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이곳 삿포로의 유키와 같이 걷는다. 30도를 넘는 이상기온이 계속되어 걱정을 했는데 오늘은 걷는데 최적의 날씨다.
최고기온이 어제보다 10도나 낮은 22도인데다 시원한 바람마저 분다. 그리고 간간이 땀을 씻어주는 비도 흩뿌린다.
삿포로역에서 유키와 그녀의 친구 칸을 만났다. 유키는 하코다테에 사는 카마다의 친구다. 두 사람 다 금년 제7회 조선통신사 우정걷기 행사에 참석해 서울에서 부산까지 걸었다.
일행들과 토요히라 강변길에서
토요히라가와 강변 길을 걸었다. 삿포로의 한강이다. 연어가 올라온다는 강인데 물살이 빠르고 수량이 풍부한 일급수다.
유키는 60세 때 골반 인공관절수술을 받았다. 의사는 더 이상 걷지 말라고 했다. 그녀는 걷기 위해서 힘든 수술을 받았는데 좋아하는 걷기를 그만둘 수 없었다고 했다.
대수술 후 65세 때에는 3년간 에 걸쳐 북해도 2800킬로를 카마다와 함께 일주했다. 그리고 2년마다 개최되는 조선통신사 행사에도 참여해 오고 있다.
인간 승리다. 오늘은 20킬로인데 문제없냐고 농담 삼아 물었더니 "나는 푸로 입니다"라고 정색을 했다. 좋은 길에 좋은 날씨다. 불어오는 바람이 싱그럽다.
그녀의 친구 칸도 걷기를 좋아한다. 그녀는 유키에 앞서 북해도를 일주했다. 걸으며 그녀가 들려준 곰 이야기가 재미있다.
그녀가 40대 초반에 여동생과 초등학교 취학 전의 남자 조카를 데리고 산을 올랐다가 중간 크기의 곰을 만났다고 했다.
어린 조카는 동물원에서 곰을 여러 차례 본 일이 있어 야생 곰을 보고는 "야! 곰이다!!!"라며 좋아했다. 그렇지만 어른들은 순간 몸이 얼어붙었다.
그녀는 여동생에게 조용히 곰의 눈을 응시하라고 했다. 도망을 가면 쫓아온다. 그들은 곰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마주 보았다.
그리고 "만약 곰이 덤벼들면 내가 먹이가 될 테니 너는 아들을 데리고 도망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녀는 독신이었으며 5남매 중 맏딸이었다. 큰 딸이 역시 다르다.
곰과 3명의 대치상태가 한동안 계속되었다. 곰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6개의 눈동자에 자신이 없었는지 슬금슬금 숲 속으로 사라졌다고 했다.
최석원 사장은 15킬로 지점에서 숙소로 돌아갔다. 그동안 발바닥 문제로 위축되어 있었는데 조금은 자신감이 붙었을 것이다. 유키는 그가 걸으며 아픈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며 '젠틀맨'이라고 칭찬했다.
삿포로의 맛집에서 스시를
삿포로역까지 20킬로를 걸었다. 숙소의 최 사장을 불러내어 역 근처의 이름난 스시집으로 갔다. 주문받으러 온 종업원이 3시까지가 런치 타임이라고 했다. 시계를 보니 3시 3분 전이다.
서둘러 주문을 했다. 런치의 양만큼 다른 시간대에 먹으려면 돈이 두 배는 들 것이다. 오늘은 운이 따른다고 유키가 좋아한다. 손님이라고 우리가 대접을 받았다.
다음날 아침 식사를 하러 스스키노로 나갔다. 까마귀 떼가 주위를 바쁘게 날아다닌다. 환락가라 음식 찌꺼기 등 먹을 게 많다. 이곳 까마귀는 살이 포동포동 오르고 윤기가 흐른다. 사람을 겁내지 않는다.
아사히카와역 3 정거장 못미쳐서 나가야마역에서 내렸다. 국도로 나서서 걷기 시작하는데 웬일인지 울컥 감정이 복받쳐 오르며 눈물이 난다.
오늘로서 걷는 일정은 마지막이다. 지난 두 달 나름대로 열심히 걸으며 많은 일본인과 교류했다. SNS를 통해 국내와도 부지런히 소통했다. 오늘은 10킬로를 걸었다.
먼저 도착한 최 사장이 좋은 호텔을 저렴한 가격으로 예약했다며 문자로 알려왔다. 3시경 체크인을 한 후 그와 함께 '미우라 아야코 기념 문학관'으로 갔다.
미우라 아야코 기념 문학관에서 청주에서 온 단체와 함께
청주의 모 교회에서 단체로 견학을 왔다. 외국 수종 시범림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곳은 아야코의 데뷔작이자 최고의 히트작인 소설 '빙점'의 무대가 된 곳이다.
'시범림 속에는 관리인의 낡은 집과 빨간 지붕의 창고와 외양간이 있었다' 소설 빙점에서 아야코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이 관리인 집의 자리에 그녀의 문학기념관이 들어섰다.
나는 중학생 시절 '빙점'을 읽었다. 당시 그녀의 인기는 지금의 무라카미 하루키 이상이었다. 내가 이곳을 마지막 일정으로 정한 것도 그녀를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1964년 '아사히신문 1,000만엔 현상소설 공모전'에 1등으로 입선했다. 쟁쟁한 기성 작가들을 제친 42세 무명 가정주부의 쾌거에 세상이 놀랐다.
하늘이 위대한 인물을 내기 위해서는 남들이 겪지 않은 혹독한 시련을 준다고 한다. 그 시련에 꺾이지 않고 이겨내었을 때 비로소 하늘은 그 사람에게 위대한 생애를 선물로 준다.
아야코는 군국주의 일본에서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 교사를 7년간 지냈다. 패전 후 그녀는 군국주의 교육의 잘못을 깨닫고 1946년 교직을 떠난다.
여기서부터 그녀의 방황이 시작되었다. 폐결핵에 걸려 입원했지만 술 담배는 여전했다. 당시 폐결핵은 죽을병이었다. 살아갈 의미를 잃은 자포자기의 행동이었다.
이후 결핵성 척추 카리에스로 발전되며 그녀는 13년간이나 꼼짝 못 하고 깁스 베드에 누워 지냈다. 자기 손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를 수렁에서 건져 낸 사람은 어린 시절 친구이자 연인인 마에카와 타다시였다. 그는 병원을 방문하거나 편지 등을 통해 그녀를 끈질기게 설득했다.
그녀를 갱생시키고 크리스천으로 인도할 수만 있다면 자기 목숨을 바치겠다고 기도했다. 타다시는 폐결핵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다.
타다시의 사후 그의 진심을 깨달은 아야코는 세례를 받고 그렇게 혐오했던 크리스천이 되었다. 타다시는 위대한 작가 미우라 아야코를 만들기 위해 세상에 온 한 알의 밀알이었다.
연인과 사별한 후 그녀는 또 한 사람의 헌신적인 신앙인 미우라 미쓰요를 만나 결혼했다. 37살로 당시로서는 만혼이었다. 결혼 후에도 병약한 그녀는 암에 걸려 회복과 재발을 반복했다.
그러나 그녀는 암에 감사했으며 하늘이 준 선물이라 고백했다. 하늘이 인간에게 주는 고통은 반드시 의미가 있으며 그것을 극복할 길도 함께 주신다는 믿음이 있었다.
손이 마비된 아야코는 구술로 집필 활동을 계속했다. 말년에는 파킨슨병으로 고통을 겪었다. 그렇지만 죽는 순간까지도 집필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남편 미쓰요는 공무원을 그만두고 아내의 집필 활동을 도왔다.
아야코의 구술을 받아 적어 원고로 만드는 일이 그의 평생의 일이 되었다. 그녀는 1999년 77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35년간 총 84권의 책을 출간했다. 그중 80권이 구술에 의한 것이었다.
다음날은 그녀의 또 한 권의 베스트셀러 《시오카리 토우게(한국어 번역판 제목 '설령'》의 현장을 찾았다. 소설의 주인공인 실존 인물 나가노 마사오가 순직한 곳이다.
마사오 역시 아야코처럼 기독교를 경멸했으며 결코 크리스천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던 사람이다. 그런 마사오가 친구의 여동생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의 밝고 항상 기쁨에 넘친 모습의 뒤에 기독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는 고뇌한다. 결국 그는 세례를 받고 크리스천이 된다.
그 운명적인 날은 '유이노' 즉 결혼 신청을 위해 사주단자를 가지고 그녀의 집으로 가는 날이었다. 시오카리 고개에서 객차의 연결고리가 알 수 없는 이유로 풀린다.
눈 덮인 경사로를 객차가 무방비로 굴러 내려갔다. 승객들의 비명과 아우성이 들려 온다. 차량이 커브로 접어드는 순간 그가 선로로 몸을 날렸다. 열차는 멈추어섰고 수십 명이 목숨을 구한다.
빙점 발표 당시 잡화점을 하던 미우라 아야코
20세기 초의 일이라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던 그가 미우라 아야코의 소설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이곳 시오카리역에는 그의 현창비가 서 있고 언덕 위에는 '시오카리 토우게 기념관'이 있다.
기념관 정면에 요한복음 12장 의 말씀을 써놓은 현판이 걸려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일본 열도를 걸으며 많은 사람과 소통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위대한 인생을 살다간 몇몇 일본인들을 만났다. 그들은 내 영혼을 정화시키고 마지막 여정을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다.
출국하는 날 아침. 공항으로 가는 6시 리무진 버스를 타기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다. 미우라 아야코의 숨결이 느껴지는 이곳 아사히카와 땅을 조금만 더 걷기로 하자.
그동안의 누적거리는 1,108 킬로다. 버스에 오르기까지 3킬로를 더 걸었다. 1,111킬로. 두 다리에 2개의 스틱을 짚고 일본 열도를 종단했다는 의미를 스스로 부여했다.
당초 목표에는 미달하지만 완주했다는데 의미를 두고 싶다. 하루 평균 25킬로를 걷겠다고 작정했지만 목표에는 못 미친다. 그렇지만 평균 22킬로 정도 걸었으니 B+는 된다.
되돌아보니 내 의지로 걸은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걸어왔다는 느낌이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다. 감사의 마음을 가슴에 새긴다.
당초 우려와 달리 일본인들은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최근의 정치적인 갈등으로 대한민국 국가 이미지는 나빴다. '한국인은 좋은데 한국은 싫다'가 오늘 일본 국민의 대한민국 정서다.
4월 1일 입국하는 날 일본의 새 연호의 발표가 있었고 걷는 중에 일왕이 교체되었다. 구시대가 가고 새 시대가 시작되는 역사적인 순간에 일본 열도를 걸었다는 것이 내게는 행운이었다.
인천으로 가는 저가항공 기내에서 비빔밥을 주문했다. 들어간 재료를 살펴보니 한국 중국 일본 미국 인도 파키스탄 에티오피아 등 다양한 나라에서 왔다.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일본을 보는 시각은 여전히 국내에 갇혀 있다. 아직도 일제 식민지 시절의 시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한일 간에 놓인 여러 현안은 오래된 고질병이다. 쉽게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칫 잘못 건드리면 오히려 문제가 꼬이고 커진다. 급기야 국민들의 혈압은 높아지고 양국 관계는 악화일로를 치닫는다.
국익이 크게 훼손된다. 경제분야에서 평생을 살아와 한일관계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절감한다. 먹고 사는 일 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몇 가지 한일 간의 현안사항은 평생 안고 가야 할 고질병이라 생각하고 더 악화되지 않도록 잘 관리하며 사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세월이 약이다.
양 국민 의식의 저변에는 반일 혐한 감정이 도사리고 있다. 민족감정과 연계되어 휘발성이 강하다. 자칫 잘못 건드리면 폭발한다. 그리고 한 번 불이 붙으면 걷잡을 수 없다.
가해자 피해자로 상호 입장이 달라 서로 자기에게 유리한 내용만을 기억하고 이를 확대 해석한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진실이라고 확신한다. 절반의 진실을 100% 진실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양국 관계의 악화 속에서도 민간교류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것이 매우 다행스럽다. 상대의 매력을 알고 이를 즐기려는 사람이 늘고 있다.
1년에 1천만 명 이상의 양국민이 상대국을 방문한다. 그곳에 가면 정치권의 이념 공방이나 언론의 선정적인 보도가 얼마나 비현실적이며 공허한 것인지 깨닫는다. 답은 현장에 있다.
작금의 악화된 양국 관계를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루속히 정상화시켜야 한다. 정치권 경제계 그리고 언론이 적극 나서서 각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
이것이 국익에 부합하고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존경받는 길이다. 그리고 중국이 우리를 가볍게 대하지 못하게 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사 갈 수도 없는 한일 두 나라. 앞으로의 100년도 선린우호 관계는 지속되어야 한다. 그것이 상호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허남정 한경닷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