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만에 성사된 푸틴 대통령의 북한 방문은 대략 21시간만에 끝났다. 그만큼 빡빡한 일정으로 진행됐다. 새벽 3시쯤(모스크바 시간으로는 밤 9시) 평양에 도착해 숙소(금수관 영빈관)로 가 잠을 자고 이튿날인 19일 낮 12시(모스크바 시간으로는 아침 6시)쯤 본격적인 방문 일정을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국내 언론들이 하나같이 '지각 대장 푸틴' 어쩌구 하지만, 70대 초반 나이인 그로서는 모스크바와 평양 간의 시차 6시간을 극복하기 위한 신체적 감각 조율이 반드시 필요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동서로 시차가 무려 11시간이나 나는 러시아에서 최고 지도자(소련 포함)들은 통상 극동지역 순방 시 중간 기착지에 머물며 시차 극복에 나서곤 했다. 푸틴 대통령은 평양으로 가는 길에 동시베리아의 '야쿠츠크(사하) 공화국'을 거쳤다. 길거리로 나가 예정에도 없던 주민들과 깜짝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평양 도착 시간이 사전에 공개되지 않았던 만큼, 그의 '지각' 여부는 사실 확인이 불가능하다. 러시아 언론을 보면 '대통령의 연착' 여부가 거의 거론되지 않았다.
푸틴 대통령의 방북 환영식/사진출처:크렘린.ru
그의 방북을 지켜보면서, 눈에 딱 들어오는 현지 언론 기사가 두개 있었다. 대통령과 함께 평양으로 간 크렘린 출입 기자가 쓴 가벼운 취재기(현지 유력 경제지 코메르산트 19일자)와 국내에서도 해석상 논란을 부른 '북러 포괄적 동반자 협정'에 관한 분석 기사(온라인 매체 rbc 19일자)다.
푸틴 대통령의 '지각'이 국내 언론에 크게 다뤄진 만큼, 코메르산트의 크렘린 출입기자 안드레이 콜레스니코프(Андрей Колесников)가 평양에서 송고한 기사를 바탕으로, 우리 식으로 방북 21시간을 다시 쓴다/편집자.
"평양시는 깨끗하고 잘 관리된 도시라는 인상을 준다. 사실 도착하기 전에는 어떤 도시일런지 궁금했다. 실제로 와 보니, 녹지와 공원이 많고 도심 한가운데 극장과 박물관 등 공공건물이 서 있다. 아파트는 단순하지만, 깨끗하고 깔끔하다. 첫 눈에 (벨라루스의 수도) 민스크다. 그래서 낯선 느낌이 아니다. 다만, 길거리에는 차도 사람도 너무 없다.
평양의 분위기/사진출처:크렘린.ru
◇선발대로 평양 도착
TV 취재진과 함께 선발진으로 평양에 갔다. RT(러시아 투데이) 취재진만 해도 5명의 기자와 카메라 기자 2명이다. 평양으로 가는 직항편이 있었다면, 푸틴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처럼 큰 버스 하나는 왔을 텐데, 이번에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공항에서 5대의 도요타 미니 버스에 나눠 탔다. 그리고 한참 기다렸다. TV 장비들을 찾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 시간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안내하는 북한인들과의 대화가 즐거웠다. 이들은 모두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그 친구에게 물었다.
"당신은 뭐하는 사람인데?"
"가이드"
"그럼 평양을 잘 알겠네?"
"아니, 난 직업이 선생이야, 여러분들을 안내하라고 해서, 지금 막 여기에 도착했어"
놀라운 일이었다. 취재진을 안내하러 온 사람들이 '평양을 잘 모르고, 이제 막 여기로 불려욌다니'. 그들은 누군가로부터 무전을 받고 우리에게 전달했다. "빨리 빨리 차에 타세요"
도착한 호텔에서는 돈을 주고 와이파이 서비스(Wi-Fi)를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로비에서만 가능했다. 점심 메뉴로 6조각의 코틀렛이 나왔다. 곧바로 소련 시절의 식당이 떠올랐다. 먹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원하는 사람에게 '팬케이크'을 만들어줬다.
중요한 일정 중 하나가 평양 투어였다. 해방 기념관과 러시아 정교회 등을 둘러봤다.
인솔한 가이드가 버스에서 내릴 때 이렇게 말했다.
"10분 드립니다. 15분이 아닌 걸 다행으로 여기세요., 여기서 15분이나 할 게 전혀 없으니까요."
짜증나는 건 TV 취재팀이었다. 15분을 넘기고 40분을 훌쩍 지났음에도 버스는 떠나지 못했다. 부지런한 RT 특파원들이 금빛찬란한 해방 기념탑을 찍고 또 찍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위대한 소련 인민은 일제를 타도하고 조선 인민을 해방했다. 조선 해방 당시, 소련군이 흘린 피는 조선 인민과 소련 인민 사이의 유대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했다"고 적혀 있다.
김일성 광장에 갈 시간이 됐다. 해방탑 취재로 힘들었던 RT 기자들은 물론, 모두가 그 곳에는 반드시 가야 한다고 했다. 해방기념관 못지 않게 신성한 곳이어서 빠지는 것 자체가 허락되지 않았다. 광장에는 북한과 러시아간의 우의를 주제로 한 거대한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여기서도 우리는, 북한과 러시아는 친구라는 걸 믿을 수 있었다.
그리고 주체 사상탑을 지나, 비행기에서도 거대한 피라미드 처럼 보였던 건설 중인 100층짜리 호텔을 지나, 러시아 정교회로 들어갔다. 북한 경비원이 기자단에게 "모자 쓰는 것을 잊지 마세요. 덥다는 게 아닙니다"라고 정중하게 요청했다.
모스크바에서 같은 비행기로 평양에 온 페오판(Феофан) 신부는 내주 삼위일체 대축일을 기념하기 위해 왔다고 했다. (몽골 서북쪽 시베리아의) 투바에 본당이 있는 그는 "외조부모는 한국 출신이고, 친조부모는 북한 출신”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1910년 일본이 한국을 합병한 뒤, 남한 사람들을 사할린으로 강제 징용으로 끌고 갔고, 그 후손들이 러시아에 남아 있는데, 나도 그중의 한명"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한민족의 러시아 이주는 19세기 중반 극동지역으로 처음 이뤄졌고,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의 사막 지대로 강제 이주됐다"고 말했다. 나는 (그곳이) '사막'이 아니라 '초원'이라고 정정해줬다.
페오판 신부는 2000년부터 한국에서 살았는데, '한국인이 된 기분'을 묻자 "(여전히) 러시아인이라는 느낌"이라고 했다. 남북관계에 대해 그는 “한국에서는 어느 당이 집권하느냐에 따라 남북관계가 달라진다"며 "집권 여당이 북한과 교류 관계를 유지하면, 우호적으로 변하고, 정권이 바뀌면 또 모든 게 달라진다"고 설명했다. 그는 "현재는 남북관계가 별로 좋지 않다"며 "그동안 전단지를 뿌리는 일은 있었지만, '오물 풍선'이 나온 적은 없었다"고 밝혔다.
◇새벽에 도착한 푸틴 대통령
푸틴 대통령이 도착하기 전날(18일) 오후, 도시는 인적이 드물었다. 안내원은 "날씨가 매우 덥기 때문에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쉬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날(19일) 아침,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어딘가에서 계속 사람을 데리고 오는 것 같다. 다만, 그들의 얼굴은 '운이 좋았다'는 표정이다.
새벽에 공항에 내려 기다리고 있던 김정은 위원장과 포옹하는 푸틴 대통령/사진출처:크렘린.ru
푸틴 대통령은 현지 시간으로 새벽 3시에 평양으로 날아왔다. 그 장면을 현장에 있던 몇몇 언론이 촬영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짙은 어둠 속에서 붉은 카펫을 따라 비행기로 향하자, 주변이 환하게 밝아졌다. 몇 분뒤 두 지도자가 포옹하고 차를 함께 타고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두 지도자의 정상회담을 직접 지켜본 기자들은 꼼꼼하게 신분 확인 절차를 거쳐야 했다. 이 과정을 좋다 나쁘다 평가할 수는 없다. 북한 측은 나름 노력했겠지만, 번거로움을 피할 수는 없다.
다만, 그 곳에는 평양 방문 기념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곳이 있었다. 아름다운 산(금강산?) 풍경을 배경으로 했는데, 거기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구멍으로 보이는 뒤쪽에는 북한인들이 러시아 기자들을 찍고 있었다.
이후 푸틴 대통령이 묵었던 '김정은의 집'(금수관 영빈관)으로 이동했다. 규모와 관리 상태를 보면 모스크바 외곽에 있는 푸틴 대통령의 관저 '노보 오가료보'는 물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관저보다 낫다고 할 정도다. 부지가 몇 헥타르인지 아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예측 가능한 핵 공격으로부터도 보호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러시아 공식 대표단은 이곳에 있는 5성급 호텔 건물에 묵었다. 무료 Wi-Fi에 20개의 모니터가 있는 프레스 센터가 있고, 모든 러시아 TV 채널 시청이 가능하며, 만두국이나 성게를 곁들인 아침 식사가 제공되는 곳이다. 또 '카츄샤'와 같은 러시아 민요가 흘러 나온다. 모스크바의 집보다 더 많은 것을 느끼게 만든다.
로비에서는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 등 러시아 대표단이 모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기차를 타고 온 올레그 코제먀코 연해주 주지사의 이야기에 가끔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다. 올레그 벨로조로프 연방 철도청장은 "우리는 석탄 환적을 위한 합작 회사를 운영하고 있으며, 첫 번째 석탄 선적이 시작됐다"면서 "연해주와 함께 철도 관광 프로그램을 개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누군가가 "코로나(COVID19) 사태로 끊긴 철도가 연결됐나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평양까지 갈 수 있나요?"라고 묻자, 코제먀코 주지사는 "조선의 지도자(김정은)가 (지난해 9월) 러시아에 온 것처럼 우리도 이제 이곳으로 올 수 있다"고 말했다.
◇ 밖에선 환영식, 안에서는 정상회담 준비
대표단은 기자들이 평양 도시 투어때 사용했던 도요타 미니 버스를 타고 푸틴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정상회담이 이뤄질 곳으로 이동했다. 김일성 광장에서 열린 환영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공식 환영식은 중국 방문 때와는 달리 비교적 단순하고 짧았다. 풍선이 하늘을 수놓은 가운데, 몇 시간 동안 광장에서 두 정상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에게 손을 흔들며 두 정상은 독일제 리무진을 타고 광장을 떠났다.
그 시각, 관저에 마련된 회의장에 러시아의 대표단이 들어섰다. 5분 정도 기다리면 된다고 했다. 그러나 북한 측의 한 인사(국방상?)가 옆방으로 옮겨가자고 말했다. 사진 촬영을 위해서였다. "어떻게 설까?"라고 물었더니, 북한 측은 "자유럽게 서세요"라고 답했다. 라브로프 외무장관 등 대표단은 어깨를 으쓱하며 자유롭게 자리를 잡았다.
"그럼, 다음은 뭐죠?"
러시아 대표단이 서로에게 확인하자, “두 정상은 단독으로 차를 마시고 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차를 마시며 밀담을 나누는 두 정상/사진출처:크렘린.ru
몇 분 뒤 두 정상이 들어왔고, 편안한 자세로 사진을 찍었다.
두 정상의 연설은 예측 가능했다.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가 수십 년 동안 미국과 그 위성국들의 헤게모니 정책, 제국주의 정책에 맞서 싸우고 있다"고 강조했다. 또 우크라이나 사태를 포함해 러시아 정책에 대한 북한의 흔들리지 않는 지지를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문구는 좀 낯설었다. 어쩐지 북한 지도자에게 더 적합할 것 같았다.
푸틴 대통령은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했던) 2000년 이후 평양이 얼마나 개발되고 변화했는지 인상깊었다는 찬사를 보내고, 이를 이끈 '위대한 지도력'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초 단위로 정확히 움직이던 일정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언론은 두 그룹으로 나눠 프레스 센터에서 정상회담이 열리는 곳으로 가기로 했다. 첫번째 그룹은 두 정상의 문서 서명 순간을 취재하기 위해, 두 번째 그룹은 언론 발표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첫 번째 그룹이 들어간 뒤, 두번째 그룹인 우리는 미니 버스에서 내릴 수가 없었다. 평양의 뜨거운 태양 아래, 30분, 1시간, 2시간, 2시간 30분을 기다려야 했다. 우리를 프레스 센터로 데려가지도, 미니 버스에서 내리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과거 역사'(소련 시절의 관습)에 갇힌 듯했다. 공영 TV채널 '채널1'과 NTV, 통신사, 일간지 등등 모두가 같은 처지에 빠져 있었다.
겉으로는 매끄럽게 잘 돌아가는 것 같았던 북한측 운영이 뭔가 한번 삐걱하자, 융통성 있게 돌아가지 않았다.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포기하고 시간의 흐름에 맡겨두니, 우리는 작고 더운 미니 버스에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끝이 있는 법. 김정은 위원장이 혹시 찾을 경우를 대비해 보관했던 담배와 성냥, 그리고 벌레를 잡는 파리채도 치워지고, 두 정상이 기자들 앞에 섰다. 그러나 발표한 성명은 이미 밝힌 내용들외에 특별한 게 없었다.
◇우샤코프 보좌관의 놀라운 기자 응대법
유리 우샤코프 대통령 보좌관은 기자들에게 푸틴 대통령이 김 위원장에게 차 세트와 본인의 사진과 흉상 등을 선물했다고 말했다. 한 기자가 "어느 정도 크기?"라고 물었을 때, 우샤코프 보좌관은 그를 바라보며 "글쎄, 당신 크기 같은데..."라고 하더니, "근데, 머리는 다르지"라고 말했다.
러시아의 고급 세단 '아우루스'(아우러스)를 선물로 전달했다는 말에, 한 기자가 또 "뭐야, 벌써 두대?"라고 하자, 우샤코프 보좌관은 "세 대가 아닌 건 확실하다"고 받아넘겼다.
이어 두 정상은 산책에 나섰다.
두 정상의 산책 대화
러시아 가수 샤먼의 노래 '일어납시다'가 흘러나오자 자리에서 일어선 관객들/사진출처:크렘린.ru
마지막 일정은 콘서트였다. 여성들이 고운 목소리로 '조국이 시작되는 곳'(С чего начинается Родина)이라는 노래를, 남성들은 '성스러운 인민의 전쟁이 진행된다'(Идет война народная, священная война)를 불렀다. 또 함께 러시아 인기 가수 샤먼의 노래 '일어납시다'(Встанем)»를 불렀는데, 그 가사(일어납시다)에 푸틴 대통령이 김 위원장을 쳐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까이 앉은 탓에 그 장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곧바로 관객 모두가 일어났고, 거기에 그렇게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