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현황>
1.수영
나는 9월부터 현재까지 약 4개월간 월수금 아침마다 1시간씩 수영을 했다. 나는 너무 피곤했던 날 이틀과 고입 원서 문제로 빠졌던 하루를 제외하고는 빠짐없이 매일 출석했다.
나는 얕은 청소년풀에서 수영을 하다가 10월 중순쯤 성인풀 5번 레인으로 진급했다. 그로 인해 금색 수영모자 아저씨와는 결별하게 되었지만, 대신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언제나 방긋방긋 웃으시는 인상 좋은 간호사 언니, 이은재 뺨칠 정도로 쉬지 않고 열성적으로 수영하시는 색 바랜 하늘색 수영모의 마른 근육질 아저씨, 수영을 할 때마다 꼭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 유치원 선생님 분위기의 과학전공 여대생, 수영이 끝난 다음 언제나 남아서 혼자 연습을 하는 노력파이자 평형 에이스인 아주머니, 항상 맨 뒤에서 슬슬 느긋하게 수영하지만 현재까지 단 한번도 결석한 적이 없는 출석왕 할아버지, 그리고 언제나 한결같이 10분씩 지각하시며, 어설픈 수영동작으로 수영선생님을 답답하게 만드시는 아주머니. 이들 중 내가 간호사 언니와 여대생이라 부르는 두 사람은 한 달쯤 전부터 두문불출이시다. 사실 그 외에도 뚱뚱한 아저씨와 팔에 커다란 용모양의 문신을 새긴 청년 등 2주에 한번 꼴로 출석하는 사람들도 여럿 있다. 그런 점에 빗대어 볼 때 결석이 거의 없이, 언제나 5분 일찍 수영장에 도착하는 나는 매우 모범적인 학생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나는 현재까지 남아있는 5레인 사람들과는 아주 친하게 잘 지내고 있다. 우리는 서로 인사도 하고, 수영의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수업을 한다. 우리 반에서 나는 일명 ‘깜찍이’라고 불린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사람들은 내 이름보다 ‘깜찍이’라는 별칭을 선호한다. 아마도 연령대가 높으신 분들로 구성된 ‘청소년’ 수련관 수영장에서는 내가 최연소 학생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말을 내 입으로 하기는 그렇지만, 나는 우리 레인의 에이스이기도 하다. 정확히는 ‘못하는 사람들 중 그나마 제일 잘 하는 사람’이라고 해야 맞겠다. ‘못생긴 애들 중엔, 내가 제일 잘생긴 것 같아’라는 케이윌의 노래 가사처럼. 나는 일단 우리 레인에서 수영 속도가 매우 빠른 편이다. 그래서 아줌마, 아저씨,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언제나 나를 수영 선두주자로 세우신다. 그리고 나는 아무래도 어르신들보다는 새로운 것을 잘 배우는 편이다. 그래서 ‘역시 다르다’, 심지어는 ‘저 체력이 어디서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는 얘기까지 듣는다. 하반하에서의 내 과거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이 글을 읽고 빵 터질 것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리고 감사하게도 나는 어른들과 비교했을 때는 아직 많이 건강하다. 그러나 여기서 만족하고 기뻐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결국 우리나라 어른들이 얼마나 몸이 허약한가를 보여주는 안타까운 지표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수영장 사람들을 보면 국가가 국민 건강 증진을 위해 많이 힘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수영장에는 정말 불편한 진실들이 많다. 지금부터 내가 4개월간 직접 관찰해온 그 진실들을 나열해보겠다.
<수영장의 불편한 진실>
1.수영모와 수경은 아무리 다시 고쳐 써도 끊임없이 다시 흘러내린다.
수영장 아주머니들은 1시간 동안 적어도 네 번 이상은 모자를 다시 쓰고 안경을 닦는 것 같다.
분명 방금 전에도 고쳐 썼는데 왜 다시 그것을 벗었다 썼다 하는지 나로써는 도무지 알 도리가 없다. 그들은 적어도 10분 이상은 그것을 고치느라 수영을 못한다. (조깅할 때만 되면 신발끈이 자꾸만 풀리는 현상과 비슷한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2.수영을 못하는 사람이 수영을 못하는 다른 사람을 가르친다.
예를 들면 내가 보기엔 당신도 접영을 잘 못하시는 분이, 접영을 못하는 다른 사람에게 ‘그건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나처럼 해봐라’라고 얘기하신다. 그러면 그 분은 ‘그런 것이었냐’면서 정말 열심히 앞의 분의 잘못된 동작을 따라하고 크게 감명을 받는다.
3.수영 선생님의 말을 정말 안 듣는다.
꼭 평형을 하라고 하면 자유형을 하고, 접영을 하라고 하면 평형을 하시는 분들이 있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4.제일 늦게 들어와서, 가장 설렁설렁 수영을 한 사람이 언제나 ‘오늘은 왜 이렇게 수업이 빨리 끝난 거냐’고 묻는다.
5.아무리 오랫동안 샤워실에 줄을 서고 있어도, 내 차례는 돌아오지 않는다.
샤워실의 줄은 사실 아무런 역할을 못한다. 왜냐하면 아주머니들이 길게 늘어선 사람들을 비집고 샤워실에 들어가 먼저 모든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나 같은 정의롭고 힘없는 아이는 아주머니들이 빠져나가고 조금 한산해진 뒤에야 샤워를 할 수 있다.
에이스 이은재는 자유형 팔 꺾기부터 시작하여 현재는 한팔 접영을 배우고 있다. 과연 내년 2월까지 접영을 마스터해서 4개 영법 가능자가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학교에 입학하고 나면 더 이상 시간이 없을 테니 부족한 것은 3년 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더 배워야 할지도 모르겠다.
청소년 수련관에 더 이상 나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적어도 내가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만은 이제 모두가 안다. 며칠 전 나는 월수금 수영 화목 에어로빅을 다니시는 박영희 아주머니와도 친해졌다. 아주머니는 내 등판을 가득 채운 부항 자국을 보시고는 내게 동질감을 느끼셨고, 우리는 그때부터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아주머니의 지인 분이 운영하시는 고구마 농장의 전화번호도 알게 되었고,.(이번에는 이미 매진 된 상태였기 때문에) 나중에 그곳에서 고구마를 시켜먹기로 했다.
우리 월수금 7시 수영반은 다음주 수요일 저녁 7시에 닭갈비집에서 송년회를 한다. 아마 나도 거기에 참가하게 될 것이다. 수영장에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과 이렇게 일년을 마무리하는 파티도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럽고 기쁘다. 내가 수영을 하기로 택했던 것은 정말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2. 한자
나는 9월 21일부터 지번 주까지 매주 금요일마다 도서관에서 하는 한자수업을 들었다. 아마 우리반에서 한번도 지각, 결석을 하지 않은 사람은 내가 유일할 것이다. 나의 원래 목표는 2급 한자 2000자 중 절반을 외우는 것이었는데, 아쉽게도 매주 25자씩 외워서 500자 정도밖에 외우지 못했다. 그래도 눈목과 해일도 구분 못하던 내가 웬만한 중국집 이름의 한두 글자 정도는 읽을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것은 장족의 발전이다. 초등학교 때는 매주 아침마다 하는 한자수업을 듣기가 너무 싫어서 항상 일부러 10분씩 늦게 등교하곤 했었다. 그때는 한자를 배울 필요성과 흥미를 못 느꼈다. 그런데 이렇게 나이가 들어 스스로 필요하다고 느낄 때 다시 한자 공부를 하니 정말 재미있고, 열심히 하게 된다. 엄마는 아직도 단어를 잘 못 읽는 나를 비웃지만, 나는 이렇게 계속 공부하다 보면 언제가 내 한자실력이 평균이상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한자 수업에서 우리는 부수한자를 먼저 배우고 그것으로 한자의 한 자 한 자를 해석했다. 그렇게 하니 한자마다 이야기가 생겼다. 예를 들면 ‘기를 양’자는 양에게 밥을 먹여서 ‘기른다’는 뜻이고, ‘기를 육’자는 자녀를 큰 사람으로 ‘기른다’는 뜻이어서 ‘양육’은 밥을 먹이는 것뿐만 아니라 자녀의 됨됨이를 잘 길러주는 것까지 포함한다. ‘어질 현’자는 신하가 나라를 다스릴 때 재물에 대해서 만큼은 ‘어질어야 한다’는 뜻이고, ‘곧을 정’자는 높은 사람은 재물에 대해 ‘곧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 한자들을 보면 과거부터 높은 사람들의 횡령이 문제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글자는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만들었지?’ ‘왜 이런 모양으로 만들었을까?’ 생각하다 보면 무작정 외우려고만 했던 언어가 사실은 선조들의 큰 뜻을 담은 굉장히 흥미롭고 신비한 문자라는 것을 느낀다.
한자 공부를 하며 알게 된 사실이 있다면 언어는 경직되지 않은 자세로 편안하게 공부할 수록 더 재미있다는 것이다. 어렵고 복잡하고 공부해야 할 것으로만 생각하면 짜증이 나고 머리가 아프지만, 부담 없이 재미로 한다고 생각하면 암호 해독을 하는 특별 수사대가 된 기분이다. 다른 사람은 모르는 것을 나 혼자만 이해할 수 있다는 데에서 쾌감을 느낀다. 가끔은 내가 직접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불끈 들기도 한다. 물론 그것은 생각에서 그치지만.
우리 한자 반에는 15명 남짓한 사람들이 있다. 30대 아들이 집에서 빈둥대는 것을 못 참아 리프레쉬를 하러 한자수업에 나오시는 아주머니, 학교에서 영어 선생님을 하다가 퇴직하신 아주머니, 언제나 중학생 아들 교육 문제에 대해 유난히 걱정이 많으신 우리 한자 수업의 막내(나를 제외하고) 아주머니, 그리고 우리 한자수업의 최강 분위기 메이커 김종연 선생님과 정여사님. 그 외 분들의 정체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르겠다. 김종연 선생님과 정여사님 두 분은 72세로 한자수업에서 가장 연장자이시다. 김종연 선생님의 성함은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연못이라는 뜻에서 한라산의 백록담을 지칭한다고 한다. 김종연 선생님께서는 자신의 성함에 대해 매우 큰 자부심을 가지고 계셔서 내게 이 얘기를 몇 번이고 다시 해주셨다. 선생님께서는 경상북도 상주시 사벌면 엄암리 567번지가 고향이시고, 과거에 교직 생활을 하셨다. 체육선생님이셨고, 교감, 교장 선생님의 경력도 있으시다. 그래서인지 말씀하시는 투가 학교 조회시간에 자주 들었던 늠름한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연상시킨다. 선생님은 한자 수업을 3년간 들으셨기에 나의 한자 선배님이시기도 하다. 한자 수업이 끝나면 언제나 나를 앞에 앉히시고는 한자를 어떻게 공부해야 하며,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강의를 공자 선생님 못지 않게 열성적으로 가르쳐주신다. 매일 부수한자를 공부한 뒤, 그 주에 배운 한자 읽기를 공부하라고 하시기에 나는 그간 매일 아침마다 한자 공부를 했다. 또 가족들의 이름을 한자로 외우는 것과 거리나 역의 이름을 한자로 알아보는 것도 좋다고 하셨다. 김종연 선생님은 나의 은사님이시다.
김종연 선생님과의 나머지 공부.
<김종연 선생님의 가르침>
1.나이가 들면 아는 것이 많아져서 말을 많이 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것을 자제할 줄 알아야 한다. 젊은 사람들에게도 생각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도 말씀하시는 걸 아주 좋아하신다. 수업시간에 자꾸 이런 저런 설명을 길게 늘여놓으신다. 예를 들면 다락루, 누각루를 배우는 데, 다락과 누락은 다른 것이라며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 5분간 설명하셨다.)
2.공부할 때는 질문이 끊이지 않아야 한다. (내가 선생님께 질문을 안 했더니 나를 꾸짖으시며 이렇게 말씀해주셨다.)
3. 항상 웃으려고 해보면 좋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현재가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순간인지 떠올려보라고 하셨다.
4.최고의 수업은 선생님이 결석하는 수업이다. (김종연 선생님은 한자 선생님이 지각하시는 걸 정말 좋아하신다. 선생님이 안 와서 수업을 안 하는 것이 최고의 수업이라고 말씀하신다. 어린 학생같은 귀여움이 있으시다)
김종연 선생님은 나이가 많으심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에 대한 이해가 깊으시다. 집안 환경이 어려운 아이들이 학교에서 말 안 듣고 난동을 피우는 것을 반듯하게 열심히 공부만 하며 자란 선생님들은 이해하질 못한다고, 왜 공부를 안하냐고만 할 뿐이라고 한탄하셨다. 아이들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하다고. 나는 김종연 선생님이 학교에서도 정말 좋은 선생님이셨을 것이라 확신한다. 선생님은 아직까지도 끊임없이 독서를 하시고, 자기 수련을 하신다. 나는 선생님같이 늙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감을 깎으시는 정여사님.
정여사님은 한자 수업을 듣기 위해 서초동에서부터 버스를 세 번 갈아타고 목동까지 오신다. 한자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고, 아주 똑똑하신 분이다. 배운 한자로 예시를 들 때 가장 많은 단어를 말씀하신다. 정여사님과는 많은 대화를 나눠보진 못했지만, 참 따뜻하고 좋은 분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하루는 당진의 농장에서 재배한 감이라며 한 봉지 가득 이고 오셔서 먹어보라며 깎아주셨다. 우리 한자 반에 김종연 선생님과 정여사님이 안 계시면 수업 분위기가 많이 침체된다. 김종연 선생님이 설명도 늘여놓으시고, 정여사님이 열정적으로 예시도 들어주셔야 교실 환기가 된다.
나는 매주 금요일마다 한자수업에 아빠가 만들어주신 빵을 가져갔다. 아주머니들은 내가 오면 모두들 분주하게 움직이셨다. 내가 가져온 빵과 함께 마실 커피나 티를 끓이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들은 어느 순간부터 빵을 챙기기 위해 각자 비닐까지 가져오기 시작했다. 누구도 내게 꼭 빵을 가져오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무언중에 나는 이 모든 광경들과 빵에 대한 그들의 극찬을 보고 들으며 빵에 대한 나의 의무감과 책임을 느꼈다. 많은 분들이 내가 가져올 빵에 대한 기대를 살짝씩 비추셨다. ‘어머 은재야~ 자꾸만 기대가 되네~’ 하루는 한자 선생님이 파상풍으로 다리가 아프셨는데, 내가 가져온 빵을 먹으려고 수업에 나오셨다고 했다ㅋㅋㅋ 이러니 나는 하루도 수업에 빠질 수가 없었고, 하루도 빵을 가져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하튼 우리 아빠의 빵이 누군가에게 치유를 주었다는 것은 정말로 감사하고 뜻 깊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빵을 통해 한자수업에서 없어서는 안될, 필연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들은 어쩌면 나보다 빵을 더 그리워할지도 모르겠으나, 어떤 식으로든 나는 한자수업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6개월간의 한자 수업이 마무리되었다. 어르신들의 수업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달려들어 결국 듣게 된 이 수업은 아마도 나 덕분에 분위기가 더 좋아진 듯하다. 나의 빵과 나의 젊음이 교실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드는 데에 분명 한몫 했으리라. 물론 나 역시도 이 수업을 통해 얻은 것이 많다. 목표했던 대로 한자공부도 잘 마치고, 어르신 친구들도 사귀었으니 나는 그간의 시간을 잘 쓴 것 같다.
3. 인문학 수업
나는 매주 일요일마다 교육공동체 나다에서 인문학 수업을 듣는다. 나다는 지난 겨울에 내가 학교를 1년 쉬기로 하면서 찾게 된 공간이다. 나는 이곳에서 사회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 처음 들었던 수업은 청소년 인권과 관련된 것이었다. 학생들이 얼마나 억압받고 있으며, 학생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대우를 받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사실 나는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무조건 아이들을 제제하고, 규칙에 따르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나는 아이들이 왜 교복을 입지 않는지, 왜 하지 말라는 화장을 하는지, 왜 몰래 담배를 피우고, 왜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은 당연히 아이들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학생들의 입장을 대변해야 하는 회장의 자리에 있었을 때도 나는 선생님들이 원하는 것을 아이들에게 끼워 맞추려고만 했다. 그래서 학교 규칙을 지키지 않는 아이들의 이름을 받아 적어서 교무실로 보내는 일을 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는지 나다에서 깨달았다. 아이들의 행동은 이상한 것도, 잘못된 것도 아니었다. ‘교복을 왜 입으라고 하는 거지? 교복은 그저 어른들이 아이들을 통제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인 거야. 교복을 입으면 그 신분에 맞게 행동하게 되거든. 왜 아이들이 굳이 술과 담배를 하려고 하는 걸까? 그건 어른들이 아이들을 과도하게 억제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항으로 나오는 당연한 결과야.’ 나는 내가 옳다고만 믿었던 규칙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것은 사실상 아무런 논리적인 이유도 없이 학생들의 모든 것을 규제하고 있었다. 결국 필요한 것은 더 엄격한 규칙과 처벌이 아니라, 자유와 허용이었다. 나는 인문학 강의를 들으며,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 깊게 들여다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게 되었다. 그러지 않고 현재 상황만 보고 통제하고 덮으려고 하면 다른 누군가에게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도 말이다.
나는 나다가 편해서 좋다. 아무도 나를 평가하지 않고, 꼭 질문에 답해야 하는 것도 아니며,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라던지 경쟁 같은 것이 없어서 좋다. 나다에서는 지각을 해도 된다. 내가 5분 늦었다고 해서 1점을 깎거나 나를 나무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루는 내가 날씨가 너무 좋아서 놀러 나가고 싶다는 이유로 수업을 빠졌었는데 그때 슈가 나를 되려 칭찬해주었다. 좋은 생각이라고, 잘 놀다 오라고 말이다. 나다는 가만히 앉아있다 오기 좋은 은신처 같은 곳이다. 나다에서 수업을 해주는 슈는 마흔살이 넘은 선생님인데,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싫어한다. 그리고 존댓말 보다는 반말로 친근하게 지내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래서 나다에서는 나이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나다에서 내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한 주를 어떻게 보냈는지다. 요즘 재미있는 일이 있는지, 심심하진 않은지 물어보고, 언제든 놀러 오라고 한다. 그리고 슈는 내게 꼭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준다. 실제로 나다에는 학교에 다니지 않는 청소년들이 많다. 대안학교에 다니는 아이들도 있고, 학교를 나와 자유로운 삶을 사는 아이들도 있다. 그래서 나다에 있으면 내가 앞으로 어떤 삶을 택하든, 학교에 가든 안 가든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나다에서 배우는 것들은 내가 일상생활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기준을 만들어준다. 나다의 공부는 실용적이고 나를 보호하는데에 이용할 수 있어서 여러모로 도움도 되고, 더 열심히 듣게 된다. 한마디로 나다는 내게 참 좋은 공간이다.
요즘은 근대 철학을 배우고 있다. 근대 철학이 현대 우리의 사고방식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아직은 데카르트, 흄, 헤겔 같은 이름들이 낯설게 느껴지지만, 나는 이해가 되는 것까지만 듣고 올 것이다. 편하게. 적어도 2월까지는 놀러간다는 마음으로 계속 나다에 갈 것 같다.
|
첫댓글 은재가 참 열심히 살아가고 있음이 훤히 보인다~ 수영과 한자공부 거기다 인문학강의까지.... 그 안에서 사람을 살피고 의미를 부여하고 깨달음까지 멋지다 은재👍👏👏👏
은재양 공항서 얼굴은 처음봤지만 반가웠네요 ㅎㅎ 하루를 알차게 흐트러짐없이 보내는게 쉽지않을텐데 대단해요 은재양에게서 배우는게 참 많아요
사회성 짱인 은재 -. 너무나 멋지다... 감탄스럽네.
카페에서 잠시 추가 수다 붙여 쓴다. 은재야 사회성이 자립력의 중심인 거 알고 있냐? 자립능력이란게 무인도에서 혼자 생존하기, 팔방미인인 완벽한 독불장군처럼 되기가 아니라, 내가 나를 믿고 나를 근거로 온 세상과 소통하고 교류하고 도움을 주고 받는 능력이라는 거 ㅡ, 그게 진짜 자립능력이야. 인공지능 로봇이 갖출 수 없는 가장 인간다운 능력.
너 사회성 짱 ㅡ이라고 감탄한 이유가 그거란다. ㅋ
글고, 밑에 쭌맘댓글에 은재에 대한 자부심이 깨알 토핑된거 보니 유쾌, 슬슬 웃음이 나오는 걸? ^^*
은재가 매일 엄마한테 해주었던 수영반, 한자반 이야기가 이렇게 글로 쓰여지니 이것 또한 엄청 재미난 글이 되었구나. 사람 사이 넘기 힘든 벽이 있게 마련인데 은재는 특히 나이..라는 경계를 가뿐히 넘는 거 같아. 특히 너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는데 있어서 탁월한 소통 능력을 발휘하지. 너를 젊은 친구로 삼은 어르신들은 얼마나 좋으실까? ㅋㅋㅋ너를 친구 삼고 싶어하는 엄마 친구들도 많단다^^
나다에서 아줌마도 인문학수업 듣고싶구나
여전히 은재는 자율적으로 열심히 살구있구나
기특하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1.08.31 2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