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영세중립국 스위스, 190번째로 유엔에 정식가입
동서대립의 완충지 역할을 하며 영세중립국을 표방해 오던 스위스가 2002년 오늘 유엔에 190번째 정회원국으로 가입한다.
이로써 스위스 정부는 냉전시대에 평화협상 장소를 제공했던 중립국 지위를 벗고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새롭게 등장하게 됐다.
그러나 스위스 정부는 국제사회에서 중립성을 지키기 위해 어떤 국제적 군사동맹에도 참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1999년] 일본 대중문화 2차 개방 발표
일본 대중가요에 대해서도 빗장이 풀렸다. 박지원 문화관광부장관은 1999년 9월 10일 일본 대중문화 2차 개방 방침을 발표, “2000석 이하 규모 실내 장소에서의 일본 대중가요 공연을 허용한다”고 밝혔다. 박 장관은 또 영화 및 비디오 부문의 개방폭도 확대, “세계적으로 공인된 70여개 국제영화제 입상 영화와 온가족이 관람할 수 있는 '전체관람가' 영화들도 수입-상영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식품위생법령에 의한 식품접객업소(일반음식점 단란주점 유흥주점)에서의 일본 대중가요 공연과 공연실황의 방송, 음반 제작-판매 등은 허용하지 않았다. 또 영화 부문 중 애니메이션도 개방 대상에서 제외됐다.
박 장관은 “국민 정서와 국내 관련 업계에 끼칠 파급효과 등을 검토해 개방 수위를 결정했다”고 밝히고 “작년 10월의 영화와 비디오 부문 1차 개방이 우려했던 만큼 부정적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고 판단, 앞으로도 국내 대중문화의 질적 발전에 따라 단계적으로 개방폭을 확대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조선
[1996년] 유엔총회,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 채택
유엔총회는 이날 일체의 핵실험을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을 압도적 다수로 채택했다. 핵보유국 5개국(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과 한국 등 158개국이 찬성, 3개국이 반대, 5개국이 기권했다. CTBT 통과는 그동안 탐지가 어려웠던 우주공간 공중-수중실험에 대한 검증체제 도입과 지하핵실험 등 장소와 형태를 불문한 모든 실험 금지를 '세계의회'를 통해 명문화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CTBT는 국제원자력기구에 보고된 한국을 비롯한 44개 원자로 시설보유국(5대 강대국과 인도 이스라엘 파키스탄 등 핵개발 능력 보유국 포함) 전원이 서명,비준한 후 효력이 정식 발효될 예정이지만 각국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해 발효가 의문천품?있다. 북한은 이날 표결에 불참했다. /조선
[1986년] 한강종합개발사업 4년 만에 준공
1982년 9월 (28일)에 착공하여 1986년 9월 (10일) 준공되었다. 총사업비 9560억 원, 동원 연인원 420만 명, 동원 장비 100만 2천 대, 공사비 가운데 1962억 원은 한강에서 파낸 골재를 팔아 충당하였고, 하수처리시설에만 5427억 원의 공사비가 투입되었다.
이 사업은 크게 ①수로를 고정화·안정화시키는 저수로 정비를 통한 치수(治水)기능 확대, ②하천공간의 고도이용을 기하는 고수부지 조성 및 공원화를 통한 휴식공간 확보, ③안전하고 쾌적한 동서교통망을 확보하는 올림픽대로 건설(강변도로 확장), ④수질오염을 막아 한강물을 정화하기 위한 분류하수관로(分類下水管路)와 하수처리장 건설, ⑤유람선과 수상 레저·스포츠시설 등 수자원 이용, ⑥기타 관련 계획사업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저수로 정비와 수상 레저 시설, 김포대교에서 천호대교 부근 암사동까지 36㎞에 이르는 강바닥의 높낮이를 고르고 강폭 650∼900m, 수심 2.5m 로 정비하는 한편 상류와 하류에 각각 수량을 조절하는 수중보를 설치, 계절에 관계없이 수로에 항상 물이 꽉 차서 흐르도록 하여 하천의 경관을 아름답게 가꾸었고, 수상교통을 개발, 유람선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옛날에 유서깊은 나루터가 있던 행주·양화·마포·여의도·한강대교·한남대교·뚝섬·잠실 등에는 선착장이 설치되었고, 잠실대교∼광진대교 사이 155만㎡에 수상스키장, 광나루 750만㎡수면에 요트장, 뚝섬 유원지에 보트장이 조성되었다. /naver
[1974년] 기니비사우, 포르투갈로부터 독립
기니비사우는 1446년 포르투갈인(人)에 의하여 발견되어 포르투갈 최초의 해외식민지가 되었다. 17∼18세기에는 노예무역으로 번성하였으나, 포르투갈인은 식민지통치의 거점을 카보베르데에 두고, 이 식민지에 들어가 살지는 않았다. 19세기에 영국이 백인이 거주하지 않는 이 땅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한 바 있으나, 1870년에 미국의 제18대 대통령 U.S.그랜트의 중재에 의하여 포르투갈령으로 확인되었다.
1979년 이후 포르투갈은 식민지를 카보베르데로부터 분리하여 하나의 단위식민지 포르투갈령 기니로서 통치하였다. 1956년에 조직된 기니비사우·카보베르데 아프리카독립당(PAIGC)이 중심이 되어 1963년경부터 독립항쟁이 시작되었고, 1971년 여름부터는 독립준비가 추진되었다. 독립운동의 지도자 아밀카르 카브랄의 암살사건에도 불구하고, 1973년 9월의 전국인민회의는 독립을 선언하였다. 독립선언의 승인을 지연시켜 오던 포르투갈이 1974년 9월에 독립을 승인함으로써 기니비사우는 정식으로 독립을 성취하였다. /naver
[1962년] 조두형군 유괴사건 발생
← 신문에 실린 조두형군 유괴사건 기사
1962년 9월 10일 오후3시40분 경 서울 마포구 공덕동 175 조병옥씨의 큰아들 두형군이 실종됐다. 두형군은 이날 동네 친구들과 집 앞에서 놀다가 20대 청년 2명이 "아저씨 따라가면 맛있는 과자를 사주겠다"고 속여 데리고 간 후 소식이 두절됐다.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대통령권한대행인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은 담화를 발표 "두형군을 하루속히 집으로 보내줄 것"을 당부했다.
경찰이 두형군의 실종사건을 수사하는 가운데 모두 8차례의 협박편지가 왔다. 첫 협박편지는 9월 13일 10만원을 삼각지로 가져오라는 내용이었고 여섯 번째는 9월 15일 돈을 보자기에 싸서 도봉구 장위동 철로변 91호 전주 밑에 묻으라는 내용이었다. 여덟 번째는 20만원을 요구하며 자신이 보낸사람에게 20만원을 주면 두형이를 10분 후에 돌려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범인은 20만원의 몸값만 갖고 도주했고 경찰은 끝내 범인을 잡지 못했다. /조선
[1953년] 대한청년단 해체
1953년 9월 10일 이승만의 명령으로 대한청년단의 해산이 선포되었다. 대한청년단은 1949년 12월 19일 이승만이 자신의 취약한 정치적 기반을 유지·강화하기 위해 결성한 우익청년단체이다. 이승만이 총재직을 맡은 대한청년단은 광범위한 조직망을 이용해 200만 명에 이르는 단원을 확보함으로써 유일무이한 청년단체로 성장했다. 그러나 명목상 청년단체였을 뿐 주로 이승만을 지원하는 활동에 주력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은 대한청년단을 청년방위대로 개편해 향토방위에 투입시켰으며, 1·4후퇴 때에는 다시 국민방위군으로 재편해 국민방위군을 조직·이동·훈련시키는 임무를 맡겼다. 군사실무경력이 부족한 이들에게 과중한 임무가 맡겨지자 부작용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결국 일부 간부들이 국민방위군에 편성된 정부예산을 횡령해 수많은 청년들을 굶어 죽게 만든 '국민방위군사건'이 일어났다. 그 책임을 지고 5명의 주요 간부가 처형되면서 대한청년단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결국 1953년 9월 이승만은 향토방위를 목적으로 한 민병대의 창설과 전국의 청년들을 민병대에 규합한다는 내용을 발표했고, 이에 따라 대한청년단은 해산되었다.
[1951년] ‘라쇼몽(羅生門)’ 베니스영화제서 대상
←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이 1951년 9월 10일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이로써 일본영화와 동양영화가 세계에 처음으로 널리 알려졌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오즈 야스지로, 미조구치 겐지와 더불어 1950년대 일본영화의 전성기를 이끈 감독이다. 4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중학교 졸업 후 화가를 지망하여 18세 때 니카전에서 입선하고, 프롤레타리아 미술동맹에 참여하여 전람회에 출품하기도 한다. 그러나 1932년 궁핍한 생활과 피로 때문에 동맹에서 탈퇴하고, 동시에 좌익 사상에 대한 열정도 식어버리고 만다.
1936년에는 자립을 하기 위해 도호의 전신인 P.C.L. 영화제작사에 조감독으로 입사하는데, 주로 야마모토 가지로 감독 밑에서 조수로 일하며 극본 쓰는 법도 배운다. 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 도호에서 ‘스가타 산시로(姿三四郞)’로 감독 데뷔를 해, 1950년 중세를 배경으로 한 '라쇼몽(羅生門)'을 발표한다.
이 작품은 하나의 살인 사건을 배경으로 범인, 피해자, 목격자 등이 자신에게 유리한 각기 다른 4가지의 진술을 한다는 이야기로 인간의 에고이즘(이기주의)이 강렬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후 그는 ‘이키루(生きる)’(52) ‘칠인의 사무라이(七人の侍)’(54), ‘거미 집의 성(蜘蛛巢城)’(57), ‘요진보(用心棒)’(61), ‘붉은 수염(赤ひげ)’(65) 등의 작품을 남겼다. /조선
[1910년] 한말의 문장가 황현 사망
← 황현 영정, <한국역대명인초상대감>에서 발췌한 사진.
한말에 곧은 소리로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했던 황현 선생이 1910년 한일합병조약 체결 소식에 비통함을 금치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다 9월 10일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자결했다.
어릴 때부터 학문에 대한 열성으로 가득했던 그는 갑신정변 이후 민씨정권의 무능과 부패에 환멸을 느끼게 되자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귀향해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만 전념했다.
유교적 지식인으로 조선 말기와 한말의 사회상에 대한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그 중 유명한 것이 `매천야록(梅泉野錄)`이다. 이것은 1894년의 갑오농민전쟁과 갑오개혁ㆍ청일전쟁 등을 경험하면서 유교적인 입장에서 비판의식을 가지고 지은 편년체의 역사책으로 조선왕조 쇠망의 원인을 확인하고 갑오농민전쟁의 원인과 배경, 그리고 실상을 낱낱이 기록했다. 을미사변 전 매관매직ㆍ투기 등으로 얼룩진 명성황후의 행태를 고스란히 담아내기도 했다.
황현은 어려서부터 전통적인 유학ㆍ주자학을 공부했지만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주자학에 만족하지 못하고 20세 이후 양명학과 실학에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정약용의 학문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하면서 그의 재주와 실용을 중시하는 태도를 높이 평가했다. 이렇듯 그는 유자적(儒者的) 지배층적인 입장에서 갑오농민전쟁을 수습하고 정치를 개혁하려 했으며, 서양의 기술문명은 수용하되 유교적인 사상은 그대로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끝을 보지 못하고 이날 죽음을 맞았다./조선
[1860년] 유대인 역사가 두부노프 출생
← 두브노프(1921)
두브노프는 동유럽 유대인의 역사연구에 사회학적 관점을 도입한 유대인 역사가이다. 러시아 미스티슬라블(지금의 벨로루시)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시절에 이미 유대교 의식을 그만두었다. 유대교 신자가 아닌 그가 유대 역사가가 된 것은 조상의 신앙에 충실하기 위해서였다. 두브노프는 하시디즘을 최초로 체계적·객관적으로 연구했다. <하시디즘의 역사 Geschichte des Chassidismus>(1931)는 이러한 연구의 성과물이다. <유대민족의 세계사 Die Weltgeschichte des judischen Volkes>(10권, 1925~30)는 유대 역사의 사회적·경제적 흐름을 파악한 학문적 가치가 뛰어난 저서이다. 두브노프는 유대 역사를 자치가 계승된 역사로 보았으며, 이러한 자치론, 즉 디아스포라 민족주의를 <민족주의와 역사 : 신·구 유대주의>(러시아판, 1907)에서 피력했다. 1922년 볼셰비즘을 혐오해 베를린에 정착했지만 나치 독일의 반유대주의 때문에 1933년 다시 라트비아의 리가로 피신했다. 그는 이곳에서 나치에 의해 살해당했다.
[1855년] 독일의 건축가·고고학자 콜데바이(Robert Koldewey) 출생
1855. 9. 10 브라운슈바이크 블랑켄부르크암하르츠~1925. 2. 4 베를린.
성서에 나오는 반(半)전설적인 바빌론이 지리적·역사적으로 실재했음을 밝혔다. 터키 서부에 있는 고대도시 아수스(아소스, 1882) 및 근처에 있는 레스보스 섬(1885)을 방문하며 현지탐사 고고학자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이라크(1887)와 히타이트 제국 도시 사말의 유적인 터키의 진지를리휘위크(1888~92)를 탐사했는데, 이 유적에서 지표조사, 지도작성, 도면제작 및 유적복원을 준비했다. 또한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의 그리스 신전에 대한 방대한 연구를 했으며 1887~97년에는 독일 괴를리츠에서 건축을 가르쳤다. 1897년 독일 동방학회의 후원으로 실시될 대발굴을 위해 남부 이라크에서 바빌론의 유적지를 선정했다. 1899년 3월 26일부터 발굴에 들어간 그는 이후 18년 동안 거의 중단 없이 계속 일했다. 가장 극적인 발견물은 마르두크 신전 기단(基壇)이었는데, 이것은 지구라트라 불리는 계단 모양의 유구(遺構)로서 그 위에 천문관측대가 있었다. 또한 근처에서 놀라울 정도로 잘 설계된 우물이 딸린 아치형 구조물을 발견하고 그것이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바빌론 공중정원의 유허(遺墟)라고 믿었다. 그밖에 이 도시의 거대한 성채, 유명한 이슈타르 대문의 증거 및 마르두크의 신전에 다다르는 대로를 발견했다. 발굴 성과는 여러 해에 걸쳐 부분적으로 나뉘어 출간되었는데, 그중 하나의 영역본인 〈바빌론 발굴기 The Excavations at Babylon〉가 1914년에 출판되었다.
[1819년] 미국 발명가 하우(Howe, Elias)
1819. 7. 9 미국 매사추세츠 스펜서~1867. 10. 3 뉴욕 브루클린.
윌리엄 하우의 삼촌이다. 그가 발명한 재봉틀은 가정과 공장에서 의복제조의 혁명을 일으키는 추진력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기계에 관심이 많았던 하우는 기계수리를 배워 매사추세츠 주 로웰과 케임브리지 등지의 면방직기 공장에서 일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누구든지 재봉하는 기계만 발명해내면 큰 돈을 벌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5년 동안 하우는 모든 여가시간을 투자해 실용적인 재봉기를 개발해 1846년에 특허를 얻었다. 처음에 이 기계는 미국에서 거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큰 돈을 벌 가능성이 없자 하우는 영국에서 특허권을 250파운드(1,250달러)에 팔아넘겼다. 그는 영국으로 이사해 주당 5파운드를 받고 가죽 등의 두터운 감도 재봉질할 수 있도록 재봉틀을 개량하는 작업을 했다. 재정상태가 악화되자 그는 가족을 미국으로 되돌려 보냈다. 결국 그도 무일푼으로 미국에 돌아가 보니 그의 부인은 거의 죽어가고 있었고, 자신의 특허권을 침해하여 미국 내에서 재봉틀이 널리 제작, 판매중인 것을 알았다. 여러 차례의 소송 끝에 1854년 드디어 그의 권리가 확증되었고, 그때부터 특허권의 만기인 1867년까지 그는 미국 내에서 생산되는 모든 재봉기에 대해 로열티를 지급받았다.
[1796년] 우리나라 최초의 신도시 화성(현재의 수원) 완공
← 정조18년~20년에 화성을 축성하고 팔달산 동쪽에 행궁(行宮)을 건립했다. 정조가 화성에 도착해 머물렀던 행궁.
우리나라 최초의 신도시 화성(현재의 수원)이 2년 반 동안의 공사끝에 1796년(정조 20년) 9월 10일 완공됐다. 세계 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된 화성은 우리나라 성곽의 백미로 꼽히는 건축물이다. 당대의 모든 과학 기술과 역량이 동원된 이 성은 다산 정약용이 기중기를 이용해 축성의 모든 과정을 계획하고 감독했다. 성의 총길이는 4600보(5743m)로 서양식 축성법을 채용했고, 재료도 대형벽돌을 사용했다.
정조가 화성을 건설한 이유에 대해 벽파세력의 압박을 피해 화성으로 천도하려 했다는 ‘화성 천도설’이 있긴 하지만, 당쟁에 휘말려 비운에 간 아버지 세도세자를 추모하고 국왕으로 추존하려는 자신의 비원을 실현할 목적으로 건설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정조는 화성 건설과 함께 지금의 서울시립대 뒷산인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무덤을 지금의 화성군 태안읍 안녕리로 옮겼고, 통일신라 때 창건된 갈양사를 용주사로 바꿔 사도세사의 능사(陵寺)로 삼아 아버지의 넋을 위로했다.
정조는 신도시의 번영을 위해 한성부내의 재력있는 시전도매, 기타 부호들과 개성, 평양, 의주, 동래의 거상들로부터 이주신청을 받았는가 하면, 장사에 능하고 근면성실한 자 20인을 골라 계를 짜게 하고 이 계원들에게 관모와 가삼의 국내매매와 대중국 무역을 독점하게 했다. 정조의 강력한 의지는 인가라야 불과 5~6호 밖에 지나지 않던 삭막했던 들판을 1900년에는 약 2000호의 큰 읍으로 발전시켰고, 이 신도시는 2004년 현재 인구 100만여 명인 대도시로 성장했다. [1721년] 스웨덴-러시아 간 니슈타트 조약 체결
← 폴타바 전투/Denis Martens the Younger의 1726년 작품.
1721년 9월 10일 니슈타트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제2차 북방전쟁 중 스웨덴과 러시아 사이의 전쟁이 종결되었다. 제2차 북방전쟁은 16, 17세기에 스웨덴이 발트 해 연안에서 영토를 늘려나가자 이웃한 러시아, 덴마크-노르웨이, 작센-폴란드 등이 이에 반발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기회를 엿보던 각국은 1697년 스웨덴의 카를 11세가 죽고 당시 14세에 불과했던 카를 12세가 왕위에 오르자 반(反)스웨덴 동맹을 결성해 스웨덴에 맞섰다. 그러나 카를 12세의 연이은 승리로 반스웨덴 동맹의 위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1709년 7월 8일 전력을 재정비한 러시아 군대가 폴타바 전투에서 스웨덴군을 무찌르자 이를 계기로 반스웨덴 동맹이 다시 형성되었다. 전세는 역전되어 동맹세력은 1709년 가을 발트 해 연안의 스웨덴 점유지들을 빼앗기 시작했다. 카를 12세는 재기의 기회를 노렸지만 1718년 11월 프레데릭스할트 전투에서 전사했다. 후손이 없었던 카를 12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프레드리크 1세는 1719~21년 여러 차례의 평화협상을 추진했다. 니슈타트 조약도 이 평화협상들 중 하나였으며, 이 조약에 따라 스웨덴은 잉그리아·에스토니아·리보니아 및 핀란드령 카렐리아의 일부 영토를 러시아에 양보했다. 그 결과 발트 해 지역에서 스웨덴의 영향력이 약화되었으며, 러시아가 새로운 강자로 부상했다.
[1484년] 동국통감 간행
← 동국통감
1484년 9월 10일 조선 성종 때 서거정이 신라에서 고려까지의 역사 사실을 모아 편찬한 사서인 동국통감을 간행했다. 동국통감은 활자본이며 56권 28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권근의 '동국사략'으로 대표되는 기왕의 고대사 서술이 탈락된 것이 많아 이를 보완하려는 세종의 의지에 따라 1458년(세조4) 편찬작업이 시작되어 고대사 부분이 1476년(성종7)에 '삼국사절요'로 간행되었으며 1484년에 '동국통감'이 완성되었다. 여기에 사론(史論)을 보충하여 1485년 56권의 '신편동국통감'이 간행되었다.
편년체이며 단군조선에서 삼한까지를 외기(外紀), 삼국의 건국으로부터 신라 문무왕9년(669)까지를 삼국기, 669년에서 고려 태조18년(935)까지를 신라기, 935년부터 고려말까지를 고려기로 나누어 편찬하였는데 이러한 시대구분은 정통사상에 입각한 것이다. 신화와 전설적인 것이 배제되고 역사적 사료들을 발췌하여 서술하였으며, 고려기에서 세가(世家)와 열전 부분이 강화된 것은 정치의 주체로서 국왕과 신하를 중시하였음을 말해준다./조선
그 밖에
2001년 골프선수 박희정, 미LPGA 윌리엄스챔피언십 골프대회에서 우승
1998년 김우중 대우그룹회장, 제24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으로 추대
1996년 배타적경제수역(EEZ)법 발효
1994년 참여 민주사회와 인권을 위한 시민연대(참여연대) 창립
1994년 인천 송도 해상 신도시 기공
1987년 보험회사 전면개방
1983년 후세인 요르단 국왕 내한
1982년 소련, 국제전화 폐쇄
1981년 피카소 그림 '게르니카', 미국에서 스페인으로 반환
1981년 폴란드 노조, 자유비밀총선 촉구
1980년 시리아, 리비아 통합을 공식선언
1980년 미국, 중공에 군사장비 판매를 허가
1977년 사우디, 석유무기화 재선언
1976년 영국-유고 여객기 공중 충돌, 탑승자 176명 전원사망
1970년 상공부, 우리나라 처음으로 불량상품전시회(406개 업체 1,539점)
1963년 미국 흑인, 버밍햄 백인학교에 첫 입학
1963년 케네디 미국대통령, 앨러배마 주병(注兵)을 연방군에 편입
1960년 김종필 중령 등 육사 8기생 11명 현석호 국방장관에게 정군(整軍)을 건의
1960년 일본 NHK 등 8개 방송국서 컬러TV방송 개시
1960년 아베베, 로마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
1957년 헝가리문제 유엔특별총회 열어 대소(對蘇)비난 37개안 결의
1957년 국무회의, 김포비행장을 국제공항으로 지정할 것을 의결
1955년 프랑스-모로코 자치협정 조인
1954년 세계 청소년 교육과 구제에 힘쓰는 성프란치스코 살레시오회 한국 진출
1953년 주한미군, 송환 거부하는 14,000여명의 중공군과 84명의 북괴군 포로들을 비무장지대로 이송 시작
1952년 서독, 대(對) 이스라엘 배상협정(관계수복협정) 조인
1951년 인도, 대일(對日)전쟁 종결 선언
1946년 영국-소련 통상협정 런던서 조인
1946년 맥아더 원수, 일본 관리방침 성명
1946년 부산일보 창간
1943년 독일군 로마점령
1940년 나치 독일기, 영국 버킹검궁을 폭격
1919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 해체
1919년 상해임시정부, 임시헌법 제정공포. 대통령제 채택
1919년 사이토(齋藤)총독 문화정치 공표
1919년 화가 안중식 사망
1919년 상제르망 강화조약 체결
1917년 중국 광동군정부 수립. 대원수(大元帥)에 손문
1887년 이탈리아의 기독교민주당 대통령(1955-62) 그론키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