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평사리와 최 참판 댁
구례에서 버스를 탔고 평사리에서 내린 나는 최 참판 댁이 있는 곳으로 걸어 오른다. 잘 포장된
도로와 넓은 주차장. 잘 정돈 된 건물들과 식당 그리고 매점들. 최 참판 댁이 있는 곳까지 줄지어
서 있는 그런 건물들을 보면서 마음이 편하지 않다. 하지만 점심을 먹지 못한 나는 그 중간의
어느 작은 매점 안에서 국수를 파는 곳으로 들어선다. 국수를 한 그릇 시켰는데 바로 그 자리에서
뽑아서 끓여준다. 맛은 괜찮았지만 마음은 별로였다.
고대광실, 최 참판 댁을 보면서 느낀 것이다. 그 집 뒤로 빼곡하게 서 있는 대나무 밭, 저곳으로
윤씨 마님이 연곡사에 갔다가 얻은 아들 구천과 최 치수의 부인 곧 서희의 어머니와 함께 도망간
곳이리라. 마당으로 들어서니 문득 귓전에 봉순이를 괴롭히던 서희의 앙칼진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고 최 치수의 거친 기침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최 참판 댁 담 곁에 서서 평사리 들과 섬진강을 내려다본다. 그 들이 참으로 넓다. 저 많은 땅에서
얻은 수확이 얼마일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 끝에 보이는 섬진강, 아마 저 강변의 어느 모퉁이에
서 용이는 배를 타고 읍내로 나간 월선이를 그리며 서성였을 것이다. 아니 깊은 밤 평사리를 기억
하고 조그만 보따리 하나 가슴에 안고 그 섬진강 줄기를 따라 배를 타고 되돌아오는 월선이의 저린
가슴과 눈물 흔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최 참판 댁을 지나 조금 위로 오르니 평사리 토지 문학관이 있다. 하지만 내가 간 날이 휴일이었는지,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나는 건물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평사리 주민들의 집이 깔끔하게
정돈된 상태로 그 주변에 다닥다닥 붙어서 세워져 있는데 나는 그것을 보면서 마음이 불편했다.
왜 이렇게 꾸며놓았어야 하는지,
내 생각으로 도로는 비포장이었어야 했고 입구로부터 늘어진 매점들은 없어야 했고, 주민들의 집은
최 참판 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마련했어야 했다. 아니 소설 자체가 박경리님이 이곳을 지나치다가
구상하고 쓰게 된 허구라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이미 토지 그 자체의 문학적 자산을 생각했더라면
평사리의 모습이 그런 식으로 오밀조밀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닐까?. 차라리 매점 같은 것들은 구별해서
따로 입구 쪽에 자리하게 하면 어떨까? 동화사. 용문사. 같은 곳으로 가면 매점들은 언제나 그 입구 쪽
에 자리한 것을 보면 말이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평사리 들을 섬진강 쪽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서 있는 곳으로부터 섬진강
까지는 걸어서 얼마나 걸릴까? 한 시간으로는 안 될 것 같아 보인다. 그 당시 평사리 사람들은 섬진강의
배를 타기 위해서 새벽 밥 지어먹고 걸었을 것이다. 하긴 나 어릴 적 십리 길의 논에 가는 길도 걸어서
다녔으니 그 당시에 걷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인식하고 살았을 것이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은 나 말고 여자 한 명이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그 곳의 사람은 아닌 것 같
은데 어째 혼자 여기서 버스를 기다라고 있을까? 잠시 그 생각을 넓혀보았다. 아주 작은 단편 소설 하
나는 쓸 수 있을 것 같지만 아직 정리하지 못한 글들이 많다는 생각 때문에 포기하고 만다. 버스가 오고
있다.
하동 터미널은 하동의 중심가에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큰 시장이 있었고 주변에 큰 건물들과 상가들이
즐비하다. 구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같은 읍이라는 조건임에도 하동이 도시라면 구례는 소도시라
고해도 괜찮을 것 같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