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화 ( 神 話) 단편소설
김 학 진
나는 신화가 기적을 이루는 이야기라든가 또는 없던 것을 새로 만들어 내거나 스스로 생겨난 것으로 이해해 왔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신화라는 것을 새롭게 알아내고 있었다.
신화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이고, 지금껏 살아 온 이야기들이라는 것이다. 그 중에서 여지껏 있어 온 신화보다 있어야 할 신화를 이루어 나가는 것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단군신화이니 바리데기이니 어느 왕이 알에서 깨어났다든가 하는 이야기들은 내가 어린 시절에 자주 들어서 이미 알고 있는 것인데, 비해서 요즈음의 내가 아는 신화는 ,그 괘를 달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여기서 그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곳은 미니학교라고 부르는 신도시 안에 있는 푸른들 초등학교이다. 그러자니 자연 내이야기는 학교에 대한 이야기요, 학생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주로 이루어내고 있다. 어린 시절에 내가 다니던 학교는 한강이 바라다 보이는 넓은 들에 학교가 서 있었고 수백 년이나 묵어서 나무의 나이를 헤아릴 수도 없는 아주 오래된 은행나무 두 그루가 운동장을 떡 버티고 서 있는 학교였다. 그 학교에는 몇 가지 이야기들이 졸업생들의 입을 통해서 전해 내려오고 있었는데, 비오는 날이면 교실 안에서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변소에서 붉은 손이 나와서 똥통으로 끌어들인다는 이야기들이었다.
학교에는 정문으로 들어가는 현관입구에 교훈이 적혀있었는데, 그것은 <의좋게>,<정성껏.> <부지런히 >라는 세 가지였다. 나는 그때 아마도 비오는 날이면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이야기는 형제가 서로 의가 좋지 못하여 싸움을 하다가 죽은 귀신이 비오는 날이면 우는가 보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 생각은 우리가 보는 앞에서 현실로 다가왔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정오의 햇빛이 강열하게 비치는 오후 1시경이었다. 구본흥 담임선생님이 쏜살같이 교문 안으로 뛰어 들어오더니 운동장을 곧바로 질러 현관 앞에 붙어있는 교장실문을 박차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아이구 교장선생님 나 좀 살려주십시오, ‘’
교장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애원을 했다. 얼굴이 흑 빛깔이었다. 잠시 후 뒤따라 온 군인 서너 명이 뒤쫒아 교장실로 뛰어들었다. 바닥에 꿇어앉은 구 본흥 선생을 마구 두드려 팼다. 마루바닥에 엎어졌고 서너 명이 구두 발로 마구 짓밟았다. 구 본흥 선생의 얼굴에는 코에서 피가 터쳐 나와 온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어서 최 교장의 근엄한 얼굴이 바뀌고, 고함치는 소리도 그들의 행동을 저지시키지 못했다. 그 군인들은 축 늘어진 구 본흥 선생을 땅바닥에다 질질 끌며 운동장까지 끌고 나왔다. 또다시 운동장에서 엎어진 그를 구두 발로 마구 짓밟았다. 교무실에서 선생들이 모두 뛰어나와서 이들에게 항거했고, 이 광경을 본 아이들이 교실에서 운동장 밖으로 뛰어나왔다. 잠시 후 경찰차와 헌병차가 오더니 구 본흥 선생과 이들을 붙잡아 차에다 태우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사건의 전말은 그 군인들은 학교 옆에 있는 특수부대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군인들이라고 했다. 처음의 시작은 구 본흥 선생이 그가 하숙을 하고 있는 집에 점심을 먹으러 갔는데 하숙집 주인의 딸이 길거리에서 군인들에게 희롱을 당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말리려고 뛰어 든 것이 싸움으로 번졌고, 군인들의 숫자가 많아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힘이 모자라 그만 학교로 쏜살같이 도망을 쳐왔다는 것이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싸움은 시작되었겠으나 우리들은 개를 두들겨서 때려잡듯이 ,군인들한테 매를 맞고 축 늘어져 운동장에 누워있던 구 본흥 선생의 모습을 생각을 하면서, 그가 이번에 우리학교 대표로 서울 시내초등학교 대항 축구대회에 나서기로 되어 있는데, 코치인 구 본흥 선생이 그렇게 되었으니 이미 우승은 다 틀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빗나갔다. 그것은 나의 마음에 충격일 뿐이었다.
우리학교의 축구팀이 우승을 한 것이다. 운동장에 쓰러져있던 구선생의 모습은 내 머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축구팀 중에 태경이와 기철이의 뛰어난 기술과 공차는 기술과 주력은 상대방 팀의 기술보다 앞서 있었다. 태경이는 몸집이 크고 운동력이 있었다. 태경이는 영양가가 듬뿍 들어있는 도시락 반찬도 맛있는 것만을 골라서 싸 왔는데, 집에서도 늘 고기반찬만을 먹는다고 했다. 다른 아이와 달랐다. 이를테면 미군부대에서 배급으로 주는 우유가루를 먹고 학생들은 모두 배탈이 나서 쩔쩔 매었는데도 태경이는 설사를 하지 않았다.
어느 날이었다. 내가 그와 같이 그의 집에 갈 기회가 있었다. 그의 집에는 방안에 침대가 놓여있었고, 식탁위에는 과일이랑 꽃들이 화병에 꽂아져 있는 문화생활을 하는 집안이었다. 문화적인 가정 분위기였다. 내가 물었다.
‘’야 ! 태경아 ! 니네 아버지 뭐 하시냐 ‘’
‘’ 엉 우리 아버지? 군인, 권총도 있다. ‘’
“정말? ‘’
‘’그래? ‘’
나는 깜짝 놀랐다. 여지껏 태경이 아버지가 군인이라는 것을 모르다가 오늘에야 비로소 처음으로 알았다. 태경이는 사진첩에서 권총을 찬 군인의 사진을 꺼내어 손으로 가리키면서 우리 아버지라고 했다.
‘’ 이게 우리아버지다 어때 멋있지, ? 이게 권총이야, 적을 때려눕히는 총이지. ‘’
그의 아버지가 군인이어서인지 그는 투쟁적이었고, 공을 몰고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모습이 유별나게 다른 선수들에 비해서 능숙하고 빨랐다. 그런 태경이가 상대방의 꼴 문에다 꼴을 넣은 것이다. 또 한 꼴을 넣은 애는 기철이였는데, 기철은 철길 옆 과일노점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허름한 건물 안에서 살았는데. 어머니가 사과를 팔았다. 홀어머니의 아들이었다. 기철이는 점심 시간이되면 다른 아이들이 싸 가지고 온 도시락을 빼앗아 먹기도 하고 심지어는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훔쳐 먹기도 했다. 아이들의 가정이 모두 형편이 넉넉치 못한 시기이어서 도시락을 두개씩 싸다가 줄 형편이 못되었다. 그러나 구 본흥 선생은 학교에 행사가 있어서 교직원들에게 도시락을 나누어 줄 때는 그것을 기철이에게 주기도 했다. 나무상자로 만든 도시락에 담겨진 밥과 반찬을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이 후딱 해치웠다.
나는 구선생의 하숙집을 자주 갔었다. 그의 심부름으로 가기도 하고 놀러가기도 했다. 어 느 날이었다. 그가 구민대항 친선체육대회의 축구선수로 대회에 참가한 다음날이었다. 구 선생은 어제 뽈을 차서 다리가 아프다면서 나더러 다리를 주물러 달라기도 하고 다리에 뭉친 근육을 풀어야 한다면서 다리위로 올라가서 팍팍 사정없이 밟으라고 까지 했다. 나는 그의 말대로 다리의 이곳저곳을 주물러 주기도 하고 다리위에 올라가서 사정없이 내리밟기도 했다. 구 선생의 다리근육은 아주 단단했고, 질긴 가죽 같은 근육으로 이루어진 다리를 가지고 있었다. 구 선생은 이미 축구선수로서 경남대표로 전국체전에 출전한 경험이 있었고, 고향인 진주에서는 잘 알려진 유명한 축구선수였다. 그가 진주에서 서울로 처음으로 올라왔을 때에 처음으로 느낀 인상은 감색양복에 검은색세타를 입었었는데 머리는 곱슬머리였고, 눈은 부리부리하고, 얼굴살결은 시커멓고, 사내다운 기상이 흘러넘쳤다.
그가 우리 반 학생인 학운이 네 집에 하숙을 하게 되었고, 학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전까지는 옥이라는 공주에서 갓 올라 온 선생과 함께 학교숙직실에서 자취를 하며 당분간 머물렀었다. 그러다가 하숙집을 얻어나간 곳이 내 친구 학운 네 집이었다.학부형 집에 머물게 된 것이다. 학운이 네는 딸만 여섯이었고, 그 가운데 큰누이와 작은누이는 이미 시집을 갔고, 셋째 누이가 혼기적령기였다.
구 선생이 하숙을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학운이 아버지는 그를 사위 감으로 마음에 두고 있었으므로 구선생의 하숙생활은 불편함이 없었다. 한결같이 융숭한 대접이었고 한 가족 처럼 어려움이 없이 지내게 되었다. 학운이 네 앞에는 우물이 있었는데. 이 우물은 동네사람이 함께하는 도당우물이었다. 도당 굿이 매년에 한 번씩 열리기도 했다. 도당 굿 날이 되기 전에 동네사람들이 모두 모여 우물을 깨끗이 청소하여, 정갈하게 만들어 놓고 굿판을 벌였다. 마을사람들이 함께라는 의미로 쓰여 진 도당장말 굿이 매년 한번 씩 행해지기도 했다. 도당 굿을 하기 전에는 동네사람들 모두가 나서서 우물을 깨끗이 청소했고 정갈하게 만들어놓고 굿 놀이를 해 나갔다. 우물에 얽힌 이야기로는 어느 날 새색시가 동네로 시집을 왔는데 3일이 지나고 이튿날 아침밥을 지으려고 우물가로 물을 길러나갔다. 우물 옆에 희고 예쁜 달걀이 있어서 그 달걀을 주으려고 하자 또르르 굴러서 옆으로 이동했다. 다시 잡으려 하니 그 달걀은 또 굴렀다. 달걀을 주으려고 쫓아간 곳이 한강 가였다. 달걀은 한강물속으로 들어가고 새댁도 물속까지 따라 들어갔다. 그 이튿날 날이 밝자 새댁은 강변에 시체로 누워있었다고 한다.
한날은 구 선생이 하루 결근을 하자 음악시간을 했다. 새로 전근해 온 여자선생님이 음악을 맡아 가르쳤는데 그 시간은 정말 음악이 흐르는 시간이었다. 여선생의 옴팍 패인 손등에 가느다란 손가락이 올겐에 건반을 두들길 때 마다 신기했다. 느리고 빠르게 여리다가 질풍같은 음을 내며 올겐 소리에 맞추어서 따라 부르는 노래는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우리들의 마음은 부프른 풍선에 태워 하늘을 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
“우리는 찬란한 새 역사의 창조자
피곤을 모르는 불사조의 날개라
그 노래 소리는 교실 밖까지 나가 교정에 울려 퍼졌다. 거리에도 화장실에도 퍼져나갔다.
구 선생이 군인들에게 얻어맞고 군화 발에 짖 밟혀 쓰러진 내 머리에 기억된 흔적들을 조금씩 지워내기에 충분했다.
음악시간이 끝나자 이번에는 김근대 선생이 들어왔다. 그는 국어시간을 대신해 주었는데 구담임 선생이 들려주지 않았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가 들려준 바리데기라는 이야기는 정말로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바리데기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살았는데 바리데기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장가를 들면 아들 9명은 낳을 수 있다고 해서 둘이 결혼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3년이 지나도록 태기가 없어서 공을 들이려고 삼신산에 가서 3일 동안 머물며 기도를 드렸더니 아기를 잉태하여 순산하니 딸 아기였다. 그 아기의 이름을 날 때 청비단에 쌓았다고 해서 청난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청난이가 3살이 되어서 이 부부은 또다시 삼신산에 가서 불공을 드렸더니 아기를 낳았는데 역시 딸이었다. 홍비단에 쌓았다고 해서 홍난이라 불렀다고 했다. 홍난이가 3살이 되어 또 부부가 정성을 드리니 태기가 있어 승산하였는데 이번에도 딸이었다. 그 아기는 백비단에 쌓았다고 해서 백난이라 불렀다. 딸만 셋을 낳았으나 이번에는 아들도 낳을까해서 다시 불공을 드려 낳았는데 역시 딸이었다. 그래서 지은 이름이 사예, 다섯째 딸은 오예, 여섯째 딸은 육예, 일곱째 딸은 칠예, 여덟 째 딸은 팔예를 낳았다.
그러자 아버지가 말했다.
“정성을 여덟 번이나 들였는데 딸을 여덟이나 낳았으니 정나미가 떨어지는 구나 요번 한 번만 정성을 더 들여 보고 또 딸을 낳거든 포기해 버리기로 하자”
부인과 딸 여덟을 데리고 모두 삼신산에 올라가 불경들 드리고 아기를 낳았는데 또 딸이었다. 아버지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이번에도 딸을 낳았으니 그 아기를 디딤 밭에 내다 버려라”
고 호령을 했다. 어머니는 명을 거역하지 못하고 아기에게 저고리와 치마를 입혀서 명주포대기로 쌓은 다음에 디딤 밭에 갖다버리고는 바리데기라는 이름을 짖고 탄식하며 돌아왔다. 바리데기는 아무도 돌보아 줄 사람이 없이 밭에 버려진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하늘에 학 한 쌍이 너울너울 내려와서는 한 마리는 한쪽 날개를 깔고 한쪽 날개로 덮어서 바리데기를 품어주고 한 마리는 음식을 물어다가 바리데기에게 주어 이리저리 길렀다.
어느덧 세월은 흘러 바리데기 부모는 딸 여덟을 모두 키워서 남의 집에 출가를 시킨후 아버지는 황달병에 어머니는 소한마리를 다 먹어도 또 먹는 아구 병에 걸리게 되었다.
온갖 약을 다 써 보았으나 이들에 병세는 점점 더해 가기만했다. 그래서 그들은 유모에게 비자씨 한테 가서 판수나 쳐보라고 시켰다. 유모가 비자씨 한테 가서 판수를 쳐보니 천살이 끼고 지살이 끼어서 천년을 두고 만년 술을 먹어도 낳을 수 없으나 서천서역국의 약물을 마시면 병이 완케 할 수 있다는 점 쾌가 나왔다. 유모는 부리나케 집으로 내려와
“서천서역국에 약물을 같다가 자셔야 병이 낳을 수 있으십니다”.
“그러면 누구를 보낼꼬?”
부부는 고민 고민하다가 여덟 딸들을 보두 불러서 물어보기로 하였다. 여덟 딸들이 다 모여지자 부부는 첫째 딸 청난이에게 물어 보았다.
“우리들이 너희를 키워 시집을 보낸 후에 이렇게 모진 병이 들었는데 서천서역국에 약물을 갖다 먹으면 낳는다고 하는 구나 청난아 네가 갔다오렴”
“저는 아들 장가 갈 날을 받아놓아서 못 갑니다”
“그러면 홍난이가 같다오렴”
“저는 딸들 시집보낼 혼처를 받아놓아서 못갑니다.”
“백난이는 어떻더냐?”
“저는 눈이 어두운 시부모님을 모시고 있는데 제가가면 누가 조석을 해드립니까?”
이렇게 딸 여덟이 모두 별의별 핑계를 다 대고 못 간다며 서둘러 시가로 돌아갔다.
부부는 유모를 불러 분부했다.
“전에 우리가 디딤 밭에 버렸던 가엾은 바리데기를 좀 불러다오 죽더라도 막내딸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구나”
유모는 디딤 밭으로 가서
“바리 데기야 바리 데기야”
하고서 세 번 찾았더니 바리데기는 누가 날 찾을까 그동안 하늘에 있는 학 한 쌍 외에는 나를 찾는 이가 없었는데 .....
그러다가 문득 자신도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아나지 않은 이상 부모님이 계실 것이니 혹씨 부모님께서 찾아오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보름달같이 어여쁜 얼굴을
살며시 내밀었다.
“누가 저를 찾아 오셨습니까? ”
유모는 바리데기를 보고 반가워했다.
“너희 부모님이 너를 찾으신다. 딸을 여러 날 찾았는데 아홉 번째로 너를 부르신다. 너를 이곳에 갖다버린 부모님이 병이 드셔서 곧 돌아가시게 되었으니 그전에 너를 한번 보고 싶다는 구나 그래서 이렇게 왔단다.”
바리데기는 이 말을 듣고 아리따운 자태를 나타내며 뛰어나가 유모를 따라 부모 집으로 왔다.
“불효효녀 용서하소서 부모님이 살아계신 것을 알면서도 진즉에 찾아와 뵈옵지 못해 대단히 죄송합니다.”
“아가야 어서 올라 오너라 디딤 밭에 갖다버린 우리아가가 이렇게 장성 했구나 너를 보고 죽으려고 이렇게 불렀다”.
그 후 언니 여덟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후 바리데기는 자기가 가겠다고 선뜻 나섰다. 바리데기는 온갖 고생을 다하여 물을 구해다가 부모의 병을 낳게 했다.
학운이는 나를 불렀다. 차안에서 내게 말했다.
“저 말이지 이번에 내가 부동산을 매매 했어 그런데 산값보다 조금 이문이 남았지 그래서 말인데 개척교회 힘들지 내가 지난번에 창립기념예배 때 가보니까 조금 힘들어 보이더군 그래서 말인데 내가 헌금하는 거야 자 이거 받아 ! 오백 만원이야 나는 천만 원을 하자고 하니까 아내가 고향교회에도 나누어 주자는 거야 힘든 건 도시교회나 농촌교회나 개척교회는 마찬가지 일 테니까 그러니 어쩌 겠어 그만 그렇게 하자고 했지 자 이거, 예배시간에 헌금함에 넣어야 할 테지만 내가 그때 갈 수가 있어야지 우리교회에도 직분이 있는 걸 그러니 이거 헌금으로 받아 그리고 한번 와 거 알지 왜 우리매형 4학년 때 담임선생 말이야”
“알지 구본흥 선생님”
“응”
“다 죽게 되었어”
“왜”
“중풍이야”
“그 당당한 체격을 가진 축구선수였잖아”
“그러면 뭘 해 나이들고 병들면 모두 마찬가지지 그러니 꼭 와 친척들도 많지 않으니까”
학운이는 바쁜듯이 찻집을 나와 휑당 그렇게 차를 타고 가 버렸다. 나는 그가 내 손에 쥐어준 헌금을 다시 만져보았다.
“자 헌금이야 오백만원!!”
빈집에 소들어 오는 격이었다. 학운이는 나와 초등학교 동창생으로 기독교교회 장로였다.
그가 동창들 몇이서 나를 찾아와서 우리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간적이 있었다. 아마도 마음이 안타까웠는지 내가 목회를 하고 있는 것이 고마워서였는지 다시 찾아와서 내게 헌금을 주고 간 것이다. 교회를 개척한지 십년이 지나도록 변변한 사례비 한번 받지 못하는 교회여서 친구가 보기에 얼마나 안타 까웠겠는가 교회에 하는 일이 헌금이 좌우하는 것은 아니나 빈민촌에 언덕배기에 스레트로 지붕으로 이은 무허가 건물의 교회가 오죽이나 했겠는가 그가 다시 연락을 하겠다더니 오늘 온 것이다.
그 이튿날 나는 그가 살고 있는 학교 밑에 있는 그의 집으로 그를 찾아갔다. 좁은 골목길이 넓은 길로 만들어 졌고 그 집 앞에 있던 도랑은 이미 메워져 흔적도 찾아 볼 수 없었고 향나무만이 몇 그루 그대로 우물터를 감싸고 있었다. 학교 운동장이 환히 들여다보이게 담을 모두 헐고 얕은 휀스로 된 담장이 쳐져 있었다. 그가 가게를 잠시 비우고 동네에 있는 목욕탕에 다녀온다고 나갔다는 것이다. 가게에서 나간지가 30분가량 되었으니 1시간 정도는 있어야 올 것이라고 경리아가씨가 말해주었다. 나는 잠시 기다리겠다며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를 들어가 보았다. 나는 학교운동장으로 들어섰다. 그렇게 높고 크게 보였던 학교건물이 예전보다 훨씬 작아 보였다. 이 건물을 모두 헐고 새로 지은 최신식 건물이었다. 나는 운동장 은행나무 아래 만들어 놓은 긴 나무의자에 앉아서 헐리어진 교사들을 생각해 내고 있었다.
학운이는 나를 데리고 신도시가 건설된다는 판교로 갔다. 구본흥 선생이 거기 있다는 것이다. 이미 10여 년 전에 부모님이 모두 서울 집을 정리해서 판교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는데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집이 비워있었다. 마침 구본흥 선생이 정년퇴직을 한지 여러 해가 되어서 누님과 함께 그곳에서 살게 했던 것이다. 딸들 다섯이 있는데 모두 시집을 가서 남편을 따라 외국에 나가서 살고 막내딸 하나만 진주로 한의사에게 시집을 가서 그곳에서 한약방을 경영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판교가 부모가 살던 집이라니 기억이 나는 것 같았다. 언제인가 여름휴가 때 동창들 몇이서 부부동반해서 야유회를 판교로 간적이 있었다. 시내가 흐르고 동산이 있는데 온통 과수원 이었고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고 하루를 보낸 적이 있었다. 부모님이 서울에서 내려와 사시는 집이 어렴풋이 생각났다. 한번 가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동창들 야유회를 한번 한 적이 있었잖아 그때 거기”
“어 그래 정말 한번 와 본적이 있었군 바로 거기야 그곳이 변해서 이제 신도시가 된 다지”
머리카락이 길게 두 귀를 덮었고 양 볼은 쏘옥 들어가 윤곽만을 드러내 놓았다. 그 육중한 체격 검은머리 날렵하게 움직이던 구본흥 선생은 이미 기력을 잃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 일어나 앉지도 못했다. 학성이가 나를 소개했다.
“매형 제자 김 돌석 내 친구 잖우”
구본흥 선생은 학성의 말을 듣고 나서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내 쪽을 조금 바라보다가 고개만 끄덕거렸다.
“선생님 접니다. 김 돌석입니다.”
내가 주물러서 근육을 풀어주던 그 다리도 근육이 모두 풀린 채 앙성한 뼈만 남아 있었다. 오랜 동안 동작을 하지 못해서 일 것이다. 한꺼번에 허무가 밀려오고 있었다. 커다란 짐승이 우지직 소리를 내며 쓰러지는 것 같았고 학교운동장에 있는 나무에다 링을 설치해 놓고 아침저녁으로 오르던 단련된 체력을 지녔던 구 선생이 아니었던 가 그런 그가 앙상한 뼈마디만 보이며 누워있는 것이다. 나는 언뜻 어떻게 하면 다시 그를 예전처럼 되게 할 수 있을까하고 생각해 보았다. 아무래도 할 수 없는 일 같았다. 그를 다시 예전처럼만 만들 수 있다면 그 방법을 찾아서 하고 싶었다. 나는 내가 그 동안 온갖 힘을 다 들여서 해왔던 생활의 한부분인 기도를 들여서 그를 예전처럼 회복시켜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생각해 보았다. 군인들에게 군화 발에 짖밟혀 운동장에 쓰러졌던 처참한 그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그는 이미 내 머리 속에 신화의 존재가 아니었다.
축구선수로 전국무대에서 활동했고 체육시간이면 강인한 체력과 우람한 성격으로 우리에게 운동을 강요하던 그가 아니었던 가 그런 그였는데 지금은 허물어져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을 해서 몇 년이 지났을 때였다. 초등학교 졸업식에 참석을 했다. 나는 미리 내가 졸업식에서 할 축사를 손수 써서 주머니에 넣고 갔다. 나는 졸업식을 하기 위해 장래를 정리하고 있던 구 선생에게 말했다. 내가 축사를 준비해 왔으니 졸업식에서 축사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구 선생은
“네가 할 수 있겠느냐?”
하고 물었다. 나는 미리 준비해 간 원고를 보여드렸다. 원고를 몇 장 읽어보더니 잠시 기다려라 내가 교장선생님에게 말씀드려보고 오겠다고 말했다. 구 선생은 내가 교무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동안 교장실을 다녀 나와 내 앞으로 오더니
“됐다. 교장선생님께서 허락하셨다. 잘 썼다고 하시더라 처음 있는 일이다. 잘 해 보거라”
나는 졸업식에서 축사를 했다 그러니까 중학교 3학년학생으로서 졸업생으로 축사를 하기는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구 선생님이 나를 그 자리에 세워 준 것이다. 내가 잘 할 수 있겠다고 믿고 운동선수 코치답게 나를 선수로 내어 보낸 것이다. 축구선수가 공을 차서 골대에 공을 차 넣듯이 내가 졸업식에 참석한 내빈들과 학생들 마음에 골인을 시킨 것이다.
학운이는 나의 손을 붙잡고 구본흥 선생이 머물고 있다는 동산 쪽으로 갔다. 그 곳 양지바른 곳에 콘테이너 박스가 일자형으로 놓여있었고 바둑이가 쾅쾅거리며 짖어 댔다.
“어딘데 이리와 ? ”
내가 학운이에게 묻자 손으로 콘테이너 박스를 가리켰다.
“어디? 저기!”
학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앞서서 언덕으로 올라갔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왜 이 산중에 있는 콘테이너 박스 안에서 살고 있을까?“
내가 머리를 저어가며 학운이의 뒤를 따라갔다. 문들 두드리자 촌 할머니 한 분이 내다보았다. 학운이의 누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구본흥 선생의 아내였다.
“왠일이냐”
김빠진 할머니의 목소리로 으아한 듯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뒤따라온 나를 유심히 훑터 보았다.
“누나 매형 제자야!! 오고 싶다고 해서 매형을 보고 싶다고 해서 그래서 데리고 온 거야 여기까지”
학운이는 내가 여기까지 찾아 온 이유를 둘러댔다. 자신이 가자고 해서 따라 온 것뿐인데 오히려 내가 원해서 온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어서 들어 오세여 원 예까지 허긴 제자라니까 선생님이 아파요 다 죽게 되었어요”
내가 컨테이너 박스 안에 들어서자 퀴퀴한 냄새가 내 코에 확 끼쳤다. 나는 그저 한 쪽에 환자처럼 누워있는 구본흥 선생을 바라 볼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정신이 없는 듯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선생님 제가 왔습니다. 김 돌석입니다. 김 돌석이요”
내가 큰 소리로 말해도 그는 눈만 꿈벅 거렸다. 이미 온몸에 기가 쭉 빠진 듯 했고 병색이 완연한 흑빛의 얼굴이었다. 그 옛날 운동장에 패대기쳐질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아니 교장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생기있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저 모든 것을 이미 체념한 듯한 어찌 보면 망연자실한 표정의 얼굴이었다. 다만 창문으로 비치는 겨울 한낮의 햇빛이 그의 얼굴에 비치고 있었다.
“오랫동안 편찮으셨나요?”
“응 벌서 3년째지”
“그렇군요”
학운이는 내개 매형이 병석에서 벌떡 일어나게 기도를 드려달라고 했다.
“기도를 좀 드려주지 매형을 위해서”
그때서야 비로소 학운이가 나를 이곳까지 데리고 온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러지 나는 온힘을 다해서 구본흥 선생의 건강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나는 그러면서 구본흥 선생이 군인들에게 몰매를 맞으면서까지 군인들에게 길거리에서 희롱을 당하는 처녀시절의 아내를 위험을 무릅쓰고 구해내던 그를 떠 올렸다. 축구코치가 없이 서울시대항 축구대회에 참가하여 우승을 하던 감격을 되살리고 있었다. 나를 알아보지도 못하는 구본흥 선생을 위해서 그가 쾌유되기를 위해 기도를 드렸다. 그런 다음에 그의 아내로부터 구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동안 해 놓은 일이 없어요 딸만 일곱 낳아서 시집보낸 것 뿐이예요. 교육자생활하면서 평교사로 정년퇴직하시고 여기에 내려오셨어요. 퇴직금으로 이 동산을 모두 사놓으셨어요. 여기에다가 특수학교를 짓는 다구요 딸아이 하나가 있는데 그게 병신이지 뭐예요 그래서 그런 아이들을 교육을 시켜보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이 땅을 마련했지요 그래서 이곳에 오신 거예요. 이집은 임시로 사무실로 쓰려고 갖다놓은 것인데 여기에 계시겠다고 하셔서”
나는 구본흥 선생이 누은 바로 벽 위에 걸린 한 폭의 액자를 볼 수 있었다. 그 그림은 학교를 지으려는 조감도였다.
첫댓글 코치없이도 축구경기 이길수 있다는 것이 대단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