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련 金正連 (1895~1968)】 "전남 각지에서 군자금 모집, 중국 망명 후 공명단 조직"
1895년 9월 7일 평안북도 용천군(龍川郡) 양광면(楊光面) 충렬동(忠烈洞)에서 태어났다. 김정연(金正淵)·김광한(金光韓)·김유춘(金柳春) 등으로도 불렸다. 호는 진혼(震魂)이다.
용천군의 오암서원(梧岩書院)에서 7년간 한학을 배운 뒤, 평양의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와 숭실대학(崇實大學)을 졸업하였다. 숭실대학 재학 중 평안남도 대동군(大同郡)에서 황주군(黃州郡) 출신의 김화촌(金花村)과 함께 항일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연설을 하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혀 곤욕을 치렀다. 이어 숭실대학 3학년 때에는 상하이(上海)에서 활동하던 김홍서(金弘敍)와 비밀문서를 교환하며 독립운동을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평양감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평양의 숭덕소학교(崇德小學校)와 숭실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중 1919년에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혀 태 90대를 맞았다. 이후 의주 양실학교(養實學敎)에서 교원으로 재직하다가 1919년 8월, 전라남도 광주의 숭일학교(崇一學校)(현 광주숭일고등학교) 교사와 회계 담당으로 근무하며 항일 연설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혀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 6월을 받고 풀려났다.
또한 1920년 10월 부한청년단(扶韓靑年團) 단원 신덕영(申德永)·최양옥(崔養玉)·노형규(盧衡奎) 등과 더불어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 단원 전협(全協)과 연락을 하면서 전라남도 각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가 붙잡혀 징역 7년을 구형받았다. 그러나 1921년 5월 7일 공판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1921년 평북 선천군(宣川郡) 신성학교(信聖學校) 교원으로 1년을 지내고 그 후 만주로 갔다가 다시 신의주로 돌아왔다. 1923년 민립대학 의주지방부 위원, 1925년 신의주 기독청년회 이사 등을 맡았고, 1924년 시대일보사 강계지국장겸 기자, 신의주지국장 등을 맡으며 언론활동에 주력하였다.
1928년 김석우(金錫雨) 등과 연해주 남석동(南石洞)에 한인마을을 건설하여 동포들의 생활 안정을 기하여 독립운동 기반 확충을 위해 노력하였다. 다시 상하이·베이징(北京) 등지를 거쳐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부(太原府)에서 최양옥·안창남(安昌男)·이용화(李容華)·정동석(鄭東錫)·노중현(盧仲鉉) 등과 공명단(共鳴團)에 참여하였다. 이때 부단장에 선임되었고 단장은 최양옥이었다. 이후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스자좡(石家庄)에서 일제 밀정에게 붙잡혀 톈진(天津) 일본영사관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뒤 최양옥·안창남·신덕영과 북만주 부시현(布西縣)에 독립군 비행사를 양성할 비행학교를 세울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비행학교 설립 자금 모집과 서울에 공명단 지부를 설치할 목적으로 1929년 4월 단장 최양옥, 단원 이선구(李善九)와 함께 권총을 휴대하고 국내로 잠입하였다. 그 해 4월 4일 평안북도 용천군(龍川郡)에서 김인옥(金仁玉)으로부터 군자금 160원을 받았다.
1929년 4월 18일에는 최양옥·이선구와 서울 교외 양주군(楊州郡) 미금면(渼金面) 호평리(好坪里) 마석재(魔石峙)(오늘날 남양주 호평동 마치고개)에서 강원도 춘천(春川)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일본 우편물 수송차를 비롯해 모두 세 대의 자동차를 기습하였다. 우편물을 뒤져 군자금을 모으고, 일본인 우편물을 모두 불태워버린 다음 천마산 일대로 종적을 감추었다. 경기·황해·강원·충청남북 5도의 일제 경찰이 일본군 19사단의 지원을 받아 추적하자 양주군 화도면(和道面) 천마산(天摩山) 일대에서 1주일 동안의 악전고투 끝에 탄환이 떨어져 붙잡혔다. 1929년 12월 13일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징역 8년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35년 5월 19일 풀려나서 일제 경찰의 감시를 피해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백마산성(白馬山城)에서 화전민 생활을 하였다. 이때 소위 요시찰 대상으로 지목되어 매년 12월이면 예비 검속되어 경찰서 유치장에 있다가 이듬해 1월 6일에야 석방되었다. 그리하여 ‘섣달그믐이 없다’는 의미의 ‘무랍인(無臘人)’이란 별명까지 얻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정련(金正連, 1895.9.7 ~ 1968.10.23)
의열투쟁은 말 그대로 의로운 투쟁으로, 우리 역사에서는 일제강점기 국권 회복을 위해 벌인 목숨을 건 투쟁을 의미한다. 그 방법은 피압박 통치기관을 파괴, 마비시키거나 일본인 고급관료를 처단하는 것, 또는 독립자금 마련을 위해 현금수송 차량을 탈취하는 것 등 다양하다. 1909년 하얼빈역에서 조선침략의 원흉 이토를 처단했던 안중근 의사와 1932년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본군 총사령관에게 도시락 폭탄을 던진 윤봉길, 1932년 도쿄에서 일왕의 마차 행렬에 수류탄을 던진 이봉창 의사의 의거는 의열투쟁의 대표적인 예이다.
의열투쟁을 전개한 숭실 출신으로 김정련이 있다. 1929년 독립자금 확보를 목적으로 1929년 일본의 우편차량을 권총으로 습격하여 군자금을 마련하려 했던 대한독립공명단(共鳴團) 의거의 핵심 인물이다. 김정련은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자신의 집에 무단 침입해 가족을 강제로 쫓아내는 것을 목격한 후 배일사상을 갖게 됐고, 1915년 숭실대학 입학 이후 항일 투쟁을 본격화하여 일평생 투옥과 출옥을 반복하며 민족운동의 한길을 걸었다.
어려서부터 고향인 평북 용천군 양광면의 오암서원에서 한학을 7년간 공부했고,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평양의 숭실중학에 진학하여 1915년 제11회로 졸업했고 숭실대학을 1919년 제10회로 졸업했다. 숭실대학 재학 시〈숭실학보(崇實學報)〉창간호(1915년 9월)에 “20世紀活舞臺靑年諸君”과〈숭실문학보(崇實文學報)〉창간호(1916년 3월)에 “所謂 困難者는 鑄人之爐요 榮譽之母”라는 글을 발표하며 민족문제에 관심을 기울였고, 항일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연설을 한 탓에 수차례 투옥되기도 했다. 3학년 때에는 상해의 김홍서와 비밀문서를 교환하며 독립운동을 계획하던 중 발각되어 평양감옥에 구금되었다.
숭실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여 평양감옥에서 태형 90대라는 전근대 형벌을 받았다. 같은 해 전남 광주 숭일중학 교사로 있으면서 항일연설을 한 죄목으로 또다시 체포되어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1920년에는 김가진이 이끄는 대동단에 가입한 후 전남 각지에서 군자금 모금활동을 한 혐의로 징역 7년을 구형받았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출옥 후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 기반 확충에 힘쓰던 김정련은 산서성(山西省)에서 망명한 우국지사 최양옥,안창남 등과 함께 항일결사조직으로 공명단을 조직했다. 조직 목적은 조선의 독립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군자금을 확보한 후 3개 사단 7만 5천 명의 병력을 양성하여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함에 있었다. 이를 위해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활동하다 체포되어 천진감옥에서 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안창남과 함께 북만주에 독립군 비행사를 양성하기 위한 비행학교 설립을 계획하고 그 방책으로 국내에 공명단 지부를 조직하고자 1929년 4월 공명단원 최양옥, 이선구와 함께 국내로 잠입했다.
이들 3명은 평북 용천군에서 군자금 160원을 모금했고, 큰 규모의 자금 확보를 위해 권총으로 일본의 우편 차량을 습격, 탈취했다. 이 사건에 대해 동아일보는 1929년 4월 22일자에서 “본시 민족주의자로 폭탄권총으로 직접 행동… 백주에 권총을 들고 자동차 습격이라는 조선 미증유 대담한 범행을 한 3인단 권총…숭대 출신 김정련, 숭실대학 졸업 후 교원생활, 기미운동으로 징역도 했다.”고 하며 사건을 상세히 보도했다. 김정련은 일본군 19사단의 지원을 받은 일경의 추격을 받고 양주군 백봉산에서 포박됐다. 8년 만기 출옥 후 일경을 피해 평북 의주 백마산성 속으로 들어가 화전농사를 짓다 8·15 해방을 맞이했다.
일제는 화전민 생활을 하던 김정련을 요시찰인명부에 올려 놓고 매년 12월에 예비검속하였다가 1월 6일에야 석방했다. 이 때문에 지인들은 그를 ‘섣달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의 ‘무납인(無臘人)’이라 별칭했다고 한다. 정부는 1962년 그의 독립행적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한국기독교박물관 한명근 학예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