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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이 막걸리라면 그걸 그린 자화상은, 그나마 볼 만한, 증류식 소주 같은 거고 역사가 보리로 담근 발효주라면 소설은 그걸 증류한 위스키라고 할 수 있을 테죠. 히치콕이라는 영화감독도 비슷한 말을 했어요. 극(劇)이란 지루한 부분을 오려 낸 인생이다. 영화가 인생을 그대로 옮겨 놓기만 한 거라면 사람들이 왜 그걸 보고 있겠어요? 더럽게 지루한데다 매일 신물나게 보고 겪는 게 그건데요. 저처럼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죠. 창밖의 소리가 아무리 싱그럽고 청량해도 그걸 그대로 옮겨 놓은 건 음악이 아니라는 걸요. 반대로 아무리 비싼 악기로 만들어낸 것이라고 해도 낯설고 기이하기만 한,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감정과 무관한 소리들 역시 음악이 아니죠. 그건 그냥 악기로 만들어 낸 소음일 뿐이니까요.
(8-9)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면 아무것도 겪지 않은 것과 다름없고, 아무것도 겪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것과 다름없으니까요. 끝내주는 음악은 끝난 뒤의 침묵도 끝내주죠. 죽여주는 영화는 극장 불이 켜진 뒤에도 자리에서 일어나는 걸 잊어버리게 하고요. 음악이든 그림이든 영화든 소설이든 그제 제대로 된 작품이라면 체험을 만들어 내야 해요. 그게 아니라면 뭘 제대로 만든 게 아닌 거죠.
(17)
준연은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하나 마나 한 소리 같지만, 진실도 그 진실을 체험하는 것도 정말 중요해요. 한번 생각해 보자고요. 누가 자신이 죽는다는 걸 경험으로 알 수 있나요? 또 누가 태어남에 대한 기억이나 감각을 갖고 있나요? 우리는 태어났다는 것도 죽는다는 것도 이야기로만, 체험이 아니라 간접적인 증거로, 자료로만 알고 있어요. 시간도 마찬가지죠. 어떨 때는 1분이 한 시간 같지만 게임이라도 하면 사흘이 한나절 같잖아요. 그 두 가지 시간이 같은 건지, 다른 건지 우린 몰라요. 그저 같겠거니 생각할 뿐이죠. 태어남과 죽음에 대해서도 그러겠거니, 하듯이요. 사실 우리한테 발생한 어떤 사건보다 가장 크고 중요한 사건인데도 그렇죠. 준연은 나를 보며 말했다. 우리는 우리한테 가장 중요한 것들을 실은 말로만, 추측으로만 알고 있어요.
(27)
좋은 사람이란 그 한 사람만 있어도 살 만하다 생각이 드는 사람이죠. 싫은 사람이란 그냥 생각하기도 싫은, 결국엔 우리와 무관한 사람들일 뿐이고요. 제 생각에, 분명한 건 이거예요. 우리는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살 수는 있지만 싫어하는 사람을 위해 잘, 열심히 살 수는 없어요. 그게 우리가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 이유고 그런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싫은 사람에게도 자지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낼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렇게 밑진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싫은 사람을 만나고 겪어 봐야 좋은 사람이 왜 좋고 어떻게 좋은지 알 수 있으니까요. 또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요. 다만 싫은 사람은 대가고 좋은 사람은 목표죠. 좋은 사람, 싫은 사람이란 글자 수만 같을 뿐 사실 그렇게나 다른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67)
압도적인 풍경을 볼 때 풍경과 그 풍경을 보고 있는 아주 작은 자신을 함께 지각하게 되는 것처럼, 침묵과 그 침묵을 드는 내가 거기에 있었다. 이전에 준연이 말했던, 음악이 끝나고 달라진다는 침묵이 바로 이런 것임을 나는 실감할 수 있었다. 무음이 아닌, 음악에 빗질이 된 것처럼 정갈하고 가지런한 고요함. 거긴엔 침묵이 주기 마련인 두려움도 의심도 없었다. 오직 파고들 듯 깊숙이 간직되는 환희만이 있었다. 연주회장에서 우리를 포효하듯 환호하게 하고 열렬히 박수치게 만드는 환희. 어쩌면 우리는 이런 침묵을 듣기 위해 음악을 듣는 건지도 몰랐다.
(109-110)
내가 누군가와 연애를 했던 건 늘 그렇게 예쁨을 발견할 때였다. 내 기준에서, 연애란 예쁜 여자와 하는 게 아니었다. 예쁜 데가 있는 여자와 하는 게 연애였다. 객관적으로 예쁘건 말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예뻐 보이려는 것도 나는 싫은 쪽에 가까웠다. 멋있어 보이려는 남자가 결코 멋있지 않듯 예뻐 보이려는 여자도 결국에는 예쁘지 않았다. 남자든 여자든 자기가 어떻게 보일지 의식하는 사람과 하는 대화는 금세 지루해졌고 대화가 지루하면 외모도 지루해졌다. 나이가 들수록 더 그랬다. 술자리가 끝나기도 전에 한창 술에 취해 있을 때조차 내가 왜 여기 앉아 이 술값과 시간을 버리고 있나 싶어졌다. 지금 내 앞에 있는 하진은 아니었다. 계속 얘기하고 싶은 여자, 웃게 해 주고 싶고 나를 웃게 해 주는 여자였다. 아무리 웃고 예기해도 지치지 않을 것 같은, 오히려 더 웃고 얘기하고 싶어지는 여자.
(127-128)
하진의 말대로 그때는 몰랐다. 어렸기 때문에 모르는 건 많고 아는 건 적었지만, 생각은 늘 반대였다. 다 안다고, 내가 아는 걸 사람들은 모른다고 생각했다. 실상은 사람들이 아는 걸 내가 모르는 것이었는데, 뭔가를 안다는 건 나만 안다고 게 아니라 사람들이 아는 것보다 조금 더 안다는 뜻에 불과한데도.
(137-138)
어렸을 때는 어른이 되면 모든 게 쉽고 가벼워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건 하나도 없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문제들은 어렵고 복잡해졌다. 가진 것도 지킬 것도 적은, 한 살이라도 어렸을 때가 늘 더 쉽고 더 가벼웠다. 똑 같은 외도라도 연애할 때는 바람이지만 결혼하고 나면 불륜이 되듯.
(178-179)
친구와 연인이 다른 것 같지만 진실한 의미일 때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연인이란 내가 이성을 발견한 타인이었다. 친구란 내가 나 자신을 발견한 타인이었다. 친구는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연인은 이성으로서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195-196)
서로 다른 것 같지만 실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준연이 말했다. 꿈과 이상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라고요. 현실과 반대라거나 동떨어진 거라고들 생각하지만, 꿈이나 이상이 없다면 현실은 점점 더 시궁창이 될 수밖에 없고 또 현실이 온전하지 않으면 꿈이나 이상도 건강할 수가 없잖아요. 가난하고 못살았기 때문에 다들 희석식 소주밖에 마실 게 없었고 그래서 술이라고 하면 그런 소주가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처럼요. 더 나은 건 늘 있어요. 현실에 아직 없기 때문에 꿈이나 이상이라는 망원경으로 볼 수밖에 없을 뿐이죠.
(214)
우리는 한 인생에서 오직 한 사람만 될 수 있어요. 인생은 하나고 우리의 시간은 하나니까요. 우리는 다 매여 있어요. 속박당해 있죠. 인생에, 시간에요. 그걸 벗어나려고 하면 방종이고 망상인 거고 거기에 갇히려고 하면 감상(感傷)이고 자박(自縛)인 거예요. 우리는 속박 안에서 생각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해요. 벗어나려 하지도 갇히려 하지도 않은 채로요. 그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속박이라는 뜻이죠. 어떤 속박을 선택하느냐가 우리의 자유예요.
(223)
우리에게, 남자들한테 사랑을 가르쳐 주는 건 늘 여자라고요. 안아 주고 보살펴 주는 최초의 어머니로서, 또 처음으로 사랑을 느끼는 사람으로서도, 늘 여자들이 우리에게 사랑을 느끼게, 보여 주고 일깨워 주죠. 여자들이 아니라면 우리가, 남자가 사랑이라는 걸 알 수 있을까요? 애초에 우린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잖아요.
(270)
맞아. 배부른 소리야. 하지만 배가 부르니까 해야 하는 소리지. 배가 부르다고 만족할 수 없는 게 우리니까. 인간이란 먹고 살기 위한 존재에 그쳐지지가 않으니까. 우리한텐 좋은 술이 필요해. 좋은 집, 좋은 차, 외식도 하고 드레스도 입어야 돼. 그래야 ‘살았다’가 아니라 ‘살아 있다’고 느낄 수 있으니까, 먹고 살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으로, 인간답게 살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건, 남들보다 더 많이 먹고 마시는 게 아니라 더 좋은 걸 먹고 마실 때니까. 물론 없어도 먹고사는 데아무 지장 없지. 하지만 그것뿐이면 우리가 먹고살기만 하는 존재 같아지는 거야.
(280)
살아 있는 것이라서 아름답다는 건, 사라지는 것이라서 아름답다는 뜻이기도 해. 이렇게 생생하고 울창하게 살아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메마르고 작아지겠지. 음악도 그래. 아름답지만 오직 만들어지는 그 순간에만 존재했다가 끝나면 사라져. 술도 아름다워. 솔직하고 속 깊은 얘기들, 울고 웃는 것들이 다 비워지는 술병과 함께 사라지지. 아름다운 건 다 살아 있고, 사라지는 것들이야. 그래서 우리는 그걸 만들지. 만들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으니까. 오직 사라지기만 할 테니까. 만든다는 건 사라진다는 걸 받아들인다는 뜻이기도 해. 거기에 만든다는 것의 아름다움이 있는 거지.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만든다는 것만큼 살아 있다는 걸, 사랑한다는 걸 증거하는 건 없으니까. 사람들은 아름다움이 무용하다고, 쓸모없다고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아름다움이야말로 우리의 쓸모와 유용함을 일깨워 주니까. 우린 아름다운 걸 좋아해. 아름다운 걸 사랑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아름다운 걸 만들 수밖에 없지.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 그게 우리의 능력이야. 다른 어떤 생물에게도 없는, 오직 신만을 닮은 우리의 능력.
(293)
이건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4번, 흔히 <월광 소나타>라고 하는 곡이에요. 들어 본 적 있어요? 준연이 말하며 비장한 느낌의 셋잇단음표를 연주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유명한 곡이었다. 준연이 나를 보고 말했다. 이건 죽음의 선율이에요. 다가오는 죽음, 피할 수 없는 죽음, 억울하고 비통한 죽음이죠. 제 마음대로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베토벤이 모차르트에게서 빌려 온 선율이에요. 모차르트 오페라에 그렇게 나오거든요. <돈 조반니>에서 기사단장이 살해당할 때 거의 똑 같은 선율이 현악으로 연주되죠. 그리고 베토벤도 이 곡을 쓸 무렵 청력을 상실해 가고 있었어요. 그런 음악가로서 죽음을 의미했죠. 역시나 다가오고 피할 수 없는, 억울하고 비통한 죽으미요.
(296)
음악 안에서는 아무것도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에, 규칙이 있을뿐 모든 게 상대적이기 때문에 가능한 거죠. 곡을 쓴다는 건 음표 하나하나가 아니라 이런 맥락들을 엮고 쌓아올린 총체적인 구조고요. 거기서 가지 위에 잎이 돋듯 음표들이 자라나는 거예요. 음들은 300년 전에도 있었고, 2000년 전에도 그보다 훨씬 오래전에도 이미 있었어요. 음악이라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표기법, 악기, 작곡법, 연주법 같은 것에 따라 발견되고 발전해 왔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이런 맥락과 구조를 만들어 내는 게 한결같이 곡을 쓰는 사람의 몫이고 노동이라는 건 달라지지 않았어요. 시대나 사조마다 달라지는 것도 음악이나 음들이 아니라 이런 맥락과 구조에 대한 것일 뿐이죠.
(346)
사랑은 인정이고 긍정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랑이 죽음에 반항하는 방식이었다. 사랑하고 있을 때, 단지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을 열렬히 실감할 때, 죽음은 단지 침묵에 불과해진다. 하진의 연주가 끝났을 때 들였던 그 의심도 두려움도 없고 외로움마저 없는 침묵. 사랑은 환상이나 감상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것 없이도 사랑은 이미 사랑이었고 절실히 필요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것만으로, 허기를 채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니까. 살아 있다는 걸 실감할 때 죽음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니까. 자식들이 커 간다는 그 실감 속에서 부모들이 다 그런 거지, 한마디로 자신들의 늙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듯. 그 긍정, 인정이 슬프면서도 기쁜 것이듯 사랑도 기쁘고 그래서 슬펐다. 모두, 모든 것이.
(381-382)
최악이라는 건 생각하자면 끝이 없어. 우리 벌써 거기에 대해서는 얘기했잖아. 진짜 최악의 의미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뜻이고 뭐라도 할 수 있는 게 아직 있다면 최악은 아니야. 그러니 최악이란 늘 접어 놔야 하는 거지. 할 수 있는 건, 언제 어디서든 늘 있어. 그게 없다면 어차피 안 되고 안 될 거, 그냥 불운이고 불행일 뿐이야.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그런 건 그저 마음과 시간을 스스로 좀먹는 짓일 뿐이지. 거기에 붙들리면 아무것도 해 나갈 수가 없어. 할 수 있는 만큼만, 그걸 피하고 대비할 만큼만 하게 되니까. 일이란 건, 그렇게 하는 게 아냐. 방어가 아니라 공격이지.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해야 하는 걸 해야 되는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일이 요구하는 걸 해야 하고, 그걸 할 때까지 해내는 거야. 그래야 성장이라는 게 되는 거니까, 그래서 성장이라는 게 힘든 거고. 하진은 진지하게 나를 봤다. 할 수 있는 걸 하는 게 아니라 해내야 하는 걸 하는 거, 그게 일이야. 그걸 알면 할 수 있어. 죽고 사는 일도 아니고 다들 그렇게 뭔가를 해내니까.
(488-489)
아버지가 말했다. 세상만사 다 길이 있는 법이다. 왜냐하면 다들 이렇게 길을, 누가 봐도 아무 쓸 데 없는 길을 뚫어 놓으니까. 이렇게 뚫어야 알뜰살뜰 여기저기서 기름칠해 주는 사람이 생기거든. 시키지 않아도 똥 치워 주는 사람들이 줄을 서고, 우습지. 크고 빳빳한 기름종이들 살랑살랑 흔들어 주면 다들 혓바닥 내밀 듯 손을 내밀지. 아버지는 나를 봤다. 인간이란 다들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죄 한두 개쯤은 지어 가면서 사는 거다. 어느 자리쯤 올라서면 짓지 않을 도리도 없고, 짓지 않을 이유도 없지. 감당할 수 있으니까. 감당이 되면 죄가 아니니까. 감칠맛이 돌지. 남들 다 하는 거 하면서, 지키라는 거 지켜 가면서 남들 안 볼 때 한번씩 혀를 낼름, 낼름해서 핥아 보는 그맛이 혀에 감겨서 잊히질 않거든. 그럴 때야 사는 거 같으니까, 사는 맛이 그거니까. 남들 못하는 걸 나만 할 때, 남들 모르게 나만 아는 걸 하는, 바로 그때.
(500)
무엇을 사는지(購買)가 어떻게 사는지(生活)고 살 수 있는 능력이 살 수 있는 능력이다. 아버지는 톡톡 시가를 떨어 재떨이에 떨어진 재를 시가 끝으로 부쉈다. 그러고는 끄트머리를 세워 내게 보였다. 여기 있는, 요 타고 있는 까만 재, 이게 우리 인간이야. 그 가운데에 빨갛고 뜨거운 불이 세상이지, 불가에서 말하는 아수라. 아버지가 깊게 한 모금을 빨자 빠직거리며 담뱃잎이 타 들어갔다. 가운데가 빨갛게 환해졌다.
(566)
마음이라는 건 세면대 같아요. 거기엔 뭘 붓든 모두 한곳으로 흘러 들어가죠. 우리 자신이라는 그 구멍으로요. 하지만 그 구멍이 이어지는 곳은 결국 하수구, 하수도예요. 썩어 가고 악취를 풍기고 끈적거리고 질척거리는, 토악질 나는 것들밖에 없죠. 거긴 우리한테 묻은 더러운 걸 씻어 내는 데지 우릴 욱여넣어서 더러워지는 데가 아니에요.
(659)
사랑의 본연이 그런 것이기 때문에 사랑은 다른 사랑과 비교당하지도 평가당하지도 않았다. 가장 좋은 것, 값비싼 걸 해 주는 게 사랑이 아니니까, 최악을 지워 주고 최악이 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 모든 수고를 다해 마지막까지 같이 있어 주는 것으로 충분하니까, 같이 있어 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게 바로 사랑하는 사람의 의미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일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같이 있는 것만으로 충분한 사람이 된다는 건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 믿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뜻이니까. 그게 늘 하진에게 해 주지 못한 것, 그래서 매번 틀리고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사랑한다면서도 이해하는 만큼만 이해하고, 믿을 수 있는 만큼만 믿으려 했으니까. 그래서 그건 이해도 믿음도 아니었다. 알던 만큼만 아는 건 앎이 아니니까, 모르던 걸 아는 앎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