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을 품고 혼자 날아가는 새의 목소리
낭만적이고 쓸쓸한 목소리로 기억에 얽힌 시 세계를 노래해온 심재휘 시인이 7년 만에
새 시집 『중국인 맹인 안마사』(문예중앙시선 032)를 묶었다. 1997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현대시 동인상 수상 시집 『적당히
쓸쓸하게 바람부는』(2002)과 『그늘』(2007)을 펴내며 ‘유년 시절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애착과 그리움을 그려냈다’는 평을 받아온 심재휘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도 특유의 소슬한 기풍이 돋보이는 시편들을 선보인다.
새 시집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장면들은 낯선 이국의
풍경들이다. 이번 시집의 절반은 시인이 캐나다에서 체류할 때 쓴 ‘북쪽마을’ 연작시로 이루어져 있다. “참 알 수 없는 것들로만 가득한 머나먼
하늘 아래”(「선셋 비치 파크」)에서 시인은 “집 없는 자의 눈처럼 좁고 깊은”(「손바닥 우물」) 우물에 비친 풍경을 써 내려간다. 이 이국적인
풍경을 담은 시편들을 두고 해설을 쓴 이홍섭 시인은 “이국 풍경 속에서만 자신의 내면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시인이 현재 몸담고
있는 현실과 불화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라 평하며 “그를 생각하면 소슬한 적산가옥 한 채가 떠오른다.”라고 덧붙였다. 점령지에서 적국
사람들이 살던 집을 뜻하는 적산가옥은 숙명적으로 이중국적을 껴안은 건축물이다. 오랜만에 새 시집으로 찾아온 심재휘의 언어는 적산가옥과도 같은
이국적이고 투명한 슬픔의 정서로 빛난다.
저자 : 심재휘
1963년 강릉에서 태어났다. 고려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고, 1997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적당히 쓸쓸하게 바람부는』(2002), 『그늘』(2007)이 있다. 제8회 현대시 동인상을
수상했다. 현재 대진대 문예창작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1부 ∥ 지저귀던 저
새는
옛사랑
중국인 맹인 안마사
지저귀던 저 새는
징검돌 위에서
세월이 가면
변방에서
초당이라는
곳
샤파 연필깎이
어떤 무늬
이별
건너편 가을
안개인간
울음의 집
가난
그림자와 이별하다
오리온
크래커 별표 스티커
달걀 같은 잠
이별 후에는
스타게이트
폐정
황금빛 마개
돌멩이의 곁을
지나왔네
청도관
호두나무 한 그루의 마을
그믐달
나에게로 파도가 친다
늦은 밤에 거는 전화
청춘
백 년만의
폭설
2부 ∥ 북쪽마을에서의 일 년
전나무 숲 속의 자작나무 한 그루
찬 밤하늘을 멀리 날아가는 한 마리
새
뒷마당의 새벽달
그 마당의 사과나무
눈 내리는 한밤의 전나무 숲
밤기차 이야기
흐르는
방
아침들
서머타임
크레센트 빌리지
꿈도 없이
북쪽마을의 봄나무
기차가 간다
서쪽행 편도
제스퍼 가는
길
두 번째 이별
언덕들의 세계
선셋 비치 파크
빈 의자의 깊이
숲 속의 피크닉
손바닥 우물
인디언
서머
열쇠와 필름과 무덤
효과 빠른 종합 감기약
이민
얼음 평원
주유 그리고 주유
폐정, 유년의 풍경을 담은
우물
보리밭에 누워 마지막으로 눈을 떠보는 바람
뒤란 우물에서 한없이 퍼 올리던 앵두꽃 피는 저녁이며
담장에 기대
올려다보던 구름의 질주여
마르지 않고 흩어지지 않던 날들이여
―「폐정」 부분
세상을 떠돌다 마지막으로 보리밭에 눕는
바람이 바라보는 풍경은 마르지 않는 우물에 앵두꽃 피는 저녁이 비치는 고즈넉한 풍경이다. 이 풍요롭고 훼손되지 않은 ‘맑은 우물’의 세계는
오래전에 집터였던 곳, 즉 시간이 멈춘 과거이다. 시인의 유년과 관계된 풍경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유년이란 시간이 멈춘 자리이며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세계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돌아 나오지 못하는 저 문”(「스타게이트」)을 열고 유년을 지나 단숨에 성인이
되고 만다. 이 유년의 나와의 이별을 통해 사람은 풍요롭고 훼손되지 않은 세계를 떠나보낸다. 그 이별이 존재론적인 현실과의 불화로 이어지며,
시인에게 슬픔을 안겨주는 것이다. 이제 “맑은 우물을 기억하는 자의 최후란(…)바람을 불러 잠재우는/폐정 하나를 갖는 것”(「폐정」)밖에
없다.
유년인 나와의 이별을 통해 이별을 알아버린 시인은 “한평생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것은/멀어지는 이별 후의 다시 다가오는 이별”(「두
번째 이별」)밖에 없다고 쓴다. 그에게 삶이란 이별을 반복하는 운명의 여로이다. 그는 자신과, 아이와, 눈앞의 당신과 이별하며 먼 곳으로 간다.
이별의 삶이 슬픔이라는 인식은 “순식간에 웜홀을 지나/슬픔이 없는 어느 은하의 별로”(「스타게이트」)라는 구절에서 보이듯이, 이 별을 떠나가는
우주적 상상력에까지 확장된다.
그 자체로 온전한 세계였던 유년을 떠난 이후부터 “유빙처럼 흘러”(「흐르는 방」) 다니며 울음의 시간들을
살아온 심재휘는 “그대가 즐겨 앉고 떠난 한 자리에”서 “저렇듯 만질 수 없는 의자의 깊이”(「빈 의자의 깊이)를 발견한다. 큰 울림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물론 심재휘의 시는 언제고 떠나간 것들을 위해 노래 불리겠지만, 그대가 떠난 자리에 “오늘은 가을 저녁 빛”(「빈 의자의 깊이」)이
앉는 것도 놓치지 않는다. 이런 서늘함 가운데서도 느껴지는 따뜻한 시선이, 그늘을 만드는 곳에는 언제나 빛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