "그 사람들하고 대화를 가져 봤나요?" "안 됩니다. 사실은 이렇고저렇다고 말할 기회도 안 줍니다. 욕부터 하고 소리부터 지르니까 전혀 대화가 안 됩니다." "잊을 만하면 또 그러고 잊을 만하면 가슴을 뒤집어놓곤 합니다. 그런데 내가 더 못 견디는 건 신문사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한 번쯤 확인을 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한쪽 주장만 일방적으로 믿고 기사를 쓴다면 공신력 있는 신문을 누가 믿겠습니까. 그래도 나는 신문만은 믿었습니다. 나같이 억울한 희생자가 그동안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더 억울한 사람도 많았을 겁니다. 그래서 수소문을 해 봤더니 집안에 변호사 한 분이 그러시더군요. 언론중재위원회가 있으니 그쪽에 호소해 보라구요. 또 어떤 사람들은 신문사 비위 건드려 봐야 득될 게 없으니까 미친 개한테 물린 셈치고 참으라고요. 또는 언제든지 한번 본때를 보여 줄 수도 있으니 신문사하고 싸우진 말라고요. 그러나 나는 할 겁니다. 하고말고요." "설마 신문사가 그런 일로 해꼬지를 하겠습니까. 잘못 된 걸 알면 사과하겠지요. 가끔 신문을 보면 정정 보도가 나오던데요." "정정 보도만 가지고 되겠습니까? 며칠자 어느 기사가 사실과 다르므로 정정합니다 정도 가지고 내가 당한 일이 보상되겠습니까? 너무들 합니다. 오늘 낮에 언론중재위원회를 찾아가 사실 얘기를 했더니 중재 신청사항을 관계 서류와 함께 정식으로 접수시키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좋은 곳이 있다는 걸 나는 정말 몰랐습니다. 당장 써 봤는데 읽어 그가 안주머니에서 꺼내 준 중재 신청사항은 그동안 당한 수모와 고통, 신문사의 일방적인 보도와 사건의 진상, 피해자 가족에게 당한 얘기와 문 한번 열어 놓고 살아보지 못한 애절한 사연이 적혀 있었다. "아무튼 속시원하게 알게 돼서 반갑습니다." "장총찬 씨도 내 말만을 믿지 마시고 한번 그쪽 사람들을 찾아서 말하세요. 그래서 정말 내 잘못이 털끝 만큼이라도 있는지 대조해 보세요. 그런 뒤에 나를 믿어 주십쇼." 나는 그의 허심탄회한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세상은 정말 복잡한 곳이란 생각을 했다. "사고 당시의 상황만은 다를 겁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 하나님이 있다거나 사후세계가 있다는 걸 믿는다면 내가 억울하게 당하고 있다는걸 인정할 겁니다." 우리는 두어 시간 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의 말대로 무지하게 대드는 경우에 법마저도 어쩌지 못한다는 걸 나는 배운 셈이었다. 마음이 무거웠다.

[묘안당]

그렇다고 4년이나 유골을 등에지고 양심도 없이 시골식 무댑보가 사람잡는것 같습니다~소설이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그리고 무고하다면 그 사장이 신고해서...경찰서에서 잡아가야 하는데...갸우뚱...ㅎㅎ 감사합니다

[나리아리]

양쪽 말을 다 들어봐야 한다고 하더니... 누가 피해자인지?

[미혜]

옛말이 있지요!안방에가면 시어머니 말이 맞고 부엌에가면 며느리말이 맞다는얘기....................

[새처럼]

잘 봤습니다,, 감사 합니다,,

[그리운남촌]

잘 읽고갑니다~~

[김성갑]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