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응모작들은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작품 수준이 높다. 예선에서 올라온 작품들 중 최승철의 ‘매화’, 안성호의 ‘계단에서’, 박하성의 ‘구두종합병원’, 윤진화의 ‘모녀의 저녁식사’, 송유자의 ‘鳥致院 지나며,’ 등은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내세워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모두 역량이 느껴지는 작품들이다.
최승철의 ‘매화’는 꽃망울이 터지기까지의 과정을 치밀하게 묘사한 시이다. 말과 리듬을 다루는 솜씨도 노련하고 소재를 처리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세부 묘사에 치중하다 보니 꽃의 세계를 놓친 게 흠이다. 안성호의 ‘계단에서’는 사물의 구조를 이용하여 현실과 상상을 잘 맞물려 놓은 시이다. 박하성의 ‘구두종합병원’은 삶을 보는 시선이 건강하고 자연스런 호흡이 돋보이나 전체적으로 내용이 추상적이다. 윤진화의 ‘모녀의 저녁식사’는 상상력이 기발하고 구성도 독특하다. 그러나 시가 전개될수록 이미지가 융합되지 않고 겉돌아 초점이 흐려진다.
송유자의 ‘鳥致院 지나며,’는 윤동주의 ‘십자가’를 패러디한 시로 읽을 때 신진다운 패기와 실험의식이 더 느껴지지만 그냥 읽어도 산뜻하고 단아한 시이다. 정서가 단단하고 안정되어 있고 끝까지 균형감각을 잃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도 응모시 가운데 가장 시가 완결되어 있다. 이 중에서 송유자의 ‘鳥致院 지나며,’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동봉한 시들이 수준이 고르고 시와 산문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긴장을 유지하는 표현력도 수준급이다. 곧 바로 창작활동을 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작품이 숙련되어 있다.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인 윤진화의 ‘모녀의 저녁식사’는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심사위원:신경림·신대철>
2)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감성돔을 찾아서
홀로 바위에 몸을 묶었다
바다가 변한다
영등철이 지나 바다가 몸을 바꿔 체온을 올리고
파도의 깃을 세우면
그들은 산란의 춤을 추기 시작한다
빠른 물살이 곶부리를 휘어감는 곳
빠른 리듬을 타고 온다
영등 감생이의 시즌이다
바닷물의 출렁거림은 흐름과 갈래를 지녔다
가장 강한 놈은 가장 빠른 곳에서만 논다
릴을 던져라 저기 본류대를 향해
가쁜 숨 참으며
마음 속 깊이로 채비를 흘려라
거칠고 빠른 그곳
거기 비늘을 펄떡이는 완강함
릴을 던져라
바다는 몸을 뒤채며 이리저리 본류대를 끌고 움직이지만
큰 놈은 언제나 본류에 있다
본류는 멀고
먼 데서부터 입질은 온다
바다의 마개를 뽑아 올릴 힘으로 나를 잡아채야 한다
팽팽한 포물선을 그리며 발밑에까지 끌려온 마찰저항
마지막 순간이 올 때
언제나 거기 있다
막, 채비를 흘려보냈다
온다
*영등 감생이:영등철(영등 할머니가 내려온다는 음력 2월초)에 잡히는 감성돔
**채비:낚싯대 끝에서 낚시 바늘까지. 낚싯줄과 찌와 납덩어리 등을 통틀어 일컫는 말
심사평
본심에 올라온 작품 중에서 김선아의 ‘석모도 가는 길’, 박일구의 ‘외출’, 이상우의 ‘지리 수업’, 그리고 윤성학의 ‘감성돔을 찾아서’가 마지막까지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석모도 가는 길’은 아름답다. ‘세상의 마지막 노을에 물들어/ 태어나는 투명한 말’이나 ‘파도 위에 앉은 수천의 금빛 동자승들’과 같은 빼어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이 시는 걸러지지 않은 감정의 토로가 흠이었다.
‘외출’은 길게 논의되었다. 이 산문시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면서 응모작 전반에 걸쳐 있는 문제들-너무나 쉽게 생각하고 있는 행 갈이, 산문시 특유의 장점에 대한 뚜렷한 인식 없이 확산된 산문화 경향-에 대한 우려가 있었음을 밝힌다. ‘지리 수업’엔 재기가 번뜩인다. 그러나 시를 성급하게 하나의 의미로 단순하게 귀결짓는 잠언조의 진술들이 더러 눈에 거슬렸다.
문학적 역량도 중요하지만 신인이라면 새로운 면모가 있어야 한다. 세계를 새로운 눈으로 보고 새로운 언어로 말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어낼 줄 알아야 한다. 신인은 그렇다. 새로운 표현에의 열정으로 늘 젊어야 한다.
그 모든 면에서 충분히 새롭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당선작으로 결정한 ‘감성돔을 찾아서’는 참신하다. ‘홀로 바위에 몸을 묶었다’로 시작되는 이 시는 긴장을 늦추는 법없이 전개된다. 리듬의 자연스러움과 진술의 격조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쉼표 하나를 찍는 데도 이 신인은 많은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참다운 시인이라면 쉼표 하나에도 자신의 이름과 인생을 걸어야 할 것이다.
당선작에 이견이 전혀 없었던 심사였다. 그만큼 눈에 띄는 시를 만난 것이 기쁘다.
/황동규 서울대 교수·시인 최승호
3)2002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옹이가 있던 자리
이윤훈
울타리 한켠 낡은 잿빛 나무판자에서
옹이 하나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가고
아이가 물끄러미 밖을 내다본다
그 구멍에서 파꽃이 피었다 지고
분꽃이 열렸다 닫힌다
쪼그리고 앉아 늙은 땜쟁이가
때워도 새는 양은냄비 솥단지를 손질하고
겨울의 궤도에 든 뻥티기가
등이 시린 이들 사이로 행성처럼 돈다
꿈이 부풀기를 기다리며
코로 쭉 숨을 들이키는 이들
홀쭉한 자신의 위장을 닮은 자루를 들고 서 있다
이승의 끝모서리에 이를 때마다 나는
아이의 그 크고 슬픈 눈과 마주친다
나는 아픈 기억이 빠져나간 그 구멍으로
저켠 길이 굽어드는 곳까지 내다본다
누가 잠자리에 들 듯 목관에 들어가 눕는다
뚜껑이 닫히고 어둠이 쿵 쿵 못질하는 소리
문득 옹이 하나 내 가슴에서 빠져나가고
세상 한 곳이 환히 보인다
▲1960년 경기 평택 출생 ▲아주대학교 영어영문과 졸업 ▲현 대성N스쿨 평택분원 영어 강사 ▲안성시 공도 우림아파트 101-301
◆심사평/ 감추지 않는 패기 돋보여
높고 고른 수준의 시들을 읽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그러나 규격적인 훈련을 받은 비슷비슷한 시들을 읽는 일은 동시에 다소간 괴롭다. 대체로 즐거우면서도 이따금씩 괴로운 작업 끝에 우리는 이윤훈씨의 ‘옹이가 있던 자리’를 올해의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이 작품은 시적 완성도가 우수하지만, 그가 당선자가 된 까닭은 역설적으로 ‘돈황으로 가는 길’, ‘아씨시 성 프란시스코와 마주하여’, ‘주인님전 상서’ 등 비교적 완성도가 떨어진 작품들 덕택이다. 거기서 그는 엉뚱한 상상력과 독특한 자신만의 세계, 스타일을 감추지 않는 패기를 내보였기 때문이다. 아직은 연약한 모습이 남아 있는 패기이지만, 더욱 힘을 길러 세상을 보는 시인만의 시각을 키워가기 바란다. 이민, 김미영, 최찬상, 문신 씨등도 상당한 경지에 근접해 있는데 문제는 자신만의 목소리이며 자기의 언어 발견이다. 가정속의 일상성, 시어의 상투성, 운률이 결핍된 산문시 애호 현상 등등은 이를 위해 싸워야할 대상들로서 시인을 동경하는 분들이 깊이 음미해도 좋을 것이다.
( 황동규/시인)·김주연/문학평론가
4)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가문비냉장고 - 김중일
내 생의 뒷산 가문비나무 아래, 누가 버리고 간 냉장고 한 대가 있다 그날부터 가문비나무는 잔뜩 독오른 한 마리 산짐승처럼 갸르릉거린다 푸른 털은 안테나처럼 사위를 잡아당긴다 수신되는 이름은 보드랍게 빛나고, 생생불식 꿈틀거린다 가문비나무는 냉장고를 방치하고, 얽매이고, 도망가고, 붙들린다 기억의 먼 곳에서, 썩지 않는 바람이 반짝이며 달려와 냉장고 문고리를 잡고, 비껴간다 사랑했던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데리고 찾아와서 벼린 칼을 놓고 돌아갔다 매일 오는 무지렁이 중년남자는 하루에 한 뼘씩 늙어갔다 상처는, 오랜 가뭄 같았다 영영 밝은 나무, 혈관으로 흐르는 고통은 몇 볼트인가 냉장고가 가문비나무 배꼽 아래로 꾸욱 플러그를 꽂아 넣고, 가문비나무는 빙점 아래서 부동액 같은 혈액을 끌어올린다
가까운 곳에, 묘지가 있다고 했다 가문비나무가 냉장고 문열고 타박타박 걸어 들어가 문 닫으면 한 생 부풀어오르는 무덤, 푸른 봉분 하나가 있다는,
5) 평화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하늘문' - 정가일
동굴 속을 가고 있었다
축축한 벽을 더듬으며, 이 쪽에서
저 쪽으로 소리의 근원을 쫓아서
허공을 잘박이는 발소리와
나직한 노래 소리가 들린다
그 노래 기도가 되었다가
울음이 되었다가, 손과 손을 통해서
서로의 상처가 되기도 하였다가, 끝내는
그 상처로 몸이 따뜻해지기도 했다
그 때였을까
빛이 다 땅으로 내려오던 때가
저녁이면 바다의 입 속으로 붉디붉은 해가
서둘러 들어가듯이
땅 밑에 허술하게 파놓은 동굴 속으로, 수수수
별빛 같은 눈들이 쏟아진다
어깨 위에 하얀 눈을 맞으면서
청무우 꺼내 오던 아버지처럼
저 앞으로 먼저 간 그리스도
가지런히 우리들 세워 놓고, 쑥쑥
뽑아 올리려고
절벽을 기어오르고 있다
환하게 하늘문이 열리고 있다
흙으로 만든 둥그런 묘지에서
2002년 신춘문예 시 심사평
심사위원, 신달자(명지전문대 교수,시인) 정호승(시인)
최종까지 올라온 작품은 서관덕씨의 ‘나는 작은 사람’ 박지현씨의 ‘은총’ 신정민씨의 ‘등대 이발관’ 정가일씨의 ‘하늘문’ 네 편이었다.
‘나는 작은 사람’은 신앙적 고백이 두드러진 작품으로, 지나칠 정도로 단순하고 가벼워 시의 맛과 기품에 가 닿는 힘이 부족했다. ‘은총’은 사물을 바라보는 따뜻하고 어여쁜 마음이 잘 드러나 있었으며, 생명의 소리를 듣는 예민한 청각성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차돌처럼 단단한 소망 하나/믿음직한 자식이 잉태되어 나온다’는 구절 등에서는 아직 덜 익은, 구태의연한 모습을 찾을 수 있어 아쉬움이 컸다. ‘등대 이발관’은 발상의 참신함이 우선 돋보였다. ‘어린애의 필체로 씌어진 등대이발관/그 푸른 간판을 보는 순간/평야는 내게 그만 바다가 되어 출렁였다’는 표현 등에서는 시적 상상력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후반부로 넘어오면서 모호해지고 말았다. ‘어둠이 밀물처럼 다가와 등대이발관을 삼키고 있었다’는 상황만 제시돼 있어, 그 상황이 우리 삶의 무엇과 은유돼 있는지 알 수 없어 안타까웠다.
당선작으로 고른 ‘하늘문’은 다른 작품에 비해 비교적 완성도가 높은 편이었다. ‘동굴’로 표현된 삶의 현실과 고통을 극복하고 ‘하늘문’에 도달하고자 하는 과정이 구체적이고 긍정적이어서 호감이 갔다. 특히 ‘어깨 위에 하얀 눈을 맞으면서/청무우 꺼내오던 아버지처럼/저 앞으로 먼저 간 그리스도’라는 구절은 이 시인의 개성과 역량을 인정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평화신문이라고 해서 꼭 신앙적 소재나 주제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문제는 시적 완성도가 얼마나 높으냐 하는 데 달려 있을 뿐 어떤 소재와 주제를 선택했느냐에 달려 있지는 않다. 평화신문을 통해서 시를 공부하고 사랑하시는 분들의 분발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