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쟁반에 금 사과
(잠언 25:11)
오늘 본문 말씀은 성경에서 제가 참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지혜자는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 사과”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수사학적으로 잘 표현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아로새긴 은쟁반의 금 사과는 말의 열매를 말합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을 해서 얻은 열매가 이렇게 크다는 것입니다. 어떤 말이 그런 귀한 열매를 만들어내는가? 단순히 옳은 말이 아니고 단순히 정직한 말이 아닙니다. 사실에 기초한 말이 때로는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내는가? 말에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창세기에 함이 아버지 노아가 벌거벗었다는 말이 노아에게 얼마나 상처가 됐을까요? 그래서 단지 정확한 말이 아니라 경우에 합당한 말이라는 것입니다. 상황에 적합한 말이어야 하고 내용은 물론 그 표현이나 톤까지 적절한 말이어야 합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무엇일까요? 잠언서에 의하면 세 가지 경우에 합당한 말이 있습니다.
첫째, 침묵의 언어입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 첫 번째가 침묵의 언어입니다. 때로 침묵이 최고의 말이 됩니다. 동의가 됩니까? 잠언 10:19에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가 머리와 가슴에서 발까지 가는 거리입니다. 이것이 바로 돌아가신 김 수환 추기경이 하신 말씀입니다. 반면에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는 머리에서 입까지 가는 거리입니다. 마음에 있는 것들이 거침 없이 입으로 언어로 말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또한 욥기에 잘 나와 있습니다. 욥의 고난에 대해서 친구들이 위로한답시고 왔습니다. 친구들이 와서 처믕 일주 일 동안은 말 안 하고 가만히 듣기만 했습니다. 그때에는 위로가 되었습니다. 일 주 일이 지난 그 다음에 위로한답시고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욥에게 엄청난 상처가 됩니다.
얼마 전 방송에서 농아인 어느 딸이 엄마에게 ‘농아로 태어나서 감사해요’라고 말하는 장면을 봤습니다. 엄마가 딸에게 ‘미안하다’라고 말합니다. 농아인 딸이 수화로 엄마에게 말합니다. “엄마 저한테 미안해 하지 마세요. 저는 농아로 태어나서 너무 좋아요. 말을 못하니까 남에게 나쁜 말로 상처 줄 일이 없어서 좋고 듣지를 못하니까 누구에게 나쁜 말 듣고 상처 받을 일이 없어서 좋아서 행복해요”라고 말했습니다. 아마 나중에 천국에서 이 땅에 살면서 말을 제일 잘한 사람이 누구냐 등수를 매긴다면 어쩌면 이 분이 일 등할지 모릅니다.
언어 철학자인 비트켄슈타인은 말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침묵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무엇을 말할 수 없습니까? 보지 않은 것, 경험하지 않은 것, 잘 판단할 수 없는 것, 잘 분별할 수 없는 것은 말할 수 없습니다. 그 경우에는 침묵을 지켜야 합니다.
둘째, 경우에 합당한 말은 지혜가 담긴 말입니다. 좋은 말은 경우에 합당한 말인데 그러나 사람이 항상 침묵할 수 없습니다. 말할 때 말을 해야 되는데 말하려면 지혜롭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말이 경우에 합당한 말이라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 중에 가장 지혜로운 말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한 여인을 구하기 위해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라고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늘 경우에 합당한 말씀입니다. 쓸 데 없는 말 때문에 싸움 날때가 많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어떤 분에게 인상이 좋다고 하니까 ‘인상이 좋은 사람이 사기친다’라고 그 옆에 있는 성도가 말해서 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학술 대회에서 제가 경험한 것입니다. 어느 교수가 논문 발표를 하는데 인신공격성 질문이 난무했습니다. 그 교수는 심한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 교수의 논문은 제가 생각하기에는 꽤 좋은 논문이었는데 그분은 계속해서 ‘잘못했습니다. 반성하겠습니다. 잘 모릅니다’라고 계속 대답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셋째, 사랑의 말입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사랑의 말입니다. 사랑이 담긴 따뜻한 말이 경우에 합당한 말입니다. 말에는 온도가 있습니다. 펄펄 끓어서 사람을 태워버리는 말이 있는가 하면 너무 냉랭하여 사람을 얼게 만드는 말도 있습니다. 아름다운 말은 섭씨 36.5도와 같이 온기가 있는 따뜻한 말입니다.
이 기주 작가가 쓴 ‘언어의 온도’라는 책에 대한 한 독자의 서평입니다.
말이라는 것은 뱉는 순간 주워 담을 수 없습니다. 의도치 않게 오해가 생길 수 있고 상대방의 말을 잘못 해석해서 오해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기분에 따라 마음과 달리 날카로운 말이 상대의 기분을 날카롭게 찌르는 경우도 생깁니다.
말이 그래서 어렵습니다. 오해를 풀기 위해서 갖은 수단을 써 보지만 이미 다친 마음을 위로하기에는 어떤 말도 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말은 추억이 됩니다. 사랑이 됩니다. 흔한 멸치볶음을 보면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추억한다는 것은 축복이 아닐까요! 음식을 통해 그리운 말을 떠올리면서 우리는 행복한 미소를 짓습니다.
우리는 무심코 많은 말들을 내뱉습니다. ‘괜찮아’ ‘그냥’ ‘응’ 이렇게 무심한 말속에 진정한 의미를 담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봅니다. 일에 지쳐 집에 들어간 나에게 “피곤하지?”라는 엄마의 걱정스러운 질문에 나는 “괜찮아”라고 툭 답합니다. 그렇게 툭 던진 말속에는 더 이상의 대화는 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엄마는 망연한 표정을 짓고 더 이상 내게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툭 던진 말 한마디에 대화는 차가워집니다.
"언어의 온도는 몇 도일까요? 언어의 온도가 몇 도일 때 거부반응이 나지 않을까요? 너무 뜨거우면 사람을 놀라게 하고, 너무 차가우면 사람을 떠나게 합니다.“
“무심결에 내뱉은 말 한마디 때문에 소중한 사람이 곁을 떠났다면 '말 온도'가 너무 뜨거웠던 게 아닐까. 한두 줄 문장 때문에 누군가 마음의 문을 닫았다면 '글 온도'가 너무 차갑기 때문인지도 모를 노릇입니다. 어쩌면. ”
작가는 말과 글에는 나름의 온도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표정과 말투로 말했느냐에 따라 대화는 따뜻해 질 수도 있고 차가워질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친구과 고민을 이야기하며 걱정을 덜고 어떤 사람은 시 한 구절에서도 위안을 받기도 합니다. 이렇듯 ‘언어’는 한순간 마음을 얼리기도 하고 마음을 녹여주고도 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작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8장에 혈루병 여인이 나옵니다. 예수님 옷자락을 만집니다. 얼마나 겸연적었겠습니까? 정말로 사람들에게 조금 창피한 일입니다. 거기에 대해 예수님이 “딸아 안심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참 대단한 예수님입니다.
제가 항상 고민하는 것이 있습니다. 감사한 일이 먼저일까요? 보통 감사한 일이 있어야 감사한 말이 나옵니다. 성경은 거꾸로 말씀합니다. 범사에 감사한 말을 먼저 하면 감사한 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랑하고 격려하는 말을 먼저 하면 행복한 일이 반드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을 하시기 바랍니다. 잠언 25:11에서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말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을 하여 복 받는 성도들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