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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케산을 내려와서 금석성(金石城 가네이시)를 둘러보면서 성터 안에 있는 덕헤옹주와 대마도주와 결혼한 결혼봉축비를 둘러보았다. 가네이시 성터는 대마도 번주(藩主)인 소가(宗家) 가문의 성이다. 가네이시 성터 뒤에는 만송원(萬松院)이 있는데 소씨 가문의 무덤들이 있는 곳이다. 반쇼인(萬松院).... 대마도주 소(宗)씨의 사당(인터넷)
대마도는 소씨(한자로 宗)에 의해서 다스려 졌는데 대마도는 일본의 영향력 아래 있으면서 일본과 한국의 중간자의 역할을 하면서 지내왔으나 임진왜란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이후 실권을 장악한 도꾸가와 이에야스에 의해서 대마도 20대 당주인 소 요시토시(일본어: 宗義智, 1568년 ~ 1615년 1월 31일)를 대마도의 초대 번주로 임명하였다. *번주(藩主)란 제후를 의미하고 번은 제후가 다스리는 땅이다.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의 사위로 임진왜란에 무장으로 참여하여 혁혁한 무공을 세웠으나 본래는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였으나 이쩔 수 없이 임진왜란에 참여하였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도꾸가와 이에야스와(동군)와 이시다 미츠나리(서군)의 전투에도 참여하여 자신의 장인이 속한 서군에 참전하여 서군이 패배하자 자신의 장인인 고니시 유끼나가를 비롯한 장군들이 참수를 당했지만 도꾸가와 이에야스는 소 요시토시를 살려주고 영지도 몰수하지 않게 되는데 이는 조선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 때문이었다. 소 요시토시는 히데요시의 명령이었던 정명가도(征明假道), 명을 치고자 하니 길을 빌려달라)라는 국서를 조선에 전달하라는 명령을 받고 입장이 곤란하여 가도입명(假途入明, 명으로 가는 길을 주선해 달라)이라고 국서를 변조하여 전했지만 전쟁을 막지는 못했고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 도꾸가와 이에야스가 조선에 보내는 국서와, 조건이 일본에게 보내는 국서를 변조하면서 상대국의 입맛에 맞게 변조하여 결국 양국이 국교를 수교하도록 하는데 공을 세우게 되고 그 공으로 대마도는 조선과 일본의 교역에 대해서 독점권을 가지게 된다. 소 요시토시(宗義智)
금석성 터 안에 있는 덕혜옹주 결혼 기념비는 고종황제와 귀인양씨 사이에 태어난 고명딸로 일본의 정략결혼 정책에 의해서 대마도 번주(藩主) 가문(家門)의 당주(堂主)인 백작 소 다케유키와 1931년 정략결혼을 한 것을 기념하는 기념비이다.
덕혜옹주는 소 다케유키와의 사이에 딸 소 마사에(정혜)를 낳았으나 우울증 등 정신병 등으로 결혼생활이 불가능하여 1955년 이혼하여 그 후 우여곡절 끝에 한국으로 귀국하여 1989년 76세로 창덕궁 수강재에서 별세를 하여 남양주 금곡의 홍유능에 묻혔다. 금석성터...안으로 들어가면 결혼봉축비가 있다는 표지가 있다....뒤에 보이는 산이 아리아케 산이다.
결혼봉축기념비 한일 양국의 글자로 설명이 되어 있다. 덕혜옹주의 사진들...인터넷 대마도는 한국과 일본의 사이에 있는 섬이다가 보니 한국의 문물이 일본으로 건너가는 길목으로 역사적으로 한국과 관련된 사찰들이나 불상 들이 많이 있으나 우리는 관광이 아닌 등산을 하러 갔었기 때문에 둘러볼 수 있는 시간도 없고 관심이 있는 사람들도 별로 없다. 역사적인 의의 같은 것은 그리 관심이 없고 그저 이곳저곳에서 사진을 찍는데 열심이다.
주변에 피어 있는 동맥꽃들 단풍도 있고.... 사람들은 이런 주변의 꽃들에 관심이 더 많다. 어디에 피어 있든지 꽃은 꽃이니... 향기가 아름다운 나무...그 때가 11월인데 꽃이 피어서 향기가 나는 나무가 있다니... 가네이시성을 둘러보고는 그 앞에 있는 수선사(修善寺)를 들렀다. 수선사는 7세기 백제의 범묘스님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며 이곳은 1907년 1월 1일 대마경비대 병영에서 서거한 면암 최익현 선생의 유해가 임시 안치되어 있었던 곳이다.
가네이시 성터를 둘러보고 수신사로 가는 길..도심을 가로지르는 운하 운하 안에는 이런 물고기들이 ...아마도 숭어인 듯 이런 골목도 지나고 위에 수신사 절 지붕이 보인다. 이 절은 7세기 백제의 범묘스님에 의해서 지어졌다고 최익현 선생의 순국기념비가 있는 곳으로 가는 골목
면암 최익현은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은 1834.1.14일 포천에서 태어나 1855년 과거에 급제하여 의정부찬성(종1품 오늘날 부총리급)의 벼슬에 이르렀으며 1898년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귀향하여 후진들을 양성하였으나, 1905년 을사늑약이 채결되자 의병을 조직하여 호남과 영남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의병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 의병을 해산하라는 명령을 받고 일본군에 체포되어 1906년 8월 말에 대마도 이곳 이즈하라(嚴原) 위수영(衛戍營)으로 압송되었으나 일본의 회유와 협박에 굴복하지 않고 단식(斷食)투쟁을 하여 1907.1.1일 순국을 하였다.
면암 최익현 선생의 초상화 이곳 수선사는 최익현 선생의 유해가 임시 안치되어 있었다가 1907.1.5일 부산 초량으로 운구되어 1.20일 충남 청양의 본가에 안장되었는데 부산의 초량이라 운구가 이동하는 곳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애도하였다고 한다.
수선사 옆에는 1986년 한일 양국의 뜻 있는 사람들이 최익현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비를 세웠는데 사람들은 이곳에서 비석과 기념사진을 찍는다.
순국 기념비 옆에 적혀 있는 설명문 순국 기념비..1986년 한국과 일본의 양국 사람들에 의해서 세워졌다고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가 있는 곳...일본에는 동네 가운데 이런 비석들이 있는 곳들이 있다. 오늘 귀국을 하여야 하기 때문에 수선사를 들러보고 난 후 점심을 먹고 우리가 내렸던 히타카츠 항으로 출발한 시간이 12시 반이다. 본래는 이즈하라 항에서 출발하기로 하였으나 히타카츠 항으로 변경되어 그저께 왔던 길을 되돌아 항구에 도착한 시간이 두 시 정도로 한 시간 반 정도 버스를 타고 왔으니 배를 타는 시간을 그만큼 줄인 셈이다.
점심(대마도에서의 마지막 식사)을 먹기 위해서 가는 골목길의 풍경 줄 서서 들어가서 일본에서는 그리 흔치 않는 뷔페식으로... 통관절차를 마치고 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하니 다섯 시 반으로 우리가 타고 왔던 버스를 타고 서울에 오니 늦은 밤이다. 대마도를 본래는 관광으로 가려고 했었는데 얼떨결에 등산을 겸해서 대마도를 가다가 보니 역사적인 부분을 제대로 보지 못해서 많이 아쉽다. 식사를 끝내고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보이는 거리풍경 다시 히타카츠 항으로 면세점에서 산 물품들을 들고 배를 타러 간다. 부산에 도착한 시간이 5시 반으로 2박3일의 관광 겸 등산여행이 끝났다...그러나 버스로 서울까지 가야 한다.
대마도는 옛날에 우리나라 땅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옛날부터 대마도는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다. 대마도가 우리나라와 명나라를 괴롭히는 왜구(倭寇)의 본거지가 되다가 보니 세 번의 대마도 정벌(征伐)이 있게 되는데 3번째 정벌인 1419년(세종 1) 음력 6월 19일 이종무에 의해서 대마도를 정벌하였는데 이 때문에 대마도의 도주가 조선에 항복하고 조선에서는 관직을 하사하게 되었으나 조선의 영토로서 통치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한반도 땅이었던 적이 없다. 고려가 원나라의 지배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원나라의 땅이 아니었던 것과 같은 맥락인 셈이다.
그 후로도 대마도는 조선보다는 일본의 지배를 더 많이 받는 입장에 있었으며 임진왜란 후에는 일본의 영향력 아래 완전히 놓이게 되었기 때문에 대마도를 우리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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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1931년이면 조선은 이미 오래전에 망하고 한반도가 일본이었던 시대. 조선의 왕족은 일본의 귀족으로.
일본에 유학가는등. 많은 교류와 왕래가 있던 시대.
그당시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청양에 최익현님 사당인 모덕사 있더군요. 대마도에 가면 꼭 가보고 싶네요.
최익현 선생님이 포천에서 태어났지만 나중에는 청양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포천에서도 최익현 선생을 추모하는 행사를 하더군요
산악회에서 대마도 갔었는데 산행이 주라서
이곳에서 들리지 못했네요
그냥 한번은 가볼만한곳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라다케산에서 본 조망이 참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