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도림법전
원각團覺이 보조普照하니 적멸寂威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萬物은 관음觀音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妙音이라.
보고 듣는 이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시회대중時會大衆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이 법문은 1981년 정월 성철 노사께서 조계종정으로
추대되면서 대중에게 내린 법어입니다.
그 뒤로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말은
모든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유명한 말이 되어 버렸습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말을
맨 처음 하신 선사는 황벽黃檗스님일 것입니다.
황벽스님은 백장, 황벽, 임제로 이어지는
조사선의 정통을 이어받은 선사로서
「전심법요專心法要」, 「완릉록宛陵錄」등의 어록이 전해져 옵니다.
이 어록들은 그의 속가 제자인
배휴裴休 거사의 노고에 따른 것입니다
배휴와 황벽 선사의 만남은
홍주洪州 개원사開元寺에서 이루어집니다
어느 날 배휴가 개원사를 찾아옵니다.
그리하여 벽에 걸린 조사의 영정들을 보고는
원주스님에게 물었습니다.
“벽에 걸린 것은 무엇입니까?”
“큰스님들의 영정입니다.”
“영정은 볼 만한데 큰 스님들은 어디에 계십니까?”
이에 원주스님은 그만 말이 막혀 버렸습니다
그러자 배휴는 ‘혹시 참선하는 스님이 있느냐?’하고 하면서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희운希運이라는 수좌가 있는데 참선 공부를 합니다.”
그리하여 배휴는 처음으로
황벽스님과 얼굴을 대하게 되었고 또 물었습니다.
“저 벽에 걸련 큰스님의 영정들은 볼 만한데
큰스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그러자 황벽스님은 큰소리로 불렀습니다.
“배상공裴相公!”
놀라서 얼떨결에 대답하였습니다.
“예”
배휴가 대답을 하니 황벽 선사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대는 어디에 계시오?”
이에 배휴는 크게 느낀 바가 있었고
그 뒤부터 황벽을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황벽스님은 심외무불心外無佛 마음 밖에
따로 부처가 없다는 법문을 즐겨 하였습니다.
그저 다른 견해만 내지 않는다면
산시산山是山 산은 산,
수시수水是水 물은 물,
스님은 스님, 속인은 속인일 뿐이다.
산하대지와 일월성신이 모두
너의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삼천대천 세계가
모두 너의 본디 면목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황벽 선사의 법은
목주도명睦州道明 설봉 의존雪峰義存을 거쳐
운문 문언雲門文偃으로 이어졌습니다.
뒷날 운문스님은 황벽스님의 이 말을 이어서
온 땅덩어리가 그대로 해탈의 문어거늘
공연히 불법이라는 견해를 일으키는구나!
하불견산시산何不見山是山하고 견수시수見水是水오.
어째서 산을 산으로 보지 않고 물은 물로 보지 않는가?”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온 땅덩어리가 곧 해탈의 법문이거늘
지견으로 알려고 하는 견해를 지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때로는 산을 보고도 산이라 부르지 않고
때로는 물을 보고도 물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러 대중과 이 산승은 피차彼此가 대장부이니
남의 말에 속임을 당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운문스님은 이 대답 곧
‘온 땅덩어리가 그대로 해탈의 문이거늘
공연히 불법이라는 견해를 일으키는구나!
하불견산시산何不見山是山하고 견수시수見水是水오.
어째서 산을 산으로 보지 않고
물은 물로 보지 않는가?라는
말로는 당신 이야기를 다 피력하지 못했던지
어느날 상당하여 다시 말하였습니다.
“여러 스님이여, 망상을 부리지 말라.
하늘은 하늘이요, 땅은 땅이다.
산시산山是山은 산이며, 수시수水是水 물은 물이다.
스님은 스님이요 속인은 속인이로다.”
그러고 나서 양구 후에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안산案山을 가져와서 나에게 보여 달라.”
그러자 어떤 스님이 물었습니다.
“제가 산을 보면 산이고 물을 보면 물일 때는 어떠합니까?”
“삼문三門이 어째서 이리로 지나가느냐?”
“그렇다면 망상을 피우지 않는 것입니까?”
“내 화두를 돌려다오”
원오 극근圖惜克動스님은 이에 대하여
“땅이 산을 받친 것 같고 돌이 옥을 품은 것 같다.
꿰뚫고 지나가는 이는 모두가
무진장無龜藏 속에 있게 되겠지만
꿰뚫고 지나가지 못하는 이는
고달픔을 헤아리지 않을 수 없으리라” 하고는,
손으로 한 획을 긋고는 말하되
불전佛願이 어째서 저리로 지나가는가?
그러니 어찌해야 하는가?
하나의 잎이 지는 것을 보고는
천하에 가을이 왔음을 아나니라”
하고는 그날 저녁 소참법문때 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를 일러서 본체를 보면 전부가 참되다는 것이거니와
그렇게 할 때에 사람들로 하여금 얻었다거나
잃었다는 견해를 낼 수 있게 하는가? 분명하도다.
진실만 이야기하고 거짓은 이야기하지 않아서
마치 고양이나 흰 암소와 같이 또는
마른 나무와 썩은 그루터기와 같이
아무런 호홉도 없어져 마치 미련한 듯 어리석은 듯하면
천불이 출세하더라도 그를 알지 못 할 것이다.
눈으로 석가를 바라보되 마치 단풍잎같이 하여야
비로소 무쇠로 부어 만든 사람인지라 천만사람이
그를 옭아맬지라도 옭아매지 못할 것이니라
그렇다면 홀로 벗어나는 한 구절은 어떻게 이르는가?
무심無心을 도道라고 이르지 말라.
무심이라도
여전히 한 겹의 관문이 막혔느니라’고 하였던 것 입니다.
금강경 제5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에
이런 구절이 었습니다.
“불고 수보리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 비상 즉견여래.
佛告 須菩提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 非相 卽見如來.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무릇 상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일에 모든 상을 상 아닌 줄로 볼 수 있으면
여래를 보는 것이니라”
부처님은 상相 속에서 법신法身이 있음을 보라는 말씀이지
신상身相을 버리고 법상法相을 찾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산이 본디 산이라는 모습을 말한 바 없고
물이 본디 물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산이 스스로 산이라고 언제 말했습니까?
물이 스스로 물이라고 언제 말했습니까?
다만 미혹한 중생이
산과 물을 구별짓고
부처와 중생을 차별짓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야부治父 선사는
“산시산 수시수 불재심마저 山是山 水是水 佛在甚麽處?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네.
부처님은 어느 곳에 있는가?”라고
되물은 것입니다.
유有에 집착하고 무無에 집착하면 함께 삿된 견해에 떨어집니다.
유무有無 둘 다 없어야 한 맛으로 늘 나타납니다.
유상유구구시망有相有求俱是妄이요
무형무견타편고無形無見墮偏枯로다
당당밀밀하증간堂堂密密何曾間이리오
일도한광삭태허一道寒光爍太虛로다
상이 있고 구함이 있음은 이 모두 망견이요
무형 무견도 치우친 소견에 떨어점이로다.
당당하고 밀밀히여 어찌 간격이 있으리오.
한 줄의 찬 빛이 큰 허공을 빛내도다.
이 산승이 참선을 하기 전에는
간견산취시산看見山就是山
산을 보면 곧 산이었고,
간견수취시수看見水就是水 물을 보면 곧 물이었습니다.
그 뒤 스승을 만나 참선법을 깨치고 나니
견산불시산見山不是山 견수불시수貝水不是水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더욱 정진하여 안목이 열리고
난 지금은
의전견산지시산
依前見山只是山 견수지시수見水只是水
그 전처럼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었습니다.
대중이여. 이를 명확히 알아차리는 납자가 있다면
이 산승은 그에게 엎드려 절을 할 것입니다.
이 세 가지 견해가 서로 같은 것입니까?
서로 다른 것입니까?
모셔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