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망디의 에트르타 절벽은 대서양 연안의 도시인 르 아브르와 디에프 사이에 있는 영국해협에 갑자기 쑥 올라와 커다란 벽처럼 우뚝 서 있습니다.
파리에서 자동차로 2시간 거리인 에트르타 해변에 있는 이 절벽은 프랑스인들은 ‘코끼리 절벽’이라고 부르며 절벽 끝에 있는 아치형의 문처럼 생긴 커다란 틈을 ‘빠진 이빨’이라고 부릅니다. 바다 속에 있는 바위 사이에 파도가 구멍을 내어 마치 코끼리가 바닷물에 코를 대고 물을 빨아 먹는 듯한 모습이 독특합니다.
* 에트르타와 노르망디 반도(왼편)
이렇게 자연이 빚어낸 아름다운 광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말문이 막힐 정도입니다. 미국의 그랜드캐니언 계곡과 호주의 포트 캠벨이 떠오르는 절경입니다. 이곳 노르망디 해변의 거칠면서도 광활한 풍경과 끼륵대는 갈매기 울음소리가 합쳐지면서 천국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에트르타의 절벽은 19세기 프랑스의 낭만주의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 풍경화가 외젠 부댕, 사실주의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가 화폭에 담기도 했습니다. 1883년 2월 인산주의 화가 클로드 모네도 이곳 풍경 20점의 그림을 남겼습니다.
그는 이젤을 들고 절벽으로 올라가 매서운 겨울바람과 짙은 안개에 때맞춰 변하는 조수와 싸우면서 대기와 빛의 변화를 스케치했습니다. 그의 걸작인 <절벽, 에트르타, 석양>은 이런 노고 끝에 탄생했습니다.
모네는 빛에 따라 변하는 에트르타 해변의 파도와 구름, 절벽의 갈라진 틈새 하나까지도 화폭에 세밀하게 옮겼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빛은 곧 색채’라는 자신의 신념을 고스란히 표현했습니다.
에트르타를 자주 여행한 모네는 이곳에 아예 집을 짓고 살았던 작가 모파상과 어울리기도 했습니다. 해안가 가운데 서 있으면 발밑에 퇴적작용으로 생긴 오팔색 정동석이 카페트처럼 깔려 있습니다.
해변 옆의 높은 절벽 위에는 연두색 잔디가 침대보처럼 부드럽게 덮여 있습니다. 아마 겨울바람이 휘몰아치는 2월에 모네는 왔습니다. 걷기도 벅찬 겨울 날씨에도 그림을 그리려고 애썼을 모네의 예술혼이 그려집니다.
[ 여자의 일생의 저자, 모파상 ]
기 드 모파상은 태어난 곳을 잃은 사람입니다. 출생지에 대해 정설이 없습니다. 통설은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미로메닐 성관이라고 하나 일설은 거기서 가까운 어항인 페캉이라고도 합니다.
미로메닐 성관에 가보면 모파상은 틀림없이 이 집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관은 120 헥타르나 되는 넓은 숲으로 둘러싸였고 그 숲의 입구에 모파상의 석상(石像)이 서서 맞이합니다. 거기 <1850년 8월 5일 미로메닐 성관에서 태어난 기 드 모파상에게>라고 쓰여있어 그의 생가임을 자처합니다.
* 모파상
성관으로 들어가는 길 양쪽에는 노르망디 지방의 명물인 너도밤나무의 거수(巨樹)들이 울창합니다. 성관은 16세기 때의 3층짜리 커다란 벽돌집입니다. 본시 루이 16세 때의 법상(法相)이던 미로메닐 후작의 거처였는데 현재 큰 샴페인 공장 주인인 드 보그라는 백작이 살면서 일반에게 문을 열어 구경을 시켜주고 있습니다.
안내인은 뾰족탑 밑의 2층 방을 가리키며 저기가 모파상이 태어난 방이라고 설명합니다. 전시실로 꾸민 아래층만 공개할 뿐 위층은 사실(私室)들이라고 출입을 금지시켜 그 방까지 올라가 볼 수는 없습니다. 숲 속에는 모파상이 약식 세례를 받았다는 조그만 예배당도 있습니다.
* 모파상의 생가
역시 귀족 집안인 모파상 가(家)의 대궐답다 했더니 실은 양친이 이 집을 잠시 빌어 살고 있는 사이에 모파상이 태어났다고 합니다. 모파상이 몇 살 때까지 여기서 컸느냐에 대해서는 2세 때쯤까지라고만 전할 뿐 분명치 않습니다. 자기 집도 아닌 남의 집에서 첫 돌 정도 지냈다는 것만 가지고, 그나마도 아주 확증이 없는 채, 이 성관은 사진 몇 점 갖다 놓고 모파상의 기념관 행세를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모파상의 고향은 노르망디 지방입니다. 모파상은 프랑스 서북부의 영불해협에 면한 노르망디 지방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고, 그후 파리로 나가고 나서도 고향과의 인연을 끊지 못해 에트르타에는 종생(終生)의 집이 있었습니다.
그의 많은 작품들이 노르망디의 어부와 농부가 주인공이지만 특히 <여자의 일생>은 이 일대가 전체의 무대장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자의 일생>은 한 여인의 슬픈 운명을 그리면서 그 반주 효과로 노르망디의 자연 묘사가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눈으로 본 것 아니면 쓰지 않던 모파상으로서는 소설의 주인공 잔느가 “땅에 씨를 뿌리듯 추억을 뿌리고 다니던 곳”은 바로 작가 자신의 기억이 괸 고향 산천이었습니다.
* 모파상이 태어나고 자란 노르망디 지방
잔느가 일생의 행복과 불행을 데리고 살았던 소설 속의 레 푀플 성관은 그 모델에 대해 또한 설이 분분합니다. 소설에 성관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 에투방은 존재하지 않는 거리입니다. 모파상은 이 소설에서 실재의 지명과 가공의 지명을 섞어 썼습니다.
르네 뒤메닐이라는 학자의 저서는 페캉에서 남쪽으로 내륙 쪽에 있는 그랭빌 이모빌의 성관을 본땄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랭빌 이모빌은 고데르빌에서 앙제르빌 바이욀쪽으로 약 3km 거리입니다. 하도 동네가 작아 지도에는 물론 근처까지 가도 도로 표지판에조차 안 나타납니다.
성관은 동네로 접어들어서는 길가에 있습니다. 철책 문 안으로 정원너머 멀리 건물이 하얗습니다 모파상은 이 성관에 4세 때부터 6세 때가지 살았고 동생이 이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 <여자의 일생>의 무대, 왼쪽부터 에트르타, 이포르, 페캉 등이 보입니다
그랭빌 이모빌 성관이 레 푀플이기에는 무엇보다도 바다에서 멀다는 것이 약점입니다. 잔느의집은 바닷가의 언덕 위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건물만 딴 데서 빌어다가 바다 가까이로 옮겨 놓았을 수도 있습니다.
레 푀플에 대한 다른 일설로는 모파상이 10세 때부터 13세 때까지 살던 에트르타의 레 베르기라는 집의 추억과 그밖에 부근 성관들의 이미지가 섞인 것이라고도 합니다. 레 베르기는 모파상의 어머니가 아버지와 별거한 후, 1860년부터 아들들을 데리고 살던 집입니다.
에트르타의 베르됭 가(街)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져 소설과 견주어 볼 수가 없습니다. 모파상은 이 집을 떠난 후에도 1883년까지 휴가 때면 찾아왔습니다. <여자의 일생>은 파리와 에트르타를 왕래하면서 완성한 것인데, 에트르타에서 쓴 곳이 이 집이었습니다.
* 잔느가 지지리 속 썩이던 남편 쥴리앙과 결혼했다는 교회
페캉에서 에트르타까지의 17km는 바닷가가 온통 깎아지른 백악(白堊)의 단애요, 그 위로는 비탈진 목초지입니다. 그 중도에 이포르가 있습니다. 숲이 우거진 골짜기 끝의 이 내포(內浦)는 소설에 이름이 자주 나옵니다. 잔이 결혼식을 올리는 곳도 이 마을의 교회입니다.
이포르에서 잠시 모레스크라는 이름의 집에 들릅니다. 집 앞에 <모파상이 1883년 여기 머물며 그의 여러 소설을 썼다>는 명판이 걸려 있습니다. 러시아 귀족이 애인이던 파리의 한 무희와 살고 있어서 모파상이 이 집에 와서 여름을 지냈습니다.
* 모파상이 글을 썼던 이포르의 집
이포르에서 에트르타를 향해 언덕길을 조금 돌아나가다 저만큼 바다가 다시 트이기 시작하는 곳에서 잠깐 머무니 일대는 초원입니다. 가운데에 쓰레기장이 들어서서 갈매기들이 한 떼 날아와서 쓰레기를 뒤지다가 차소리를 듣고 끼륵끼륵 달아납니다.
이 부근에 소설에 등장하는 레 프플리에라는 이름의 성관이 실재했는데, 1900년께에 허물어져 버렸다고 합니다. 지금은 터도 없고 갖다 대볼 나무 하나 남은 것이 없습니다. 다만 바다, "부딪치는 물결소리에 잔느의 마음도 출렁거렸다"는 바다, 그리고 절벽, 남편 쥴리앙이 하녀와 밀통하는 현장을 목격하고 정신없이 달려 나와 자살을 생각했던 해안의 절벽이 곁에 있습니다.
* 잔느가 자살을 생각했던 절벽
여기서 1km쯤 더 나가면 보코트, 별장 같은 집들이 드문드문한 포구입니다. 손바닥만한 사장(沙場)을 끼고 양쪽으로 문기둥처럼 높은 절벽이 서 있습니다. 쥴리앙이 푸르빌 백작 부인과 목동의 이동식 오막살이에 숨어 밀회하는 것을 백작이 보고 오막살이째 굴려 떨어뜨린 곳에 절벽이 서 있습니다.
보코트를 지나면 에트르타입니다. 에트르타는 양쪽 만두(灣頭) 끝에 선, 아몽과 아발의 두 절벽이 절경으로 유명합니다. 모파상이 소설에서 "물 속에 코를 처박고 있는 거상(巨象)의 모습을 한 바위"라고 한 단애입니다. 쿠르베, 모네 등의 화가들이 그림으로 명작을 남긴 단애이기도 합니다.
* 물 속에 코를 처박고 있는 큰 코끼리 모습의 그 유명한 절벽
<여자의 일생>은 잔느가 결혼 전에 쥘리앙과 함께 이포르에서 배를 타고 에트르타까지 선유(船遊)하는 장면의 묘사가 절창(絶唱)입니다. 그 바다에 지금은 해수욕객들의 보트가 떠 있습니다.
에트르타는 <여자의 일생> 외에도 <아름다운 에르네스틴>, <미스 하리에트> 등의 작품에도 등장하고 <에트르타의 영국인>, <손> 등은 여기가 주무대로 되어 있습니다.
<여자의 일생>에서 잔느가 레 푀플 성관을 떠나 외로운 여생을 늙는 곳이 고데르빌 부근의 바트빌입니다. 그러나 고데르빌에 가서 바트빌을 물었자 헛 일입니다. 이것은 가공의 지명이기 때문입니다.
* 파리 몽소 공원의 모파상 기념상
잔느의 남편 쥘리앙이 정을 통하는 푸르빌 백작 부인의 성관 <라 브리에트>는 있습니다. 실제의 앙제르빌 바이욀 성관입니다. 그랭빌 이모빌 성관에서 5km 가량 나가면 1543년에 세운 이 르네상스식의 성관이 나옵니다.
에트르타는 모파상의 마지막 휴식처이기도 했습니다. 모파상은 <여자의 일생>이 발표되던 해인 1883년, 지금은 기 드 모파상 가(家)라고 불리는 한길가에 <라 기예트>라는 옥호의 집을 새로 지어 그가 죽기 전 해인 1892년까지 10년 동안 매년 여름과 주말이면 파리에서 이곳을 찾아와 쉬곤 했습니다.
* 모파상의 집 <라 기예트>
그의 첫 작품집 <라 메종 탈리에>의 성공이 마련해 준 집이었습니다. 넓은 뜰이 화초로 가득 덮힌 이 집은 미첼이라는 노부인이 20여 년 전에 사들여 모파상을 찾아 심심치 않게 안을 기웃거리는 사람들에게 상냥하게 웃으며 문을 열어주는 재미로 살고 있습니다.
파리 시내의 팟시 지구, 발자크 기념관의 이웃인 베르통 가(家) 17번지는 모파상이 광사(狂死)한 브랑슈 의사의 병원 자리입니다. 지금은 터키 대사관이 들어 있어 실성한 대작가의 안타까운 변용(變容)이 그려지지 않습니다.
* 파리의 몽파르나스 공동묘지의 모파상 무덤
[ 모파상과 <여자의 일생) ]
기 드 모파상(1850~1893)은 에밀 졸라와 함께 프랑스의 자연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입니다. 그의 문체는 정확, 명석, 정밀했습니다.
작가생활 불과 10년 동안에 6편의 장편소설, 약 3백 편의 중,단편 그리고 3권의 기행문, 1권의 시집과 희곡집을 썼습니다. 단편에 특히 뛰어났지만 장편 <여자의 일생>은 톨스토이가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이래 프랑스 소설 중 최고의 걸작”이라고 경탄한 작품입니다.
불행한 결혼으로 남편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이어 아들한테까지 배신을 당한 뒤 손녀딸에게 모든 애정을 쏟으며 쓸쓸히 늙어가는 한 여인의 한 많은 일생을 그린 이 소설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습니다.
“인생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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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재밌는 글 잘 봤습니다..! 보고픈 친구의 모습을 모임에서도 보여 주삼 ^^
송대감! 오랫만이네요. 잘 지내시지요?
제가 금년 들어와 책 쓰는 일 때문에 조금 바빠서...
금년말에 상권이 나올 예정이고 내년 상반기에 하권이 나올 것
같네요. 그러고나면 조금 여유가 생겨 얼굴을 내밀 것 같은 생각이...
건투를 빕니다.
아, 그렇군여..좋은 성과 기대합니다!
이 책 집필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거의 20년 전, 블라디보스톡에서
쓰기 시작한 <자녀들에게 들려주는 인문학 이야기>가 될 것 같네요. 이후
광주에서 근무하면서 틈틈히 용두열 홈피에 올린 영화이야기들을 덧붙이면
서...
다행히 출판사에서 상업성이 떨어지는 인문학이야기 출판을 혼쾌히 받아들이면서
성사가 됐습니다. 역사책과 영화에 빠져 살아온 제 반생이 이 글에 녹아있다는 것을
혹시 출판사에서 높이 샀는지는 모르겠지만...ㅎㅎㅎ
유익하면서도 재미있는 글의 마무리를 향해 오늘도 자판을 뚜둘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