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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겹의 노래
이 문 열
삶은 쓸쓸하다. 또는 쓸쓸하지 않다. 아니, 쓸쓸하지 못할 것도 없다. 잔디밭에는 소녀들이 비둘기가 되어 내려앉아 있고, 허공에 뿌리박은 나무들은 잔인한 겨울의 예감으로 불안하게 일렁인다. 대지의 끝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녀들은 이제 잎새가 되어 공원의 돌담 너머로 흩어진다. 나무의 잔뿌리들이 늙은 탄금사(彈琴士)의수염인 양 나부끼며 추억 같은 먼지를 핏기 없는 하늘에 뿌린다.
“날씨가 차군.”
수의(壽衣)를 걸친 젖은 석고상같이 벤치에 기대섰던 사내가 그 곁에 허상(虛像)처럼 앉은 여인에게 축축한 목소리로 말한다. 너무 긴 사내의 오른편 다리는 세 번이나 집혀 벤치 모퉁이에 얹혀 있다. 삭아 가는 뼈 색깔의 피부에 코를 입술까지 드리운 여인은, 그러나 사내 쪽이 아니라 담 너머의 우중충한 건물을 향해 대답한다.
“마음이 춥기 때문일 거예요.”
“아니야.”
사내는 여인의 메마른 목소리를 흐트러 버리기나 하듯 단호하게 부인한다. 눈길은 어느새 여인이 보고 있는 건물에 가 있다.
“저기를 봐. 눈이 오고 있잖아?”
“하지만 그 꼭대기를 봐요, 햇빛이 눈부시지 않아요?”
여인은 약간 호소하는 말투다. 그러나 사내는 오히려 그 당돌함에 흠칫하며 한동안 말이 없다가 이내 머리를 끄덕인다.
“그렇군, 햇빛을 받아 온통 금빛이군.”
“네, 정말 눈이에요. 건물 밑둥은 이미 거멓게 젖어 오고 있군요.”
사내가 선선히 말을 바꾸자 여인도 까닭 없이 풀이 죽으며 이번에는 자기의 말을 뒤집는다. ‘하지만 금빛으로 번쩍인다 해서 차가움의 반대라고는 할 수 없지. 내일 다시 떠올라야 할 피로가 우연히, 건물 꼭대기에 얼룩진 것뿐이야.’라고 말해 주고 싶던 사내는 거기서 문득 할 말을 잊는다.
그사이 그들이 보고 있는 건물은 조용히 그날 몫의 침몰을 가라앉힌다. 도회의 그쪽은 매일 한 자씩 땅속으로 꺼져 든다. 들리기에 사람들이 그 밑에서 너무 많은 것을 파내 땅 위에다 쌓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자리, 아득한 옛날에 석회(石灰)의 강물이 흘러가고, 다시 그 위를 열 길이나 되는 고사리가 무성하던 자리, 몇 천 년 전에는 늙은 소나무들이 비바람에 부대끼고, 승냥이며 고라니가 떼를 지어 노닐기도 했다. 그 어디엔가 백 년 전에 지쳐 죽은 당나귀
도 묻혀 있어, 만 년쯤 지나면 사람들은 그 뼈를 유리 그릇에 담아 늘어놓을 것이다.
“생각나세요?”
문득 그리움을 충동질하는 눈길로 여인이 그렇게 물어 오지 않았더라면 사내는 자칫 그 당나귀 얘기를 꺼낼 뻔했다. 하지만 생각만으로는 아무도 남을 해치지 않는다. 사내도 시치미를 떼고 그녀의 물음에 대한 성의만 표시한다.
“무얼?”
“그때 말이에요. 우리가 처음 만날 무렵.”
“생각나지.”
“벌써 삼 년이나 됐어요. 그날 집집마다 창틀에 활짝 핀 제라늄 분(盆)들을 내놓고 있었지요.”
그렇게 말하는 여인은 이미 허상이 아니었다. 똬리 틀듯 움츠러져 있던 목은 어느새 우아하게 길어지고 입술까지 흘러내렸던 코는 꼭 한 치 위로 올라붙는다. 바람만 불면 바스라져 날아가 버릴 것 같던 머리칼에도 윤기가 비치고 삭아가는 뼈 같은 빚을 띠고 있던 뺨에는 제법 혈색까지 아른거린다. 그러나 사내에게는 그 같은 변화가 마음에 거슬린다.
“나는 집집마다 붉은 등을 내건 줄 알았는데. 아니면 지저분한 분홍 커튼 자락들이 창밖으로 휘날렸거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는 걸 상기시키려고나 하듯 사내의 말투는 느닷없이 심술궂어진다. 그래도 여인은 열기가 더해진 목소리로 잇는다.
“당신은 이 벤치에 앉아 계셨지요. 저는 말없이 빗긴 노을을 쳐다보고 있는 그 모습에서 상처 받은 외로운 영혼을 느꼈어요”
“권태기에 접어든 중년 남자의 사치 스러운 외로움에다 배은(背恩)과도 같은 상심과 외로움이었어요.”
“그렇다면 비뜰어진 욕정의 냄새였을 테지. 그 무렵 내 속옷은 언제나 몽정 (夢精)으로 축축했었지.”
“이런 오늘을 예감케 하는 것은 아무 데도 없었는데…….”
“어쩌면 너무 분명 했기 때문에 예감조차 없었는지도 모르지.”
그러다가 사내는 어느새 삭아 가는 뼈 빛깔로 돌아간 여인의 얼굴에서 늘어 가는 푸른 금을 보고 불현듯 안쓰러움을 느낀다. 그 같은 대꾸는 쓸데없는 감정의 과장에 지나지 않음도. 그 바람에 사내는 앞말과의 연관을 거의 생각하지도 않고 성급하게 덧붙인다.
“하지만 당신은 정말 아름다웠소. 전에 만난 적이 있다는 걸 미처 생각해 낼 수도 없었을 만큼. 그야말로 눈이 부실 지경이었지.”
“시들기 직전의 처연함이 종종 꽃의 아름다움으로 착각되기도 하는 법이에요.”
이번에는 여인의 앙갚음이 시작된다.
“그래도 재치 있고 발랄했어.”
“늦도록 독신으로 남겨진 여자의 허세였겠죠.”
“아니, 당신의 지성과 심미안은 분명 남달리 반짝이는 데가 있었소.”
“남자도 아이도 없이 삼십 년쯤 두리번거리다 보면 여자라도 이것저것 세상 일을 알게 되는 수도 있죠.”
그래 놓고서야 여인의 목소리가 품고 있던 칼날은 무디어진다. 입가에까지 그물처럼 덮여 있던 푸른 금들도 차츰 쓸쓸한 미소로 바뀐다. 그러나 사내는 이미 물에 젖은 석고상으로 돌아간 뒤였다. 얘기하는 동안 무심코 쭉 펴는 바람에 오른편 다리는 반 넘게 땅 속에 파묻혀 있고, 수의 같은 외투 속의 허술한 입성들은 마침 불어온 한 줄기 바람에 해져 너덜거린다. 관자놀이 어름에는 어느새 자줏빛 버섯도 하나 돋아 있다. 그걸 본 여인이 갑자기 절반으로 줄어 들며 말한다.
“죄송해요.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괜찮아, 나는 기분 상하지 않았소.”
“아, 이런 만남으로 이끌어 가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러더니 여인은 문득 앞뒤 없는 비탄에 젖어들며 묻는다.
“아무것도 달라진 건 없잖아요? 도대체 그때와 무엇이 달라졌어요?”
“세월이 낭비되었소. 지나치게.”
사내가 간신히 입술만 움직여 대답한다.
“그걸 낭비로만 여겨야 해요? 의미로 채웠다고 보면 안 되나요?”
“공허한 의미야.”
“원래가 공허한 삶이에요.”
“그래도 우리에게 함부로 공허해질 권리는 없어.”
그러자 여자는 한동안 말이 없다. 그사이 하늘은 점점 검푸르게 내려앉고, 나지막한 공원의 담은 부패하는 시체 같은 고동색으로 누워 있다. 뜻밖의 새가 한 쌍 그 담을 뚫고 날아와 그들의 머리 위를 돌다 수직으로 솟아올라 검푸른 하늘을 찢고 사라진다. 무한 속으로.
“윤리가 무엇일까요?”
새를 쫓는 사내의 몽롱한 눈길이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기다려 여인이 다시 한숨처럼 묻는다.
“우리가 도덕적이 된다누 거요.”
“자유로워지는 것이지. 우리가 우리들 자신으로 충일되는 것이지.”
사내가 턱없이 으스대며 답한다. 자신 있게, 그러나 곧 우울하게 정정한다.
“묶이는 것이지, 우리를 비워 남으로 채우는 것이지.”
“자유로운 우리를 채우면 안 되나요?”
“그걸로는 우리의 관(棺)밖에 채우지 못해.”
“그게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 줘두요? 또는 낡고 억지스러운 세계를 부수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두요?”
“대단하다고 해도 관을 비어져 나와 무덤을 꾸미는 정도겠지. 새로운 관을 땅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그러는 사내의 어깨 어름에서는 해져 너덜거리던 입성들이 바람도 없는데 조각조각 눈송이처럼 흘러내린다. 앙상한 빗장뼈가 드러나고, 아득한 옛날 여자에게 빼앗겨 버렸다는 갈비뼈 자리에는 피멍 같은 그늘이 져 있다.
“우리를 비워 남으로 채우면 어떻게 되나요?”
그렇다면 할 수 없지만요, 하는 조건문(條件文)을 한숨으로 대신한 여인의 물음이다.
“오래. 편안하게 살겠지.”
“그뿐인가요?”
“근엄하고 경건하게 늙을 수 있을 거야. 함부로 쓸쓸해할 권리도 있고, 세상을 향해 큰 목소리로 떠들어도 어느 정도는 참아 주겠지.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내의 회색빛 이마에도 검푸른 금이 거미줄처럼 어지럽게 얽힌다. 이어 목소리는 여러 개의 동굴을 거쳐서 들려오는 상처받은 짐승의 신음인 양 낮고 처량해진다.
“하지만 또…… 지루하고 피곤할 거야. 삶은 삼십 초마다 한 번씩 벗어서 팽개치고 싶은 짐짝같이 느껴지겠지.”
사내는 진심으로 음울하다. 듣고 있는 여인은 당연하게 또는 느닷없이 절망적으로 슬퍼진다. 금세 부스러져 내릴 듯이 푸른 잔금으로 뒤덮인 코 아래는 검고 깊은 그늘이 파이고, 열린 창문처럼 휑한 안공(眼孔) 저쪽에는 구십 억 의 뇌세포가 슬픔으로 파들거리는 게 보인다.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는 오른쪽 다리를 땅속 깊이 늘러 박으며, 사내는 그런 여인에게서 눈길을 돌려 의미 없이 사방을 둘러본다. 조금 전의 바람에 묻어 온 듯한 빨간 소년들이 한 줌 짓궂은 눈길을 그들의 벤치에 뿌려 놓고 어디론가 날려 가고, 잎새처럼 가믓없이 사라졌던 소녀들은 다시 하얀 비들기가 되어 공원의 잔디밭에 내려앉는다. 여러 해 전에 죽은 이들의 뼈가 얼음 공으로 작은 공터를 굴러다닌다.
사내의 눈길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여인의 몸에서 우러난 슬픔의 빛은 무슨 요염한 휘장처럼 그녀를 둘러싸고 있다. 그 엉뚱하게 선정적인 모습에 당황한 사내는 얼른 눈길을 맞은편 담벽으로 돌린다. 그런데 고동색으로 죽어 있던 담벽에서 갑자기 분홍빛 여인의 두 다리가 피어오른다. 이어 검붉고 거대한 수말이 그 곁에서 힘차게 달려 나오고, 오래잖아 서로 얽힌 둘은 페가수스가 되어 천랑성(天狼星)을 향해 솟구친다. 그들을 축복하기라도 하듯 담벽 여기저기서 금빛 팬지 꽃이 피어나 순식간에 우중충한 고동색을 묻어 버린다.
보고 있는 사내의 아랫도리는 까닭 모르게 달아오른다. 백열(白熟)된 귀두(龜頭)가 너덜거리는 바지 앞자락을 태우며 비어져 나온다. 상사목은 아직 시뻘겋게 달아 있을 뿐이지만, 백열은 머지않아 그 부근 전체에 번질 듯하다. 사내는 자신의 그 같은 변화가 느닷없는 탓인지, 무안함을 감추기나 하려는 듯 벤치에서 몸을 떼며 입을 연다. 한껏 심각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이미 칙칙한 고혹(蠱惑)이 깃들어 있다.
“그래도 우리는 노예고 또 주인이지.”
여인은 아직도 푸르스름한 슬픔의 안개에 싸여 있긴 하지만 그 슬픔은 계산된 것인 듯하다. 마치 사내의 그 같은 변화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그 선정적인 슬픔의 휘장을 헤치고 나온다.
“맞아요. 선택당하지만 선택할 수도 있어요.”
“삶을 채우는 것도 죽음을 꾸미는 것도 우리 스스로의 일이지.”
“이 땅의 마지막 판관(判官)은 결국 우리 자신이죠.”
그리고 여인은 몸을 일으킨다. 그녀를 일으킨 한 줄기 생기는 금세 도발적인 섬광이 되어 비어 버린 것 같던 두 눈을 채운다. 그제야 사내는 그녀가 헤치고 나온 휘장이 하나의 그물이었을지 모른다는 의심에 어렴풋이 젖어 들지만, 별로 불쾌한 기색은 없다.
“가요. 우선 이곳을 떠나요.”
“하긴 그래. 우리가 너무 황량한 곳에 와 있군.”
“변해서는 안 돼요. 자유를 향해 가요.”
“맞아. 자신의 선택을 책임질 용기만 잃지 않으면 돼.”
“그게 끝내는 관을 채울 뿐일지라도 두렵지 않아요.”
“관을 넘쳐흘러 우리의 무덤을 온통 장미꽃으로 뒤덮을 수도 있을 거야.”
“어쩌면 개선비(凱旋碑)로 남을 수도 있을 거예요. 자기가 친 덫에 자신이 걸려 고통 받는 이들에겐…….”
여인은 과장의 혐의를 받을 만큼 한층 고무적으로 속살거리며 앞장을 선다. 사내도 땅속 깊이 박혀 있던 다리를 서둘러 빼내며 흔연히 뒤를 따른다. 이 둘의 발밑에서 귀엽고 색정적인 사향노루 한 쌍이 불쑥 솟아올라 그들의 머리를 타 넘고 갑자기 짙어진 부근의 관목 숲으로 사라진다.
사내와 여인은 쓸쓸한 초겨울의 공원을 말없이 빠져나온다. 출입구 난간에 걸려 있던 제복과 제모가 그들이 일으킨 바람에 공손하게 나부낀다. 거리는 텅 비어 있고, 시커멓게 골조만 남은 건물들 사이를 들쥐 떼만 이리저리 몰려다닌다. 무너져 내리는 교회의 첨탑에 술 취한 시인이 빨래처럼 나부끼며 노래하고 있다. 아아, 신(神)은 어디 가고 우리만 남아 눈물짓고 있나. 우리는 어디 가고 신만 남아 눈물짓고 있나. 눈물은 어디 가고 우리만 남아 신을 짓고 있나…….
후미진 골목 모퉁이에 이르렀을 때 사내는 잠시 이게 아닌데, 하는 표정이 되어 걸음을 멈춘다. 그러나 후줄근한 노을 속에 떠다니는 여자의 장밋빛 젖가슴과 컴컴한 건물 그늘에서 두 눈만 번쩍이는 검은 수소 떼가 묘하게 그를 충동하고, 사내는 가볍게 개뿔 같은 사유(思惟)의 추격을 벗어난다.
“뭘 하시려는 거예요?”
몇 발 옮기지 않아 다시 걸음을 멈추고 길가의 불타다 남은 가로수 그루터기에 수의 같은 외투를 거는 사내에게 여인이, 그러나 크게 이상하게 여기는 기색 없이 묻는다. 사내는 대답 대신 쭈그리고 앉더니 매끈하게 거리를 덮고 있는 아스팔트를 손톱으로 후벼 파기 시작한다.
잠깐 동안에 완강하던 아스팔트는 갈기갈기 찢어지고, 사내는 오랜 상처에서 딱지를 떼 내듯 찢어진 아스팔트 껍질들을 하나씩 벗겨 나간다. 신기하게도 그 밑에서는 빠알간 흙이 돋아나는 새살처럼 드러난다.
“무얼 하시느냐니깐요?”
여인이 가만히 다가와 사내 곁에 나란히 쪼그리고 앉으며 되풀이해 묻는다. 그러나 전혀 모르겠다는 뜻이 아닌 것은 그사이 달라진 모습만으로도 알 만하다.
삭아 가는 뼛빛이던 그녀의 뺨에는 수채의 실지렁이들처럼 가늘고 붉은 핏줄들이 아련히 일고 있다.
“당신과 성합(性合)을 나누었으면 해. 모든 결 잊고, 질펀하고 흥건하게.”
사내는 여전히 쇠꼬챙이 같은 손톱으로 아스팔트를 후비며 능청스레 대답한다. 지극히 근엄한 얘기를 할 때처럼 제법 이맛살까지 찌푸리며. 여인은 그런 사내의 뻔뻔스러움을 정직 한 화냥기로 받아들인다.
“좋은 생각이에요. 지금 같은 때에 우리가 할 알맞은 일이죠. 그런데 여기서?”
“그래, 여기서. 나는 지금 대지의 뼈를 모으고 있어. 그걸로 돌담을 둘러쌓을 작정이지, 원래 성합은 남들이 보는 곳에서 하지 않기로 되어 있거든.”
“지붕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그건 필요없어. 하늘 위에 있는 것은 신뿐이니까. 하지만 이제 그도 어디론가 가 버렸다고 아까 누가 노래하지 않았어?”
여인이 정말 그렇군요, 하는 듯 입을 다물자 사내도 말없이 흙만 후빈다. 공처럼 둥글고 여러 색깔을 한 자갈들이 흙 속에서 빠져나와 사내를 중심으로 가지런한 돌담을 이루기 시작한다. 개중에는 녹색의 원뿔도 있고, 감람색의 육모 기둥과 석류알 빛을 띤 육십사면체도 섞여 있다.
그런데 잠자코 그것들로 엉성한 담을 쌓고 있던 사내가 무얼 보았는지 문득 두 눈을 번쩍이며 일손을 멈춘다. 도회 저편의 지평선 끝에 떠 있던 한 조각 쪽빛 바다에 눈을 팔고 있던 여인이 호기심에 차 사내의 손안을 살핀다. 부스러지기 시작하는 은빛의 돌조각이다.
“뭐예요?”
“이게 여기 있었군. 오래 찾았었는데.”
“뭐길래요?”
“내 어깨뼈야. 수룡(獸龍)이 나를 삼킨 뒤 영영 찾지 못했지. 그게 여기에 묻혀 있었군.”
“이제 그걸 찾아 무얼 하게요?”
“내 관을 위해 필요하지. 이게 없으면 나중에 염하는 사람들이 찾을 거야. 그들은 애초부터 내게 어깨뼈 한 조각이 모자랐다는 걸 모르거든.”
“그러고 보니 당신 발아래 있는 그 푸른 돌, 어디서 많이 본 것이에요.”
“흔해 빠진 쑥돌 조각이야.”
“그렇찮아요. 어쩌면 제가 가지고 놀다 잃어버린 노리개일 거예요. 십만 년쯤 전에.”
“그게 사실이라도 원래 당신에게 속했던 건 아니지. 찾았다고 신통할 건 없어.”
사내는 방금 주운 돌조각을 어깨살을 비집고 집어넣으며 심드렁히 말한다.
“차라리 저쪽에 가 먼지나 씻지. 공원에서 흙먼지를 눈처럼 맞고 왔잖아?”
“저건 납과 타르가 녹아 흐르는 더러운 수채예요.”
여인은 사내가 자기의 말을 잘라 막은 것을 깜박 잊은 채, 그가 눈길로 가리킨 길가의 수로(氷路)가 더러운 것에만 눈살을 찌푸린다. 사내는 다시 엉성한 담 쌓기를 계속하면서 남의 일 말하듯 대꾸한다.
“어쨌든 먼지는 씻어질걸.”
그 말에 아무런 뜻이 없다는 것은 움직임이 없는 사내의 입술보다도 이제는 거침없이 바지를 찢고 온몸을 드러낸 그의 한발이나 되는 남근(男根)이 잘 말해 주고 있다. 그걸 본 탓인지, 여인도 정작 해야 할 일은 따로 있다는 듯이 한 꺼풀 한 꺼풀씩 허물 같은 옷을 몸에서 떼어 내기 시작한다.
여인이 옷을 다 벗었을 때쯤 사내의 돌담도 완성된다. 거멓게 그을은 골조만 남은 건물들이 끝없이 늘어선 포도 한 귀퉁이에 쌓은, 사방 한 길의 낮고 알락달락한 돌담은, 그러나 기괴하기보다는 아늑하고 선정적이다. 일을 마친 사내가 서둘러 옷을 빠져나가 이제는 알몸이 되어 누워 있는 여인을 덮고, 이내 그들의 거칠고 성급한 성합은 어우러진다.
이미 수백 수십만 년을 되풀이해 온 일이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시작은 언제나 황홀하다. 누구든 떨어져 보고 싶은 저주의 불꽃, 또는 영원히 적셔지지 않을 목마름이다. 그 고통과도 흡사한 몸서리쳐지는 열락을 향해 둘의 괴롭고 긴 허망의 행진은 시작된다.
젖은 석고 같던 사내의 몸 여기저기서는 붉게 단 강철선 같은 힘줄이 팽팽하게 솟아나 얽히고, 푸르게 금 간 삭은 뼈의 빛깔이던 여인의 피부도 뜨겁게 살아나는 핏줄들로 분홍의 꽃잎처럼 피어오른다. 어둡게 내려앉은 하늘도 그들의 머리 위에만은 에메랄드 천장을 드리워 주고 있다. 부패와 미망, 한탄과 의혹 같은 우리 삶의 여러 어둠을 간신히 헤쳐 나온 자줏빛 구관조 한 마리가 돌담 위에서 운다. 포도를 굴러다니던 맘모스의 턱뼈를 쪼개고 새빨간 장미 꽃 한 송이도 돋아난다.
“나는 이럴 때면 언제나 까마득히 잊고 있던 고향이 떠올라. 아주 오랜 옛 고향이…….”
사내가 애써 가쁜 숨을 죽이며 여인의 귀에 속삭인다. 여인이 감았던 눈을 뜨며 가만히, 그리고 열에 아홉은 건성으로 대꾸한다.
“어디게요?”
그런 여인의 갈라진 젖무덤에는 붉고 탐욕스러운 혀가 널름거리고, 청회색 젖 그늘에는 노란 채송화도 몇 송이 반짝인다.
“바다, 저 원초(原初)의 쪽빛을 지나면 검푸른 안식이 있고, 그걸 또 지나서 가면 어둠과 침묵에 이르지. 그 어둠과 침묵 속에서 한 생명의 예감으로 잠들어 있던 때를 기억할 것 같애. 그곳을 벗어나 이번에는 한 외로운 단세포로 부유(浮遊)하던 때도. 그다음…… 나는 산호였고 바다 백합이었고, 앵무조개였고, 삼엽충이었지. 때로는 몸 길이가 삼 미터나 되는 바다 전갈이 되어 억센 집게발로 그것들을 무자비 하게 잡아먹기도 했어…….”
“너무 까마득하군요.”
여자가 다시 성의 없이 참견한다. 역시 가쁜 숨을 애써 누르며.
“그다음도 기억하지. 나는 암모나이트였고, 어룡(魚龍)이었고, 장경룡(長勁龍)이었고…… 그렇게 점차…… 그 쪽빛 원초(原初)에서 헤어 나왔지.”
“아직도 멀어요.”
“또 기억해. 내가 꼬리를 달고 그 아늑한 고향을 떠나 거친 뭍으로 처음 오르던 때를. 내 몸의 따뜻함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도 어렵게 싸워 온 땅 위에서의 기나긴 세월을…….”
사내의 눈은 정말로 그리움에 차 이제 막 작은 불꽃들이 지피기 시작하는 여인의 눈 속을 바라본다. 마치 거기서 잃어버린 원초의 고향으로 돌아갈 길을 찾아내려고나 하는 듯이. 그런 사내의 간절한 눈길은 찬물 속에 스며든 햇빚처럼 똑바로 여인의 심장에 이른다. 오래잖아 자신을 사를 격렬한 불꽃의 예감에 떨면서도 여인은 까닭 모를 뭉클함을 느끼며 사내의 향수에 동조하고 만다.
“저는 아무래도 밑림밖에 떠오르지 않네요. 향긋한 열매와 보드라운 새순, 그리고 거침없던 나날의 삶만이……. 그래요. 그러다가 갑자기 바람이 불고 황사(黃沙)가 날아들기 시작했어요. 밀림은 자꾸만 황폐해지고, 숲과 숲 사이가 또는 나무와 나무 사이가 점점 멀어져 갔어요. 그것은 가지에서 가지로 이어진 안전한 우리의 길이 막혀 버렸다는 뜻이죠. 그때부터 모든 길은 땅 위로만 나게 되고, 또한 길은 바로 우리에게 위험과 피로를 나타내는 말이 되고 만 거예요. 처음 안전한 나무에서 내려와 땅에 발을 디뎠을 때는 얼마나 두렵던지……. 날카로운 발톱이나 이빨도 없고, 빨리 달리지도 하늘을 날지도 못하는 우리들은 별수 없이 무리의 험에 의지해 새로운 숲 또는 새로운 나무로 옮아 가지 않을 수 없었지요. 이미 껍질까지 벗겨 먹은 숲과 나무를 떠나……. 아, 그때 당신도 있었던지…….”
“있었어. 처음 새 숲 또는 새 나무로 옮아갔을 때는 살아남은 기쁨만으로도 감격해 어쩔 줄 몰랐지. 그러나 오래잖아 옛날의 무성하던 그 밀림을 그리워하며 그쪽을 바라보고 울었지.”
“하지만 그때에도 당신의 품에만 안겨 있으면 언제나 옛날의 밀림을 느낄 수 있었어요. 내일이면 또 버리고 옮아 가야 할 메마른 나뭇가지 위에서도 어김없이 그 풍성하던 열매와 새순을 보았지요…….”
“나도 보았어. 원초의 바다와 쪽빛과 그 아래 잠든 어둠을. 나는 단세포로 그곳을 부유하기도 하고, 한 생명의 예감으로 어둠과 침묵 속에 잠들기도 했지.”
거기서 사내의 목소리는 완연히 헐떡임으로 변한다. 움직임도 점점 격렬해져 어깨 너머로 미친 바람이 일고, 백열(白熱)은 어느새 가슴 어름까지 번져 있다. 그의 몸은 이미 얼마 전의 젖은 석고가 아니라 하나하나 살아서 숨 쉬고 외치는 수많은 세포들의 뜨거운 집합(集合)이었다.
여인도 더는 가쁜 숨결을 감추려 들지 않는다. 신음과도 같은 헐떡임을 토해 내는 그녀의 입 언저리에는 작고 현란한 무지개가 선다. 머지않아 그 무지개는 불꽃 같은 구름으로 피어오르리라. 흥건히 솟은 땀으로 분홍의 점액질같이 보이는 여인의 팔은 참나무 등걸에 박힌 겨우살이의 혁질(革質) 줄기처럼 사내의 희게 달아오른 등줄기를 파고들고, 거대한 두족류(頭足類)의 발 같은 두 다리는 보이지 않는 흡반으로 감긴 것은 무엇이든 껍질만 남겨 버리겠다는 듯 뜨거운 구리 기둥 같은 사내의 아랫도리를 죄고 있다. 그들의 발치에서는 쉬고 있던 화산이 갑작스레 연기를 ㅃ붐으며 용암을 부글거린다.
“다시…… 보여. 원초의 쪽빛…… 아래 잠든 어듐. 나는…… 생명의 예감이야. 단세포야.”
사내가 몽환에 젖어 다시 웅얼거리고 여인도 신음 같은 소리로 그 웅얼거림을 받는다.
“보여요. 나도 그 무성하던 밀림…… 지금은…… 우기(雨期)예요. 활엽수에 빗방울 듣는 소리가…… 요란하구요…… ”
“떠올랐어……. 나는 삼엽충이야……. 산호야……. 해면이야.”
“우리는…… 속이 빈…… 고목 등걸에서…… 비를 피하고…… 있어요. 다, 당신의 품은…… 아, 따뜻…… 하군요.”
“나는 장경룡(長勁龍)이야. 돌고래야……. 다랑어야.”
“전…… 당신에게, 꼬리를…… 들어 준…… 원숭이…… 암컷이에요.”
그런 둘의 신음은 점차 괴상한 울부짖음같이 변한다.
“나는 후회해, 후회해, 내가 뭍으로 기어 나온 걸. 땅 위에서 살고 싶어 한 걸.”
“저도…… 슬퍼요. 우, 우리가…… 나무에서… … 내려오게 된 게.”
“언제나 강한 적들에게 쫓겨야 하고.”
“주림과…… 추위에 시달려야 하고…….”
“어쩔 수 없이 무리를 짓고.”
“어리석은…… 규칙들을 만들고…….”
“불과 도구로 허세를 부리고.”
“두 발로 서서…… 쓸데없는…… 생각에 잠겨 들고…….”
“언어로 해로운 기억까지 저장하고…….”
“무, 문화란…… 허영에… … 젖어 들고…….”
“스스로 만든 사슬에 묶여야 하고, 윤리와 도덕이란 이름으로 상처 입고.”
“사랑하면서도…… 헤어져야 하고…….”
“아, 그래 빌어먹을. 언제나 도둑처럼 만나고, 간부(姦婦)로 붙고, 빌어먹을, 배우처럼 헤어지고.”
한껏 높아졌던 그들의 울부짖음은 그쯤에서 잦아지고, 오래잖아 격렬하던 움직임도 멎는다. 둘은 한동안 태엽이 풀린 자동인형처럼 스스로가 흘린 땀과 정액 속에 꼼짝 않고 잠겨 있다. 그들이 흘린 정액과 땀은 어느새 그 돌담 안을 넘쳐 검은 내를 이루며 포도 위로 흘러내린다. 빈 콜라 깡퉁이 뗘내려가고, 시든 꽃다말과 구겨진 연주회의 프로그램과 좀이 슨 책과 알이 깨진 안경과 씹은 껌이 싸인 은박지가 떠내려가고 ― 그들의 욕정과 피로와 슬픔도 떠내려간다. 고양되었던 용기와 반역도.
“날이 저물었군요.”
이윽고 몸을 일으킨 여인이 돌담 밖을 내다보며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연다. 발치의 화산에는 검은 연기만 솟고, 에메랄드의 하늘도 사라져버린 뒤다. 사내는 나무토막처럼 쓰러져 대답이 없다. 여인은 그런 사내를 버려두고 돌담 곁의 수채로 간다. 여인이 정성들여 구석구석 엉겨 붙은 사내의 정액을 씻어 내는 동안 그녀를 덮고 있던 분홍의 열기는 피부 밑으로 가는 핏줄이 되어 스며들고, 마침내는 가는 그 핏줄마저 혼적 없이 사라진다.
다시 돌담 안으로. 돌아온 여인은 처음의 삭아 가는 뼈 같은 살결과, 입술까지 흘러내린 코, 그리고 열린 들창처럼 공허한 눈을 가진 허상(虛像)으로 돌아가 있다. 여인은 그 허상에다 얼마 전에 미련 없이 떼어 던졌던 허물들을 한 조각씩 주워 붙인 뒤 아직도 꼼짝 않고 누워 있는 사내에게 메마른 목소리로 묻는다.
“이대로 여기서 주무시고 오겠어요?”
그제야 사내는 멍한 눈길로 여인을 올려다본다. 그동안 한 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듯 사내는 그녀의 변모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다가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여인에게 묻는다.
“우리는 자유를 향해 떠나지 않았소?”
“그래요. 그래서 여기 이렇게 와 있지 않아요?”
여인은 조그마한 양보의 기색도 없이 되묻는다.
“아니, 하나의 결론으로 선택하지 않았는가 말이오? 관을 채우고 무덤을 치장하게 되더라도.”
“그건 어리석은 선택이에요. 우리의 삶 전체를 위협당하면서까지 택해야 할 그런 대단한 관념은 없어요.”
“…….”
“당신에겐 지켜야 할 이름과 지위와 ― 또 가정이 있어요. 저도 지켜야 할 삶이 따로 있구요. 결국 우리는 주인은 아니에요. 노예일 뿐이에요.”
그러자 사내는 정말로 알 수 없다는 표정이 된다.
“그 생각은 방금 한 거요? 아니면 공원에서부터요?”
“그보다 훨씬 전 당신을 만나려고 집을 나서면서부터예요.”
“그럼 당신이 아까 말한 자유란 기껏 지난 삼 년의 연장만을 뜻했단 말이오?”
“그건 아니에요.”
여인의 부정은 단호하면서도 어딘가 미안해하는 듯한 구석이 있다. 얼굴에는 다시 푸른 금들이 덮이기 시작한다.
“이게 마지막 만남이죠. 나는 그걸 꾸며 줄, 오래 기억할 만한 작별의 의식을 원했을 뿐이에요. 이제 우리 어디서 만나더라도 허심한 목례로 지나쳐 갈 용기를 가져요.”
사내는 여인의 그 같은 말이 뜻밖인 모양이다. 그러나 그게 대수로운 일은 아닌 듯 그사이 젖은 석고로 돌아간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떠오르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충격을 받은 증거가 있다면 몇 분간의 침묵 정도일까.
“알겠소. 그렇다면 나도 돌아가야지.”
마침내 사내도 몸을 일으킨다. 그러나 몸을 씻는 대신 비 맞은 짐승처럼 부르르 떨어 말라붙기 시작하는 정액과 분비물을 털어낸 뒤 빠져나왔던 옷 속으로 기어든다. 오래잖아 사내도 처음처럼 해진 옷을 걸친 젖은 석고상으로 돌아간다. 다시 늘어난 오른쪽 다리는 몇 번이나 집힌 채 바짓가랑이 속에 감추어지고, 속옷이 삭아날려 간 가슴께에는 앙상한 빗장뼈가 드러난다. 달라진 것은 다만 언제부터인가 머리칼로 덮인 부분이 투명해져 그 속에 축소된 책 더미며, 명함 잉크병, 고무도장 따위가 뒤죽박죽으로 얽혀 있는 게 내비치는 것 뿐이 다.
“하지만 이게 마지막이라니 허전하군.”
옷을 다 걸친 사내가 불타다 남은 가로수 그루터기에서 수의 같은 외투를 벗겨 내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그리고 새삼스러운 애착으로 돌담에 의지해 굳어 있는 여인을 본다. 그 순간 금세라도 머리가 부스러져 흩어질 듯 깊고 잦게 파이는 이마의 푸른 금들이나, 머릿속 가득히 비치던 잡동사니 대신 여인의 밝게 핀 얼굴이 자리 잡는 것으로 보아 그의 말이 단순한 의무감에서 나온 의례적인 것이나 이별의 상투어 같지만은 않다. 왼쪽 어깨 위에는 작고 쓸쓸한 회색 구름 한 덩이도 떠 있다.
“저두요. 지난 삼 년 그렇게도 자주 당신과 영원히 함께가 되는 꿈을 꾸곤 했었는데…….”
역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여인의 정수리 위에는 남청색의 물망초 한 송이가 돋아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둘은 곧 똑같은 두려움으로 자신이 한 말을 후회한다. 사내가 먼저 자신의 터무니 없는 감상을 철회하는 듯, 메말라 버린 목소리로 덧붙인다.
“더 이상 당신을 안을 수 없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이제 다시는 여자를 사랑할 수 없게 되리라는 예감 때문일 거야.”
“마찬가지예요. 저도 당신을 다시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보다 제가 혼자 남게 되었다는 게 슬퍼요.”
그러자 사내의 자세는 약간 느슨해진다.
“떠나야 할 때를 알고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당신은 좋은 여자였어.”
“당신두요.”
“성녀(聖女)였고…… 요부였지.”
“기사(騎士)이고 치한이었지요.”
“축복이고…… 저주이기도 했지.”
“기쁨인 동시에 괴로움이었지요.”
“도취이고 환멸이었지.”
“모든 노래는 두 겹이지요.”
여인은 그렇게 말을 맺고는 기대섰던 돌담에서 떨어져 남자에게 다가간다.
“자, 이제 그만 나가요. 너무 늦었어요. 그 전에 마지막 입맞춤을 해 주시지 않겠어요?”
어느새 두 눈은 가동 중인 컴퓨터의 신호용 램프처럼 파랗게 깜박이고, 목소리는 무거움을 털어 버린 채다. 사내가 조립한 로봇처럼 직각으로 움직이며 말없이 여인의 요구에 따른다. 젖은 석고의 고동색 입술과 삭아 가는 뼈 색깔의 입술이 부딪치며 둔탁한 소리를 낸다. 잠깐 그곳에서 분홍으로 으스름한 불기둥이 일지만 사내의 어깨에 걸려 있던 작고 쓸쓸한 회색 구름에게 자리를 내주고 만다. 떨어지는 사내의 입술은 왼쪽 모서리가 깨어져 나가고, 여인의 입술은 남자의 고동색 이 묻어나 지저분하다.
“안녕. 다시 한 번, 우리 어디서 만나게 되더라도 허심한 목례로 지나쳐 갈 용기를 가져요.”
여인이 그 말을 도마맴의 꼬리처럼 남기고 먼저 돌담을 빠져나간다. 이어 사내도 수의 같은 외투 깃에 얼굴을 깊숙이 묻은 채 돌담을 나선다. 거리는 썩은 당나귀들과 밤이 불러낸 망령들로 붐비고 둘은 하나씩 그 물결 속으로 휩쓸려 사라진다.
강주(江州) 김씨 알지공 파(派)의 까마득한 후손으로 경상북도 안동의 어떤 수몰 지구에서 올라와 아슬아슬하게 서울 시민이 된, 1960년 2월 15일에 태어나 이제 스물하나로 입대를 넉 달 남기고 있으며, 학교는 고향 임천(臨川)초등학교와 임천중학교를 거쳐 서울의 변두리 광문(光門)상고를 일 년 반 다닌 것이 마지막이고, 그동안 받은 상으로는 초등학교 때의 개근상 세 번과 우등상 한 번에 중학교 때 받은 개근상 한 번이 있는 반면, 벌은 통금 위반으로 구류 한 번 산 일과 교통법규 위반으로 과료 오천 원을 문 것이 전부이며, 늑막염과 장티푸스를 한 번씩 앓은 적은 있지만 대체로 건강한 몸에 일 미터 칠십이 센티미터의 키와 육십팔 킬로그램의 몸부게를 가졌고, 흰 살결에 왼쪽 볼의 점 세 개가 제법 뚜렷한 눈코와 어울려 또래의 처녀 아이들에게 인물 가지고 서러움을 당하는 편은 아닌, 그래서 깔끔한 미용사 아가씨와 백화점의 계산대 아가씨를 각 한 번씩 애인으로 사귀어 본 적이 있고, 지난봄에는 어떤 골빈 여대생과 연애가 되다 만 적도 있는, 고생한 데 비해 구김없는 성격에 심성도 대강은 고와 윗사람들에게 싹싹하고 붙임성 있고 동료들 사이에도 잘 지내는 편이며, 그러나 이따금씩은 자신의 처지나 고르지 못한 세상에 불평을 늘어놓기도 하고 또 걸어오는 시비는 구태여 마다하지 않는, 비록 변두리의 별 세 개짜리 호텔이긴 하지만 월말이면 꼬박꼬박 나오는 봉급에 손님들의 팁과 몸 파는 아
가씨들에게서 얻어먹는 구전까지 합치면 한 달 수입 삼십만 원은 되고, 그 가운데 매달 이십만 원은 어김없이 집으로 가져가 이제는 중늙은이가 되어 막일도 어려워진 아버지와 어떤 시장 모퉁이에서 좌판을 벌이고 있는 어머니를 감격시키는, 강서호텔 607호실 벨 보이 김시욱(金時旭) 군은 1982년 12월 26일 오후 여섯 시 반쯤 호출도 없는데 그 방문 앞을 서성거리다가 그들이 나오는 기척을 듣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잡것들. 대낮부터 요란스럽기는 지금이 어떤 때라고…….”
(1985년)
2016년 12월 1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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