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을 보며/서정주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山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靑山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엔 없다.
<시 읽기> 무등을 보며/서정주
서정주의 시가 한국 근대시사近代詩史의 영욕榮辱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전재성이 유별나다고 평가받는 작품들로부터 친일시, 독재자들을 찬양한 시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편들은 충격으로 다가온 경우가 많았다. 많은 이들은 그의 시편들을 아낀다. 한국적 살을 토대로 차원 높게 성취한 언어 미학을 그의 이력에 가두고 싶지 않고 텍스트 밖의 곡절에 구애됨 없이 시를 이해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아래의 시는 이런 생각을 여지없이 핍박한다.
단어와 단어가 만나서 언어의 결을 이루고 새 의미가 생성되는 미학이 이 시엔 없다. 고백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뭔가를 가르치려는 투로 시상은 일관된다. 시의 울림이 없는 가르침은 편견에 불과하거나 자기 오만일 가능성이 높다. 이 시에 적힌 것처럼 가난은 정말로 남루, 즉 누더기에 불과한가. 가난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라는 캄캄한 굴종屈從이 「무등을 보며」가 가르치고 싶은 진짜 뜻인가.
가난하고 싶어서 가난한 사람은 없다. 이 땅엔 아직도 가난을 벗어 버리고 싶은 몸부림들이 더 많다. 그러함에도 살아갈수록 빛이 늘어 간다고들 한다. 그들이 왜 빛더미에 앉았는지를, 평생 뼈 빠지게 살았음에도 빚에 갇힐 수박에 없도록 사회 구조가 짜인 것은 아닌지를 엄정히 살펴보지도 않고 “가난이 한낱 누더기에 불과”하다는 근천기에 쩔어버린 말에 동의할 수 없다.
삶과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만이 차원 높은 언어 미학을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지식과 사의 형상화는 정비례하지 않으며 시는 더러 시인의 무의식이나 직관력에 의존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따지는 것은 시 또는 시인의 개별성을 옹호하려는 게 아니라 언어 미학 이전의 삶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에 있다. 물질과 정신이 어쩔 수 없이 맞물려 있는 삶의 불가피성을 치열하게 접근하지 못한 데 있다.
힘주어 말하지만 가난은 한낱 누더기가 아니다. 단지 불편할 뿐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가난은 몇몇 지식인의 입에 바린 수사修辭가 아니라-에미애비된 자가 죽음의 유혹, 자살의 유혹을 견디는 얼마나 무덥고 지루한 터널이던가.
―이병초, 『우연히 마주친 한 편의 시』, 형설, 2021.
첫댓글 작년 미당 선생이 살았던 서울 남현동 봉산산방을 두 번이나 갔다 왔다. 원래는 예술인 마을이었는데 주변 건물들은 모두 변했고 미당 가옥만이 원형대로 유지되고 있었고 안에 유품들도 잘 보존되고 있었다. 그의 인생과 시에 대해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