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잡한 서울답지 않게 고즈넉한 동네가 성북동이다.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삼선교역)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성북동 비둘기’로 유명한 동네가 나온다.
1980년대쯤에서 시간이 멈춘 듯한 장면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이곳에는 성북동성당(가톨릭) 길상사(불교) 덕수교회(개신교)가 지척에 모여 있다.
#단풍이 절정이던 지난해 10월 세 종교단체의 신부, 스님, 목사와 신자들이 어울려 공동 바자회를 열었다.
장소는 성북초등학교 운동장. 고미술 전시회가 열리면 장사진을 이루는 간송미술관 바로 옆이다.
지난여름은 이명박 정부와 특정종교 간 대립으로 우리 사회가 혼란의 도가니였다.
비슷한 시점에 열린 이 바자회는 당시엔 큰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흥미로운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1000여 명이 참여해 종교 간 벽을 넘어 이웃처럼 친구처럼 행사를 치렀다. 소장품도 함께 진열했다.
바자회를 마친 후엔 함께 덕담하며 행사장을 말끔히 청소했다.
이날 참여한 한 신자는 “행사 시작 이전보다 더 깨끗해진 모습에 마음까지 정갈해진 느낌이었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수익금은 불우학생 장학금 등으로 ‘뜻 깊게’ 쓰였다. 호응이 좋자 세 종교단체는
이 행사를 매년 열자고 뜻을 모았다.
이 동네엔 천주교 수도원도 여럿 있다. 크지 않은 사찰도 꽤 많다.
한 동네에 여러 종교단체가 몰려 있지만 두루두루 ‘믿음과 상생의 꽃’을 피우고 있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서로 격려하는 행사가 자주 열린다.
성탄절 즈음에는 길상사 등 사찰 앞에 아기예수 탄생을 축하하는 플래카드가 걸린다.
부처님오신날에는 성북동성당과 덕수교회 인근에 석가탄신 축하 현수막이 등장한다.
그뿐만 아니다. 서로 꽃을 보내기도 하고 축하방문도 이어진다.
성북동성당의 정복근 총회장(평신도회장)은 “지금 옆에 있는 사람에게 애정 어린 손길을 내밀고
배려하는 것이 사랑의 출발점”이라고 했다.
이 같은 ‘성북동 화합’의 뒤안에는 얼마 전 선종(善終)한 김수환 추기경의 발자취가 선명하다.
추기경은 길상사 개원법회(1997년)에 이어 2005년 이 사찰에서 열린 ‘사랑과 화합을 위한 음악회’에
축하의 메신저로 자리를 함께했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법정 스님을 명동성당으로 초대해 법문을 청하는 등 일찌감치 종교 간 우의의 씨앗을 뿌렸다.
#김수환 추기경 추모 물결이 한창이던 19일. 무언가에 이끌려 명동성당으로 향하는 끝 모를 조문대열에 섰다.
실제로 새치기 소란 짜증이 없는 3무(無)대열이었다. 성인(聖人)이 따로 없었다.
그 대열엔 스님도 적지 않았다. 원불교 고유의 복장도 눈에 띄었다.
그날 명동성당 내 추모미사에서 기자의 시선을 한참 붙잡은 것은 여승으로 보이는 스님의 하염없는 눈물이었다.
그곳에는 이미 내 종교, 너희 종교가 따로 없었다.
설익은 고구마처럼 우리 삶이 더욱 팍팍해지고 있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톨레랑스(다름을 인정하는 것)가 더욱 절실한 때다.
김 추기경이 자주 불렀다는 대중가요 ‘애모’가 훌륭한 성가(聖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시나브로 깨닫는다.
“그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오늘은 울고 싶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