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레스 오블리주, “자유수호 위한 6·25 참전, 개인과 가문의 영광”
대통령 아들 존 아이젠하워는 자원
워커·밴플리트 장군은 부자가 참전6·25전쟁 당시 미군 장군의 아들
142명이 참전해 35명이 전사·부상
“굳건한 한미동맹 매우 자랑스러워”
기사사진과 설명

1952년 12월 미국 대통령
당선인 신분으로 한국 전선을 방문했던 당시 아이젠하워(왼쪽) 대통령과 6·25전쟁에 참전 중인 그의 외아들 존 아이젠하워
소령. |
세계 최강국인 미국의 힘은 군사력과 경제력에 바탕을 둔 것이나, 그 근원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다.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한미동맹을 이루어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역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대표적인 지도자인데, 필자는 워싱턴에서 근무할 때 한국과 관련된 그의 일화를 더 자세히 알게 됐다.
2차대전의 영웅인 아이젠하워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여름 미국 대통령선거를 위한 공화당 후보 경선에서 이겨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후보수락 연설을 하기 위해 시카고를
방문했다. 이때 육군소령이던 외아들 존이 숙소인 블랙스톤호텔로 아버지를 찾아왔다.
아들= “이번에 한국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아버지= “나도 군인으로서 전쟁에 참전해 봤으니, 위험을 무릅쓰고 참전하려는 너의 의사를
존중하겠다.”
아들=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 “네가 한국전쟁에 참전해서 전사하거나 부상 당하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다. 그러나 포로가 되어서는 안 된다. 포로가 되면 적들이 너를 볼모로 미국과 유엔의 정책에 반하는 방향으로 협상하려 할 것이다.
포로가 될 상황이면 네 권총으로 자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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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시 전선을 지휘하던
미8군사령관 밴플리트(오른쪽) 대장과 공군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 평양 북방 순천 상공에서 야간폭격임무를 수행하다 실종(1952년 4월)된
밴플리트 장군의 아들 밴플리트 주니어 중위. |
포로 될 상황이면 권총으로 자결하라
이 대화
내용은 아이젠하워 집안에서는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다. 필자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손녀로서 아이젠하워기념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수전
아이젠하워로부터 이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 이렇게 아들을 한국에 보낸 아버지는 1952년 12월 대통령 당선인 신분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도 당시
미8군사령관 밴플리트 대장에게 “내 아들이 포로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백선엽 장군이 필자에게 전해준 적이
있다.
존은 6·25전쟁에서 미 3사단 대대장과 정보참모 직책을 수행했다. 그는 참전 중에 부친 아이젠하워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라는 트루만 대통령의 지시에 “전선에서 부하들을 두고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러나 트루만 대통령의 명령이니
참석하라는 말을 듣고 부친의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그는 한국 근무를 마치고 귀국해 준장으로 예편해 훗날 벨기에 주재
대사를 역임했다. 필자는 주미국방무관 재임 중에 메릴랜드 주에 살고 있던 존 아이젠하워 준장에게 필자가 영역한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 『조국이
없으면 나도 없다(Without my country, I can not exist)』와 우리의 전통 자개함을 기념으로 선물하고, 감사의 표시를
했다. 그는 당시 91세의 고령임에도 필자에게 고맙다는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는데, 그 몇 달 후 세상을 떠났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사돈(존의 장인)도 대령으로 6·25전쟁에 참전해 맥아더 장군의 참모로 근무했고, 그의 두 아들도 웨스트포인트 출신으로 군대생활을 했다.
아이젠하워 집안은 미국을 대표하는 군인 가문인 동시에 한국과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셈이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입장에서 보면
자신은 6·25전쟁을 끝내고 이승만 대통령과 한미동맹을 맺은 주인공이고, 자기 아들과 사돈은 6·25전쟁에 직접 참전했고, 자기 손녀는
아이젠하워기념재단 이사장으로서 한미동맹을 기리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젠하워 가문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진면목과 함께
한미동맹이 미국에서 어떤 뿌리를 두고 가꿔지고 발전돼 왔는지 잘 보여준다. 아이젠하워 외에도 많은 미국 지도자들의 아들이 6·25전쟁에
참전했다. 이들 다수가 굳이 참전하지 않아도 됐는데 참전을 자원했다.
“(낙동강방어선을) 사수하든가, 전사하라(Stand or
Die!)”를 외치며, 낙동강전선을 지켰던 미8군사령관 워커 장군의 아들 샘 워커 대위도 보병중대장으로 전선에서 싸웠다. 전선 시찰 중 순직한
아버지 워커 장군의 영결식에도 “전투 중인 중대장이 부하들을 전선에 두고 갈 수 없다”고 참석을 거부했으나, 맥아더 장군의 명령을 받고
참석했다. 이 아버지와 아들은 미군 역사상 최초로 부자 4성 장군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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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아들 존
아이젠하워 예비역 준장이 2013년 8월 당시 주미국방무관이던 필자에게 보낸 편지. 존 아이젠하워 장군은 편지에서 필자의 선물에 대한 감사와
더불어 “한국전 참전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
한미동맹상 받자 “감사·영광”
우리 국방부는 한미동맹 60주년을 맞아 제정한 한미동맹상을
최초로 워커 장군에게 수여했다. 필자는 주미국방무관 재임 시절 샘 워커 장군과 통화하며 감사를 표하고 서울에서 열리는 시상식에 참석할 것을
요청했는데, 당시 88세였던 그는 “큰 영광이다. 그러나 의사가 장거리비행을 금지시켜 직접 갈 수 없으니, 예비역 장교인 두 아들을 대신
참석시키겠다”고 말했다.
한국 전선에서 22개월간 미8군사령관을 역임한 밴플리트 대장 역시 부자가 6·25전쟁에 참전했다. 외아들
제임스 밴플리트 중위가 공군 폭격기 조종사로 평양 북방 순천 상공에서 야간폭격임무를 수행하다 실종됐는데, 밴플리트 사령관은 실종된 아들을 찾는
수색작전을 조기에 종결시켰다.
6·25전쟁 때 미군 장군들의 아들 142명이 참전했고, 그중 35명이 전사하거나 부상 당했다.
미국의 이런 예는 6·25전쟁에 앞선 제2차 세계대전 때도 많이 있으며,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케네디 대통령도 2차대전 때
해군 장교로 참전했다가 일본 구축함 때문에 함정이 격침되고 부상 당해 대통령 재임 중에도 그 후유증으로 고생했고, 그의 형 조 케네디도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필자가 대령 시절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동맹군사령부(MNF-I) 협조단장으로 근무할 때 인연을 맺은
페트레이어스 장군도 마찬가지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이라크전쟁과 아프가니스탄전쟁 두 전쟁에서 동맹군사령관을 역임한 CIA 국장 데이비드
페트레이어스 대장을 워싱턴에서 다시 만났을 때, 그는 “내 아들이 아프가니스탄 전선에서 소대장 임무를 잘 수행하고 있다”며
자랑스러워했다.
솔선수범으로 국민 신뢰 쌓아
오디어노 육군참모총장의 아들
앤서니 오디어노 대위도 이라크전에 참전해 바그다드공항 부근 작전에서 왼팔을 잃었다. 바이든 부통령·매케인 상원의원·뎀시 합참의장의 아들도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했다.
미국뿐 아니라 영국도 마찬가지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2차대전 때 운전병으로 복무했다. 그녀의
아들인 앤드루 왕자는 포클랜드전쟁에서 헬기 조종사로, 손자인 해리 왕자(찰스 황태자의 아들)는 아프간의 최전선에서 싸웠다. 영국 국민이 자기
왕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리더십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가
솔선수범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지도층을 가진 국가는 융성하며, 그렇지 않은 국가는 쇠망의 길로 들어서는 경우를 우리는 역사를 통해
보아왔다. 지도층이 솔선수범할 때 도덕적 우위 속에서 국가지도체계가 확립되고, 국가나 조직은 원활하게 움직이게 된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이다. 미국과 영국의 지도층은 가장 위험한 장소인 전장에 나가 책임을 다하고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실천하면서
국민의 신뢰를 쌓아왔던 것이다. 사진=필자 제공
<전 주미국방무관 이서영 장군의
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