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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11-20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본문에서는 에서와 야곱이 서로 떠나는 장면에 이어서 야곱이 가나안 땅 세겜에 이르러서 장막을 치고 단을 쌓음으로 대대로 기념이 될 표적을 남기면서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나의 도움이셨고 앞으로도 그러하실 것이고 영원토록 그러하시리라는 고백을 남기고 있습니다.
1. 본문 11-12절은
“(11)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나의 소유도 족하오니 청컨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
(12) 에서가 가로되 우리가 떠나가자 내가 너의 앞잡이가 되리라” 입니다.
1) 본문 11절에서 야곱은 총체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앞세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혜택이 자기 소유에도 미쳐서 풍족하다고 말합니다. 자기가 형님께 드리는 것도 그 중에 일부라고 합니다. 그리고 강권하여 예물로 드립니다.여기서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고 그것을 나누는 정신이 있습니다.
2) 또 본문 12절에서 보는 대로 에서는 자비로운 마음에 기울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야곱은 여전히 그를 불신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두려움의 올무에 걸려 있다거나 형제 우애 속에 불성실성이 감춰져 있다고 의심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야곱은 자기 형을 새로 격분시킬 일이라도 저지를까봐 매우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교만하고 흉포한 자는 조그마한 꼬투리만 있어도 쉽사리 격노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성자 야곱은 꼭 두려워 할 만한 이유가 없었지만 지나칠 정도로 불안 해 하였습니다. 그는 에서의 관대한 마음을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총체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서는 연약한 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는 명백한 체험에 의해 하나님이 그의 구원을 감시하고 계신다는 것을 확신하였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와 형 사이에 그 하나님이 서 계신다는 것을 몰랐단 말입니까?
늑대와 같은 에서가 양같이 변형된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일이 아니었다면 그런 믿을 수 없는 심적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례에서 우리 불안과 걱정하는 심리에 대한 억제를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불안거리를 주실 때 우리는 의심스러운 일처럼 떠는 일이 없도록 힘써야 합니다.
2. 본문 13-16절은
“(13)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유약하고 내게 있는 양 떼와 소가 새끼를 데렸은즉 하루만 과히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14) 청컨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짐승과 자식의 행보대로 천천히 인 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15) 에서가 가로되 내가 내 종자 수인을 네게 머물리라 야곱이 가로되 어찌하여 그리하리이 까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하매
(16) 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회정하고” 입니다.
야곱은 자기 형 에서와 동행하지 못하는 데 대한 구실을 내세우고 있는데 그런 것들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야곱은 거짓된 핑계로써 그런 것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물론 야곱은 자기 형에게 부담스럽거나 폐를 기치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이런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야곱이 다른 방향으로 여로를 바꾸는 것을 볼 때 실제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은 감추고 달리 표현했던 것 같습니다. 야곱은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많이 데리고 왔으므로 길이 지체되니 앞서 가 달라고 자기 형에게 요구합니다.
야곱은 ‘내가 자식의 행보대로 따르겠나이다. 나는 자식의 발걸음에 맞춰서 천천히 나아가 세일 산에 있는 형님께 이르겠나이다’ 하고 말합니다. 이런 말로써 야곱은 자기 의중에 없는 일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자기 형을 떠나자 다른 곳으로 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는 진실이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아무런 해가 수반되지 않는 때에라도 그분께서는 우리의 거짓말이나 거만을 용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험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을 때에 이런 속임수에 의존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됩니다.
3. 본문 17-19절은
“(17)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은 고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18)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검 성에 이르러 성 앞에 그 장막을 치고 (19) 그 장막 친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은 일백 개로 사고” 입니다.
1) 모세가 곧 설명하듯 숙곳이란 말에는 예상하는 어법이 들어 있습니다.
야곱은 숙곳에 며칠 간 머물렀을 법도 합니다. 오랜 여행에서 쌓인 피로를 풀도록 자기 가족과 가축 떼를 휴식시키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는 숙곳에 이르기까지는 휴식처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그곳 이름을 숙곳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천막이란 말입니다.
그는 다른 곳에서는 감히 발을 든든히 딛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다른 곳에서도 천막을 많이 쳤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념을 오직 이곳에만 고정시키는 이유는 이제야 드디어 안주할 수 있는 땅을 허락받은 때문입니다.
2) 그러나 그곳은 거주지로서 넓지 못하였기 때문에 야곱은 계속 나아가다가 세겜에 이르렀습니다.
이 성의 명칭은 하늘의 아들에게서 유래했지만 그 이전의 명칭도 18절에 언급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렘을 고유명사로 생각하는 해석자들과 의견을 같이 합니다. 물론 야곱이 평안히 세겜에 이르렀다는 해석에 대해 논란을 벌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성은 살렘이라고 불리울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성이 나중에 예루살렘이라고 불리운 성과 다르다는 것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마찬가지로 숙곳이란 이름으로 부르는 성도 둘이었습니다.
3)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서 모세가 19절에 기록하고 있는 땅을 매입하는 것은 불합리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평생토록 묘지 이외에는 아무것도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이삭도 모든 직접적인 토지 소유는 보류하고 아버지의 기업에 만족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나그네 노릇을 할 것이라는 조건으로 그들을 그 땅의 주인과 상속자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적당한 시기를 기다리는 대신 돈으로 자기 밭을 샀기 때문에 그릇된 행동을 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밭 매입 가격에서 야곱이 탐욕스럽지 않았다는 것을 즉시 추리해 낼 수 있습니다. 그는 은 일백 개를 지불했습니다. 그토록 적은 금액으로 그가 광대한 영토나 거리낄 것이 없이 지낼 수 있는 은신처를 매입할 수 있었겠는가?
더욱이 모세는 야곱이 성 맞은 편에 장막을 치고 그 장막 친 지역을 샀다고 명백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소유한 땅은 초장도 아니고 포도원도 아니며 경작지도 아니었습니다. 그 성의 주민들은 성 근처에 거주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그들과 협정하여 적은 금액으로 화평을 샀던 것입니다.
이런 불가피성이 바로 야곱의 변명이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사로 기대해야 마땅할 것을 사람에게 샀다고 비난할 자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약속된 땅의 지배를 소망으로 포용했어야 할 야곱이 그 땅을 향유하는 데에 너무도 급급했다고 말할 자도 없었습니다.
4. 본문 20절은 “거기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해이스라엘이라 하였더라” 입니다.
1) 본문 20절 초에 “거기 단을 쌓고”에서 야곱은 자기 가족을 거느릴 수 있는 장소를 얻자 하나님께 엄숙한 예배를 드립니다.
모세는 앞에서 아브라함과 이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증언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어느 곳에서든지 기도나 다른 신앙 행위로 순수한 하나님 예배에 헌신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들은 여호와께서 자기들의 정착지를 허락하실 때마다 외형적 경건의 고백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제단 건립을 읽을 때마다 그 의도와 용법을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희생을 드리고 순수한 의식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 아뢰기 위해 단을 쌓았습니다.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자기들 종교와 신앙을 알리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하는 것은 경솔하게도 그들이 하나님 예배를 장난으로 드렸다고 생각하는 자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규칙대로 자기들의 행동을 지향하는데 정성을 기울이며 관심을 두었고 그 규칙은 노아와 셈으로부터 그들에게 전수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제단이란 말을 ‘대유법’으로 경건에 대한 외면적인 증거로 이해해야 합니다.
더욱이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 예배에 대한 애착심이 야곱에게 얼마나 크게 작용하고 있었는지 분명히 감지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비록 여러 가지 환난에 기진맥진했지만 그런데도 제단을 잊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자기 은밀한 감정 가운데서 남몰래 하나님을 예배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하신 유용한 의식을 열심히 이행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인간이 육신으로 존재하는 한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또 희생제물이 까닭 없이 제정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가 단을 쌓은 데에는 또 다른 목적도 있었습니다. 야곱은 자기 전 가족도 동일한 경건 의식을 품고 하나님을 예배시키려고 했습니다. 자기 가정을 속되게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소에서처럼 그 가정에서 왕 노릇 하시도록 만반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한 가정의 경건한 가장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도리입니다.
더욱이 세겜 지역 주민들은 잡다한 미신에 빠져 참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타락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자기와 그들 간에 명확한 구별을 짓고 싶어했습니다. 세겜인과 인근 여러 민족들도 틀림없이 자기들의 제단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자기 가족을 위해 상이한 예배 방식을 확립함으로써 자기에게 특유한 신이 계시다는 사실을 선언합니다. 또 자기가 완전하고 순수한 신앙이 시작되어 나온 거룩한 조상들로부터 타락하지 않았다는 것을 밝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런 행동으로 말미암아 비난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세겜인과 다른 거민들은 거의 이런 행동에서 멸시 당했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자 야곱은 우상숭배자와 뒤섞이지 않는 일을 무엇보다 우선시 했습니다.
2) 본문 20절 후반에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하였더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1) 이 명칭은 제단과 별로 조화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명칭에는 무더기나 뗏장이 마치 하나님의 상을 형성한 듯한 감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의미한 것은 이와 다릅니다.
제단은 하나님의 모든 이상과 약속에 대한 기념물이자 상징이었습니다. 따라서 야곱은 제단을 바라볼 때마다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촉구할 양으로 이 칭호로써 제단을 영예롭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여호와는 나의 도움이시라’고 기록할 때도 같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또 에스겔이 새 예루살렘에 대해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 라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형식의 발언에는 엄격한 은유 감각이 결여되어 있지만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미신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을 상징과 결부시켜 버립니다. 말하자면 그분을 하늘의 보좌에서 끌어내려 자기들의 고안물로 나타냅니다. 이것은 어리석고 악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땅에 있는 표시물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경건하고 정당한 방식입니다.
(2)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야곱은 자기가 경배한 신이 바로 확실한 말씀에 의해 계시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증명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그 하나님을 다른 모든 우상과 구별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신비와 영광에 대해서 경솔하게 말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자기 말씀 가운데서 알리신 그대로 말해야 됩니다. 그것은 신앙 의식에서 비롯하며 우리는 그것을 겸손의 규칙으로 준수해야 합니다.
야곱은 자기 후손도 존중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와 구원의 언약을 맺으시겠다는 분명한 조건으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이 기념물을 남깁니다.
그는 자기가 가르침을 받은 말씀과 이상을 이 단위에 새기기라도 하는 듯이 그렇게 합니다. 그는 자기 사후에라도 자손들이 이 기념물로부터 그의 종교가 캄캄하고 불분명한 우물이나 흐릿하고 탁한 웅덩이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니라, 맑고 순수한 샘에서 흘러나왔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할 수 있게 하려고 그렇게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