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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2 장/ 인간시장(人間市場) ]
자욱히 흐르는 새벽 안개.....
호오이..... 호오이.....!
왕우진은 문득, 어디선가 울려오는 누군가의 외침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모처럼만에 깊이 빠져든 숙면(熟眠), 대체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잤는지도 모
른다.
".........."
눈을 뜬 그가 제일 먼저 느낀것은 심한 갈증이었다.
'여기가 어딘가.....?'
풀먹인 솜처럼 무거운 몸,머리속은 텅하니 비어버린 듯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행히 머리맡에는 물 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벌컥벌컥.. 별 생각없이 주전자 째 물을 들이켜, 일단 조갈이 해소되고 나자 그
는 비로소 자신이 한 침침한 토옥(土屋)의 방, 이부자리 위에 누워 있음을 깨달았
다. 또한 그제서야 텅 비어버린 듯 했었던 기억이 하나하나 뒤살아나기 시작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베어냈던지.....
그것은 피(血)의 기억이었다.
'그래... 동령관의 흑점, 영호충이란 친구를 만난 후 산을 내려오며 난 백루,흑
막, 청사의 놈들과 무수한 접전을 치뤘었지.....'
그러나 그 다음의 일들은 아무리 기억을 하려고 해도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접전(接戰).....
확실히 그랬었다. 그는 분명 지난 낮부터, 물론 자신의 기억에 한해서일 뿐이었
지만, 이삼랑의 흑점에서 빠져 나온후 동령관을 내려오며 대체 몇이나 되었던지
그 수효조차도 제대로 알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살인자들과 그야말로 무종무시(無
終無始)할 정도로 혈전(血戰)을 벌였었다.
거의 제 정신이 아니었을 만큼 무서운 싸움.....!
칼날은 톱날처럼 되어 버렸었으며, 숨이 턱에 차오르고, 전신이 녹초가 되었을
때까지 베고 또 베었었다.
대체 자신은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던가?
하지만 그 다음부터의 기억은 안개에 가려진 듯 모호했고.... 생각이 여기에 이
르자 그의 가슴속에는 자신도 모르게 왈칵 어떤 진한 비애(悲哀)가 엄습했다.
'살인마(殺人魔)다 나는.....! 어쩌다 인생(人生)이 이렇게 되었을까.....!'
툭, 하니..... 그와함께 뇌리속에 다시 몇몇의 얼굴이 주마등 처럼 떠올랐다.
자신의 손에 죽은 연인 신궁희연..... 그 아비 파오..... 백루주 진사.... 또한
지금껏 자신으로 인해 죽어간 차마 다 헬 수 조차 없는 저 많은 사람들.....!
- 대협..... 방황은 이제 그만... 칼을 버리고 우리와 더불어 평범히 살아가시
는게 어떻겠소.....?
동시에 얼핏...! 인생을 새로이 할것을 간구한 저 노목삼의 침울한 표정과 음성
이 떠올랐다.
- 아아..... 당신이야 말로 바보군요.....!
또한 너무나 자신의 죽은 연인과 흡사하게 닮은 그의 딸 노운설의 모습도.....!
여기에 이르자 그의 비애는 이제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불어나 그것은 즉시 눈물
이 되었고, 눈물은 곧 다시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미쳐버릴 듯한 외로움과 상실감.....
뼈에 사무치는 고독이, 그야말로 이가 시리는 듯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바보로군 나는.....! 어차피 망가진 몸, 지금에 와서 더 무엇을 생각할게 있다
고....!'
그는 이러한 자신을 달래기라도 하듯 지긋이,피가 흐를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자포자기(自暴自棄)한 심정.....
하지만 그러고 나자 어느정도 마음은 안정되어 가기 시작했다.
이에 그는 탄식하듯 두어번의 긴 심호흡을 한 후 마침내 이부자리를 걷고 몸을
일으켰다. 으스러지듯 한 고통, 머리에서 발끝까지 아프지않은 곳이 한 곳도 없었
다. 그러나 벌써 한두 번 격는 일도 아닌 셈, 이에 그는 오히려 '아직도 살아있다
' 하는 안도감을 느끼며 이윽고 침침한 토옥의 방문을 열고 바깥으로 얼굴을 내밀
었다.
밖은 짙은 안개가 흐르는 새벽이었다.
퍽퍽.....!
그리고 마당이라고 할것도 없는, 울타리 조차 없는 뜨락에는 촌부(村父)인 듯,
한 오십 초로의 노인이 염소수염을 한 채 구부정하게 허리를 구부리고 장작을 패
는 모습이 가득히 시야에 들어왔다.
'저 노인의 집일게다.....! 그리고 필경 난 저 이의 도움을 받은 것일 것.....'
왕우진은 이렇게 생각하며 급기야 신발을 신고 뜨락으로 발을 내밀었다. 신발
은 피로 붉게 물든채 방문앞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헛헛허..... 저런! 마침내 의식이 돌아오신 모양이구료!" 그러자 노인 역시 그
의 기척을 깨달은 듯, 흠칫 장작을 패던 손을 멈추고 잠시 놀란 기색으로 왕우진
을 보더니만 곧 다시 웃음과 함께 말을 건네왔다.
"옷을 갈아입히는 것도 모르고, 이틀내내 인사불성으로 주무시기만 하길래 소인
은 또 혹시 수마(睡魔)에게라도 잡히셨나 했더니만.....!"
'이틀.....!?'
이에 왕우진은 비로소 의당 피에 젖어 축축해야 할 신발이 바싹 말라 있음을 깨
달았다. 또한 비로소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 원래의 것이 아닌, 비록 남루하지만
깨끗이 세탁된 촌부의 것임도.....!
이에 그는 곧 조심스레 노인에게 읍을 해보였다.
"역시 어르신께서 도와주셨음이 분명한 듯 하군요.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런
지.....!"
노인은 거뭇거뭇 검버섯이 핀 얼굴에 한 가득 친근한 웃음을 떠올렸다.
"허허..... 글쎄, 은혜라해야 뭐 소인은 산밑 개울가에 쓰러진 무사님을 들쳐업
고 온것 밖에 한것이 없소이다만.....!"
산밑 개울가!
"아~ !"
그러자 왕우진은 그제서야 잃었던 기억을 마저 뒤살리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그랬었다.
그것이 정말 이틀전인지는 확연치 않았으도 흑점 이후의 혈전이 있은 후, 자신
은 어둠속에 한 산계곡 아래로 흐르는 개울가에 도착한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그 무렵에는 여타의 살인자들도 추적을 포기한 듯 더 이상의 살기가 비치지 않
았었고, 이에 타는 갈증에 개울물을 마신후 대충 손발과 얼굴을 씻고 잠시 한 바
위에 기대 지친 몸을 쉬려 했었던 것 같았다.
하다면 필경 그 직후 자신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었을 것이었다.
노인이 다시 웃었다.
"허허..... 한데 무사님께서는 재를 넘어오며 화적들을 만나셨던 모양이지?"
"아~ !"
흠칫, 왕우진은 그제야 다시 현실로 돌아오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읍니다. 대충.....!"
"허허... 역시! 안그래도 이틀전 부터 산등성이에 까마귀떼가 새까맣게 몰려 우
짖기에 혹시 무슨 변괴가 있지않았나 싶긴 하더이다만....! 아무튼 그만 하시기가
천만 다행이로소이다. 처음 봤을 때는 온 몸이 피에 젖어 있어 필경 죽거나 크게
다친줄 알았었소이다만, 실상보니 상처는 없고 몹시 지쳐 실신을 한 듯해 들쳐업
고 온터이라..... 이 산인(山人)은 소적(蘇笛)이라 하외다."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불초는 왕우진이라 하지요."
왕우진은 한 번 더 손을 모아 읍을 해보였다.
확실히 큰 일이 날 뻔 했었던 것이다.
기실 자신만한 무예에 촌로가 이곳으로 들쳐업고 오기까지 모르고 있었을 정도
였다면.....!
더우기 말마따나 온 몸은 확실히 피로 물들어 있었다. 한데 이런 자신을 만약 그
가 아닌 또 다런 살인자가 발견했거나 피냄새를 맡은 맹수라도 덮쳐들었더라면,
실로 살았다 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을 것은 자명한 이치였던 것이다.
더우기 이런경우 대개의 사람이라면 필경 겁을먹고 본척만척하거나 먼저 관(官)
에 발고부터 하려 들었을 것이 당연한 행동,
한데 이 노인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그런 자신을 마다않고
집으로 데려와 기꺼이 자리에 누인 것이니.....!
"허허..... 뭐 조그마한 인정이었을 뿐이지요."
그러나 소적노인은 조금도 우쭐대지 않고 그저 담담히 웃었다.
"아 참, 그리고 입고 있던 옷과 소지품은 따로 보관을 했소이다. 옷은 일단 세
탁을 해 말려두었으나 행랑은 그대로.....! 워낙 피에 젖어 처음에는 함께 세탁을
할까 했었소이다만 뭐가 들었는지도 잘 모르고 해서.....!"
이어 그는 보관한 행랑을 가지러 가는 듯 곧 열댓 걸음 밖에 떨어진 토옥의 안
채로 들어갔다. 왕우진이 있었던 곳은 옆에 딸린 행랑채였던 것이다.
그리고 불과 반 각,
"이런.....!"
왕우진의 것인 듯, 말마따나 젖은 피가 뻘겋게 말라붙은 보퉁이를 들고 나온 소
적 노인은 안절부절, 몹시 곤혹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허허.... 이것, 일이 좀 난처하게 되었구료. 소지하신 보퉁이는 그대로 있는데
함께 보관했던 검(劍)이 보이지 않는게..! 필경 손주녀석이 가지고 나갔는가 보오"
"손주.....?"
소적노인은 난처하게 웃었다.
"허허.. 본시 이 산인에게는 일찌기 역병(疫病)으로 부모를 여윈 손주녀석이 하
나 있읍지요.한데 녀석이 어찌나 주제를 모르고 뛰어난 무사(武士)가 되겠다고 설
치는지...! 아마 가끔 화적들을 토벌하러 나오는 관군들의 모습에 감명을 받았던
가 보오. 그러던 중에 언감생심(焉敢生心), 무사님의 칼을 보고는 들고 나간 모양
인데.....!"
왕우진은 드물게 빙그레 미소지었다.
"저야 괜찮읍니다만, 걱정이 되시겠군요."
"허허.... 사실.. 이 늙은이에게 남은 피붙이라고는 이제 녀석 하나뿐인데 하필
이면 그 많은 일 중에...! 아직 철이 없어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도 모르고...!"
왕우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손주가 있을만한 곳은.....?"
"모퉁이를 돌아 한 마장 쯤 가면 소나무 숲속에 작은 공터가 있소이다. 딴에는
무예수련을 한답시고 거기다 막대기를 묶어두고 소란을 피우는 모양인데.....! 소
인이 곧 찾아오도록 하지요."
호오이, 호오이.... 아닌게 아니라, 그러고 보니 이때 잠시 끊어져 있었다 싶었
던 누군가의 외침이 다시 멀리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바로 왕우진이 잠결에서
언뜻 듣고 일어난 그 아득했던 외침.....
"아마도 저게 손주님의 기합인가 보군요. 제가 한 번 직접 가 보겠읍니다."
이에 왕우진은 다시 한 줄기 가벼운 웃음을 머금고 외침이 들려오는 곳으로 걸
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불과 일다경,
왕우진은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 외침이 들려오는 곳에 도착했다. 그 곳은 작은
소나무들로 둘러싸인 한 작은 공터였는데, 도착하자 과연 소적노인의 말마따나 십
삼사 세 가량의 한 자그마한 체구의 소년이 소나무 가지에다 여러개의 나무토막을
묶어놓고 칼로 치고 찌르는 동작을 신명나게 거듭하고 있었다.
손에 쥔것은 곳곳에 날(刃)이 빠져 거의 톱처럼 되어버린 진검(眞劍), 분명 왕
우진의 것임에 틀림없었다.
"많이 무거울텐데도 곧잘 휘두르는구나."
이에 왕우진은 소년이 놀라지 않게 조용히 말을 건네며 다가갔다.
"아! 무사님.....!"
그를 본 소년은 잠시 흠칫하는 기색을 보였으나 곧 다시 흥분된 표정으로 붙임
성있게 왕우진을 향해 마주 다가왔다.
"깨어나셨군요! 맞으시죠? 할아버지께서 모시고 오셨던 무사님이.....?"
잘 생긴 얼굴이었다. 왕우진은 잠시 소년과 주위를 살펴보며 부드럽게 입을열
었다.
"그래, 맞다. 할아버님께 말씀은 들었다만 역시 무예수련을 하는 모양이구나."
"맞아요! 소숙(蘇淑)이라고 해요!"
소년은 계속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전 아저씨처럼 훌륭한 무사가 되고 싶어요!"
순간 왕우진의 얼굴에 얼핏 한 줄기 어두운 그늘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게 대체 언제쯤일까? 소적의 들뜬 얼굴에서 그는 문득 어린시절의 자신의 모
습을 발견한 것이었다.
- 전 아빠와 같은 훌륭한 포두(捕頭)가 되고 싶어요!
포두.....!
그러했다.
본시 그의 부친은 자신이 아직 어리고 또한 당신이 젊었을 시절, 고향이었던 유
강(柳江)에서 대단히 명망있던 관포였던 것으로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검(劍)으로는 감히 그 누구도 당할수 없었고 범죄자들은 부친의 앞에서 몸을 움
추렸으며, 또한 깨끗한 청백리로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그런 사
람으로 기억하고 있기도 했었다. 번쩍번쩍 하는 칼을 차고 푸른 관복에 씩씩하게
말을 탄 그 모습이 어렸던 자신에게는 얼마나 멋지게 보였었던가?
확실히 부친의 그런 모습은 어렸던 자신에게 있어 신(神)이었었다. 그때 왕우진
은 지금의 소적과 똑같이 그런 말을 했던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처음으로 칼을 잡았다. 찌르고 베고...그야말로 유년, 소년기를 다 버
리다싶이 혼신의 힘을 다해 무예수련에 열중했었다. 부친은 그런 그를 무척 귀여
워해 전혀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었고, 오히려 틀린 자세를 바로잡아 주거나 단
(丹)의 호흡법 등 새로운 수법을 가르쳐주기까지 했었다.
이에 청년기에 이르러, 그는 마침내 부친의 무예까지 능가하게 되었다. 그런 자
신을 보며 부친은 천부(天賦)의 재질을 타고 났다며 웃으셨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다만 그런 자신을 보며 줄곳 우려하던 모친의 저 우울한 눈빛을 빼고는.....!
- 왜 하고많은 일들중에 그런 따위를.....! 역시 피는 속이지 못하는 것일까..?
그러했다. 분명 그의 부친은 자신이 무사가 되겠다는데에 별다런 이의가 없었지
만 모친만큼은 그런 자신에게 회의를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기실 부친의 모습이 어린 왕우진의 눈에는 신(神)처럼 보였으나 모친에게는 전
혀 다른 우려의 대상으로 보였을 뿐이었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 땅의 관포
들이 모두 그렇지만 목숨까지 걸고 흉악범을 쫓아야하는 그 위험한 직책에 간신히
생활을 꾸려나가는 어려운 형편하고.....!
- 진아... 제발 너만큼은 이렇게 어렵고 험한 일을 할 생각말고 그 정성으로 글
공부를 해주렴.....!
결국,마지못해 노목삼의 금전을 움켜잡게 했던 지난 진강의 수석관포 진청의 아
내의 애환이 자신의 모친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그는 이런 현실을 직시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 오늘.....!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왕우진의 눈에 문득 축축한 물기가 어렸다.
'그때 어머니의 말씀을 들었더라면.....!'
이때 소숙이 들뜬 음성이 다시 그를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어때요? 아저씬 훌륭한 무사시죠? 그렇죠?"
왕우진은 이에 침울하게 웃었다.
"그래.... 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검으로는 아직 아무에게도 져본적이 없구
나.....!"
"야아.... 역시! 사실 처음 뵈었을 때 부터 그러실줄 알았어요! 온통 피에 젖어
계셨지만 그래도 상처하나 없이 화적들이 우글거리는 동령재를 뚫고 오신 분이 아
니신가요!"
소숙이 눈을 빛내며 환호성 같은 소리를 질렀다.
"어때요 아저씨! 제발 저에게 칼을 쓰는 법을 가르쳐 주시지 않으시겠어요?"
왕우진은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르쳐 주면..... 대체 칼쓰는 방법을 배워서 무엇을 하려고 하지?"
소숙은 계속 흥분되어 말했다.
"멋있잖아요? 관포나 협객이 되어 약한 자를 돕고 악한들을 무찌르고! 남자로서
는 최고의 일이라 생각해요!"
"과연 그럴까.....?"
왕우진은 다시 무겁게 웃었다.
"하지만 그건 오로지 몽상에 지나지 않아. 그냥 상상하기에는 멋있는 것 같지
만 실상 피를 튀기며 같은 사람을 죽고 죽이는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를 알고 보
면....! 더우기 검이란 아주 잘배워야 한갖 장수(將帥)나 관포가 되는데에 지나지
않지. 또 그나마도 그렇게 되는 것도 극소수에 불과할 뿐, 여차직하면 쓰레기같은
범죄자가 되기 쉽상이고.....!"
그러자 소숙은 이상하다는 시선으로 왕우진을 보았다.
"아저씬 무사이신데도 어떻게 그런 말씀을....! 저는 절대 범죄자 따윈 되지 않
아요! 최소한 훌륭한 협객으로.....!"
협객(俠客).....!
왕우진은 다시 쓰게 웃었다.
"그래봐야 칼을 든 협객이란 한갖 범죄자며 건달에 지나지 않아.....!"
이어, 그는 똑바로 소숙을 보며 말했다.
"그래! 하지만 어쨌건 네가 그토록 칼쓰는 것을 배우고 싶다니, 정히 그렇다면
어디 한 번 시험을 해보자꾸나. 네 나이에 무거운 검을 휘두르는 것을 보니 딴에
는 그 동안 상당한 연습을 한 모양, 시험해 봐서 진짜 재질이 있을 것 같으면 몇
수 가르쳐 줄테니까."
"진짜요?"
순간 소숙은 더더욱 흥분된 표정으로 소리치듯 말했다.
"좋아요! 그럼 시험이란.....?"
왕우진은 가볍게 웃었다.
"그 칼로, 연습해온 대로 나를 후려치는 것이다. 옷깃만 스쳐도 재질이 있다고
생각해줄테니.....!"
"진짜 칼로.....?"
이에 소숙은 멈칫,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검술을 가르쳐준다는 것, 이 말은 그를 들뜨게 만들기 충분했다. 또한
그런 피에 젖은 모습으로 화적들을 뚫고 내려온 그라면 얼마던지 자신의 칼을 피
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좋아요! 그러시다면.....!"
이에 소숙은 곧 마음을 고쳐먹고 똑바로 칼로 왕우진을 겨누었다.
"핫!"
이어, 그는 곧 한 소리,아직 어린 소년답지 않게 기합을 토하며 곧바로 검을 비
스듬히 들어 왕우진의 어깨어림을 공격해 왔는데.....!
서걱!
"허헉! 아니.....!?"
그러나 또한 바로 그 순간, 소숙에게는 진정코평생동안, 죽기까지 영원히 잊을
수 없을만한 끔찍한 기억이 생기게 되었다. 왕우진! 그것은 바로 어떤 공격이라도
피할 수 있을 듯 했었던 그가 휘두르는 칼을 피하기는 커녕 뻣뻣이 제자리에 서서
그대로 자신이 휘두르는 칼을 맞아버리는 것이 아닌가?
맞은 곳은 오른 팔! 그 즉시 피뻘건 피가 사방으로 튀어오르고 베인 사람의 살
이쩍 하니 입을 벌리며 뒤집히는 광경이 콱! 소숙의 눈을 쑤시고 들어와 박혔다.
"이건..... 이건.....!"
소숙은 그만 얼굴이 새파랗게 변해 말조차도 제대로 꺼내지 못했다.
또한 그 순간,그에게는 평생 잊지못할 두 번째의 무시무시한 일이 발생했는데.
... 왕우진이 바로 그런 그의 멱살을 거의 숨조차도 쉬지 못할 정도로 벌컥! 틀어
잡은 것이다.
"후후후. 그래! 제법 재질이 있긴 있는 것 같구나! 하지만 과연, 사람의 살(肉)
을 베는 감각이 생각대로 좋더냐?"
쭉! 동시에 눈에서 뻗어나오는 같은 무사들 조차도 혼이 달아날 정도의 저 무서
운 왕우진, 살인자의 눈빛!
철철 흐르는 팔뚝의 피를 훔쳐 그의 얼굴에 쳐발랐다.
"이 뜨끈뜨끈한 피의 감각은 또 어떠냐? 역시 좋으냐?"
"아..... 아.....!"
그러나 멱살을 틀어잡힌채 그의 소름끼치는 눈을 정면으로 대한 소숙은 혼비백
산, 그야말로 숨이 멎을 듯해 그저 와들와들 몸을 떨뿐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왕우진은 저 끔찍한 살인자의 눈으로 그런 그를 주시하며, 비로소 잡았던 멱살
을 놓았다.
"후후후..... 원하던데로.... 무사가 되면 언제나 이런 것들을 대하게 된다! 뿐
만아니라 네 살마저 항상 이렇게 베이게 돼! 어디 이번에는 내가 한 번 너를 베어
볼까?"
"으아아..... 으아아악!"
그러나 소숙은 더 이상 그의 말을 들을 틈도 없이 멱살을 놓자 그대로 처절무비
한 비명을 토하며 칼을 내던지고 집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미 완전히 혼(魂
)이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러자 비로소, 왕우진의 눈에서 뻗쳐나왔던 저 무시무시했던 눈빛이 자취를 감
췄다. 하지만 한때나마 평화로왔던 표정은 이미 완전히 사라졌고, 그의 모습은 어
느새 원래의 차갑고도 허무한 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
동시에 그는 소숙이 집어던졌던 칼을 거둬들인후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가
사라진 토옥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무..... 무사님! 대체 이게 무슨 일.....!?"
그와함께 토옥 속에서 소적노인이, 보랏빛에 가까운 낯빛으로 뛰어나왔다. 필시
피칠이 된채 도망쳐온 손자의 사색이 된 모습을 본게 분명했다.
왕우진은 묵묵히 뜨락으로 들어가 그가 꺼내왔던 보퉁이를 집어들며 말했다.
"무사란.... 좋은 의미건 나쁜 의미건 할만한 업(業)이 못되는 것, 잠시 훈계를
했던 것이오."
보퉁이속에서 한 장의 전표를 꺼내 질린 노인에게 쥐어주며 무뚝뚝 하게 말했다.
"아마 충격이 한 달은 갈 것! 이후 다시는 칼을 잡으러 하지 않을 것... 정신이
돌아오면 반드시 전해 주시오. 칼은 무섭지만 그것을 이기는 것이 글이라고....!"
말투도 모습도, 처음과는 달리 이젠 사람자체가 완전히 달라져 버린 듯한 모습!
이어 그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않고 훌쩍 몸을 돌려 집을 나섰다.
접전으로 인해 칼이 톱날같이 무디어 있었던 관계로 상처는 심하지 않았다.
"무사.....!"
그러자 소적노인의 주름진 눈에 순간 얼핏 진한 눈물이 고였다. 기실 주름진 얼
굴 만큼이나 오랜 세월을 살아온 노인으로서는 무사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삶을
사는 인간들인지 모를리가 없다.
이에 하나뿐인 손자가 그런 삶을 살기를 고집했을 때, 실제로 얼마나 많은 속
을 끓였던가? 하지만 더 좋은 길로 보내주기 위해 글공부를 시키자니 돈이 없었다.
실상 종이 한 장이 쌀 한 가마와 맞먹는 시대이고 보니 이런 가난한 산인(山人)의
처지에 그런 따위는 그야말로 엄두조차 낼 수 없었던 일이었음이 분명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젠.....!
"나무 관세음보살.....!"
이에 소적노인은 왕우진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기 까지 그를 향해 오랫동안 합
장을 하고 있었다.
서로 나누어진 또 하나의 작은 인정.....! 끝없이 떨리는 가슴이었다.
* * *
그리고 밤, 항주(杭州)의 전당강(錢塘江)을 낀 쾌활림 갑구(閘口)..! 역대로 부
터 인간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이런곳이 있었지만, 칙칙한 시궁창같은 전당강
의 한 지류를 끼고 여기에는 싸구려 지분냄새를 풍기며 남자들에게 술과 웃음을
파는 여인들이 밀집한 소위 사창가(私娼街)가 자리잡고 있었다.
낮에는 추루하기 짝이없는 습한 거리이나, 밤만되면 화려한 불빛으로 감쪽같이
변신을 하고마는 그런.....!
해질녁부터는 눈(雪)이 내렸다.
술취한 남자들과 호객을 하는 여자들로 거리는 몹시 분주했다.그리고 그런 비좁
은 길을, 언제부터인가 손운(孫雲)은 천천히 걷고 있었다.
바로 항주제일내교방의 문전에다 오줌을 내갈겼었던 그 사내.....!
하지만 지금의 그의 얼굴에는 그때의 웃음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표정은 극
도로 비통했으며 사뭇 초라하기까지 한 모습이었다.
'결국 또 오고 말았다.....!'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벌써 수 백 번도 더 다짐했었던 이곳..... 두 번 다시는
..... 기억에서 조차 지워버려야 겠다고 생각했던 이곳에.....!'
휘황한 불빛을 강물처럼 어깨뒤로 넘기고 걸으며..... 그는 침통히 생각하고 있
었다.
'축축히 습진 공기..... 인간의 혼을... 생명을 사냥하는 사망(死亡)과 음부(陰
部)로 이어진 거리....! 나는 대체 지금 어디에 서 있는 것이며 어디로 가는 것일
까.....'
쾡하니 들어간 눈..... 모습은 몇일 전에 비해 몰라볼 정도로 초췌했다.
'오늘 만큼은 기필코 끝을 내야겠다.... 어차피 구제받지 못할 영혼이라면 차라
리 죽어 버리는게 났다.....!'
이때, 문득 스치듯 지나던 그를 지분단장한 한 여자가 가로막았다.
"호호호..... 손님, 즐기시려고 오셨나요? 하다면 소녀는 어떠신가요?"
하지만 손운은 여전히 극도로 침울히 얼굴을 떨군채 말했다.
"이러지 말게나. 나는 가는 곳이 따로 있다네.....!"
그러나 여자는 물러서지 않고 더욱 자신을 밀착시켜 오며 오히려 답싹 그의 몸
을 끌어안았다.
"아잉, 거기나 여기나.....! 하자는데로 해드릴께. 응응.....?"
떼어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글쎄 이러지 말래도.....!"
"앗.....!"
이에 손운은 자신도 모르게 여자를 밀어내는 손에 힘을 줬는데, 그게 다소 과했
던지 여자는 그만 털썩 눈이 녹아내리는 질척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순간 여자의 눈에 매섭게 독이 올랐다.
"야이 개새끼야! 싫으면 곱게 싫다고 할것이지 네가 뭔데 사람을.....!"
그 즉시 소매를 걷어부치며 발딱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 오늘 임자 잘못 만났어! 그러고도 멀쩡할줄 알아?"
필경 무슨 일이 생겨도 생길 찰나인 터, 한데 이때 그런 그들을 본듯 다른 분단
장을 한 여자 하나가 나서며 말렸다.
"얘, 그만해둬. 그것으로 됐어....."
그러자 넘어졌던 여자는 이번에는 그녀에게 소리쳤다.
"뭐예요 언니! 저 자식이 날 밀쳤어요! 그런데도 참으란 말이예요!?"
말리던 여자는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 그건 나도봤어.....! 하지만 저 사람이 바로 손운이야.....!"
"엣.....?"
그러자 넘어졌던 여자의 눈이 놀란듯 잠시 휘둥그레 뜨여졌다.
".........."
이어 그녀는 그런 눈으로 한동안 침울히 고개를 떨군채 선 손운을 보더니 화난
얼굴로, 곧 다시 그를 외면했다.
"체! 설마 그 병신같은 얼간이가 바로....! 그럼 특별히 한 번 봐주지 뭐, 솔직
히 갈굴 위인도 못되니까!"
필시 그를 알고 있었던 듯 했다.
"미안하네. 본의 아니게 옷까지 버리게 해서....."
동시에 손운은 침통히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날리는 눈발이 숙인 그의
뒷모습을 더욱 어둡게 보이게 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일 각 쯤 후,
이윽고 손운이 도착한 곳은 근 오리(五里)에 이르는 사창가의 중간쯤에 위치한
춘화(春和)라는 비교적 규모가 큰 한 창기(娼妓)의 집이었는데.....
깔린 어둠과 눈발, 그리고 휘황한 홍등이 본래의 추루함을 감춰주고 있긴 했었
으나 다시 보면 금시라도 냄새가 코를 찌를 듯한 흉칙한 몰골의 이 층 목옥(木屋)
이었다.
"호호..... 어서오세요, 나으리! 묵고 가실 생각이신가요?"
그러자 속에서 즉시 한 요란하게 분단장을 한 한 여자가 호들갑스런 웃음과 함
께 뛰어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멋! 당신은.....!"
뛰어나온 여자는 손운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깜짝, 크게 놀라는 기색으로 주춤거
렸다. 그라는 존재를 역시 이미 알고 있었던 듯.....!
"허허..... 또 왔네.....!"
하지만 손운은 개의치 않고 한 줄기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난향(蘭香)은 있는가? 거리에는 요즘 나오지 않더군.....!"
"아..... 글쎄..... 있긴 하지만.....!"
"좀 불러 주게나."
그러나 처음 볼때 부터 놀란 기색을 보였던 여자는 잔뜩 당황하기만 할 뿐 한참
동안 대답을 못했다. 필시 무슨 말못할 사유가 있는 듯. 하지만 이윽고,
"안되겠나.....?"
"아..... 알겠어요. 그럼 우선 안으로.....!"
머뭇거리던 여자는 손운이 두 번째 청을 하자 급기야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본
래의 추루함을 어둠과 휘황한 홍등으로 악마같이 변신시킨 창옥(娼屋)내로 끌어들
였다.
하지만 일단 손운을 칙칙하고 비좁은 한 방속에다 밀어넣은 그녀가 다시 당황스
레 찾아간 곳은 그가 요구했던 여자를 부르러 간것이 아니라, 뒤꼍의 한 후미지고
칙칙한 골방.
"저어, 나..... 나으리!"
문을 열자, 서너 평 남짓한 골방속에는 몇몇의 화복차림을 한 사내들이 한창 노
름이라도 하고 있었던 듯 골패짝을 주무르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사내들의 주위에는 빨래판처럼 칼자욱이 가로 세로로 난 섬찍한 모습의 건달들
이서 있었다.
그 중 골패짝을 쪼이던 육 척 가량의 비둔한 체격을 지닌 한 오십 대 화복사내
가호들갑스레 나타난 여자를 향해 무직하게 입을 열었다.
"웬 일이냐 바쁜 시각에? 무슨 사고라도 생겼느냐?"
여자는 잔뜩 겁을 먹고 머뭇거리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 그런게 아니오라.... 실은 그 사람이 또 찾아왔기에....! 그 손운이란
문사말이어요.....!"
"뭐가 어쨌어.....?"
순간 화복사내의 피둥피둥 살찐 얼굴의 안색이 싹 돌변하는가 싶더니, 탁! 들고
있던 골패짝을 내려놓으며 섬칫한 눈빛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흐흐흐..... 정말 별 꼴같지도 놈이 자꾸 속을 썩이려 드는군. 대체 미쳐도 곱
게 미쳐야지 어디서 그런 어처구니없는 것이.....!"
눈빛이 더더욱 흉흉해졌다.
"안되겠군! 이러다간 아무래도..! 불가분 더 늦기전에 한 번 손을 봐주는 수 밖
에.....!"
여자는 흠칫 몸을 떨었다.
"또 난향을 찾고 있사온데.....?"
화복사내는 일순 가벼운 냉소를 머금었다.
"흐흐... 좋아. 아무렴! 어쨌거나 손님이니까 일단 불러주도록 해! 아무런 내색
도 하지말고!"
"아..... 알겠사와요. 그럼 분부대로.....!"
그러자 여자는 한 번 더 몸을 떨며 허리를 조아렸는데.... 상황을 보면 바로 저
화복사내가 포주(抱主),
입가에 어느새 진득한 살기같은게 떠오르고 있었다.
첫댓글 즐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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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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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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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감하고 감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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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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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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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윤 난향은~~~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잘보고 있습니다~~~
즐독이랍니다
재미 있게 읽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