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모지서 철강신화를 이루다
자금부족·정국혼란… 제철소 건설 계획 5차례나 무산
탁월한 리더십·강력한 추진력 사상 초유의 신화 창조국가 주요산업의 기틀 마련… 대한민국 경제발전 견인
여기서 유래한 ‘우향우 정신’은 당시 포스코인들의 각오를 담은 표현으로, 몇 사람의 사표나 희생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거대한 역사적인 작업에 동참했던 자부심, 자신들을 다스리는 채찍과도 같은 것이었다. 특히 1970년 가장 먼저 착공한 열연공장 건설이 지연되자 열연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103만 톤 규모의 1기 설비를 예정보다 1개월 앞당겨 39개월 만에 준공했다.
제철소 공기 단축은 박 명예회장의 성공에 대한 자신감·집념·열정과 함께 그만큼 원료 재고비용을 절감해 현금흐름을 빠르게 할 수 있다는 데 큰 의미가 있었다. 임직원의 강인한 정신력과 불굴의 투지로 다른 회사들이 통상 4~5년 만에 건설하던 제철소를 포스코는 2~3년 만에 건설했다.
따라서 1기 건설에 소요된 톤당 투자비도 다른 회사의 톤당 500달러에 비해 절반 수준인 260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전통은 광양제철소 건설에도 계속 이어졌다.
박 명예회장은 공기업 체제에 따르는 비효율과 부실의 여지를 막기 위해 조직의 자율과 책임문화 정립에 특히 중점을 두었으며 이러한 책임의식은 자연스럽게 완벽주의로 연결됐다.
박 명예회장은 “직원들의 주거가 안정되어야 정상적인 회사 업무가 가능하고, 장기간의 건설기간 동안 안심하고 현장에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주택과 자녀교육 문제까지 근원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며 공장을 짓기 전에 직원 주택을 먼저 짓도록 했다.
▶정부, 기업, 국민이 합심 노력한 성과
포스코의 탄생과 성장은 조국 근대화라는 국가적 비전과 강력한 실천의지를 가진 최고통치권자, 최고경영자, 국민적 공감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1968년 11월 제철소 부지 조성공사 현장을 처음 시찰한 이후 11년 동안 무려 13차례나 포스코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은 각종 인사청탁 등 정치권 압력을 원천 봉쇄하는 방파제 역할을 했다. 당시 설비 및 원료 구매와 관련된 여러 업체가 구매에 개입하기 위해 유언비어와 역정보를 퍼뜨리는가 하면 정치권도 설비구매 시 일정률의 리베이트를 요구하는 등 심한 압력을 받았다.
이에 박 명예회장은 정치권의 압력 배제와 함께 설비공급업자 선정의 재량권 인수 등을 골자로 하는 내용을 메모에 적어 박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박 대통령은 후일 소위 ‘종이마패’로 불린 이 메모에 친필 사인을 해 외부 압력을 차단해주는 등 포스코의 출범과 조기정착을 위해 모든 정치적·행정적 지원과 신뢰를 보여줬다.
1973년에는 제철설비 중 최첨단인 포항 1연주공장 설비구매 시 국제입찰을 통해 오스트리아의 푀스트가 공급사로 선정됐으나 국제 설비 브로커의 모함으로 박 명예회장이 약 4개월에 걸쳐 수사당국의 조사 및 가택 수색까지 받아야 했다.
결국 무고함이 밝혀지자 박 명예회장은 고귀한 민족자산을 건설하는 데 브로커의 농간이나 정치권력의 개입은 용납할 수 없다는 강력한 의지로 사의를 표명하는 등 단호하게 대처했다. 박 대통령도 사안의 중대성을 보고받은 후 관련인사들을 호되게 문책했다.
포스코의 탄생은 박 명예회장의 총체적이고 자주적인 정치력과 외교역량의 결집이었다. 박 명예회장은 일관제철소 건설을 위한 자금·기술 문제 해결을 위해 야와타제철·후지제철·일본강관 등 일본의 철강3사를 방문해 경제 및 기술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일본 정부 각료와 유력 인사들을 만나 협조를 구하는 등 공식·비공식으로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여 포스코 탄생의 돌파구를 마련했다. 또한 자립경제를 향한 국민적 열망은 중앙정부는 물론 지방자치단체, 정부 산하기관들의 아낌없는 지원과 협력을 이끌어냈다.
이처럼 정부·기업·국민의 합심과 노력은 일관제철소 건설이라는 소중한 결실을 맺었으며 출범 당시부터 숱한 어려움에 직면하면서도 포스코가 세계 최고 수준의 철강회사로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한국 경제발전을 뒷받침하는 버팀목
포스코의 역사는 한국경제의 성장사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1970년대 우리나라의 생존전략은 중화학공업 육성과 대외수출 진흥이었으며 이러한 전략의 성공 여부는 철강산업 발전에 달려 있었다.
포스코는 조업 개시 이래 품질 좋은 철강재를 공급함으로써 조선·가전·자동차 등 국가 산업발전의 근간이 되는 주요 관련산업이 선진국 수준으로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70년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은 박 명예회장을 찾아와 포항제철소에서 생산할 후판을 소재로 사용하는 조선소 건설 입지에 대해 문의했는데 박 명예회장은 후판은 운송비 부담이 크니 울산이 적당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처럼 포항제철소 건립 초기에는 고객과 공급사가 서로 협조해 상호 발전방향을 공유했다.
포스코가 국민경제에 미치는 파급효과는 여러 부문에서 계측될 수 있다. 현 산업의 생산물에 대한 최종 수요 변화가 산업 전체의 생산에 미치는 영향을 나타내는 생산유발계수에서 포스코는 1980년 2.65, 2003년에는 2.34로, 전 산업평균 1.68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다. 이는 포스코 철강제품에 대한 신규수요가 10억 원 발생할 때 유발되는 각 산업의 생산은 23억 4000만 원 증가하는 데 비해 서비스업에 대한 신규수요가 10억 원 발생할 때 유발되는 각 산업의 생산액은 15억 9000만 원밖에 증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철강산업은 전후방산업 연관효과가 매우 큰 대표적인 기간산업이다. 모든 산업에서 최종수요가 1단위씩 증가할 때 특정 산업의 직·간접적인 생산증대 효과를 나타내는 전방연관효과를 보면 타 산업에 비해 매우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또 특정 산업에서 생산된 제품에 대한 최종수요가 1단위 증가할 때 경제 전체에 미치는 직·간접적 생산증대 효과를 의미하는 후방연관효과도 철강산업이 2000년 1.27을 기록한 데 이어 2003년에도 1.31로, 전 산업 중에서 영향력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상적인 산학연 연구개발체제 구축
박태준 명예회장은 일찍부터 연구개발의 중요성을 인식해 1986년 포항공대(현 포스텍)를, 1987년에는 포항산업과학연구원(리스트)을 설립함으로써 포스코-포항공대-포항산업과학연구원을 축으로 하는 산학연 연구개발체제를 구축했다. 이는 국내 최초의 산학연 연구개발체제로, 산업계 전반에 걸쳐 새로운 기술개발 모델을 제시했다.
포스코의 4년제 대학 설립은 1980년 광양제철소 건설 계획 때부터 구상됐다. 고급두뇌 양성이 절박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우수한 인재들을 육성해 국가발전에 이바지하고자 한 것이다.
포항공대는 박태준 설립이사장과 포스코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1986년 12월 국내 최초의 ‘연구중심대학’을 표방하며 설립됐는데 학사운영정책, 신입생 선발 등에서 당시 사회 분위기로는 생각하기 어려운 획기적인 정책을 과감하게 추진함으로써 국내 정상의 대학에서 세계가 주목하는 대학으로 성장했다.
당시 문교부는 ‘신설대학은 개교 후 3년까지 후기로 학생을 모집한다’는 방침에 대한 특례를 적용하고, 학력고사 성적 280점 이상의 학생만 응모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지원자격 제한 건을 파격적으로 승인해줌으로써 세계 일류 대학을 설립하겠다는 포스코의 강한 의지를 인정하고 지원해줬다.
박 명예회장은 1973년 포항 1기 설비 준공 당시 경쟁력 확보와 순조로운 설비확장을 위해 기술자립이 시급하다고 판단, 국내외 전문 연구기관 운영현황을 면밀히 조사·검토해 1977년 1월 기술연구소를 설립했다. 이어 1987년 회사 부설 연구소에서 산업과학기술연구소(현 리스트)로 확대하면서 독자적인 철강기술 개발을 더욱 촉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포스코는 현재까지도 제철소 건설 및 조업을 통해 축적한 경험과 기술, 포스텍의 기초과학 연구, 리스트의 응용 개발연구 수행 등을 결집해 ‘기초과학-응용개발-현장적용’을 유기적으로 연계해 기술경쟁력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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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강 연산 1140만 톤 체제를 구축한 광양제철소.(1992.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