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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반 특강 - 칸트 철학의 이해
순수이성, 실천이성, 판단력 비판
권대근
문학박사, 명예철학박사
철학이 생산되는 순간은 육체적이고 역사적이다. 거기에는 피 냄새, 땀 냄새, 아귀다툼의 찢어지는 음성들, 긴박한 포옹들, 망연자실한 눈빛들, 바람소리, 대포소리가 다 들어 있다. 망연자실한 눈빛들 속에서 쓸쓸하지만 강인한 눈빛을 운명처럼 타고난 사람이 역사를 책임지려 앞으로 뛰어나가며 인간으로서 발휘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의 시선을 화살처럼 쏠 때, 철학 이론이 태어난다. 이처럼 철학 생산 과정에는 역사에 대한 치열한 책임성과 헌신이 들어 있다. 우리가 배우는 플라톤 헤겔 데카르트 칸트가 다 이러했다.
-최진석: 낡은 가치를 버리고 주체적인 개인으로 사는 ‘반역의 철학자
1. 철학은 인간에 대한 탐구
_ 동서양, 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모든 현상에 대한 궁금증', 그것이 철학이다
_ 철학은 인간을 이해하고, '나'를 이해하는 것이며, 그것은 인간의 문제에 대해 고민해온 선대 사상가들의 학문적 업적을 이해하는 데서 시작된다
_ 철학사상을 체계적으로 공부하는 법
철학사 -> 개설서 -> 개별 사상가의 작품을 독파하는 순으로 접근하는 것이
용이하다.
_ 철학은 '어떻게 아는가'(인식)를 고민하는 학문이다. -근대성의 성찰에서 시작
‘근대성’이라는 것이 정말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고 있는 것일까?
인간이 정말 ‘주체’인가?
◘ 인류세와 기후위기
16~17세기 과학혁명(겔릴레오,뉴턴)의 우주론, +근대 이원론 철학 (데카르트)->서구문명의 탄생
18세기 후반의 양대 혁명 ->서구 근대문명의 확립
산업혁명(기술혁명) ->탄소경제의 시작 ->온실가스의 배출
시민혁명(정치혁명)->자유주의(자본주의)+민족국가=근대사회
20세기의 식민주의(+탈식민 근대화)ㄹ르 통한 근대문명은 전지구로 확산
근대문명 성공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서 ‘홀로세(Holocene)로부터 ’인류세(Anthropocene)로 이행
인류세의 대표적 양상: 기후위기, 대가속화(1950년부터),6차 대멸종, 팬데믹 등
◘ 인류세에 대한 대응 관점들 :생태근대주의, 생태사회주의, 신유물론
인간이 세계를 인식론적으로 ‘구성’하고(칸트),
‘노동’을 통해 세계를 인간화해 역사를 만들어 나가고(헤겔, 맑스),
‘대자’로서 절대 자유를 구가하는(사르트르) 존재일까?
‘서구 근대성’이 삶의 모범 답안인가? 철학자들이 원했던 것은 물론 아니겠지만, 바로 근대의 자아도취적 주체 철학이 결국 제국주의와 파시즘, 자연 파괴, 인간 소외로 귀착한 현대 사회의 비극에 사상적 토양을 마련해 준 것은 아닌가? 근대성을 수립한 것은 서구이기에 서구가 모든 가치와 의미의 기준이 되어야 할까? 근대가 이룩한 위대한 성과를 충분히 인정해야겠지만, 혹시 그 과정에서 ‘타자들'은 철학의 눈길 바깥으로 밀려난 것은 아닐까? 칸트, 헤겔,의 철학은 결국 서구-남성-어른-문명인-의 사유가 아닌가. 구조주의 사상가들은 이렇게 근대성=’modernity'에 강한 의문을 던진다.
구조주의란 무엇인가?
1) 구조주의는 철학에서 늘 기본적인 대립항으로 인식되어 왔던 대상(세계, 사물, 물체)과 주체(의식, 영혼, 마음)의 이분법을 버리고, 이 둘 사이에 어떤 제3의 차원이 존재한다고 본다. 이 차원이 바로 ‘구조(le structure)’이다.
2) 구조주의는 이 제3의 차원이 바로 대상과 주체의 일정한 관계맺음을 지배한다고, 즉 대상과 주체는 자신도 모르게 -- 즉 무의식적으로 -- 이 제3의 공간(논리적, 법칙적 공간)을 통과해서 관계맺는다.
3) 인류의 ‘문화’란 주체의 창조물이라기보다는 주체가 바로 그 무의식적 법칙에 따라 만들어낸 어떤 구조물이다. 즉 문화란 주체의 산물이 아니라 구조의 산물이다.
4) 구조란 일정한 ‘소(素)들(음소, 신화소, 음식소 등등) 의 체계이며, 주체는 이 체계의 어느 ‘위치’에 자리잡는다.
구조주의라는 학문 방법론에 처음으로 철학적 함축을 부여한 인물은 레비-스트로스이다. 구조주의가 서구적 주체, 서구적 근대성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나왔다면, 그 초입에 바로 제국주의에 대한 반성을 담고 있는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이 놓여 있다는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인류학이라는 담론은 본래 서구 열강들이 식민지를 잘 통치하기 위해서 발달시킨 담론이다. 즉 인류학은 제국주의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담론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이런 전통을 공격함으로써 유럽에 의해 침탈 당한 未開文明에게 서구 지성인의 사과와 반성을 전달하고자 했다.
인류학의 가장 기본적인 입장은 기능주의적인 입장이다. 기능주의는 한 사물의 의미를 그 사물의 역할, 기능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전형적으로 근대적인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미개인에 대해 구조주의적으로 접근한다. 근대 철학은 고전 철학이 ‘봄’의 수준에 머물렀으며 ‘함’의 수준으로 철학을 변환시키고자 했다. 구조주의는 어떤 면에서는 다시 ‘봄’의 철학으로 전환하려는 몸짓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구조주의는 ‘무의식’을 핵심으로 하며 이 점에서 현상학/실존주의와 날카롭게 대립한다. 무의식을 좁은 의미, 원래 의미대로 사용하면 정신분석학의 용어이다. 프로이트를 이어 라캉(jacques lacan)은 무의식을 탐색했으며, 구조주의적 정신분석학을 통해 서구 근대적 주체(코기토, 선험적 주체)를 해체했다. 라캉은 주체를 ‘형성되는’ 것으로 봄으로써 현대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 라캉 사유의 성과는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을 이으면서도 거기에 구조주의 언어학의 성과를 도입해 무의식에 대한 새로운 개념화를 시도한 점에 있다.
정신분석학은 '무의식' 개념을 기본으로 한다. 우리가 의식하는 세계, 의식으로 행하는 경험 아래에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세계가 놓여 있다.(그러나 ‘무의식’이라는 실체는 없다. 의식의 공백으로서, 의식의 배면으로서 발견되는 어떤 차원일 뿐이다) 라캉에게서 무의식은 어린 아기가 상징의 세계, 표상의 세계에 진입하면서 형성된다. 그러한 진입 이전의 세계, 즉 아기와 엄마만이 존재하는 세계가 그 후의 세계 즉 상징과 표상의 세계에 억눌리면서 무의식이 형성된다. 즉 우리는 의식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 아래에는 어린 시절에 발생했던 그러한 진입과 더불어 의식 아래로 들어갔으나 그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실질적으로 주체를 지배하는 무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의식 세계가 상징의 세계, 표상의 세계라면 그 세계는 필연적으로 기표의 세계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기표는 기의와 맞물린다. 그러나 라캉에게서는 소쉬르에게서처럼 기표와 기의가 일대일 대응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존재와 사유의 일치”라는 고전적인 전제 위에서 활동했던 소쉬르와 기표와 기의의 ‘미끄러짐’에 대해 이야기한 라캉 사이에는 거대한 담론사적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 더 정확히 말해, 소쉬르나 레비-스트로스에게는 기표-기의의 대응관계가 성립하며 때로 그 관계를 일탈하는 경우들이 존재한다면 반대로 라캉의 경우 기표와 기의는 애초부터 일치하지 않으며 다만 경우에 따라 기표가 기의에 “닻을 내리는” 곳 즉 이른바 ‘누빔점’이 존재한다.
기표는 그 안에 어떤 경험 내용을 담고 있다. “눈이 내린다”라는 기표는 눈이 내리는 현상(지시대상) 및 그 현상에 대한 경험 내용(기의)을 담고 있다. 그러나 라캉은 기표와 기의가 흔히 일치하지 않음을 말한다. 정치가가 “저는 대권 욕심이 없습니다”라고 극구 강조하는 것은 사실 은근히 대권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조심할 것은 이 정치가가 지금 의식적으로 거짓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실제 그 사람은 자신이 욕심이 없다고 믿고 있지만, 그럼에도 무의식 속에서는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요점이다) 즉 기표와 기의가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일치하지 않는가? 바로 무의식 때문이다. 기표는 대권 주자에 나가고 싶지 않다는 그 정치가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지만, 대권 주자의 무의식의 움직임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라캉에게 인간이란 병자든 아니든 기본적으로 이런 이중 구조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의식과 기표, 그리고 그 기표가 명시적으로 가리키는 기의의 세계가 있는 반면, 또한 무의식에서의 움직임이 존재하는 것이다.
무의식은 ‘그것(es)’이다.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상 ‘그것’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라캉은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를 뒤집는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서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고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로. 라캉은 근대 철학의 대전제인 주체의 투명성, 주체가 “주어졌다”는 생각을 거부하고, 주체의 밑에는 ‘그것’이, 무의식이 존재하며 주체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형성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주체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칸트의 예: 주체의 ‘의식’(왜 꼭 의식이어야 할까? 지극히 추상화된 인간)의 일정한 틀(감성의 아프리오리한 형식으로서의 시공간, 오성의 열두 범주, 구상력과 도식,)을 갖추었기에 인간은 바로 이러 이러한 식으로 세계를 인식할 수밖에 없으며, 그 가능성의 조건 바깥은 알 수 없는 물 자체라는 생각. 문제점은 없는가?
* 칸트는 인식 주체 안에 인식을 가능케 하는 기본 형식이 내재해 있다고 봄. 즉 인식은 대상에 대한 경험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주체가 주체적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아프리오한 인식
수학적 지식은 당연히 아프리오하다. 그러나 과학적 지식이라고 해서 순전히 아포스테리오한 것만은 아니다. 칸트는 경험과 관찰로만 전개되는 것처럼 보이는 뉴턴의 역학에도 아프리오한 측면이 있다고 봄.
아프리오리 -‘앞선 것으로부터’(선천적) -원리를 통해 앎
/ 아포스테리오리 -뒤의 것으로부터‘(후천적) -경험과 관찰
(비판)
주체가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가 끝없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그 존재의 드러남을 통해서 오히려 주체의 범주가 바뀌어 가는 것이다. 불확정성 원리는 근대 결정론의 금과옥조인 인과율을 무너뜨렸고, 물질파 개념은 모순율까지 뒤흔들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새로운 현상이, 세계가 열릴지 누가 알겠는가? 세계 속에서 주체가 변해 가는 것이지 주체가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다. 칸트의 주체는 유럽적-과학적-주체일 뿐이다.
* 고전의 소양이 없는 학문은 학문의 자격이 없다.
고전 - 다층적인 의미
-우선 고전은 시기 구분의 잣대로 볼 때, 근대 이후의 시기보다 선행하는 과거의 어떤 것들을 지칭.
- ‘classic’ : ‘오래된’이라는 뜻과 함께 ‘가치 있는’이라는 뜻이 함께 담겨 있다.
‘오래 전에 발생하여 그 가치가 공인된’, 또는 ‘후대 문화에 전범이 될 정도로 훌륭한’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럴 경우 ‘고전’이란 단어는 고전 음악이라고 할 때와는 달리 시기 구 분을 초월한 어떤 정전성(正典性)의 뜻을 내포하게 된다.
고전이란 대개는 오래된 것,
시간의 풍화작용을 견디고 모범적 규범으로 살아남은 것.
오래된 것이라고 다 고전이 되는 건 아니다.
우리네의 정서와 심성이 고스란히 담긴 명품이라야 함.
정서와 심성이란 곧 살아오면서 불어넣은 의미.
그 안에 담기는 내용은 말할 것도 없고 그 형식도 새롭고 돋보여야 함. 당대는 물론이고 미래에서도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이라야 함.
언제 읽더라도 현재적 의미를 길어낼 수 있는 심미적 텍스트여야 함.
당대성을 머금고 탄생하는 무수한 작품들은 소멸함.
소멸하는 것들은 그 소멸로써 의미를 다 소진해버림. - 소멸은 그 텍스트가 고전이 될 수 없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임.
오랜 시간을 두고 살아남았다는 것은 그 텍스트의 가치와 의미가 소진되지 않고 새롭게 덧보태지고 있다는 것.
늘 새롭게 그 의미를 갱신하는 텍스트. 바로 그런 작품들만이 고전이 되는 것.
고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 - 고전읽기- 저 가없는 뜻의 우주로 떠나는 여행.
그것은 넓고 큰 우주이되 어떤 근원과 향수로 속절없이 깊어진 심연이기도 함.
삶의 심연, 언어의 심연, 의식의 심연.
정전(canon)은 다른 어떤 것으로 그 가치를 측정할 수 없는 것, 오히려 그 반대로 다른 것들이 가진 가치를 측정하는 표준으로만 작용하는 것을 지칭한다. 따라서 불변성과 항구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이를테면 유가(儒家)의 경전인 사서삼경(四書三經)이나 기독교의 경전인 성서 등이 그러하다. 이런 것들에 대해 후대인이 가할 수 있는 변조는 고작해야 해석적인 진술, 대표적으로는 주석적 첨언이 있을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정전이라는 견지에서 사용되는 고전 개념은 불변의 가치를 지니기에 주석(commentary)이외의 어떤 개조나 변경도 용납하지 않는다.
참다운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모든 개별적 전공과 무관하게 '고전'이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
* 한국은 정신사적으로 들끓고 있다.
경제논리에 갇혀 순수학문이 빛을 발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정신적 빈곤에
처하고 있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감각적 관심을 넘어서 '학문하는 즐거움'에 눈뜰 수 있어야 한다.
서양고전과 서양철학의 주요저작들이 높은 수준으로 번역되어 '읽히기를'
기다리고 있다
* 세계사상가들이 인간의 문제에 관하여 논의한 것을 주제별로 일목요연하게
해설한 시리즈.
한국의 젊은 학자들이 소화해낸 언어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 서양고전을 공부하는 이유는 서양문명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함이다.
서양에 대한 이해를 서양을 극복하게 하며, 그 길에서 동양의 고전을 체화함으로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사유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 작자지위성 作者之謂聖 _ 예기/악기
"창조하는 사람이야말로 성인이다."
예) 음악의 역사는 연주의 역사가 아니라 작곡의 역사이다.
그런데 한국은 인재가 연주에만 몰리고 작곡에는 관심이 몰리지 않는다.
"作" 어떤 분야에서건 모방, 흉내에서 멈추지 말고 '창조'해낼 수 있어야 한다.
"젊은이는 지식의 소비자가 아니라, 지식의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
2. 칸트철학은 붕어빵 철학이다
_ 붕어빵은 밀가루반죽을 틀에 찍어낸 것
밀가루반죽은 '내용' content / 감각소여 sense data / 따라서 '경험적'이다
틀은 '형식' form / 오성 悟性의 범주 / 그렇기에 '선험적'이며 '초월적'이다
밀가루반죽 + 틀 = 앎
내용 + 형식 = 인식
순수이성(제1비판): 인간 이성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분석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실천이성(제2비판): 인간이 도덕적 행위를 하는 것이 단순한 감정적 동기나 사회적 관습 때문이 아니라, 이성적 필연성에 의해 가능하다는 점을 논증하는 데 초점,
즉 칸트는 도덕법칙이 실천이성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으며, 인간은 도덕적 존재로서 그 법칙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
- "무엇을 해야 하는가?"
판단력 비판(제3비판):순수이성 비판의 기초인 오성과 실천이성 비판의 기초인 이성 사이에서, 양자를 매개하는 인식 능력인 ‘판단력’에 의하여, 자연 인식과 도덕적 인식 이외의 특수한 인식 -‘미’와 ‘유기체’에 관한 인식이 있다는 것, 이들 인식이 포함된 앞의 두 인식을 총합하는 본질을 해명하는 일
칸트에 의하면 판단력이란 주관을 통하여 객관을 유추하는 능력이다. 주관을 통한 객관의 탐구, 랖서 두 비파서를 통하여 판단력을 인간의 지성(오성)과 이성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밝혔다. 하지만 앞선 두 비판을 통하여 설명이 되지 않는 점이 있었으니, 바로 미적 판단이다.
미적 판단은 무관심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성에, 능력에 의한 판단에 기인하는 것이 될 수 없다. 미적 판단은 보편성을 띄는 것이라야 한다. 칸트가 <판단력비판>을 저술하게 된 원인이다.
미학에 관심 갖는 이유는 무엇인가? 혹자는 삶을 더 이상 비참하게 만들지 않기 위한 노력의 소산이라고 한다. 서양철학에서 하나의 학문의 대상으로서 미 또는 예술이 다루어진 것은 사실상 칸트의『판단력 비판』덕분이다.
칸트의 미학은 고전주의 미학을 대표하면서도 낭만주의로의 이행을 예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대결은 오늘날 행해지는 모던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 대결의 고전적 버전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왜 ‘미’를 논하는 책이 ‘판단력 비판’이라는 제명으로 되어 있을까? 고전주의의 미 개념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통해 우리들의 미적 감수성을 단지 감수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높은 수준으로 고양시키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칸트는 미(美)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왜 책 이름은 「판단력 비판」인걸까?
표제어가 이렇게 되어있는 것은 굉장히 많은 함축을 가지고 있다.
고대인(플라톤)에게 미는 idea(존재하는 것)이다. 신이나 천사, 인간, 지우개 등등이 존재하는 것처럼 미도 나와는 별도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근대(특기, 칸트)에 와서 이러한 미에 대한 태도가 바뀌게 된다.
미는 주관적인 것으로써,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의 판단이나 정서의 문제가 된다.
즉, 칸트에게 있어 ‘미’란 ‘존재자의 성질’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주관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어떤 결과물’일 뿐이다.
따라서 고대인이 ‘미’라는 존재가 있어서 그것을 보고 쾌감을 느낀다고 하는 반면(고대인 또한 미가 쾌감을 주는 것은 부정하지 않음), 근대인은 쾌감을 느끼기 때문에 그것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칸트는 쾌감과 관련하여 나에게 즐거움과 만족을 주는 것을 아름답다고 정의하며, 이런 쾌감에 근거한 판단을 취미 판단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미를 분석 하는 것은 취미판단을 분석하는 것이다.
* 인식론 epistemology
근대 서양에서 과학의 발흥과 더불어 비약적으로 발전한 학문체계로써
앎 knowledge의 성립과정과 그 한계를 밝힌다
* 감각소여(感覺所與) sense data
우리의 감관 five sense-organs 을 통하여 주어지는 감각자료
* 오성의 범주(悟性의 範疇) Categories of Understanding
칸트의 용어. 우리 이해력의 기본이 되는 선천적 논리적 개념 구조
칸트는 우리의 앎이 경험과 더불어 시작하지만 경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본다.
칸트는 영국 경험론전통과 대륙 합리론전통을 종합하여 '근대계몽주의 철학'을 완성했다.
_ 내용 없는 형식은 공허하고, 형식 없는 내용은 맹목적이다.
칸트에게 있어서 내용은 '직관'이라 부르고, 형식은 '개념 혹은 사유'라고 부른다
(순수이성비판 제2부 선험적논리학)
* 구성설 construction theory
세계는 감관에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선험적 의식이 구성해내는 것이다
* 칸트 철학은 근대적 인간, 그 진정한 '주체의 탄생'이다.
오성의 범주는 인과관계를 이탈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성의 범주가 구성해 놓는 세계는 인과론적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감성을 이탈하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님은 실천이성의 요청 Postulation 일 뿐이다.
그것은 우리 삶의 도덕적 기저로서 요청되는 것이며 존재의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은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나님은 이율배반/안티노미 Antinomie의 대상이다." 칸트
ANTINOMY : 이율배반
- 서로 모순되어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명제. 칸트에 의하여 널리 쓰이게 된 용어로 세계를 인식 능력에서 독립된 완결적 전체로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이성은 필연적으로 이율배반에 빠진다고 한다.
첫째 안티노미(양적인 견지에서 세계를 고찰할 때). 명제: 세계는 시간 안에서 시작되고, 공간적으로도 한계 안에 포함된다. 반명제: 세계는 시작이 없고, 공간적으로도 한계가 없다.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무한하다.
두 번째 안티노미(질적인 견지에서 세계를 고찰할 때) 명제: 세계 안에 있는 모든 짜맞춰진 실체(合成實體)는 단순한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다. 반명제: 세계 안에 있는 그 어떤 짜맞춰진 것도 단순한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세 번째 안티노미(관계의 관점에서 세계를 고찰할 때) 명제: 자연의 법칙에 따르는 인과관계는 전체가 그것에 속하는 유일한 인과관계가 아니다.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자유에 의한 인과관계가 있다는 것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반명제: 자유라는 것은 없다.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오직 자연법칙에 따라서만 생겨난다.
네 번째 안티노미(양상의 관점에서 세계를 고찰할 때). 명제: 세계에는 그 부분으로서나 그 원인으로서,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것이 있다. 반명제: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것은, 세계 안에서도 세계 밖에서도 세계의 원인으로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계는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나의 오성의 범주가 창조한 것이다." 칸트
3. 자사와 칸트
* <중용>의 저자 자사는 칸트와 같은 인식론적 순수성을 지향하지 않는다.
초험적 자아가 있어 이 세계를 구성한다고 보지 않으며, 인간은 인식의 내용과 형식을
모두 천지와 교섭한다. 따라서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은 분열되지 않는다.
- 자사는 중용을 유가사상의 핵심 주제로 보았으며, 중용은 사람들이 모든 행동에서 본받아야 할 원칙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라고 했다. 중용의 중은 치우치지 않음(不偏不倚),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음(無過不及),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상태(喜怒哀樂之未發)를 뜻하고, 용은 변함없음(平常, 不易)을 뜻한다. 중용을 실천하는 일은 평범한 사람도 할 수 있을 만큼 쉬우나, 철저히 지키는 일은 성인(聖人)도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지극한 정성(誠)이 곧 중용에 거의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중용을 지켜 이것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군자의 도(道)이며 세상의 정해진 이치(定理)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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