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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비밀
(시 90:1-17)
찬송 263장
시편 90편은 시편에서 유일한 모세의 시로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신앙적인 행동으로 말미암아 모두가 광야에서 진멸되리라는 하나님의 진노가 선고되었을 때 당시 민족의 지도자로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중보자 역할을 했던 모세가 지은 민족의 애가입니다.
여기서 모세는 영원하신 하나님과 유한 무상한 인간을 대조하면서 인간이 자신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멀리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깨닫게 하면서(1-12절), 백성들을 향한 진노를 거두시고 긍휼과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13-17절).
그런데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의 교훈은 다름 아닌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의 죄악됨과 연약함을 인정하고 더욱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고 나아가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온전하고 긍정적인 믿음으로 승리하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시 90편
인생과 시간
1. 시 90편은 어떤 시인가?
* 애가/ 이 시는 시편에 수록된 6편의 민족 애가 중 마지막 것이다.
* 모세의 시/ 이 시는 시편에 기록된 유일한 모세의 시이다. 따라서 성경 시편 가운데 가장 오래된 시라 할 수 있다.
* 배경/ 이 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불신앙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진멸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진노가 선고된 민 13-14장의 가데스바네아 사건을 그 역사적 배경으로 한다.
이 시는 세상을 살며 고통을 겪다가 마침내 죽어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인생의 유한성과 연약성에 대한 깊은 절망과 이런 절망의 원인이 인생의 범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신앙적 인생관을 그 사상적 배경으로 한다.
2. 시 90편의 내용은 무엇인가?
1) 짜임새
이 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부분은 1-12절이다. 이 부분에서 시인은 깊은 깨달은 통찰을 노래한다. 특히 영원하신 하나님과 아침에 돋는 풀과 같이 순간에 불과한 인생에 대한 극명한 대조를 통해 유한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깨닫는다.
둘째 부분은 13-17절이다. 이 부분에서 시인은 유한하고 연약하여 범죄할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을 향한 진노를 거두시고 대신 긍휼하신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한다.
2) 풀이
# 첫째 연/ (1-7) - 깨달은 통찰
* 영원하신 하나님(1-2)
-. 주여/ 시인은 통상 하나님을 전능자를 의미하는 엘로힘, 또는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라 부르지 않고 주라고 부르고 있다. 여기서 주는 아도나이로 주권자를 의미한다. 즉 하나님께서 만물의 창조주이심과 통치자로서 실제의 주권자이심을 뜻하는 말이다. 이것은 우리 삶의 주관자되시는 하나님이야 말로 우리가 진정 믿고 의지할 자시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 거처가 되셨나이다./ 거처란 원어 ‘마온’이라는 말을 번역한 것이다. 피난처나 안전한 집을 뜻하는 말이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고있다. 즉 마온이 없이 방랑생활을 하고 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마온 곧 안식처가 된다는 사실을 훈련시키시기 위함이기도 하다.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을 때만 안전과 번영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다.
-.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해 보이는 산이 생기기 전부터 즉 영원 전부터 계시고 또 장차 영원 까지 영원 불변하시도록 우리를 주관하시는 주관자라는 말씀이다.
* 유한하고 연약한 인생(3-6)
-. 돌아가라/ 이 말씀 속에는 세 가지 의미가 담겨있다. 하나, 인생은 한 마디로 돌아가야 할 존재이다. 지금 이곳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을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다. 둘, 자기 의지와 관계 없이 하나님의 명에 따라 돌아가야 할 존재이다. 즉 인생은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명을 따를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말이다. 그리고 셋, 티끌로 돌아가야 할 존재이다. 돌아가되 흙으로 돌아가야 할 존재라는 말이다. 인생이 흙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만큼 인생은 허무한 존재라는 말이다.
-. 천년이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그러나 유한한 인생과 달리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특히 천년과 밤의 한 순간을 대조함으로써 영원하심을 강조한다. 여기서 밤의 한 경점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간 단위의 하나를 말한다. 즉 일몰에서 일출까지의 밤 시간을 네 시간씩 네 시간씩 세 단위로 구분했다. 초경, 이경, 삼경이다. 그러니까 한 경점은 네 시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과 천년을 비교할 수 없는 대조이다. 이처럼 인간과 하나님과의 유한과 영원한 차이가 나는 것이다.
-. 시어들/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인생이 홍수에 의해 일시에 휩쓸려 버리는 것처럼 그리고 잠시 잠들었다 깨는 것처럼, 하침에 화려하게 파나 저녁 바람에 스러져 버리는 풀처럼 유한하고 허무하다는 것을 시적으로 표현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 고통으로 가득한 인생(7-10)
-. 주의 노에 소멸되며/ 이 7절은 원어 성경에 접속사 ‘키’로 시작된다. 지금까지 시인이 말한 인생의 유한함과 연약함의 이유가 이제부터 설명된다는 뜻이다. 즉 인간이 범죄함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직접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10명의 잘못된 정탐꾼의 보고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애굽으로 돌아가려 한 것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산 것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간접적으로는 인생의 모든 고통이 궁극적으로는 인생의 범죄 때문에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 때문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여기서 우리의 은밀한 죄란 우리의 비밀이라는 뜻이다. 즉 남몰래 지은 죄 또는 기억하지 못하는 죄를 말한다. 그리고 주의 얼굴 빛이란 불꽃 같은 눈으로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면전을 뜻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도 몰래 지은 죄 그래서 나 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런 죄일 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숨김이 없이 낱낱이 다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이 말씀은 직접적으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범죄한 후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게 된 것에 대한 시인의 슬픔을 노래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간접적으로는 인생에게 질고와 죽음이 찾아드는 것이 인생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임을 노래한 것이다.
-.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보편적으로 인생은 그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다. 그러나 모세처럼 이보다 더 많이 산 사람들도 있다. 그렇지만 그 나이를 자랑삼아 말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말이다. 탄식어린 고백이 아닐 수 없다. 이 탄식 속에는 죄로 인해 참된 소망이 사라져버린 인생의 비참함이 배어있다. 실제로 하나님을 외면한 인생은 그 인생의 연수와 상관없이 수고와 슬픔으로 가득찬 비참한 인생을 뿐이다.
* 깨달음의 필요(11-12)
-. 누가... 알며, 누가 ...알리이까/ 시인은 부정적인 답변을 유도하는 수사학적 의문문을 사용한다. 하나님의 노여움의 능력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의 두려움은 역시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그 어리석음에 여전히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깨달음이다.
-.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여기서 지혜의 마음은 자기의 날을 셀 줄 아는 것을 말한다. 즉 인생의 덧없음과 불확실성 그리고 죽음이 언제 찾아올 지 모르는 두려운 상황을 깨닫고 살게 해 달라는 간절한 호소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셔야 하고 하나님께서 얻게 하셔야 지혜의 마음을 얻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 둘째 연/ (13-17) - 간절한 기도
-.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시인은 지금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등을 돌리고 계시다고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멀리 떠나계시다고 생각했다.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당하게 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저들을 떠나셨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시인은 이제 중보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진노를 거두시고 돌이키셔서 이스라엘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 불쌍히 여기소서/ 하나님께서 돌이키실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절히 호소하고 있다. 저들은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시지 않으면 길이 없는 상황이다. 오직 하나님께만 간절히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처지이다.
-. 기쁘게 하소서/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동안 즐겁고 기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자기들이 기뻐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얻는 길 뿐임을 다시 고백한다. 하나님께서 다시금 사랑해 주실 때 저들은 진정한 기쁨을 얻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 수대로와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라고 간구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까지 너무도 긴 세월 큰 고통을 겪어왔으니 앞으로 장구한 세월 동안은 진정 기쁨을 누리며 살게 해 달라는 간구이다.
-. 나타내소서/ 주의 행하신 일을 나타내주시고 주의 영광을 나타내달라고 간구한다. 지금까지 출애굽토록 역사하신 그 놀라운 일들을 다시 나타내주시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그 영광을 성막에 나타내 보이신 것처럼 다시 그 영광을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간절한 간구이다.
-. 견고케 하소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고자 하는 일들을 견고케 해 달라고 기도한다. 여기서 견고케 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쿤이다. 이 말은 이루다 성취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저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자 힘쓰는 그 모든 노력이 반드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기도이다.
3. 시 90편은 어떻게 묵상할 수 있을까?
1) 인생의 유한함과 연약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생은 잠시 돋았다고 곧 시들어 없어지는 풀과 같은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곧 돌아가야 하고 결국은 티끌로 사라져야 할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2) 지혜의 마음을 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토록 허무한 인생을 깨닫게 해 주실 때 어떻게 살아야 함을 알게 된다. 참된 지혜의 마음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실 때만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3) 거처를 구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거처로 삼았다. 이 땅의 거처일 뿐 아니라 저 영원한 거처이기도 하다. 우리가 정녕 주안에 거할 때 우리는 참된 평안과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출처: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행복을 위한 세 가지 기도
성경본문:시편 90: 10-13
10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1.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시39:4
13.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신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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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약 80년 전인 1923년, 미국 시카고의 한 호텔에서 당시 미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만찬회가 열렸습니다. 그런데 실제 그 자리에 참여한 사람은 겨우 여덟 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 만찬회가 화제가 된 것은 거기 모이는 인물들이 차지하는 비중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의 언론들은 '세계적으로 성공한 사람들,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의 만찬회'라는 제하에 이 기사를 다루었습니다.
그 모임에 참석한 여덟 사람의 면면을 살펴보면 과연 화제가 될만한 만찬이었습니다. 당시 세계 제일이었던 카네기 강철회사의 회장이었던 슈와브, 전기회사의 제왕 인셜, 금융가의 대부 리버모어, 국제은행 총재 프레이져, 하딩 대통령 정부의 내무장관 폴, 증권계의 거부 휘트니, 정유업과 완구업 대부 크로이거 등이 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꼭 25년이 지난 뒤인 1948년 미국의 한 신문사 기자가 이 여덟 사람의 근황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 후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조사해보았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들 모두가 계약이나 한 것처럼 하나 같이 비명횡사하거나 고통 중에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철 업계의 우두머리였던 슈와브는 채무로 쫓겨다니며 다른 친구들의 도움으로 연명하고 있었고,
금융계의 일인자 리버모어, 건축업계의 코르이거, 국제은행 총재 프레이져 등은 자살로 삶을 마쳤고,
증권업계의 휘트니는 정신병에 시달리다 죽었고,
주유 업계의 홉슨은 파산 충격으로 죽었고,
전기업계의 인셜은 해외망명으로 미국을 떠났고,
내무장관 폴은 감옥에서 고생하다가 사망했다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제일 가는 부자들이요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극찬을 들었던 저들이 불과 25년이 지난 뒤 이런 불행 속에서 생의 마지막을 장식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아 바람이 지나면 그 있던 자리조차 알 수 없다'고 노래했던 시 103편 기자의 고백에 우리는 머리를 끄떡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너 나 할 것 없이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우리 또한 행복을 찾아 지난 한 달을 살아왔고 지금도 행복을 소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자신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시간을 내고, 재물을 쏟고, 정력을 바칩니다. 아무리 바빠도 복이 나온다고 하면 그 일에 시간을 내는 게 우리 인생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이' 행복이며, 그 행복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없는 행복'을 찾기 위해 '있는 행복'을 마구 버리고 있다"고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행복은 멀리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독일의 시인 괴테는 '충고'라는 제목의 이런 시를 들려줍니다. '너는 왜 자꾸 멀리 가려느냐? 보아라, 좋은 것은 가까이 있다. 다만 네가 바라볼 줄만 안다면 행복은 언제나 거기 있나니...'
오늘 본문은 모세의 마지막 기도입니다.
그는 먼저 서두에서 하나님의 영원성을 노래하며 거기에 비해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고백합니다.
돌아가라 하시면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인생, 일장춘몽이요 아침에 돋았다 저녁에 지는 풀과 같은 인생, 칠팔십 평생이 순식간에 쏜살같이 지나가고 마는 인생임을 노래합니다. 그러면서 그러기에 더 소중한 인생이라며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인가를 노래합니다. 그 인생의 허무를 극복하고 행복하고 의미 있고 보람된 삶을 살기 위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구해야 할 세 가지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그가 12절에서 행복한 삶을 위해 드리는 첫 번째 기도는 이렇습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먼저 우리 인생의 날수를 계산하는 지혜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인생의 날수를 헤아려 보라고 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내 인생이 얼마나 남아 있는가를 계산하는 것은 공연히 쓸데없는 장난질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남은 날들을 헤아려봄은 우리에게 창조적인 긴장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하느님께서 인생들에게 주신 소중한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선한 일에도 이용되고 악한 일에도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시간에 대한 물음이 있어야 합니다. 내 지금의 총총대는 바쁜 걸음 속에 목적지는 있는지, 내가 지금 들어 선 곳에 길은 있는지, 지금 흘리는 이 땀 속에 보람은 있는 건인지... 만약 없다면 움켜잡았다고 여기는 성공은 다 손 안의 모래일 뿐입니다.
시한부 인생에게 일상은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그들에게 10분, 30분, 1시간이 얼마나 귀중합니까? 모세는 우리 또한 시한부 인생임을 알라고 다그칩니다. 70이요 강건하면 80입니다. 시간으로 따지면 많아봐야 70만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을 헤아리면서 시간을 아끼는 지혜의 마음을 잃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미국의 뉴욕 퀸스에 블로바라는 큰 시계공장이 있습니다. 혼수 예물용으로도 많이 나가는 시계 전문 유명 메이커입니다. 그런데 추수감사절에 이 공장에 도둑이 들어 많은 시계를 도난당했습니다. 뉴스 시간에 앵커가 그 사건을 보도하다가 그만 실수를 했습니다.
'오늘 블로바 시계공장에 도둑이 들어 25만불 상당의 시계를 훔쳐갔습니다'라고 멘트를 해야 하는데 그만
'오늘 블로바 시계공장에 도둑이 들어 25만불 상당의 시간을 훔쳐갔습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나운서의 실수한 멘트가 미국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25만불 어치의 시간을 훔쳐갔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시간을 허송하고 잘못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짤막한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며 사는 인생이 지혜로운 삶인데 우리의 삶이 그렇지 못할 수 있습니다. 아니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도둑맞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혹 오해가 없으시기 바랍니다. 시간을 잘 사용하라는 것은 분주하게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서둘러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정신없이 사는 게 세월을 아끼는 게 아닙니다. 그럼 '우리 날을 계수하는 지혜의 마음'이란 어떤 마음일까요?
켄 가이어의 글 중에 이런 일화가 나옵니다. 멕시코 시티의 대형 시장의 그늘진 한 구석에 한 인디언 노인이 좌판을 펴고 앉아 있습니다.
노인 앞에는 스무 줄의 양파가 놓여 있습니다.
한 미국인이 다가와 묻습니다.
'양파 한 줄에 얼마입니까?',
'10센트라오'
'두 줄에는 얼마입니까?'
'20센트라오'
'세 줄에는요?'
'30센트지요'
그러자 그 미국인인 불만섞인 목소리로 말합니다.
'별로 깎아 주시는 게 없군요. 25센트 어떻습니까?'
'안됩니다'.
'스무 줄을 다 사면 얼마입니까?'
미국인이 묻자 그 인디언 노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스무 줄을 다 팔 순 없소이다.'
'아니, 왜요? 내가 몽땅 산다면 좋지 않습니까?'
'아니요. 나는 지금 인생을 사러 여기 나와 있는 거요. 나는 이 시장을 사랑한다오. 북적대는 사람들을 사랑한다오. 햇빛을 사랑하고, 흔들리는 종려나무를 사랑한다오. 페트로와 루이스가 내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고 아이들의 안부와 농사 이야기를 하는 것을 사랑한다오. 친구들을 만나는 것을 사랑한다오. 그것이 내 삶이요. 바로 그것을 위해 하루 종일 여기 앉아 양파 스무 줄을 파는 거요. 그런데 한 사람한테 몽땅 팔면 내 하루는 그걸로 끝이 아니겠소? 그것은 내가 사랑하는 삶을 잃어버리는 것이오. 그렇게 할 수는 없소...'
여러분은 이 노인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양파를 많이 팔아치우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양파가 팔리는 속도를 우선시했을 것입니다. 노인은 노련한 장사꾼이 되었을 것이고 부자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지금 노인이 사랑하는 것들엔 관심이 없거나 거추장스런 일쯤으로 여기게 되었겠지요. 그렇게 되었을 경우를 가정하고 물어봅시다. 노인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들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원하는 것을 얻고 목표점에 이르고자 속도를 냅니다.
여기에 별로 도움 안되는 것들은 다 초개같이 버리고 오직 고지를 향해서 달려갑니다. 그러나 거기서 진정 원하는 것들을 얻을 수 있을까요?... 막상 '이것이다' 하고 손에 잡은 그것을 살펴보면 그건 내가 원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1 등을 한 순간부터 쫓기게 되고, 권력을 잡은 후엔 불안해집니다. 부를 쌓을수록 근심도 늘어만 가고, 명예를 얻은 순간 눈치를 보게 됩니다.
전속력으로 달려가서 얻는 것들이라는 게 이렇습니다. 인디언 노인에게 있어서의 햇볕 한 줌과 종려나무보다 결코 나을 것이 없습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속도는 함정입니다. 우리가 빠르게 달리는 데 몰두함으로써 길가에 있는 아름다운 동산을 못본 채 지나치게 합니다. 달리는 의지는 누리는 감각을 퇴화시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잃고 세파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그래서 있는 겁니다. 잠깐 속도를 죽이고 인생을 생각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천상병 시인의 깨달음처럼 인생은 소풍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여기고 감사하며 누려야 합니다. 목적지에 고정된 시선을 자유롭게 하고 고속으로 치닫는 삶에 약간의 제동을 걸어보십시오. 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이 새롭게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위해 배려해 놓으신 것들이 곳곳에 존재합니다. 이런 은총들을 누리지 못하고 목적지에만 빨리 이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속도의 덫에 걸려있습니다.
이 속도가 우리로 우리 날 계수함을 잊게 만듭니다. 사회는 구조적으로 속력을 내라고 부추깁니다. 도로는 넓어지고 자동차들의 성능은 향상되었습니다. 얼마나 짧은 시간 안에 목적지에 도달하느냐가 인생의 관심으로 떠오르는 세상입니다. 빠르지 못하면 경쟁에서 밀리고 낙오된다는 것이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수칙입니다. 디지털 시대가 그렇고, 인터넷 세상이 그렇습니다. 속도는 경쟁을 붙여 사람들을 흥분시킵니다.
하지만 언제나 소수의 승자와 다수의 패자라는 결과는 변함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 속도 전쟁에서 벗어나려는 쉬는 여행길에서조차도 속력의 고삐를 죄고 달리는 겁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행복해 지기 위해 우리가 드려야 할 첫 번째 기도입니다.
행복을 위한 두 번째 기도는 '삶의 만족을 위한 기도'입니다.
시인은 14절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아침에 주의 인자로 우리를 만족케 하사 우리 평생에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만족이 있는 인생이 행복합니다. 여기 '만족한다'는 말은 끝까지 채운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만족하지 못했다는 말은 공허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공허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돈, 쾌락 그리고 권력이나 명예를 지나칠 정도로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디서 진정한 삶의 만족을 얻을 수 있을까요?...
부와 명예를 간절히 바라며 살아가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하루는 꿈을 꾸었는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
"해뜰 녘에 동구 밖 큰 나무 앞을 지나는 수도승이 있을테니 그에게 '당신이 가진 보물을 제게 주십시오'라고 구해서 그 보물로 행복하게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잠에서 깬 그는 이게 길조다 싶어 동구 밖 큰 나무로 가서 기다렸더니 정말 수도승 하나가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달려가 "당신이 가지고 있는 그 보물을 제게 주세요" 했더니 수도승은 두말도 없이 바랑에서 큼직한 보물을 꺼내 주더랍니다.
이 사람이 놀라 "이런 귀한 보물을 알지도 못하는 저에게 어떻게 줄 수가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당신이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도 그렇게 얻은 것이기에 드립니다"하고 가던 길을 유유히 가는 것이었습니다.
보물을 얻는 사람은 너무도 기뻐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고 아무 것도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습니다. 즐거운 기분으로 들떠 있다가 문득 깨달은 것이 있어 수도승을 뒤쫓아갔습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보석을 돌려드립니다. 이것 말고 이렇게 귀한 보석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선뜻 내어 줄 수 있는 당신의 그 '부요한 마음', 그 마음을 제게 주십시오..."
많이 가져서 만족합니까?
아닙니다. 문제는 마음입니다.
마음에 만족이 없으면 온 세상을 다 가져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만족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만족의 비밀을 알았습니다. 어떻게 만족할 수 있습니까? '아침에 주의 인자로' 만족할 수 있다고 시인은 노래합니다. 여기 '인자'란 말은 조건없는 사랑, 언약에 성실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그 다함없는 사랑을 맛볼 때 비로소 인생의 만족이 오는 겁니다. 그래서 성 어거스틴은 고백합니다. '오 하나님, 주님 안에서 참 쉼을 얻기까지 제 마음은 그 어디서도 만족을 얻지 못하였나이다...'
러시아 어느 마을에 파흠이란 농부가 살았습니다. 그는 많은 논밭을 가지고 넉넉히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욕심이 많아 더 많은 논밭을 사들이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나그네로부터 기가 막힌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적은 돈으로 많은 땅을 살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돈을 넉넉히 준비하여 땅을 마음대로 살 수 있다는 바슈키르에 당도했습니다. 그는 촌장을 찾아가 땅값을 물었습니다. 촌장은 "하루에 1천 루블"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하루라는 것은 땅 몇 평을 뜻합니까?"라고 물으니 촌장은 "당신이 하루동안 걸어다닌 땅은 모두 당신의 것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해가 뜰 때 걸어서 해가 지기 전에 제 자리에 돌아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는 횡재의 기분에 들떠 해가 뜨자마자 뛰기 시작했습니다. 물도 먹지 않고, 밥도 먹지 않고, 쉬지도 않고 말입니다. 뛰고 뛰어 어느덧 서산에 해가 기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제야 표시를 해놓고 되돌아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가도가도 출발지점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지칠대로 지쳐 입에선 단내가 났습니다. 그러면서도 '허허~ 이 땅이 다 내 땅이 된단 말이지...' 하면서 뛰었습니다.
눈이 가물가물해 왔습니다. 파흠이 출발지점에 도착했을 때 해는 지고 그는 그 자리에 쓰러져 영영 일어나지를 못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시신을 그곳에 묻어 주었습니다. 그가 차지한 땅은 겨우 한 평이 조금 넘을까말까 한 넓이였습니다. 과연 이게 파흠 만의 인생 이야기일까요?...
유라시아 대륙을 거쳐 세계를 정복했던 몽골의 징기스칸도 그의 임종 직전에 가족 등 측근들에게 이렇게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내가 죽어 관에 들어갈 때 두 손을 관 밖으로 꺼내 놓아라..." 인생은 결국 빈손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인생의 만족은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는데 있습니다. 그래야 인생이 질서가 서고 정돈이 되고 정리가 됩니다. 한 친구가 한 대학생에게 물었습니다. "어이, 자네! 스승에겐 뭣하러 가나? 생활비 버는 데 도움이 되는가?" 그러자 그 대학생은 말합니다. "아니, 하지만 그분 덕분에, 내가 생활비를 벌면 그걸로 뭘 할지를 알게 돼..." 많이 가져서 무얼할 겁니까? 무덤까지 갖고 갈 것입니까? 인생은 많이 가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가진 바를 적절하게 사용하는 게 중요한 겁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맛보고 거기에 응답함으로써 가능한 것이고 그럼으로써 만족과 기쁨과 즐거움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세 번째, 행복을 위한 시인의 기도는 '보람된 삶을 위해 기도하는' 겁니다.
시인은 17절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임하게 하사 우리 손의 행사를 우리에게 견고케 하소서. 우리의 손의 행사를 견고케 하소서...'
인생의 허무를 느낄 때가 언제입니까?
열심히 수고했지만 그 일이 말짱 헛일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순간 아니겠습니까?
시127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리고 '헛되지' 않고 수고의 보람을 얻을 수 있는 비결을 시128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하나님이 수고의 보람을 얻게 하신다...'
'빙점'이라는 소설로 유명한 미우라 아야꼬라는 일본의 여류작가가 있습니다. 그녀가 작가가 된 배경이 참 재미있습니다. 이들 부부에게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야꼬는 남편의 수입만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 경제적 형편이긴 했지만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구멍가게를 하나 차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자기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의 생계는 내 수입으로도 넉넉한데 구멍가게까지 차려 놓으니 이웃 집 구멍가게 손님이 줄어들 것이 아니겠소. 그러니 구멍가게를 치워 버리든지 아니면 몇 가지 품목만 취급하기로 합시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가르침에 맞지 않는 삶을 살아서야 되겠소...' 아야꼬는 장사의 이치로는 당치 않은 제의였지만 남편의 뜻을 존중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자연히 점포에 손님들이 붐비지 않게 되자 틈나는 대로 글을 쓰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가 된, 그래서 저들로 더 부자가 되게 한 '빙점'이라는 소설입니다.
그녀는 언젠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하는 남편의 뜻이 이런 일을 이루어 놓았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자신의 처지를 계산할 때 전혀 불가능한 립서비스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이웃 사랑은 자신의 처지를 넘어서고 초월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어리석은 삶을 살아도 하나님은 그 손의 행사를 견고케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 손의 행사들은 어떤 것입니까? 주님의 은총, 주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행사입니까? 우리 손이 무엇을 하든지 그 행사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게 우리의 삶을 견고케 하는 비결입니다. 우리가 이 손으로 많은 일을 하며 살지만 다 우리 인생을 견고케 하는 일은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 인생을 허물어 뜨리는 일도 많이 합니다. 그러기에 시인은 결코 그렇지 않은 삶을 살아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제 행복한 삶을 위해서 우리의 인생을 구조 조정해야 하겠습니다. 한때 호황을 누리며 잘 나가던 회사들도 구조조정을 제대로 하지 않아 어이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에도 행복을 위한 내 의식의 구조조정이 필요합니다. 그리해서 지혜 있고, 만족이 있고, 보람이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아침에 주의 인자로 우리를 만족케 하사 우리 평생에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임하게 하사 우리 손의 행사를 우리에게 견고케 하소서.
우리의 손의 행사를 견고케 하소서...'
행복을 위한 이 기도 속에 우리의 한해가 더욱 지혜롭고 만족스럽고 보람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생의 주님, 저희로 저희들의 날을 계수하는 마음을 주사 주어진 생을 허송치 않고 주님 위해 사는 지혜를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의 주님, 주님의 그 다함없으신 인자하심 속에 저희 생이 참 만족을 누리며 살게 하게 주시옵소서. 능력의 주님, 저희 손이 행하는 모든 일들이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어 삶의 참 보람을 느끼며 사는 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해서 참으로 천국의 소망을 품고 언제나 이 땅에서도 행복을 맛보며 감사와 기쁨 가득한 후회 없는 일생을 살아가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