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국궁1번지 황학정"카페지기 장영민(악돌이) 입니다.
황학정카페는 여러분들의 관심과 지도편달속에 나날이 발전하여 왔답니다.
국궁카페를 운영하면서 국궁문화의 성장 잠재력과 발전하지 못한 이유를 알게 되었으며
그 간에 품었던 궁금증들을 하나하나 실타래 풀듯이 풀어 왔으며 작금의 국궁문화가 일제시대를 거치며 민족문화의 으뜸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연유에 의문을 가졌답니다.
일제의 혹독한 문화정책에 동화되어 우리민족의 전통문화,무예는 회생 할수 없을 정도로 초토화 되었읍니다.그런데 유독 국궁문화 만큼은 원형(활터문화의 변질) 그대로 유지 해 올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국궁문화를 즐기는 부류가 다름아닌 매국에 앞장섰던 왕족이하 일본의 작위를 받은 양반귀족들의 문화였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더군다나, 기생들을 불러다 음주가무를 즐기는 모습(대사례에서 유래된 잘못된 문화)에서 일본통치자들도 민족정신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그냥 놔 두었겠지요?...아니면 이양반들의 강력한 항의를 받았던가?
이렇듯 일제치하에 우리의 국궁문화의 메카인 황학정이 온전히 유지 돼 올 수 있었던 큰 버팀목은 바로 박영효라는 인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박영효(1861~1939) 그는 누구인가?..
철종의 부마(사위)로 일찍이 개화사상에 앞장섰던 인물로 1882년(고종 19) 발생한 임오군란의 수습책으로 제물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 이행을 위한 특명전권대신 겸 제3차 수신사로 부사 김만식, 종사관 서광범 등 수행원 14명, 비공식사절인 민영익·김옥균 등과 일본으로 갔다. 그의 임무는 군란에 대한 사과 국서를 전달하고 제물포조약의 비준 교환을 무사히 수행하는 것과 손해배상금 50만 원 지불방법의 완화를 교섭하는 것이었다. 일본으로 가는 도중 배안에서 태극팔괘(太極八卦)의 도안을 기초로 처음으로 태극기를 만들어 사용했으며,갑신정변 실패 후,망명생활중 이름을 야마자키[山崎永泳春]로 고쳤으며, 1888년 메이지[明治] 학원의 영어과를 졸업하고 요코하마[橫濱]에 있는 미국교회에서 동·서양의 서적들을 두루 읽었다. 1888년(고종 25) 초 국정 전반에 걸친 장문의 개혁상소를 올렸는데, 이는 이른바 '건백서'(建白書)라 불리는 것으로 봉건적 신분제도의 철폐, 근대적 법치국가의 확립에 의한 조선의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주장하고 있다. 1892년 박영효를 암살하기 위해 본국으로부터 이일직(李逸稙)·권동수(勸東壽)·권재수(勸在壽) 등이 자객으로 파견되었으나 미수에 그쳤다. 1893년 후쿠자와 등 일본 유력 인사들의 협조를 얻어 교포학생 교육을 목표로 도쿄에 신린의숙[親隣義塾]을 설립 하기도 했다.
한일 병탄후 1910년 일제의 회유책에 의해 후작(侯爵)의 작위를 받았고, 1911년에는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사람으로 조직된 조선귀족회 회장, 1918년에는 조선은행 이사를 역임했다. 3·1운동 뒤 일제의 문화통치에 따라 유민회(維民會)·동광회(同光會)·조선구락부·민우회(民友會) 등 친일단체와 관계를 맺었다. 1920년 〈동아일보〉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초대 사장에 취임했다. 1921년 중추원고문, 1926년 중추원부의장, 1932년 일본귀족원의원을 지냈으며, 1939년 9월 21일 후작·중추원부의장직에 재직중 죽었다. 저서로 〈사화기략 使和記略〉이 있다.
1922년 일제에 의해 경희궁터 있던 황학정이 헐릴 위기에 처하자 조선교풍회(친일단체) 회장 박영효가 주도해 지금의 등과정터로 옮겨온 일을 보면 박영효의 파워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수 있을것이다.이런 토대속에 우리의 국궁문화는 "궁도"라는 이름으로 미화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었던 것이다.
잘못된 역사를 외면한채 기득권세력들에 의해 밥그릇 싸움으로만 좌지우지되는 정치판과 닮은 활터문화를 개혁하지 않고서는 절대 일본,중국을 이길수 없음을 알아야 할것입니다.
자기성찰없이 유희적인 활쏘기문화만을 추구한 결과 아직도 일본 궁도의 2중대노릇만 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뜻있는 분들의 고견과 지도편달을 바라며 국궁의 대중화,세계화에 함께 나가기를 소망해 봅니다.
성탄절 전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