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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론(人間論)
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인가?
조직신학의 인간론은 인간의 기원 (origin), 인간의 구성 (constitution), 인간의 본질과 본성 (nature), 인간의 목적과 운명 (purpose and destiny), 자유의지, 인간의 죄와 타락, 죄의 결과 등을 논의한다.
오늘 에세이는 인간의 기원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주제인 하나님의 형상 (the Image of God, Imago Dei) 에 대해서 상세하게 논하고자 한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사람을 당신의 형상 (첼렘)과 모양 (데무트)을 따라 창조하셨다고 말씀한다 (창 1:26-28). 이 본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전통적으로 두 가지 견해가 제기되었다.
하나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 자체라는 관점이다. 이 관점에 의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본질과 본성 자체와 분리될 수 없다.
두 번째 관점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는 관점이다 (human beings bear the image of God).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며, 그 형상을 따라서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관점이다. 필자가 보기에 두 가지 관점은 서로 충돌한다기 보다는 보완한다고 보여진다. 둘 중에서 어느 관점을 택하든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것이다.
또한 "형상"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함의가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중요하다. 성경 전체의 맥락과 창세기가 기록된 당시의 고대근동의 문화를 고려할 때 "형상"이라는 말은 반영, 반사, 대표, 아들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을 반영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이 반사됨을 보게 된다는 말이다. 또한 인간은 하나님을 대표하는 자로, 심지어 대신하는 자로 창조되었다. 더 나아가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은 신의 아들권을 가진 자 즉 왕족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지배자인 왕들만이 신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창세기의 계시는 왕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 즉 만인이 신적 왕족으로 창조되었음을 함의한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만인이 가지고 있는 존엄과 신성함 그리고 그들간의 존재론적 평등을 가르친다는 의미에서 혁명적인 사상 즉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없는 사상이 아닐 수 없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하여 전통적으로 세 가지 관점이 제시되었다.
하나는 실체론이다 (the substantive view).
실체론에 의하면 인간이 실체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어떤 요소들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의 영혼, 이성, 자유의지 같은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본질적 요소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보는 관점이 있다. 또는 사랑, 의, 지식 같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속성 (attributes)들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관점이다. 실체적 관점은 어거스틴, 루터, 칼빈, 에드워즈 같은 고전적인 신학자들이 주창해 왔던 관점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영혼과 이성과 자유의지와 여타 속성들은 인간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일 뿐 아니라, 인간과 동물/짐승을 구별해 주는 표지들이다. 필자는 이 관점이 분명 성경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실체론만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을 총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두 번째 관점은 관계론이다 (the relational view).
관계론에 의하면 인간이 다른 인간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려는 성향 (relational inclination)또는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는 능력 (relational capacity) 즉 관계성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론은 칼 바르트 (Karl Barth, 1886-1968)나 에밀 브루너 (Emil Brunner, 1889-1966)같은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주창되었다. 특히 바르트는 하나님이 창조한 남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성이 하나님의 형상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브루너 역시 인간이 하나님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성 또는 인간이 인간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성이 하나님의 형상의 중핵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바르트와 브루너가 말하는 관계성은 단순히 인간이 사물에 대하여 가지는 소유적 관계성 (possessive relationship)이 아니라, 인간이 다른 인간과 함께 누리는 인격적 관계성 (personal relationship)을 의미한다. 사람과 사람이 함께 누리는 인격적 관계성이야 말로 다른 동물이나 식물이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필자는 이 관점 역시 성경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하다고 믿는다. 특별히 삼위일체 하나님을 구성하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매우 깊은 인격적 관계와 친교를 누리고 있음을 이해할 때, 이 관계론적 관점은 성경적 근거가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관계론적 관점 역시 하나님의 형상을 총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세 번째 관점은 기능론이다 (the functional view).
기능론에 의하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부여하신 기능, 특별히 피조물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기능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 세상을 다스리고 또 관리하는 책임을 부여 받았다. 바로 그 점에서 사람은 모든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독특성을 가진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에게 부여된 통치권의 성격을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한 통치권은 피조물을 착취하고 학대하고, 악용할 수 있는 권한이 아니다. 도리어 피조물을 잘 관리하고, 돌보고, 지키는 권한 즉 청지기적 통치권이다.
놀랍게도 인간에게 주신 통치권은 타락 이후에 마귀에게 넘어갔다. 마귀는 아담에게 주어졌던 통치권을 찬탈한 후 모든 인간을 노예로 삼고 지금도 착취와 학대와 폭압을 일삼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인간은 인간이 본래 부여 받았던 만물 통치 기능을 부분적으로 행사하고 있다. 그 실례가 바로 사람이 가축을 길들여 사육한다거나 반려동물들을 길들여서 사람에게 봉사하게 한다거나 하는 것들이다. 이 기능론적 관점 역시 성경적 근거가 분명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능론적 관점 역시 하나님의 형상을 총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성경적이고 총체적인 이해는 이 세가지 관점들을 통합한 관점 이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말은 사람이 영혼과 이성과 자유의지를 가지고, 진리와 사랑과 의와 같은 속성을 구유한 존재라는 말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 만물을 다스리는 기능을 부여 받는 존재라는 것을 뜻한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권위에 반역하여 범죄하고 타락한 후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일부 신학자들은 범죄와 타락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고려할 때, 하나님의 형상 자체가 멸절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은 심대하게 왜곡되었다. 그 결과 인간 본성의 모든 면들이 죄로 물들게 되었고, 참된 관계의 능력은 심각하게 파손되었으며, 만물에 대한 통치권은 마귀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요컨대 인간은 "폐위된 왕족" (deposed royalty)이 된 것이다.
결국 폐위된 왕족으로서 마귀와 사망에 노예가 되어 있는 모든 죄인은 자신의 죄를 자각하고,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하신 주님과 구주로 믿고 신뢰해야 한다. 오직 그때에야 죄인은 죄사함과 거듭남과 칭의와 영생과 하나님 자녀됨의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생의 본질과 목적에 대한 이미지들
지난 번 에세이부터 조직신학의 인간론 (doctrine of human beings)에 대한 묵상을 나누고 있다. 이번 주에는 인생의 본질과 목적에 대하여 숙고하고자 한다. 특별히 성경 66권 전체와 조직신학의 전 체계를 기반으로 인생의 본질과 목적에 대한 중요한 비유 (parable)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 인생의 본질과 목적은 다음과 같은 이미지 언어 (image languages)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인생이란 그리스도인의 인생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인 주님과 구주로 믿고 영접한 그리스도인에게 인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인생은 신학교이자 예배의 현장이다.
우리는 평생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도록 창조되었고, 구원받았다. 우리는 인생 전체의 과정을 통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워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온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신 목적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계시하시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 19, 롬 1:19-20). 드러나고 계시된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는 보고, 알아간다. 단순히 알아갈 뿐 아니라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체험하고, 즐거워하고, 찬양하고, 예배한다. 특별히 우리가 구원을 받은 이후 우리의 삶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아가고, 예배하고, 순종하는 과정으로서 특징 지워진다. 그러기에 우리 인생 자체는 하나님의 영광과 어떠하심을 알아가는 신학함의 과정이고, 예배의 현장이다. 인생이 신학교라는 이미지를 한 차원 더 진전시키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신학생이며, 신학자라는 결론에 이른다 (theologianhood of all believers).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는 과정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과정이다 (롬 8:29). 더 나아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갈수록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 몸을 산제사 (living sacrifices)로 드리는 참된 예배자 (true worshipers)가 되어간다 (롬 12:1-2). 결국 우리 삶 전체는 예배의 현장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예배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둘째, 인생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valley of the shadow of death) 이다.
인생의 어느 시점, 어느 공간에도 우리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을 감지한다. 그래서 주님이 함께 해주셔야 하며, 그래야만 인생으로 인하여 궁극적인 해악을 입지 않는다. 시편 23편에서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4절)이라고 노래한다.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코로나 팬데믹 같이 인생의 어떤 특정한 기간이 특별하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는 기간일 수 있지만, 더 넓게 보면 우리 인생 자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임을 깨닫게 된다. 그렇더라도 주님이 함께 하시고,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우리를 보호하시기에 우리는 인생을 통하여 해를 입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롬 8:28) 놀라운 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셋째, 인생은 실험실 (experimental lab) 이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재능과 개성을 실험적으로 알아가는 과정이다. 우리는 인생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어떠함을 배워간다. 우리 자신의 죄성과 연약성, 장점과 단점, 강점과 약점, 은사와 재능, 개성과 독특성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을 배워가는 신학교이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확인해가는 실험실이다. 우리의 인생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 깊이 알아가게 된다. 이 지식은 우리의 현세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우리 자신에 대한 바른 지식은 현세를 살아가는 동안 깊은 지혜와 통찰력의 원천이 된다. 동시에 영원한 새하늘과 새땅에서의 삶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왜냐하면 새하늘과 새땅에서도 우리는 각자의 재능과 개성을 따라 살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 인생은 유격훈련장 (ranger school) 이다.
인생은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을 강한 군사들, 영적인 전사들로 세워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매우 고되고 힘든 유격훈련과 같이, 인생은 다양한 고난과 시련들을 통해서 (질병, 인간관계의 실패, 사업의 실패, 경제적 파산, 이혼, 장애 등) 우리를 단련시키는 하나님의 유격훈련장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자녀로 부르셨지만 동시에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군사로, 병사로 부르셨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3-4). 영적인 싸움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강한 훈련을 견뎌내어야 한다. 바로 우리의 인생이 이 훈련의 현장인 것이다.
다섯째, 인생은 지뢰로 가득한 전쟁터이다.
우리의 인생은 단순히 유격훈련장일 뿐만 아니라, 실재적인 전쟁터 (battle field)이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전쟁터에서 거룩한 영적 전쟁을 수행한다.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 어둠의 권세를 이끄는 사단과의 끊임없는 전투를 수행한다 (엡 6:12-13). 또한 인생이라는 전쟁터는 온갖 유혹과 함정들이 난무하는 곳이다. 우상숭배, 간음, 살인, 도둑질, 거짓말, 탐심 등 강력한 유혹이 역사한다. 잘못 디디는 순간 폭발하게 되고, 생명까지도 위협을 받을 수 있는 지뢰들로 가득한 밭과 같다. 주기도문에서 주님은 "시험에 들게하지 마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맞다. 우리는 온갖 시험 즉 유혹에 직면하여 살아간다. 잠시만이라도 한눈을 팔면 즉시로 덫에 걸릴 수 있다. 우리는 이 지뢰로 가득한 전쟁터와 같은 인생을 지나가면서 더욱 더 근신하고,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행보해야 한다 (딛 2:11-14).
여섯째, 인생은 마라톤 경주 (marathon) 와 같다.
우리는 경기하는 자, 경주하는 자들이다.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딤후 2:5). 이 경주에서 승리하는 길은 오직 인내뿐이다. 참고 견디는 것뿐이다. 그리고 결코 포기하지 않아야 승리할 수 있다. 그렇다. 인생이라는 마라톤을 뛰다가 중단하거나 포기하면 그는 패자로 남을 수 밖에 없다. 진정한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일단 완주해야 한다.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견뎌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인생의 경주를 완주케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빌 1:6). 우리가 신실하신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과 동행하면 반드시 승리하게 된다.
일곱째, 인생은 선교현장 (mission field) 이다.
주님이 우리를 불러 당신의 자녀로, 제자로 삼으신 것은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벧전 2:9)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여,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인생 전체는 하나님의 덕을 선포하는 현장,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현장 (마 28:18-20),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현장 (행 1:8) 즉 선교의 현장이다. 이 비유를 한 차원 더 진전시키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이 선교의 현장임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속한 가정, 교회, 일터, 사회, 문화, 국가, 전세계가 선교의 현장이다. 우리가 유지하는 모든 인간관계의 현장 또한 복음 전도의 현장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선교사이다 (missionaryhood of all believers). 어떤 선교단체에 의해서 파송을 받아 풀타임으로 선교사역을 감당하는 전문선교사들 뿐만 아니라, 문자 그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누구도 예외 없이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에 의해 삶의 현장으로 파송된 선교사이다 (the sent ones).
아담의 상태와 부활인의 상태
지난 호에 이어서 조직신학 인간론의 중요 주제들을 묵상해 보고자 한다. 이번 주에 다룰 주제는 최초의 인간 (the first human being) 또는 본래의 인간 (original human being)인 아담의 상태와 장차 우리가 누리게 될 마지막 인간 (the last human being0 즉 부활인 (resurrected human being)의 상태를 비교해 보는 것이다.
창세기 1장 26-28절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최초의 사람을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고 선포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아담과 하와의 상태는 놀라운 상태였다. 특별히 타락하기 전 아담의 모습은 영광스러웠다. 그의 생각과 말과 행동과 삶 전체가 온전히 하나님을 드러내고, 반영하는 것이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을 정복하라, 만물을 다스리라는 하나님나라의 복을 받았다. 즉 아담이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 (vice-regent)로서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에덴동산에서 이루고 이어서 전 우주로 확장해 가라는 복과 위임을 받았다. 동시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벽했고, 아담과 하와의 관계도 완전했으며, 사람과 피조물의 관계도 온전했다. 즉 완전한 조화와 평화의 상태 즉 샬롬의 상태를 이루고 있었다. 에덴동산은 생명력이 충만한 땅이었고, 은혜와 축복으로 가득 찬 공간이었다. 죄와 허물이 들어오기 이전이었기에 하나님 안에서 기쁨과 자유를 누리는 놀라운 상태였다. 또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앞에서 바른 지성과 감성과도덕성을 가진 거룩한 존재였다.
그렇다고 해서 아담과 하와의 상태가 절대적인 완전 (absolute perfection)의 상태였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교회 역사 2천년 동안 다양한 신학자들이 매우 다른 답변들을 제시해 왔다. 필자는 아담과 하와의 원래 상태가 절대적인 완전의 상태라기 보다는 상대적 완전 (relative perfection)이라고 보는 견해에 동의한다. 그 이유는 아담과 하와가 절대적인 불변의 상태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임시적 (provisional)이고 가변적 (changeable/mutable)인 상태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자유의지를 오용함으로써 그들이 본래적으로 누리고 있었던 무죄상태 (the state of innocence0에서 타락할 가능성을 가진 존재였다.
결국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을 받고 그들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반역하여 범죄하고 타락하면서 에덴의 놀라운 복들을 모두 상실하게 되었다. 샬롬과 평화와 자유와 기쁨을 상실하게 되었고, 죄인을 생육, 번성케 하는 저주에 처하게 되었고, 에덴동산의 놀라운 풍요로움을 상실하고 그 땅으로부터 쫓겨나게 되었으며, 만물에 대한 통치권을 상실하게 되었고, 마귀의 종과 노예가 되었다. 자연만물과의 관계도 깨어졌으며, 만물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허무함에 굴복하게 되었다. 사망이 들어오고, 저주와 비참이 지배적인 분위기가 되었고, 영원한 사망의 선고아래서 절망적인 삶을 살게 되었다.
이런 저주와 비참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다시 한번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시려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그는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율법과 뜻을 완전히 성취하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자신을 대속제물로 드리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과 마귀와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하셨으며, 장사 된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개인의 주님과 구주로 믿고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죄사함, 거듭남/중생, 성령의 내주와 인치심,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교제, 칭의, 양자됨, 성화, 견인, 영화라는 구원의 복을 누리게 되었다.
놀라운 구원의 삶을 이 땅에서 살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순간 우리 영혼은 영화되어 낙원으로 들어가며 그곳에서 우리 몸의 부활을 기다리게 된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 몸이 부활하게 되는데 그 부활의 상태는 처음 창조된 아담의 상태보다 훨씬 더 영광스러운 상태이다.
첫째, 우리가 부활하면 우리 몸은 하늘에 속한 몸이 된다.
즉 영원을 입은 몸 (the body clothed with eternity)이 된다. 아담의 몸은 여전히 땅에 속한 몸이었다. 영원한 몸이 아니었다. 죽을 수 없는 몸, 썩을 수 없는 몸이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하게 되면 우리 몸은 더 이상 죽을 수 없는 몸, 썩을 수 없는 몸이 된다.
둘째, 우리가 부활하면 우리 몸은 시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게 된다.
아담의 몸은 여전히 시공간의 제한을 받는 몸이었다. 그러나 부활 후 우리의 몸은 시공간을 초월한 영원한 몸이 된다.
셋째, 아담과 하와는 자유를 누렸지만 범죄하여 타락할 수 있는 수 있는 상대적 자유만을 누리고 있었다.
부활 후 우리는 더 이상 죄를 선택할 수 없는, 타락할 수 없는 절대적 자유를 누리게 된다.
넷째, 부활 후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된다.
우리의 본질이 신성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신적 거룩과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
다섯째, 부활 후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통과 사귐을 누리게 된다.
피조물이 창조주와 누릴 수 있는 최대로 가까운 교제, 그리고 최대로 영광스러운 교통의 삶을 누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영생이다. 하나님을 온전히 누리고, 하나님 안에 있는 무한한 풍요로움을 우리는 향유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영광스러운 상태로 초청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지으시고, 타락을 허용하시고, 마침내 구원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 창조시의 아담의 상태도 너무나 놀라운 상태였지만, 타락과 구원을 통과하여 부활한 우리의 상태는 처음 아담의 상태보다 훨씬 더 진보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청교도 신학자 토마스 보스톤 (Thomas Boston, 1676-1732)은 그의 주저 [인간 본성의 4중상태] (Human Nature in Its Fourfold State)에서 아담과 하와의 상태를 무죄상태 (the state of innocence)라고 묘사하고, 부활인의 상태를 영원상태 (the state of eternity)라고 불렀다. 보스톤 역시 우리가 부활의 상태에서 누리는 영원한 인간의 상태가 무죄상태였던 아담과 하와의 상태보다 훨씬 더 진보한 상태임을 설득력 있게 논증한 바 있다.
우리는 이 진리를 굳게 붙들고, 주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하는 주의 자녀, 주의 제자들의 삶을 살아내야 할 것이다. 물론 그것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충만을 받아 주님과 동행함으로써만 가능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인간 본성의 4중상태
지난 호에 이어서 조직신학 인간론의 중요 주제들을 묵상해 보고자 한다. 지난 호에서는 최초의 인간 (the first human being) 또는 본래의 인간 (original human being)인 아담의 상태와 장차 우리가 누리게 될 마지막 인간 (the last human beings) 즉 부활인 (resurrected human being)의 상태를 비교해서 논의하였다. 이번 호에서는 지난 호의 논의를 한 차원 진전시켜 인간 본성의 4중상태에 대해서 묵상해 보고자 한다.
인간 본성의 4중 상태란 인간이 처음 창조된 이후부터 부활 때까지 거치는 상태를 4단계로 이해하는 교리적 관점이다. 그래서 처음 창조시의 인간을 "원래의 인간" (original human beings) 또는 "무죄 상태" (the state of innocence)로 칭한다. 원래 무죄 상태에 있던 인간이 범죄하여 타락의 상태에 갇히게 된 것을 "타락 상태" (the state of fallenness) 또는 "자연적 인간" (natural human beings) 라고 부른다. 이어서 죄인이 회개하고 믿음으로 거듭나고 중생한 상태에 이르렀을 때를 "중생된 인간" (regenerated/reborn human beings) 또는 "은혜의 상태" (the state of grace)라고 칭한다. 마지막 주님 재림시 부활하여 영화된 상태의 인간을 "영광의 상태" (the state of glory) 또는 "부활인" (resurrected human beings)이라고 칭한다.
각각의 상태에서 인간이 누리는 특권과 인간이 경험하는 의무, 책임, 비참의 모습은 매우 다양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첫째, 원인의 상태 즉 무죄의 상태에 있었던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는 선을 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상태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죄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도 지닌 상태였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죄를 지을 수 있는 (able to sin, posse peccare) 상태에 있을 뿐 아니라,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able to not sin, posse non peccare) 상태에 있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복을 누리고, 하나님과의 행복한 인격적 교제를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부여 받았다. 동시에 그들은 에덴동산에 세워진 하나님나라의 헌법 즉 선악과 금명을 지키고 순종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을 가진 존재였다.
둘째,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을 받고 그들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반역하여 범죄하고 타락하면서 에덴의 놀라운 복들을 모두 상실하게 되었다.
하나님나라의 헌법을 어기는 반역죄를 범한 것이다. 그 결과 에덴동산의 샬롬과 평화와 자유와 기쁨을 상실하게 되었고, 죄인을 생육, 번성케하는 저주에 처하게 되었으며, 에덴동산의 놀라운 풍요로움을 상실하고 그 땅으로부터 쫓겨나게 되었고, 만물에 대한 통치권을 상실하게 되었고, 영적으로 죽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마귀의 종과 노예가 되었다.
영적으로 죽어 마귀의 종과 노예가 된 상태에 처한 모든 자연인 즉 타락인들은 그 영혼과 육체를 포함하는 본성 전체가 죄로 부패되고, 오염되고, 타락되었다. 그 결과 선을 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상실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죄를 범할 수 있는" (able to sin, posse peccare) 상태이면서 동시에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없는" (not able to not sin, non posse non peccare)의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다. "죄을 범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란 결국 마르틴 루터가 말한 대로 "의지의 속박" (the bondage of the will, servo arbitrio)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다. 죄의 노예, 불의의 종이 되어서, 자신의 욕망을 따라, 마귀가 이끄는 대로 종노릇 할 수밖에 없는 처참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셋째, 이런 저주와 비참에서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해방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거룩한 보혈과 절대적인 의만을 신뢰하는 것이다.
죄인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과 구주로 받아들일 때 그의 영혼은 거듭나고 중생한다. 이 거듭남과 중생의 순간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 새사람, 하나님의 자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 성령의 전으로 영단번의 변화를 경험한다. 이 거듭남과 중생의 순간에 우리의 노예의지는 다시 회복되어 자유를 되찾는다. 그래서 중생인은 "죄를 지을 수 있는" (able to sin, posse peccare) 상태이면서 동시에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able to not sin, posse non peccare) 상태로 회복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자유의지와 죄와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는 원래 아담의 상태로 회복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거듭난 중생인의 상태가 아담의 원인 상태와 똑같아 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타락 전 아담에게는 죄가 없었지만, 우리 중생인들에게는 죄가 여전히 잔존한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은 거듭나지만, 우리의 몸 안에는 여전히 죄로 인한 저주와 부패성이 잔존한다. 죄에 끌려가는 경향성이 여전히 존재한다. 즉 아담에게는 없었던 죄와 죄성이 우리에게는 여전히 잔존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다른 점은 아담에게는 성령의 영구적인 내주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반면에 거듭나고 중생한 우리에게는 성령의 영구적인 내주가 있다. 물론 아담 안에 성령이 내주했느냐 여부에 대해서는 여전히 신학자들 간에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필자는 중생인에게 성령님이 영구적으로 내주하시는 점에 있어서, 중생인은 아담보다 더 진일보한 차원으로 진입했다고 본다.
물론 중생인은 여전히 잔존하는 죄와 그 죄를 끌려가는 죄 된 본성과 싸워야 하는 상황이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은 우리에게 싸워 이길 힘을 주신다. 이 영적 싸움에서 중생인은 때로는 승리를 때로는 패배를 경험하면서 영적으로 자라고 성숙해 간다.
넷째, 놀라운 구원의 삶을 이 땅에서 살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순간 우리 영혼은 영화되어 낙원으로 들어가며 그곳에서 우리 몸의 부활을 기다리게 된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 몸이 부활하게 되는데 그 부활의 상태는 처음 창조된 아담의 상태보다 훨씬 더 영광스러운 상태이다.
부활의 상태, 영광의 상태에서 우리는 선에 대한 자유의지를 완전히 회복한다. 그 결과 우리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able to not sin, posse non peccare) 상태로, 더 나아가서 "죄를 지을 수 없는" (unable to sin, non posse peccare) 상태로 진입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원인 아담과 하와는 범죄하여 타락할 수 있는 상대적 자유만을 누리고 있었지만, 부활 후 우리는 더 이상 죄를 선택할 수 없는, 범죄할 수 없는 절대적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부활한 우리에게는 더 이상 죄가 잔존하지 못한다. 죄가 완전히 사라져 버림으로, 우리는 죄의 현존으로부터 완전한 해방을 누리게 된다. 그리고 여전히 죄의 오염과 부패를 가지고 있었던 몸이 부활됨으로 죄의 오염과 부패로부터도 완전한 해방을 누리게 된다. 이렇게 영광스러운 부활인의 상태가 사실상 하나님이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위하여 창세 전부터 예비하신 지복의 상태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영광스러운 상태로 데려가시기 위해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타락을 허용하시고, 마침내 구원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 창조시의 아담의 상태도 너무나 놀라운 상태였지만, 타락과 구원을 통과하여 부활한 우리의 상태는 처음 아담의 상태보다 훨씬 더 진보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진리를 굳게 붙들고, 주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하는 주의 자녀, 주의 제자들의 삶을 살아내야 할 것이다. 물론 그것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충만을 받아 주님과 동행함으로써만 가능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인간본성의 전적 타락
우리는 계속해서 조직신학 분야의 인간론을 탐구하고 있다. 기독교 인간론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야 할 주제는 인간이 본래 하나님의 형상 (imago Dei)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진리이다. 이 진리는 인간의 본질적인 존엄 (human dignity), 생명의 신성함 (sanctity of human life), 인간의 영광스러운 지위 (glorious status of human beings)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진리와 함께 같은 무게로 강조되어야 할 진리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와 타락 이후 인간이 처하게 된 비참한 상태에 대한 진리이다. 이 사실에 대해서 고전적인 신학에서는 "인간 본성의 전적 타락"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여기서 "타락"이란 "부패"를 의미한다. 따라서 영어로는 타락과 부패를 뜻하는 "depravity"와 "corruption" 그리고 오염을 뜻하는 "contamination" 이라는 용어를 함께 사용해 왔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일반적인 생식방법에 의해서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인간의 본성은 전적으로 타락된 상태 또는 부패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모든 자연인은 모태에서 잉태될 때부터 죄 가운데 잉태되며, 영적으로 죽은 상태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인간의 영혼과 육체 등을 포함하는 본성 전체가 죄로 물들게 되었고, 오염되게 되었고, 죄의 저주에 처하게 되었다. 이 사실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말씀함으로써 모든 인간의 영혼이 죽은 채로 이 땅에 태어난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인간의 본성이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했다는 말을 좀 더 상세하게 살펴 보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모든 자연인의 영혼은 죽어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인간의 몸, 육신도 죄의 저주와 오염으로 인해 죄의 노예가 되어 죄의 병기로 사용된다. 또한 생물학적인 생명이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육신은 연약하고, 병들고, 늙어지고, 끝내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서 인간의 영혼과 몸이 결합할 때 생기는 인간의 마음도 부패하게 되었다. 예레미야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렘 17:9)이라고 선포했다. 인간의 마음이 이 세상 모든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심히 부패했다는 선언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님은 인간의 속 즉 마음에서 온갖 더러운 것들이 나온다고 설파하셨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마 15:18-20).
인간 마음의 부패는 인간의 양심의 부패와 연결된다. 양심은 하나님이 인간 마음에 심어 놓으신 도덕적 감각과 의식과 판단의 기능을 담당한다. 양심이 죄로 인하여 부패하게 됨으로 인간은 선악을 분별할 수 없는 삶, 즉 가치가 역전된 상태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그 결과 선을 악이라고 하고, 악을 선이라고 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이다. 로마서 1장 32절은 이런 상태의 인간에 대하여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고 고발하고 있다.
죄는 인간의 지성에도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것을 영어로는 "noetic effect of sin" 이라고 표현한다. 죄로 인하여 인간의 지성은 어두워졌고, 구부러졌고, 왜곡되었다. 타락 전 아담의 지성은 밝고, 빛났고, 포괄적이고, 정밀하고, 예리했지만, 죄는 인간의 지성을 심각하게 훼손했다. 그 결과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 전혀 알 수 없는 영적인 무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참과 진리는 거부한 채, 거짓을 추구하고, 거짓을 믿고, 거짓을 따라 살아가는 비참한 존재가 되었다.
죄는 인간의 감성에도 엄청난 해악을 끼쳤다. 인간의 감성은 균형감각을 잃었고, 방향을 상실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분노 조절에 실패하게 되었고, 사랑해야 할 것을 미워하고, 미워해야 할 것을 사랑하는 감정적 도착증에 빠지게 되었다. 또한 아름다운 것을 추하다고 하고, 추한 것을 아름답다고 하는 감성적 가치전도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감사와 기쁨 보다는 원망, 짜증, 불평이 인간의 감성적 기본 자세가 되었다. 심한 경우 도박과 포르노와 마약 같은 것들에 대하여 극단적인 중독증세를 보이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죄는 인간의 의지에도 심각한 재난을 가져왔다. 인간의 의지는 역방향으로 질주한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선을 선택하고, 행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상실하게 되었다. 의지는 죄에 속박되어, 죄에 사로잡힌 욕망을 따라 악을 선택하고 행하는 죄의 노예가 되었다. 그 결과 타락인이 계획하고, 결심하고, 행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 앞에서는 악한 것으로 정죄 받게 되었다.
죄는 인간의 관계성에도 막대한 해악을 끼쳤다.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격려하며 살아가야 할 인간이 서로 미워하고, 판단하고, 미워하고, 죽이는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이다. 서로를 높이며 서로의 유익을 구하는 삶이 아니라, 서로를 짓밟으며, 서로를 이기적으로 악용하고 착취하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인간관계는 적자생존의 원리에 기초한 극도의 경쟁관계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관계로 타락되게 되었다.
요컨대 하나님을 대항하여 반역하고 범죄한 인간은 전적인 타락의 상태에서 영원한 멸망을 향하여 질주하고 있는 비참한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오해를 정리하고 넘어가야 한다. 그것은 인간본성의 전적타락이라는 진리가 인간은 통째로 악의 덩어리라는 것을 뜻하는가라는 문제와 연결된다.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는 선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말인가? 교회 역사 동안 일부의 신학자들은 인간에게 선한 것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인간의 본성이 전적으로 타락되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은 훼손된 채로 잔존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필자는 이 견해가 성경이 가르치는 바라고 믿는다.
인간 본성의 모든 부분은 죄로 인하여 심각하게 훼손되고 오염되었기에 인간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결코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루어낼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훼손되고 왜곡된 하나님의 형상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 그러하기에 수직적인 또는 영적인 의미가 아닌 수평적인 차원에서 인간은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다. 물론 이 "선한 일" 조차도 영적으로 볼 때에는"더러운 옷" (사 64:6)과 같은 것임은 분명하다.
인간 본성의 모든 부분은 죄로 오염되고 훼손되어 있다. 그의 영혼은 죽어 있으며, 하나님의 원수로서 그는 날마다 악하고 거짓된 것을 의욕하고, 선택하고, 행한다. 인간이 생물학적인 죽음을 경험하는 날 그는 영원한 멸망으로 던져지게 될 것이다. 이 비참과 저주로부터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 죄값을 대신 지불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다. 장사된지 사흘만에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를 개인적인 주님과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모든 자마다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