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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랑말랑한 시를 찾아서
양문규
찬바람 일렁이는 1월 중순 아침, 눈길을 헤치고 영동역으로 향했습니다. 강화도 문학기행을 하기 위해서였지요. 눈길 닿는 곳마다 세상은 온통 새하얀 눈으로 가득 덮여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발 딛는 곳마다 빙판이었지요. 열차에 몸을 싣고 서울로 가는 2시간여 동안 마치 눈 나라 공화국의 한 시민처럼 느껴졌는데요. 올겨울은 참으로 많은 눈이 내렸습니다.
서울에서 강화도로 가는 길 역시 마을과 들과 산이 온통 새하얀 눈으로 덮였는데요. 오랜만에 찾는 길이어서 그런지 강화도 가는 길이 낯설었습니다. 아마도 눈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권위상 시인의 차로 한참을 달려 양촌과 월곶을 지나면서야 예전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고려궁지에서 일행들과 만나기로 했는데 시간이 넉넉하여 보구곶리 홍선웅 판화공방에 들렀다 가도 될 것 같아 전화를 넣었습니다.
홍선웅 판화가는 1989년 민예총에서 함께 생활했던 선배로 강화도를 마주하는 김포의 끝자락 문수산 아래 작업실을 두고 있습니다. 그는 전화를 받자마자 “어디냐, 차라도 한잔 하고 가.” 하였습니다.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낙향하기 전 여러 번 강화도를 다녀왔습니다. 강화도 갈 때마다 홍선웅 판화가의 판화작업실을 들렀는데요. 그와 함께 전등사, 정수사, 초지진, 동막 등을 여행하면서 강화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공부할 기회를 얻었지요. 이번 짧은 만남 속에서도 그는 그동안 작업했던 판화며, 소장하고 있는 표지판화로 되어있는 서적을 꺼내 보이며 판화가 갖는 의미를 일깨워주었는데요. 한국현대문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최석두 시인의 시집 『새벽길』(조선사, 1948), 이기영 소설가의 『광산촌』(성문당서점, 1944) 등이 그것입니다. 이 책들은 표지판화를 쓰고 있습니다. 홍선웅 판화가의 조정래 『태백산맥』 표지판화 작업 역시 그 연장선의 작업이 아니었을까요. 내가 『실천문학』을 그만두고 낙향할 때 가장 아쉬워하던 선배 중 한 분으로 소식이라도 자주 전하자며 내게 손전화를 사주기도 하였는데요. 지금 쓰고 있는 손전화 번호가 바로 그것입니다.
사적 제133호로 지정된 고려궁지는 고려 시대 대몽항쟁을 위해 도읍을 개성에서 강화로 옮겨(고종 19년, 1232) 다시 환도(원종 11년, 1270)하기까지 38년간 사용되었던 궁궐터입니다.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최우(崔瑀)는 이령군(二領軍)을 동원하여 이곳에 궁궐을 지었다고 기록되었고, 비록 규모는 작았으나 송도 궁궐과 비슷하게 만들고, 궁궐의 뒷산 이름도 송악(松岳)이라 하였다는데요. 강화도에는 정궁(正宮) 이외에도 행궁(行宮)·이궁(離宮)·가궐(假闕) 등 많은 궁궐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조선 시대에는 행궁과 강화 유수부 건물이 들어섰고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했던 외규장각도 있었는데요.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의 방화로 소실되었으며, 서적 등은 모두 약탈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강화유수부의 동헌과 이방청이 남아있을 뿐이지만 강화도는 그만큼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임을 이번 여행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일행들과 고려궁지를 두루 돌아본 후 다음 탐방지인 평화전망대로 향했습니다. 차로 15분 남짓 달려 북쪽으로 들어서자 민통선 안내판과 함께 해병대 제11검문소가 나타났습니다. 유영갑 소설가가 차에서 내려 절차를 밟고 다시 출발할 수 있었는데요. 시간이 늦어 관람불가라 차량 통행이 안 된다는 걸 그는 “이대로 물러서는 것은 문학인의 자세가 아니다. 내가 강화 주민인 것을 강조하며 지인을 만나러 간다.” 고 떼를 쓰자 그때서야 마지못해 차량 통행을 허락하였답니다.
서북 해안의 최북단,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의 강물이 모여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곳, 날씨가 좋은 날이면 멀리 개성의 송악산이 한눈에 펼쳐진다는데요. 유영갑 소설가에 의하면 강화도엔 오전에 눈이 조금 뿌려졌고, 지금은 날이 흐려서 북녘 땅을 보여주지 못해 송구하다며 연방 미안함을 표했습니다. 강을 따라 길게 설치되어 있는 검은 철책선만 바라보며 아쉬움을 달래야 했는데요. 평화전망대 앞에서 기념 사진촬영만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을 그나마 큰 행운이라 여겼습니다.
망월돈대로 가는 중 차 안에서 함민복 시인에게 전화를 넣었습니다. 지금 평화전망대에서 망월돈대로 가고 있는 중이라 했더니, “성님도, 강화도 들어왔으면 바로 연락주시야지… 송악산 못 봤지유.” 그는 오전 11시부터 외포리 숙소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중이라 했습니다. 미리 연락하여 고려궁지부터 함께했으면 좋았을 것을, 숙소에서 만난다는 생각만 한 게 후회스러웠습니다. 그를 빨리 보고 싶다는 생각에 유영갑 소설가에게 “망월돈대 들르고 외포까지 얼마나 걸리나요?” 물었더니 바로라고만 답했습니다.
망월돈대로 가는 길은 쌓인 눈이 그대로 얼어붙어 매우 미끄러웠습니다. 이 상태로 차를 몰고 가는 것이 좀 위험하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하였습니다. 평소 볼 수 없던 넓은 평야의 설경이 보여주는 또 다른 아름다움에 흠뻑 빠졌기 때문입니다. 망월평야는 바다를 매립하여 조성된 것이라 하는데, 논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한참을 달리고서야 망월돈대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바다로 떨어지는 붉은 해를 감상할 수 있었는데요. 강화도를 여려 번 들렀지만 이번처럼 아름다운 해넘이를 본 것은 처음입니다. 여간 기쁜 게 아니었습니다.
망월돈대에서 외포리로 가는 길가의 나무들이 하얀 눈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유영갑 소설가는 저 풍경을 찍기 위해 전국에서 많은 사진애호가들이 찾는다며, 강화도가 보여줄 수 있는 풍경을 한꺼번에 연출하고 있다고 마냥 싱글벙글이었습니다. 설국 속의 눈꽃(상고대)풍경 속에 함민복 시인의 얼굴이 환하게 겹쳐졌습니다. 그를 빨리 만나고 싶었습니다.
함민복 시인이 오전 11시부터 기다렸다는 숙소에 짐을 풀고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그와 함께 외포리 포구로 나갔습니다. 그는 오랜 시간 기다리는 동안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막걸리를 한잔 하였는지 얼굴이 불콰했는데요. “성님 강화도에 왔으니 숭어를 맛봐야 하지 않겠어요.” 여기저기 식당에 전화를 넣었지만 불발이었습니다. 한강과 임진강에서 떠내려 온 얼음조각으로 며칠째 배가 바다로 나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형님 내가 고기 잡는 것도 시로 한번 써보시겨/콤바인 타고 안개 속 달려가 숭어 잡아오는 얘기/재미있지 않으시껴 형님도 내가 태워주지 않았으껴/그러나저러나 그물에 고기가 들지 않아 큰일났시다/조금때 어부네 개새끼 살 빠지듯 해마다 잡히는/고기 수가 쭉쭉 빠지니 정말 큰일났시다/…중략…/숭어를 지고 뻘길 십 리 길 걸어나와/온몸이 땀범벅이 된 채 곶뿌리 끝에 서서/담배 한대물고 걸어나온 길 쳐다보면서/더 지고 나오지 못한 것을 후회도 했다는데/뻘길 십 리 길 가물가물 멀기는 멀지 아느껴 힘들더라도/나도 그렇게 숭어 타작 좀 한번 해보았으면 좋겠시다//현수 씨 콤바인 타고 들어가 고기 싣고 나오는 얘기는/여차리 일부 뻘 얘기지만 뻘이 딱딱해진다는/너무 슬픈 얘기라 함부로 글을 쓸 수 없고/아버지 얘기는 그냥 시인데 뭘 제목만/‘인생’이라고 붙이면 되지 않겠어//형님, 한잔 드시겨
─함민복, 『말랑말랑한 힘』, 「어민 후계자 함현수」(문학세계사, 2005)
외포리 포구의 식당에서 숙소로 들어가는 동안 함민복 시인의 절창 가운데 한 편으로 읽는 「어민 후계자 함현수」가 떠올랐습니다. 그가 몸소 체험했던 삶의 이야기, 동막의 작은 마을에서의 생활체험을 읽어낼 수 있었는데요. 그의 시 「숭어 한 지게 짊어지고」에서처럼 “숭어가 움직이면/움직임을 느낄만큼/숭어가 되는//증발하는 생명 한 지게 되고/뻘에 박혀 있는 흙못 하나”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여차리는 강화도에 있는 한 마을 이름인데요. 강화 바다가 갯벌을 끌어안고 말랑말랑한 생명을 키우듯 함민복 시인은 '말랑말랑'한 시를 쓰고 있습니다. 그것은 ‘뻘’이며, 그 살 속을 넘나드는 원시의 온갖 생명입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바다를 유영하는 ‘숭어’이고 ‘망둥이’며 또 많은 물고기이겠지요. 나는 함민복 시인을 만날 때마다 이원규 시인이 지리산으로 들어간 것처럼 그가 강화도에 내려와 살고 있는 게 참 잘된 일이라 여겼습니다.
외포리 식당에서 함민복 시인의 아내 박영숙 씨도 합류하였습니다. 강태규 시인이 강원도에서 가져온 닭이 인삼과 함께 삶아지고 뜨끈한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술이 돌고 노래와 시가 익어갈 무렵 이문재 시인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근처 문학행사에 초청인사로 참여했다가 합류하게 되었는데요. 어디서 구했는지 숭어 세 접시를 선사했습니다. 닭과 숭어가 어우러지는 안주로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술이 돌아 대취해 있을 무렵 함민복 시인이 갑자기 “저기 저 스님은 누구래요?” 물었습니다. 내가 “고철이잖아.” 답하자 모두 박장대소하는데, 함민복 시인은 “앗! 『핏줄』의 고철 시인이구나.” 빙그레 멋쩍은 웃음을 지었습니다. 그의 모습에 우리는 또 한번 흐뭇하게 웃을 수 있었습니다.
이른 아침 맛난 닭죽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이문재 시인을 찾아 인사를 나누고 정수사로 행했습니다. 함민복 시인이 살던 동막은 시간 관계로 그냥 지나쳐 아쉬움이 크지만 예전에 그와 함께했던 동막을 떠올리면 아직도 그 아름다움의 여운이 깊습니다.
정수사는 서해가 내려다보이는 고즈넉한 절입니다. 초입의 상사화군락지로도 유명하지만 가을 단풍 또한 일품이지요. 그동안 불사가 이루어졌는지 예전의 소박한 절의 모습은 아니어서 좀 아쉬웠습니다. 그리고 누가 돈을 받는지 마니산 오르는 등산로 한 켠에 매표소가 설치되어 눈살을 찌푸리게 했습니다.
정수사에서 내려와 아름다운 해안도로를 따라 바로 초지대교 인근 ‘길상이네인삼가게’로 갔습니다. 함민복 시인이 인삼센터 앞의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멀리서도 보였습니다. 전날 숙소에서 기다리던 그의 해맑은 모습을 여기서 다시 읽을 수 있었는데요. ‘길상이네인삼가게’는 그가 결혼하고부터 아내와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길상’이는 함민복 시인이 한때 가족의 일환으로 생활을 함께했던 강아지의 이름에서 연유된다는 사실을 그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강화에 와 얻게 된 강아지의 이름을 ‘길상’이라 했는데, 그때 개의 이름을 가져와 지금의 인삼가게 상호가 되었답니다. 그런데 가게가 소재한 지역이 길상면이라서 “길상아!” 부르는 게 지역주민들에게 송구해서 ‘길상이’를 ‘길 군’으로 높여 부르기도 했다는데요. 그는 아직도 그 개를 잊지 못한답니다. 한 시간여 동안 그가 내준 홍삼액을 먹으며 환담을 나눈 후 광성보로 향했습니다.
고려가 강화도로 왕궁을 옮긴 후 1233년부터 1270년까지 강화에는 많은 외성을 만들어져 오늘에 전하고 있습니다. 이 성은 그때 해안선을 따라 흙과 돌로 쌓아졌는데요. 그 규모가 매우 커보였습니다. 1871년(고종 8) 신미양요 때 미군과 가장 치열한 격전지로 중군(中軍) 어재연(魚在淵) 이하 전 장병이 이곳에서 순국하였답니다. 이때 성첩과 문루가 파괴된 것을 1976년에 복원하고 당시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무덤과 어재연의 쌍충비각(雙忠碑閣)을 보수, 정비하였다지요. 그만큼 광성보가 차지하는 군사적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는 안해루를 비롯 많은 유적지가 산재해 있지요.
박광숙 소설가에게 오후 2시 이후에 찾아뵙겠다고 했는데, 선생님 댁에 도착한 시각은 낮 12시가 좀 넘은 시간이었습니다. 박광숙(고 김남주 시인 부인) 소설가는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에 가입하여 유신반대운동을 펴다가 1979년 구속된 바 있습니다. 그로 인해 교사로 있던 서울 명성여중에서 해직되었는데요. 그는 출옥한 후 고 김남주 시인의 옥바라지를 하며, 고 김남주 시인이 감옥에서 휴지, 은박지, 우유팩에다 쓴 시를 세상에 전했는데, 『진혼가』 등의 시집이 그것입니다. 민예총 시절 고 김남주 시인과 함께했던 소중한 시간을 되돌아보면서 나는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그가 꿈꾸던 참다운 세상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지요.
강화도를 빠져나와 마송에서 권위상 시인이 내는 늦은 점심식사를 하고 일행들과 아쉬운 작별을 하였습니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문학기행을 통해 사람살이의 소중한 정을 다시 배울 수 있었습니다. 자연과 인간과의 소통, 사람과 사람과의 소통을 통한 따듯한 문학의 연대를 이루는 것이었지요. 그것은 ‘말랑말랑한 힘’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강화도가 잘 보여주었습니다.
─문학 무크 『시에티카』 2013년 · 상반기 제8호
양문규
충북 영동 출생. 1989년 『한국문학』으로 등단. 시집 『벙어리 연가』, 『영국사에는 범종이 없다』, 『집으로 가는 길』, 『식량주의자』. 산문집 『너무도 큰 당신』. 평론집 『풍요로운 언어의 내력』. 논저 『백석 시의 창작방법 연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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