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SKOON
"……깊은 어둠만이 있었다. 계속해서, 계속해서. 내 주위에는 오직 깊은 어둠만이 있었다. 하지만 어둠이 두렵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는 그리운 기분조차 맛보고 있었다. 언제나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었고, 눈을 감아도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었다. 그 좁고 답답한 곳에 내린 어둠은 내 사고를 송두리째 앗아가고 내 생명을 천천히 갉아먹어 갔지만 나는 그 어둠이 싫지 않았다. 어둠은 내가 그 사람을 생각하게 해주는 유일한 수단이었으니까.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그 지루한 시간들과 내게 단 일초의 편안함도 부여해주지 않았던 지독한 환경 속에서도 내가 살아야할 이유를 부여해주었으니까. 한치 앞도 알아 볼 수 없는, 그래서 더욱 그리워지는 그 어둠 속에서만…… 그 어둠 속에서만 아련히 비추어지는 그의 환영이야말로 내게 가장 필요했던 따스한 햇살이었으니까……"
<성기사 아피스트로 휴테르만의 전란 일기 중 (신력 297년 복원판)>
퍼억!!
강렬한 킥이 한 소년의 복부를 때렸다. 연이어 또 다른 사람의 다리가 다시 소년의 머리를 짓밟아 갔다. 그러나 그 소년은 마치 죽은 사람처럼 아무런 저항도 없이 몸을 웅크린 채 구석에서 머리를 감싸 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을 뿐이었다.
소년은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구타를 당하고 있었던 것인지, 온몸에서 멍이 들지 않은 곳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피부가 파랬던 것처럼 그의 몸은 구석구석까지 시퍼런 피멍이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대로라면 조만간 맞아 죽는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상황이 다가올 런지도 몰랐다.
소년을 구타하고 있는 서너 명의 사내들은 소년의 머리를 중심으로 짓밟고 있었다. 소년을 구타하고 있는 이들의 눈에는 소년이 가지고 있는 금발 머리가 그렇게 아니꼬울 수가 없는 것이다. 천민 주제에. 랄파인들이나 가지고 있는 금발을. 그것도 일류 귀족의 상징인 금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말이나 될법한가?
그들은 천민으로 태어난 서러움을, 그리고 귀족에 대한 분노를 소년에게 풀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단순한 재미로 그러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헤헤…… 잠시만 참으라구…… 곧 끝나니까 말이야……"
흥분에 가득 찬 남자의 목소리가 이 어두움이 짙게 내려있는 골목에 울렸다. 특별히 지금이 밤이기 때문에 이 장소가 어두운 것이 아니었다. 사실 이 지저분한 골목은 제 1급 시가지에 세워진 높은 건물들에 가려져 낮이나 밤이나 할 것 없이 언제나 어두운 곳이었다.
기사강국 파라피스의 수도 파라이다에 존재하는 암흑과 무법의 지대. 몰락한 빈민들과 각종 범죄자들이 도망쳐 모여드는 나라에서 버린 땅. 수도 파라이다와 같은 대지 위에 존재하면서도, 대귀족들의 가문이 들어선 파라이다 서쪽의 '윤허의 거리'나 고귀한 왕족과 수많은 국내 관료, 기사들이 오가는 파라이다 중심의 파라피스 왕궁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퇴폐의 거리였다. 화려한 파라피스 왕궁과 윤허의 거리에 가려져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있는 거리였다. 이 거리는 바로 그런 거리였다. 파라이다의 제 3급 시가지 사이에 껴있는 범죄자들의 거리였다.
바로 그 거리의 한 골목 안에서 지금, 금발 소년과 연한 하늘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아름다운 소녀가 대 여섯 명의 장정들에게 둘러 싸여 있었다. 금발 소년은 이미 한참동안 심한 구타를 당하고 있었으며, 하늘색 머리카락의 소녀는 지금 사내들에 의해 윤간을 당하고 있었다.
"아윽…… 아, 알렉……!"
그러나 그 소녀는 자신의 몸이 더럽혀지는 것보다 사내들이 소년을 사정없이 구타하는 것이 더더욱 걱정스러웠는지, 쉴 새 없이 눈물과 신음 소리를 흘리며 소년의 이름을 불러댔다. 이에, 오히려 그녀에게 달라붙어 있던 3명의 사내들은 더더욱 흥분한 듯 사정없이 소녀를 유린할 뿐이었다. 그런 무참한 유린이 계속되고 있던 때였다. 갑자기 사내들의 흥분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괴성이 들려왔다. 흥분이 싹 가라앉을 정도로 오싹하면서도 끔찍한 비명이었다.
"끄억……!!!"
그 비명소리와 함께 한 거대한 그림자가 소녀를 윤간하고 있던 사내들의 옆을 덮쳤다. 그 그림자는 공중에서부터 바닥으로 세차게 떨어져 내렸는데, 그 충격이 어찌나 컸던지 바닥에 쌓인 먼지를 모조리 허공으로 피워 올릴 정도였다. 게다가 무언가 부서지는 듯한 충격음도 들려왔다. 그림자의 정체가 사람이라는 것을 볼 때, 아마도 어딘가가 부러지는 소리였던 듯싶었다. 하긴, 저 거대한 덩치가 사람 머리 위만큼 떠올랐다가 바닥으로 떨어졌으니 그런 소리가 나는 것도 당연했다. 게다가 바닥에 떨어지고 나서도 고무공이 퉁기듯 몇 번이고 튕겨져 나갔으니 어디가 안 부러지고 배기겠는가?
사내들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자신들 옆으로 떨어진 한 덩치를 바라보았다. 입에 게거품을 물고, 흰자로 눈을 가득 채울 정도로 눈을 까뒤집고 있던 그 덩치는 다름이 아니라 골목의 외곽에서 망을 보고 있던 자신들의 패거리들 중 한 사내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게 갑자기 웬 마른하늘에 청천 벽력같은 일이란 말인가?
멀쩡히 망이나 보고 있어야할 자가 갑자기 공중에 떠올랐다가 바닥으로 떨어져오다니. 적어도 상식이 있다면, 이 현상을 그 스스로가 만들어 냈다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다른 누군가에 의해 벌어진 일일 테지.
"쯧쯧쯧……"
그것을 증명하려는 것이었을까? 그 패거리들이 추리답지 않은 추리를 하고 있을 무렵, 어두운 골목의 안으로 터벅터벅 걸어오는 그림자가 있었다. 그 그림자는 그들을 향해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겨오며 혀를 차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마 그 목소리를 들어볼 때 그림자의 정체는 남자, 그것도 상당히 젊은 남자인 듯싶었다.
"나 원 참……"
젊은 남자의 혀 차는 소리에 소녀를 윤간하고 있던 사내 3명이 일제히 어두운 골목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미 주위에는 짙은 어둠이 내려있어 남자의 모습은 좀처럼 확인되지 않았다. 마치 귀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딘가에서 말소리만이 들려오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리 이런 시기라지만 말이야…… 이런 미친 거리를 그대로 방치해두다니, 파라피스도 완전히 갈 때까지 갔구만……"
그렇게 중얼거리며 서서히 골목 안으로 들어온 그 남자의 모습은 ‘없었다.’라는 말이 어울렸다. 그것이 순간, 그 남자에게서 받은 모두의 느낌이었다. 남자의 전신은 몸에 걸치고 있는 롱코트부터 시작하여, 바지, 신발까지 모두가 검은 색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게다가 머리카락 또한 검은색의 긴 장발이었다. 그 탓에 그의 모습은 자연스레 짙은 어둠 속에 녹아 내려졌기 때문에 눈에 잘 보이지가 않았던 것이다.
"이 거리에서 감히 우리를 건드리다니……"
눈앞의 상대가 사람이라는 것을 똑똑히 확인한 사내들은 소녀에게서 몸을 떼고 분노한 표정으로 하나둘씩 일어서기 시작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모처럼의 재미를 방해받아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흑의(黑衣) 남자의 시선은 그들의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에 있질 않았다. 그의 싸늘해진 시선은 사내들의 반쯤 벗겨져 있는 바지에 머무르고 있을 뿐이었다.
"음, 모든 상황 판단이 끝났다."
흑의 남자는 마치 탐정처럼 자신의 턱을 만지작거리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말에 우락부락한 근육의 사내가 자신의 바지춤을 추스르며 흑의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온 몸의 근육을 풀듯이 이리저리 깍지를 트는 모습이 꽤나 가관이었지만, 적어도 그 사내의 몸에 잡혀있는 근육들은 보통이 아닌 듯싶었다. 그러나 흑의 남자는 그저 싸늘한 조소만을 입에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문득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덩치 큰 사내의 뒤편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찢겨진 옷과 자신의 몸을 추스르고 있는 소녀가 보였다. 이제껏 강압적으로 사내들의 밑에 깔려있던 소녀는 그제 서야 조금은 고통스러움에서 벗어난 듯싶었다. 소녀는 골목 안쪽에서 구타를 당하고 있던 금발 소년이 걱정 되는지 골목 안쪽으로 가려하며 주춤주춤 몸을 일으키고 있는 중이었다.
"요, 아가씨. 잠시만 기다리라구. 잠깐이면 끝나니까."
흑의 남자는 소녀에게 가볍게 손을 들어올려 보이며 약간의 웃음기를 담아 그렇게 말해주었다. 그러자 그의 앞까지 다가가 근육을 실룩이고 있던 사내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그의 태도가 마치 자신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다는 듯한 태도였기 때문이었다.
"간덩이가 부은 놈이었구만!!!"
"그러게 말이야."
근육질 사내의 신경질적인 고함에 남자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그러자 근육질 사내가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듯, 그 큰 주먹을 칠흑의 남자에게로 뻗어내었다. 하지만, 눈의 착각이었을까? 근육질 남자의 주먹은 갑작스레 사라져 버린 흑의 남자를 놓쳐 어두운 밤의 허공만을 크게 가르고 있을 뿐이었다. 혹여 착시현상은 아닌가하여 근육질 남자는 재빨리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급급히 흑의 남자의 위치를 찾았다. 이 짙은 어둠 어딘가에 숨어 자신을 농락하고 있는 그 남자의 모습은…… 어느새 그의 바로 옆에 있었다. 근육질 남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바싹 접근해 있는 흑의 남자를 눈치 채고는 황급히 주먹을 자신의 몸 옆으로 크게 휘둘렀다.
"이 놈이!!!"
휘익. 퍽!
그것은 너무나도 짧은 순간이었다. 단지, 단지 두 가지의 짧은 소리만으로 승부는 나버렸다. 어이없게도 주먹을 뻗어낸 근육질의 남자는 허공을 향해 큰 헛손질만을 했을 뿐이었고, 잠깐 동안 모습이 사라졌었던 흑의 남자의 주먹이 근육질 남자의 명치에 정확히 꽂혀 있었던 것이다.
"커, 커헉……!"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지르며 자리에서 그대로 허물어져 버리는 근육질 남자. 그리고 그가 바닥으로 완전히 쓰러지자, 그의 뒤쪽에서 이제껏 여유 있는 표정을 짓고 있던 나머지 사내들도 완전히 겁을 먹었는지 당황해하며 소리쳤다.
"이, 이놈!! 대체 웬 놈이냐!? 설마 다른 패거리들의……!?"
"다른 패거린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말야, 어디서 아름다운 여인의 괴로운 목소리가 들려와서 왔다구."
남자는 말의 앞뒤가 맞지 않는 대답을 천연덕스럽게 하고는, 익살에 가깝게 느껴지는 큰 동작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그러나 공교로운 건지 아니면 일부러 그런 것인지, 그의 발은 바닥에 널 부러져 있던 근육질 남자의 사타구니를 정확히 밟고 말았다.
"크억……!!?"
"엇, 실수……"
쓰러졌었던 사내가 두 눈을 까뒤집으며 입에 게거품을 물었다. 비록 흑의 남자는 태연하게 실수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발에 짓밟힌 사내의 사타구니 사이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보니 결코 실수는 아닌 듯 했다.
"여성의 합의 없이 이루어지는 섹스는 개들이나 하는 거다."
이번에는 조금 분노가 포함되어 있는 목소리였을까? 그의 낮게 깔린 음성에 뒤쪽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던 5명의 사내들이 몸을 움찔거렸다.
흑의 남자는 아직도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소녀에게 다가가 자신의 검은 코트를 덮어 주고는, 몸에 힘을 잃어 바닥을 짚어가며 비틀거리고 있던 그녀의 몸을 가볍게 안아들어 땅에 두 발을 바로 세워 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머지 사내들도 천천히 그 남자의 주변을 포위하듯 주위를 감싸갔다.
그리고는 신호와 함께 모두 그에게 돌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이번에도 결과는 같았다. 흑의 남자는 마치 춤을 추는 듯이 자연스럽게 남자들의 사이를 이리저리 빠져 다니며, 그의 손과 발을 한번씩 뻗어내 사내들을 뒤로 꼬꾸라지게 만들었다. 그의 대부분의 공격은 얼굴에 꽂혔는데, 그것이 또 어찌나 강렬한 공격이었는지 꼬꾸라진 사내들 중 얼굴이 뭉개지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다섯 사내 모두는 흑의 남자의 공격에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순식간에 이 골목에 서있는 사람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흑의 남자와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는 하늘색 머리카락의 소녀 밖에 남질 않았다. 그러나 소녀가 멍해져 있었던 것은 아주 잠시였다. 그녀는 흑의 남자에게 황급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골목의 끝에서 여전히 몸을 웅크린 채로 떨고 있는 금발의 소년에게로 다가갔다.
소녀의 그런 행동에 흑의 남자도 뒤통수를 긁적이며, 소년이 쓰러져 있는 골목의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잠시 후, 엉망진창으로 터져있는 금발 소년을 바라본 흑의 남자의 입에서는 묘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응……?"
흑의 남자는 꽤나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하긴, 지금 소년의 상태를 본다면 그 누구라도 놀랄 것 같지만 말이다.
소년의 금발은 얼마나 짓밟혔는지 머리카락들에 잔뜩 엉겨 붙은 흙먼지에 의해 빛을 잃고 있었고, 몸에 걸치고 있던 누더기 같은 옷도 그나마 여기저기가 더 찢어져 옷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물론 문제는 그런 소년의 외모가 아니었다. 그 찢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시퍼런 피멍과, 소년의 입가에서 흐르고 있는 피는 그의 부상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어 주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엉망이 되어버린 소년의 모습이 이 흑의 남자에게 과연 놀라운 것이었을까?
"이상한 녀석이군……"
금발의 소년은 희미하게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에 살며시 눈을 떴다. 뭐라고 하는 거지? 이 녀석은 또 누구야? 아직도…… 맞아야 하는 건가……? 누나는 어떻게 되었지……? 도대체 언제쯤이나 이 괴로움이 끝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소년은 눈앞의 남자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이미 수없이 구타를 당해 눈뿐만이 아니라 얼굴과 온몸이 성치 않았기에 무엇 하나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남자가 누구인지 판단한다 해서 무엇이 달라질 것인가? 이제는 의식조차 희미해지려고 하는데. 그렇게 점차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도, 소년은 희미하게 들려오는 남자의 마지막 말만은 들을 수가 있었다. 분명 그는 이렇게 말했다. 꽤나 어처구니없다는 말투로.
"어이, 너…… 그렇게 멋진 오라를 가지고 있는 주제에, 왜 저런 시시한 녀석들에게 맞고 있는 거냐?"
희미한 빛만이 존재했다. 희미하게 사물을 분별할 수 있는 정도의 미약한 빛만이 존재하는 장소였다. 그런 장소에서, 금발의 남자는 천천히 눈을 떴다. 마치 이제까지 긴 꿈을 꾸었다는 듯한 몽롱한 눈빛으로. 그러나 금발의 남자는 자신이 있는 곳이, 그리고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현실이 아직은 익숙지 않았다. 그의 표정에는 금 새 놀라움이 베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반사적으로 누워있던 침대에서 몸을 퉁겼다. 그러나 전신에 고통이 덮쳐와 그는 그대로 다시 침대에 쓰러져버렸다. 결국 그는 작은 신음소리를 내며 다시금 윗몸만 천천히 일으켜 고개를 좌우로 돌려보았다.
"아, 일어나신 건가요?"
청아한 음성이 금발의 남자의 동작을 멈추게 했다. 금발의 남자는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기 위해 있는 힘을 다 짜내어 윗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아…… 아직 무리하시면 안돼요."
그의 모습이 안쓰러웠던 것인지, 그 목소리의 주인은 그의 어깨를 살며시 눌러주며 침대로 다시 눕혔다. 그제 서야 그의 흐릿한 시선에 사람의 모습이 잡혔다. 그러나 그의 눈으로 알 수 있는 것은, 그 목소리의 주인이 푸른색의 머리카락을 가졌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얇고 청아한 목소리나 흐릿하게 잡히는 체형의 윤곽을 보아 여성이라는 판단은 내릴 수 있었다.
"이곳은…… 어디입니까……?"
금발의 남자가 여성의 부드러운 손길에 의해 침대로 다시 뉘여 지며 그렇게 물었다. 여성은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그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아직 이곳이 익숙하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이곳은 아피스트로님의 방입니다. 그러니까 기사의 관 3층에 있는 성기사단장의 방이지요."
약간 웃음기가 베어있는 여성의 말에, 금발 남자 아피스트로의 얼굴에도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그랬다. 오늘 부로 그는 다시 자유의 몸이 되었고, 예전처럼 성기사단장과 파라피스 제 1 성기사라는 명예를 되찾았다. 그는 피곤이 역력해 보이는 두 눈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6년 만에 돌아온 그리운 자신의 방을 살펴보려고 했다. 그러나 이곳을 지배하고 있는 어둠 때문에 그는 좀처럼 사물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너무…… 어두운 것 같습니다만……"
“조금 불편 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아피스트로님의 치료를 담당한 대신관 분들이 너무 강한 빛의 자극은 지금의 아피스트로님께는 독이 된다고 하셨기 때문에 부득이 취한 조치입니다.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만……”
그렇게 말하는 여성의 말에도 약간의 의아함은 베어있었다. 아마 그녀는 아피스트로의 눈이 왜 빛의 자극에 약해졌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는 것이겠지.
"그렇군요…… 그럼 지금 밖은 어떻습니까……? 어둡다면 커튼을 좀 치워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밖의 풍경을 좀 보고 싶군요……"
"아, 예. 지금은 밤이니까 아마 괜찮을 거라 생각해요."
그렇게 대답하며 여성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을 장식하고 있던 화려한 창가로 다가갔다. 그녀가 벽면의 3분의 2를 채우고 있는 거대한 창문의 커튼을 활짝 양쪽으로 제치자, 창문을 통해 희미한 달빛의 투영되어 아까보다는 조금 더 방안이 밝아졌다.
"눈이 부시지는 않으신 가요?"
"아닙니다…… 이 정도는 괜찮은 것 같군요……"
아피스트로는 여성의 세심한 배려에 다시금 옅은 미소를 머금어 보이며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모습에 여성도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아피스트로에게 마주 고개를 숙였다. 아피스트로는 그제 서야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그녀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특이할 것 없는 랄파인 여성이었다. 푸른 머리에 푸른 눈동자. 보통의 랄파인과 다른 점이라면 얼굴에 왠지 모를 상냥함이 베어있다는 것 정도일까? 아피스트로는 상냥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주고는 천천히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밖은 이미 짙은 어둠이 내리고 있는 밤이었다. 하지만 달빛이 환해서 그런지 어둠은 그다지 큰 힘을 쓰지 못했다. 그의 눈에 들어온 장면은 낯익은 파라피스 왕성의 모습이었다. 광대한 토지 위에 세워진, 웅장한 고딕 장식의 건물들과 아름다운 동선을 그린 건물들이 달빛과 어우러져 더더욱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해 내고 있는 멋진 정경이었다.
"……꿈을 꾸었습니다."
"아……"
한참 동안 창 밖만 바라보고 있던 아피스트로가 잔잔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푸른 머리카락의 랄파인 여성은 조금 놀란 듯한 목소리를 내었다. 아마 아까 전 아피스트로가 놀라 벌떡 일어난 것이 꿈 때문일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혹시 악몽이셨던 가요?"
아피스트로는 그녀의 말에 다시 한번 작게 웃었다. 걱정이 담긴 그녀의 목소리에서 오랜만에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이 여성은 아직도 성기사 아피스트로 휴테르만이라는 존재를 존경하고 있는 것일 테지. 이제는 존경할 가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니요, 좋은 꿈이었습니다……"
"그건 다행이네요. 아피스트로님은 오랫동안 병을 앓아오셨으니까, 가끔씩은 그런 식으로라도 좋은 일을 체험하시지 않으면……"
여성의 알 수 없는 말에 아피스트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아피스트로는 상황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저녁에 자신의 침실을 찾아 왔었던 5인의 대귀족들에게 들었던 이야기들 속에서 단서를 얻어, 대충 현재의 상황과 자신의 처지를 추리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현재 파라피스 국내를 비롯하여 여러 국가들 사이에서는, 삼(三)기사 중 하나인 아피스트로가 원인 모를 중병으로 요양 중이라고만 알려져 있었다. 그가 단죄의 탑 지하에 갇혀있던 지난 6년 동안, 파라피스에서는 그에 관한 모든 진실을 은폐하고 아피스트로가 심한 병을 앓아 지방의 어느 처소에서 요양중이라고 국내외로 발표해 놓았던 것이다.
파라피스로서도 세계 기사들 사이에서 아피스트로가 차지하는 비중은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차마 그가 중죄를 범해 단죄의 탑에 감금시켰다고 말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 파라피스의 국제적 체면이 걸린 문제였기도 했고 말이다. 결국 아피스트로가 겪었던 이 6년간의 참담한 옥살이는 성기사단과 왕궁 내의 고위 관료들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 되어 버린 셈이었다. 그리고 아피스트로는 더 이상 중죄인이 아닌, 국가의 위기에 병을 떨치고 일어나 전쟁에 참전하려하는 영웅이 되어있었고 말이다.
"예…… 그렇군요……"
아피스트로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여성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지난 6년간의 행방이야 어쨌든 좋은 꿈을 본 건 사실이었고, 그녀의 마음 씀씀이 또한 고마운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낮에 성기사 분들이 다녀가셨어요. 모두들 아피스트로님을 많이 걱정하고 계신 것 같아요.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남성분들이…… 눈물을 흘리시는 건 처음 봤거든요."
아피스트로는 계속적으로 시선을 창밖에 고정시킨 채로 여성의 말을 듣고 있었다. 마치 꿈만 같았다. 다시금 이렇게 세상의 빛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비록 미약한 달빛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좋은 꿈이라면 계속 꾸고 싶은 것일지도…… 그것이 허망한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좋은 꿈이라면 현실보다 계속 그 속에 머무르고 싶어 하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아피스트로는 그렇게 말하며 창가에 고정되어있던 시선을 돌려 여성을 바라보았다. 말의 앞뒤가 없는 갑작스러운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랄파인 여성은 다시 한번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아피스트로에게 상냥하게 대답해주었다.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 말씀으로 저는 한 가지 분명한 깨달음을 얻었군요."
"깨달음……?"
이번에는 아피스트로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묘하게 사람을 안도시켜 주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아피스트로의 질문에 활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지금 전 아피스트로님의 간병을 맡고 있다는 것, 그래서 이 이상 아피스트로님을 피곤하게 만드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 그러니, 제 쓸데없는 말에 너무 신경 쓰지 마시고, 아피스트로님께서는 잠시 더 눈을 붙이시는 것이 좋겠어요."
"아…… 적어도 이름 정도는……"
그녀가 아피스트로의 침대보를 끌어올려 그의 몸을 덮어주자, 아피스트로는 조금 황급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물었다. 아피스트로는 그제 서야 그녀가 자신을 간병해주는 고마운 사람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유라니 멜레디아입니다. 보시는 대로 신관이예요. 아직은 많이 미숙하지만."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 수 있는 신관이라면…… 이미 훌륭한 신관인 것이겠지요……"
"칭찬은 영광스럽게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럼 저는 일단 응접실에 나가 있을 거예요. 하지만 1시간에 한번씩은 이곳에 들려 아피스트로님의 상태를 체크할 겁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으시면 침대 위에 있는 종을 울리시거나, 방금 말씀 드렸던 제 이름…… 유라니라는 제 이름을 불러주세요."
활발한 목소리로 말하는 유라니에게 아피스트로는 잔잔히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유라니는 아피스트로에게 고개를 한번 깊이 숙여 보이고는 아피스트로의 침실에서 나갔다. 아피스트로는 유라니가 침실을 나가, 방문까지 완전히 닫아주고서야 두 눈을 감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꿈인가……'
꿈이었다. 되돌릴 수 없는 꿈이었다. 이제 와서는 후회도, 슬픔도 느껴서는 안 되는 그런 꿈이었다. 하지만 아피스트로는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더라도 그 꿈이 계속되기를 원했다. 비록 이제는 느낄 수도, 잡을 수도 없는 환영과 다름없는 존재의 꿈이었지만 그는 바랬다. 잡을 수 없는 것이기에 더더욱 갈구했다. 그것이 영원의 휴식으로 이어지는 허무한 꿈이라고 하여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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