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3번째 편지 - 홀인원
추석 연휴 어떻게 보내셨나요? 저는 연휴 기간 동안 뜻하지 않은 좋은 일이 있었습니다. 지난 9월 30일 홀인원을 하였습니다. 그다음 날 10월 1일이 제 생일이니 생일 선물을 받은 셈입니다. 그리고 제 생일에 SNS로 축하를 해 주신 분들께 월요편지를 빌어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홀인원은 골프 용어입니다. 파3 짜리 숏홀에서 한 번에 골프공을 쳐서 홀컵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아마추어 골퍼의 경우 홀인원 확률은 12,000분의 1이고, 프로골퍼 또한 3,500분의 1이라고 하니 매우 드문 일입니다.
저는 1986년 골프를 시작하여 37년 만에 처음 홀인원을 하였습니다. 자랑하려고 월요편지를 쓰는 것은 아닙니다. 주위에서 홀인원을 하였다고 할 때 홀인원을 하면 어떤 느낌일지 늘 궁금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홀인원을 하고 나니 제 자신은 그저 담담했습니다. 주위에서 축하해 주었지만 그렇게 뛸 듯이 기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마음속을 들여다보니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 번째 든 생각은 평범하게 지나갈 것이 분명하였던 2023년 9월 30일이 제 인생에 특별한 날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특별한 날이 몇 개나 될까요? 우리 모두에게 첫 번째 특별한 날은 태어난 날입니다. 우리 모두 생일을 챙겨 축하해 줍니다. 두 번째는 결혼식 날입니다. 남자들은 때론 결혼식 날을 기억하지 못해 아내에게 야단맞기도 하지만 여전히 특별한 날입니다.
세 번째는 배우자의 생일일 것입니다. 그날은 결혼하기 전에는 전혀 특별한 날이 아니었는데 결혼한 후에는 특별한 날이 되었고 이날 역시 잊어버리면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이날 말고 어떤 날이 특별한 날이 될까요? 특별한 날이 많은 인생이 풍성한 인생입니다. 또 그런 날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사람들은 인생을 멋지게 사는 사람입니다.
배우자와 첫 키스한 날, 첫 월급을 받은 날, 큰아이가 첫걸음을 뗀 날, 골프 머리 얹은 날, 손자가 태어난 날 등 무척이나 많을 것입니다.
국가로 보면 국경일이 이에 해당합니다. 국경일은 국가적으로 기억해야 하는 경사스러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법적으로 지정한 날입니다. 우리나라의 5대 국경일은 3·1절, 광복절, 개천절, 한글날, 제헌절입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 가, 국, 천하 순으로 단위가 커집니다. 같은 식으로 경사스런 날을 이름하면 <국경일 國慶日> 앞에 <신경일 身慶日>, <가경일 家慶日>이 있고, 국경일 다음에 <천하경일 天下慶日>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인생에 경사스런 날, 신경일은 몇 개나 될까요? 또 우리 집안에 경사스런 날 가경일은 무엇이 될까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이런 일에 너무 등한하였던 것 같습니다. 인생 살이가 별것 아닌데 그 인생을 살면서 경사스러웠던 날을 특별한 날로 기억하고 자신만의 세레모니를 한다면 그 또한 행복한 일이 될 것입니다.
집안에도 특별한 날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족 모두가 그날을 기억하고 기념한다면 그 가정은 단란한 가정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회사의 경사스런 날과 국가의 경사스런 날은 기억하고 기념하지만 정작 자신과 가정의 경사스런 날은 등한히 하고 살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 9월 30일을 저의 개인적 경축일, 身慶日로 삼으려 합니다.
두 번째 든 생각은 홀인원을 하고 나니 지난 몇 개월이 화이트로 지운 듯이 사라지고 제 인생이 깨끗하게 새 출발 하는 느낌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홀인원은 지난 몇 개월의 인생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저 운이 좋아 제가 친공이 홀 컵에 들어간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홀인원은 지난 몇 개월을 삼켜 버렸습니다.
홀인원을 하고 몇 홀을 걸어가면서 지난 몇 개월간 답답하였던 모든 일들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것 같은 신기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니 이런 일이 제 인생에 여러 번 있었습니다. 서울대학교에 합격한 날, 고등학교 3년간의 그 힘들었던 기억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사법시험에 합격한 날, 고시 공부하던 몇 년이 블랙홀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결혼한 날, 몇 년의 총각 시절은 아련한 추억이 되었습니다. 검찰에서 퇴임하던 날, 검찰 생활 30년이 아침 햇살에 사라져 버리는 물안개처럼 기억의 뒷편에 자리 잡아 버렸습니다.
인생의 모든 날은 같은 무게와 같은 크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어떤 날은 며칠을 빨아 당기기도 하고, 어떤 날은 몇 달, 아니 몇 년을 흡수해 버리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저에게 지난 몇 개월은 그다지 신나는 나날들은 아니었습니다. 삶의 많은 면에서 잘 풀리지 않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것들은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홀인원을 하고 나니 제 마음에서 그것들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또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홀인원이 모든 것을 빨아당겨 버린 것입니다. 홀인원을 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홀인원 한 사람의 기운을 받아 보자는 말을 하곤 합니다. 제 생각에는 홀인원이 좋은 기운을 만들어 내기보다는 홀인원이 쓸데없는 고민거리를 일거에 사라지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9월 29일과 10월 1일은 똑같은 24시간의 하루입니다. 그러나 홀인원을 하기 전날인 9월 29일과 홀인원을 한 다음날인 10월 1일은 제 마음속에서는 전혀 다른 날입니다.
9월 29일은 잡다한 고민으로 머리가 터져 나가던 날이라면 10월 1일은 그 많던 고민이 사라져 버려 머리가 텅 빈 날입니다.
제 삶은 이제부터 제가 할 탓인 것 같습니다. 텅 빈 머리에 좋은 생각, 멋진 생각을 넣으면 행복한 인생이 되지만, 지난 몇 개월처럼 잡다한 생각, 쓸데없는 생각을 넣으면 홀인원으로 잡은 기회를 날리게 될 것입니다.
제 홀인원이 여러분에게 좋은 기운을 전해 드리기를 바랍니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23.10.4. 조근호 드림
<월요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