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빨갛게 떠오른 오월의 아침 해와 같은 방미였다. 정상회담도 상하원 합동연설도 모두 5월의
태양같이 따스하고 빛났다. 한국의 첫 여성 대통령으로 손색없었고 자랑스러운 방미였다.
그 빛나는 태양 밑에는 그늘도 도사리고
있었다. 윤창준이라는 그늘이, 한미양국의 언론매체가 야! 이런 그늘도 있구나 하고 떠드는 바람에 국민은 어리둥절해졌다. 화나게 되었다. 성공적인
방미는 순식간에 시끄러운 방미로 변하였고. 부끄러운 방미가 되어버렸다.
날이 새면 중요한 의회연설이 있는 데 자기는 여자에 빠져
업무태만을 일삼았다. 성추행의 고발까지 당하였다. 모두 용납할 수 없는 행위다. 주어진 자기 업무에 대한 태만, 그리고 여성에 대한 성적추태,
이것이 윤창준의 이중죄악이다.
윤창준 사건은 박근혜 대통령을 위해 하늘에서 울려준 경종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늘은
청와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 여기저기서 또 다른 윤창준이가 활보하고 있지 않는가!
우선 청와대 비서진을 두고 말하자면
여성 대통령과 가깝고 친하다고 해서 벌써부터 대통령을 “깔보고”있는 인상을 받는다. 정책 면에서는 강한 대통령이지만 인간 면에서는 너무도
다정하고 따뜻한, 따라서 “약한” 대통령이라는 인상을 주기 쉬운 대통령이다. 심히 걱정스럽다.
미국 측에 “수사를 하루빨리 끝내
달라”고 공식비공식으로 요청하는 것도 잘못이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는 것을 갖고 질질 끌지 않게”라는 인상만 부각시킨다. 오히려 “시일이
걸리더라도 철저히 조사해 모든 사실을 밝혀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박 대통령의 의중이라고 믿는다. 청와대 비서진은 부패해 있는가? 무식한건가?
미국의 사법절차가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도, 조속종결의 독촉이 미국 측에 줄 수 있는 오해도 생각해 봤는가?
물론 박 대통령은
아무하고라도 친해지고 아무하고라도 마음 놓고 소통하기는 어려울 것이 당연하다. 그러기 때문에 그를 둘러싼 청와대 비서진은 오랫동안 서로
알고지낸, 그리고 또 아부 잘하는 인사들로 짜여질 가능성이 크다.
인물의 선택은 그에 대한 사회의 “평”을 토대로 그 평을
확인하는 과정을 통해 뽑아야한다. 이력서나 얼마나 오랫동안 알고 지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도 교수였지만 “정치교수”는 일단 조심하는 것이
좋다. 교수는 지식과 지혜의 탐구 및 전수가 사명이고 정치는 권력의 쟁탈과 행사가 사명이기 때문이다.
이번 기회에 박근혜 대통령은
인간적으로도 냉철하고, 강하고, 엄정한 대통령이라는 인상을 깊고 선명하게 심어주어야 할 줄 안다. 나는 한 대통령 수석 비서관이 수염을 깍지
않고 나와 앉아있는 모습을 보고 마음에 거슬린다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고사하고라도 김영삼, 김대중, 이명박 대통령 앞에 그런
모습으로 당당히 나와 앉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최초의 여성 대통령은 남자보다 더 냉정하고 엄정해야 할 것 같다.
II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목표의 하나는 행복문화의 창달이다. 행복문화의 가장 보편적인 요소의 하나는 남녀
간의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남녀관계에 대한 한국문화는? 한국문화의 전통은 어떤 것인가?
사랑 없이 여자를 집적거리고 성희롱하고 성폭행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드물고 예외적인 현상일까?
70여 년 전
진주사범학교에 입학했을 때 이른 아침에 여자들의 우는 소리가 울려 퍼 졌다. 저기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진주기생들이 목소리를 가다듬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목소리를 다듬고 있는 중이라고 알려주었다.
지금은 기생은 가고 없지만 요정의 손님 옆에 앉아 배웅하는 우리 젊은
여성들이 있다. 노래방 가수들이 있고 술자리를 함께해주는 여성들이 있다. 모두 또 하나의 윤창중이의 노리개 감이 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닌가?
윤창준이는 성희롱과 성폭력에 대한 미국문화를 몰랐다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하였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허용된다는 말인가? 우리여성들이 눈물로 참고
있을 뿐이지! 감히 사법당국에 고발을 안(못)하고 있을 뿐이지…….
박근혜 대통령은 이번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한국사회에서 사랑
없는 남녀 간 행동양식을 21세기 문명국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법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주기를 부탁드리고 싶다.
1950년대
중반에 캐나다의 밴쿠버로 유학을 갔을 때다. 대학교 여학생이 저편에서 다가오며 “하이”(Hi)하고 미소지운 얼굴로 지나갔을 때 나는 진짜
어리둥절해졌다. 저 여학생이 나를 어떻게 알아서 저러지? 미처 답례 말이 목에서 나오기도 전에 지나가 버렸을 때 나는 가슴이 뛰었다. 필경 나를
좋아 하는구나… 혼자서 푸른 하늘 보고 기뻐했었지만 뒤에 알고 보니 그것은 학교 교내의 전통이고 풍속이었다.
한국에도 저런 풍속이
언제나 자리 잡게 될지 아득한 느낌 속에서도 강하고 아름다운 박 대통령에게 새로운 행복문화의 정착을 기대해본다.
III
한미 간 정상회담은 양국 간의 주요현안을 협상하고 합의하는데 있기보다 솔직하게 서로 마주앉아 마음에 품고 있는 문제들을 의논
하는데 있다.
이 과정을 통해 하나의 인간으로서 서로를 더 깊이 알게 되는데 만남의 더 큰 의의가 있다. 서로 간에 인격적
인간상을 깊이 각인함으로써 전략과 정책에 대한 공감대를 넓히고 새로운 결의를 새롭게 다지는데 더 큰 의미가 있다. 한번으로 끝날 만남이 아니기
때문이다.
핵문제를 포함한 북한 문제를 다룰 한반도신뢰프로세스는 남북양자 회담이다. 처음으로 한국이 주도하는 회담이다. 여기서
북핵문제를 제대로 다루기만하면 한국도 핵 선택까지 안가고 한반도 비핵화를 성사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 능히 시도해 볼만한 구상이다.
중국과 일본을 포함한 동북아 평화협력구상(서울 프로세스)은 만약 북한이 동참한다면 파산된 6자회담을 대체할 수 있는 구상이다.
중국대신 한국이 주도하는 새 6자회담이 될 것이다.
이 두 프로세스는 성실과 진실성을 발산하며 대담하고 용감한 박근혜 대통령만이
착안하고 시도할 수 있는 고도의 외교안보전략이다. 경탄을 금할 수 없다.
정상회담은 또 미래를 향한 한미동맹의 장래에 대해 서로
간에 이해를 깊이 하였다고 믿는다.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과 함께 통일과 그 이후를 내다보는 중장기적 국가의 기반이 될 수 있기를 믿고 바란다.
DMZ 국제평화공원도 실현될 수 있는 아이디어다.
IV
끝으로 창조경제에 대해 한마디 하고자 한다. 박
대통령의 방미는 미국이라는 지구촌 창조경제의 본고향을 방문한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경제의 핵심이 무엇인가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자유로운 개인이 자유롭게 착안하고, 시도하고, 성공하고, 실패한 모든 새로운 경제활동의 총화라고 답하고 싶다. 창조는 자유의 산물이다.
자유는 창조의 어머니다. IT 산업만이 창조경제가 아니다.
자유는 인간을 창조적인 동물로 만든다.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유롭게
말하고, 표현하고, 자유롭게 집회하는 곳에는 창조의 꽃이 핀다. 남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는 한 자유롭게 사는 인간은 자생적으로 창조적 동물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하자면 창조적 경제는 자유경제의 별명이다. 가장 자생적인 경제적 패러다임이다. 문제는 이 기본
패러다임을 사회주의나 공사주의적, 또는 독재적 권력을 통해 이리저리 손질하려는 데 있다. 원래 불완전한 인간이 만든 불완전한 패러다임은 완벽한
것으로 만들겠다는 인간다운 욕구도 작용한다. 그리하여 자유경제는 고객(소비자, 시장)의 지배로 부터 이탈된다. 자유경제는 권력지배형 경제가
대체한다. 각종 경제위기, 금융위기가 반복된다. 물론 이 권력지배형 경제를 하루아침에 퇴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의 창조경제는 자유경제의 부활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리고 한국경제의 새 기적을 통해 세계경제에 빛나는 한 표본을 제시하게 되기를
기대해본다.
이 모두 한국을 지구촌의 한 중심국가로 만드는 구상들이다. 안보와 평화와 번영이 따라붙고 따라오는 발상들이다. 박근혜
정부의 성공을 몸과 마음을 바쳐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