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날 때까지(우리는 하나다)
이예주
1. 들어가며
한국 성서신우회 외원으로서 일본무교회 전국집회에 참석하고, 그 밖에 나날의 일정에 따라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우리를 안내해 주신 야마모토 선생님의 뒤를 아주 가벼운 발걸음으로 따라다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감사합니다.
2. 일본무교회와의 추억
저는 일본어를 모르기 때문에, 한국성서신우회 총무이면서 저의 좋은 룸메이트였던 김복례 선생님께 일본에서 한 번, 귀국 후에 두 번 일본어 번역을 부탁하였던 사연을 중심으로 일본방문 소감을 말하려 합니다.
그 첫 번째는 4일 일본무교회 전국집회시 한국 참가자의 자기 소개에 대한 인사말이었습니다.
“하지메 마시떼, 와타시와 이예주데쓰.”
강당을 가득 채운 회원들의 해맑은 얼굴 표정, 저를 주시하며 집중하는 눈길 앞에서 비록 발음은 어색하지만 전날 밤부터 반복 연습한 대로 일본어 인사말을 할 수 있어 마음 흐뭇했습니다.
두 번째는 우치무라 선생의 ‘우리는 넷이다’라는 시입니다.
3일 9시 50분 하네다 공항에 도착하여, 버스로 1시간 이동 후 호텔에 짐을 맡기고 점심으로 연어정식을 먹고나서 첫째 일정인 이마이관 견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강당에서 이사장의 말씀을 들은 다음, 안내에 따라 칸막이 없이 나란한 도서관과 자료실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기모노를 입은 소녀의 커다란 사진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다가가 이름을 보니 ‘루쓰’였습니다.
루쓰!
그 순간, 꽃다운 나이에 먼저 간 루쓰를 그리며 우치무라 선생이 쓴 시, ‘우리는 넷이다’라는 시가 떠올랐습니다. 37년 전 유희세 선생님께서 그 시를 들려주셨습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습니다. 바로 전날, 저 역시 꽃다운 나이에 먼저 간 둘째 딸 장례를 치르고 날짜와 시간을 잊은 채 멍하니 앉아 있다가, 뒤늦게 예배를 보러간 탓에 지각을 하게 되었는데, 유 선생님께서 우치무라 선생이 딸 루쓰를 보내고 쓴 시, ‘우리는 넷이다’라는 시에서 가족 수만 다섯으로 바꾼 그 시를 읽고 계셨던 것입니다.
자료실의 루쓰 앞에서 떠올렸던 그 시를 다시 떠올리게 된 건 6일 다마공원묘지를 찾았을 때였습니다. 동행하신 시마지리 선생과 미토 선생이 관리소에서 챙겨간 청소 도구로 마치 살아계신 부모님 목욕시켜 드리듯 묘비를 솔로 먼지를 털고, 물로 닦아 내는 동안, 우리 일행 역시 갈퀴로 낙엽을 긁어모으고, 빗자루로 쓸어내는 대청소를 하였습니다. 물로 닦아 내는 대청소를 하고, 헌화하였고, 간단한 예배를 보고 단체 사진까지 찍었습니다. 저는 시골 작은 집 안마당보다 좁은 묘역을 둘러봤습니다. 우치무라가(家) 묘역 중앙에 묘비 둘이 한 발짝 사이로 나란한데, 오른쪽은 아들 묘비였습니다. 일행은 자연스럽게 중앙의 우치무라 선생 묘비에 모였습니다.
다마공원묘지는 백 년 전, 도립묘지로 조성되었다고 하는데, 어느 묘원이든 중앙에는 성씨를 큰 글자로 새겨놓아, 사잇길을 지날 때 쉽게 구별할 수 있었습니다. ‘內村家’라는 큰 글자 밑에 선생이 직접 썼다는 영문 묘비명, ‘나는 일본을 위하여, 일본은 세계를 위하여, 세계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고 모두는 하나님을 위하여’라는 글이 있었습니다. 그 아래 ‘아내, 자녀(루쓰)와 함께 잠들다’라는 문장이 묘비 앞에 가야만 볼 수 있는 작은 글씨로 씌어 있었습니다.
워낙 유명한 우치무라의 묘비명을 되새기며 묘역을 이리저리 돌아봤습니다. 묘역 왼쪽 가장자리에 또 하나의 묘비가 있었는데, 아주 큰 글씨가 보였지만 일본어를 모르는 나는 무심히 지나쳤습니다. 그때 누군가 옆 사람과 ‘다시 만날 때까지’라고 읽으며, 우치무라 선생이 딸 루쓰를 기리기 위해 직접 썼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발걸음을 멈추고 더 가까이 그쪽으로 다가갔습니다.
이 ‘다시 만날 때까지’는 분명 ‘우리는 넷이다’라는 시에서 따온 글귀라 생각되었지만, 시 전문이 가물가물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 시 전문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김 선생에게 자료가 있을 것 같아 메시지를 보낸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마사이케 진 선생의 ‘內村鑑三伝’을 찾아보고 번역하여 보내주겠다는 답이 금방 왔습니다. 짧지 않은 시라서 시간이 걸리겠구나 했는데 정확히 20분 만에 번역문이 와서 참 반가웠습니다.
제가 무척 보고 싶어 하던 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넷이다>
우리는 넷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역시 넷이다.
호적장부의 이름 하나는 사라졌고,
사각 식탁의 한 자리는 비었으며,
4부 합주에 하나가 빠져
찬송가의 조화가 흐트러졌지만,
아직 우리는 역시 넷이다.
우리는 지금도 역시 넷이다.
땅의 장부에는 이름 하나가 사라졌으나,
하늘 기록에 이름 하나가 심어졌다.
세 번의 식사자리마다 공석이 생겼지만,
남은 셋은 더 가까워졌다.
그녀는 지금 우리 마음에 있다.
한 사람이 셋을 묶는 사랑의 줄이 되었다.
언제까지나 이렇지는 않으리라.
우리는 이후에 전처럼 넷일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울릴 때,
잠자는 자가 모두 일어날 때,
주께서 다시 이 땅에 임하여 주실 때,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올 때,
우리는 다시 넷이 되리라.
(聖書之硏究 139호, 1921.2.10.)
세 번째는 ‘고향’이라는 노래입니다.
다마공원묘지를 다녀온 그 날 오후, 이마이관에서 환영회가 있었습니다. 시작 전 여유시간에 안내인을 따라 1층의 도서관을 돌아보았습니다. 한국어 도서 칸에서 저의 남편(최병인 님)이 2002년 창간호를 발간, 2021년 5월 마지막 94호로 막을 내린 ’성경말씀‘이 차례로 꽂혀있는 걸 보았습니다. 집에도 보관하고 있긴 하나, 생각지 못한 곳에서, 그것도 우치무라 선생을 기리는 이마이관의 대도서관에서 그렇게 만나고 보니 마치 고향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습니다.
한 권을 가슴에 품고 활짝 웃는 얼굴로 사진을 찍어 큰딸과 아들에게 보냈습니다. 그 순간 우리 가족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4일, ‘복음에 살다’라는 주제로 한국과 일본의 무교회인이 함께 예배를 본 것처럼!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를 1절은 한국어로, 2절은 일본어로, 3절은 각자의 언어로 함께 부른 것처럼! 그 찬송을 부를 때 눈물이 났었다는 일본 분과 한마음으로 눈물을 흘렸던 것처럼!
환영회에서는 우리 11명을 포함하여 24명이 예술적으로 잘 만든 2층 도시락과 과자, 음료수를 앞에 하고 둘러앉았습니다. 앉은 차례대로 인사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일본에 처음 왔지만, 세 분 선생님을 만나니 일본이 낯설지 않았다고 마음을 전했습니다.
“야마모토 선생님은 서강대 어학원 유학시절인 2003년(선생님이 60세였을 때), 저의 남편(최병인 님)과 박찬운 선생, 그리고 저도 함께 부석사라는 절에 다녀왔었습니다. 가을 이맘때였는데, 주변 과수원에 사과가 빨갛게 익어 탐스럽던 정경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반나이 선생님은 한국에 오셨던 어느 날, 남편을 졸졸 따라다니던 제게 아주 예쁜 스카프를 선물해 주셨습니다. 지금도 아껴서 잘 쓰고 있습니다.
모리야마 선생님은 유희세 선생님 집회에서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고려대 대학원 유학 시절, 주일마다 뵙던 분을 오랜 세월 지나 다시 보니, 마치 어렴풋이 머릿속에서나 떠오르곤 하던 고향 친구를 만난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말을 마치고 앉았더니, 제 곁에 있던 분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향’ 노래를 불러주었습니다. 미리 나눠준 악보를 보며, 조용히 허밍으로 곡의 멜로디를 따라불렀습니다. 어디선가 한 번 들었던 곡이었습니다. 한일교류의 초창기, 모리야마 선생님이 자신의 학교 학생들 열 몇 명을 인솔해 왔을 때, 단정하고 예쁜 모습으로 합창했던 노래가 이 곡이었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가사의 한자로 미루어 볼 때, 고향을 그리는 시가 분명하나, 제대로 알고 싶어 김 선생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1・2・3절의 한국어 가사를 받아 읽어 보았습니다.
1절. 토끼를 쫓아 달리던 산/ 작은 붕어를 낚던 강
꿈은 지금도 돌고 도는데/ 잊을 수 없는 고향
2절. 어찌 지내시나요, 부모님/ 잘 있는가 친구들
비바람에 젖어도 / 잊을 수 없는 고향
3절. 마음을 다하여/ 언젠가 돌아가리
산이 푸른 내 고향/ 물이 맑은 내 고향
3. 맺으며
우리들의 뒷바라지를 해주어 조금이라도 나은 일정이 되도록 애써준 일한청년우화회 여러분과 한국성서신우회에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