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의 시_128 - 류시화
넓은 원을 그리며 나는 살아가네
그 원은 세상 속에서 점점 넓어져 가네
나는 아마도 마지막 원을 완성하지 못할 것이지만
그 일에 내 온 존재를 바친다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넓어지는 원> (류시화 옮김)
어느 날 당신이 바닷가에 갔는데, 파도에 밀려온 나뭇가지와 해초와 물고기뼈들의 잔해 더미에서 투명한 병 하나를 발견했다. 병 속에 종이 한 장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당신은 뚜껑을 연다. 종이에는 시가 적혀 있다. 당신은 그 시를 소리 내어 자신에게 읽어 준다. 모든 시는 그렇게 시인이 병 속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낸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시가 시공간을 항해해 언젠가는 누군가의 해안에 가닿으리라는 걸 믿는다.
오늘 당신의 해안에 도착한 병 속의 시(poem in a bottle)는 '언어의 거장' 릴케(1875~1926)의 시다. 모든 사람은 동심원을 그리며 인생을 살아간다. 또한 지금 그리는 새로운 원이 지난날의 원들을 대체한다. 두 종류의 삶이 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 원이 넓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원이 좁아지는 사람이 있다.
체코 프라하에서 미숙아로 태어난 릴케는 9세에 부모가 이혼했으며, 군사학교에 입학했으나 몸이 병약해 중퇴했다. 이후 각지를 유랑하며 고독, 불안, 죽음에 대해 번뇌하다가 만년에는 산중에 있는 성에서 고독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는 생을 마칠 때까지 자아의 원을 무한히 넓히는 일에 '온 존재를' 바쳤다. 그리하여 <말테의 수기>, <두이노의 비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등의 대작들이 주로 만년에 탄생했다.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지식과 경험과 배움을 통해 자아의 원을 끊임없이 넓혀 가는 일과 다름없다. 그 넓히는 작업은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 성공과 성취뿐 아니라 상실과 실패까지도, 아니 오히려 쓰라린 경험이 자아의 벽을 허물고 더 넓은 세상과 만나게 한다. 언젠가 나를 아프게 했던 일이 내 마음의 원을 넓어지게 했다. 원은 부서질 때 열리기 때문이다. 자기 나름의 원을 그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우리는 본다. 어떤 이는 상실의 원에 갇혀 있고, 어떤 이는 욕망의 원 안에서 살고, 편견의 작은 원을 그려 그 안에서 나오지 않는 이도 있다.
미국 시인 메리 올리버는 썼다.
너 자신을 사랑하라
그런 다음 그것을 잊으라
그런 다음 세상을 사랑하라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무한히 넓어져 신까지도 그 원 안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 외에는 어떤 타인도 들어올 수 없는 옹색한 원을 가진 이도 있다. 자신의 원 안에 갇힌 사람은 아무리 손을 뻗어도 타인에게 닿지 않지만, 무한히 넓어진 사람은 죽어도 죽지 않는다. 당신의 해안에 도착한 병 속의 시가 묻고 있다. 어떤 원을 그리며 살아가고 있는가?
첫댓글 참 좋은 시이네요.
저는 원이 커졌다 작아졌다
합니다. 인생의 겨울은
다가오는데 문제입니다.
원은 부서질때 열린다..그래서 또 넓혀지는것..........
릴케는 다다를수 없는 원.......참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