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어린 나이에 등단하며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선사했던 이혜미 시인이 등단 5년 만에 첫시집 『보라의 바깥』을 펴냈다. 화려한 감각이 돋보이는 새롭고 싱싱한 감수성의 세계가 펼쳐지는 이 시집에서 시인은 사랑과 관계 속에서 단단해져가는 한 존재의 목소리를 날카로운 아름다움으로 담아낸다. 대상에 대한 깊이있는 관찰과 그에 걸맞은 이미지 묘사가 강렬하면서도 매력적이다.
사랑 속에서 꿈꾸고 상처 안에서 성장한 시인은 마침내 자신의 길을 분명하게 발견한다. 그 길은 다시 이 모든 세계의 시작이기도 하며 끝이기도 한 사랑으로 이어진다. 사랑을 탐닉하는 것이 곧 나의 세계를 찬란히 하는 것이라면 그 속에서 겪을 그 모든 것들로부터 눈을 돌려선 안될지 모른다. 이혜미의 시는 바로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아름다우면서 처연한 기록이다. 『보라의 바깥』이 그렇듯 이 시인이 또 어떤 사랑에 자신의 존재와 언어를 맞댈지 궁금해진다.
저자 : 이혜미(李慧美)
1988년 경기 안양에서 태어났다. 건국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 국문과 대학원에 재학중이다. 2006년 중앙신인문학상에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2009년 서울문화재단 문예창작기금을 받았다.
제1부
얼음편지
사라질 권리
비취
어비목(魚比目)
보라의 바깥
0번
피어리 아라베스크
물의 방
측백 그늘
제3통증
푸른 꼬리의 소년
토요일의 주인
만월, 애태타
리샨
제2부
문득 말하기를 멈추고 우리는
침몰하는 저녁
춤의 독방
표면장력
카오스모스
거울 속 일요일
들키지 마라
불면
이제 누가 리라를 연주하지?
청록색의 여인
마트로시카
미러볼
블랙아웃
농도 짙은 방
제3부
요천(夭天)
혓바늘
한 마리의 어둠
방란(放卵)의 밤
달 속에 청어가 산다
그믐밤
초경(初鏡)
새벽꽃
은연
빗속의 블루마블
3초 튤립
퍼플 버블
홀
제4부
어느 새
귓속말
소름
팔걸이가 있는 의자
링반데룽
각인(刻印)
곁
골목의 가감법
메스칼린
인어의 시간
스텝 바이 스텝
풍문
투어(鬪魚)
해설 - 허윤진
시인의 말
서늘한 사랑의 아름다움, 그리고 시의 매혹
2006년, 어린 나이(88년생)에 등단하며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선사했던 이혜미 시인이 등단 5년 만에 첫시집 『보라의 바깥』을 펴냈다. 화려한 감각이 돋보이는 새롭고 싱싱한 감수성의 세계가 펼쳐지는 이 시집에서 시인은 사랑과 관계 속에서 단단해져가는 한 존재의 목소리를 날카로운 아름다움으로 담아낸다. 대상에 대한 깊이있는 관찰과 그에 걸맞은 이미지 묘사가 강렬하면서도 매력적이다.
이혜미의 시는 현실과 환상의 중간 지점을 떠돌며 서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시적 화자가 존재하는 세계는 “붉고 비린 조각달”(「그믐밤」)이 흐르는 어둠속이다. “온도를 버린 광점들로 가득한” 세계 속에서 고독의 극점에 닿은 화자는 이 세계를 함께할 타인의 존재를 기다린다. “눈먼 돌산들과 얼음안개 속에서” 마주한 타인과의 관계는 이 서늘하고 고독한 ‘빙하’의 세계 속 화자를 외부와 연결시킬 “물의 끈”(「피어리 아라베스크」) 이 된다.
너는 해초마냥 나를 휘감았네 내 머리카락도 천 개의 손이 되어 너와 얽혀들었지 손가락 사이로 푸른 비늘 출렁이는데, 이끼 덮인 너의 몸은 요동치는 한 마리 물고기였네//(…)//수맥의 흐름 속으로 콸콸 흐르고 싶은 내가 또 네가 아찔했다 고단한 뿌리를 움찔거리는 너, 그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치명(致命)//너의 비릿한 아가미 속에 들던 날, 이제 그만/나를 모른 체하고 싶었네(「측백 그늘」 부분)
이 관계를 이룬 타인은 다름아닌 사랑하는 사람이다. 연인과의 사랑을 통해 시인은 “싱싱한 진물이 흘러나”오는 “오래된 상처”(「풍문」)를 위로받으며, “광물의 조흔색을 흉내내며 당신 살에 얼굴을 부비”(「얼음편지」)고 그와 한 몸이 되려는 욕망을 놓지 않는다. 그러나 사랑의 결과는 환상과는 다르게 “서로를 흉내내다가 서로에게 흉(凶)이”(「투어(鬪魚)」) 된다. 시인은 서로를 “만져줄수록 흐려지고 미천해지는 병에 걸”(「물의 방」)리는 아픔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사랑의 현실을 인식하기에 이른다.
빛나는 가시를 세우고 너에게 갈게//(…)//어쩌면 이렇게 단단하고 빛나는 것을 몸 안에 담가두었니//뼈, 거품 속에서 떠오른 얼굴. 그 얼굴은 심장에서 가장 먼 곳에 있어 네가 머물던 자리에 다른 비참이 들어선다 서로를 흉내내다가 서로에게 흉(凶)이 되는 순간. 늑골을 숨기고 촉수를...서늘한 사랑의 아름다움, 그리고 시의 매혹
2006년, 어린 나이(88년생)에 등단하며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선사했던 이혜미 시인이 등단 5년 만에 첫시집 『보라의 바깥』을 펴냈다. 화려한 감각이 돋보이는 새롭고 싱싱한 감수성의 세계가 펼쳐지는 이 시집에서 시인은 사랑과 관계 속에서 단단해져가는 한 존재의 목소리를 날카로운 아름다움으로 담아낸다. 대상에 대한 깊이있는 관찰과 그에 걸맞은 이미지 묘사가 강렬하면서도 매력적이다.
이혜미의 시는 현실과 환상의 중간 지점을 떠돌며 서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시적 화자가 존재하는 세계는 “붉고 비린 조각달”(「그믐밤」)이 흐르는 어둠속이다. “온도를 버린 광점들로 가득한” 세계 속에서 고독의 극점에 닿은 화자는 이 세계를 함께할 타인의 존재를 기다린다. “눈먼 돌산들과 얼음안개 속에서” 마주한 타인과의 관계는 이 서늘하고 고독한 ‘빙하’의 세계 속 화자를 외부와 연결시킬 “물의 끈”(「피어리 아라베스크」) 이 된다.
너는 해초마냥 나를 휘감았네 내 머리카락도 천 개의 손이 되어 너와 얽혀들었지 손가락 사이로 푸른 비늘 출렁이는데, 이끼 덮인 너의 몸은 요동치는 한 마리 물고기였네//(…)//수맥의 흐름 속으로 콸콸 흐르고 싶은 내가 또 네가 아찔했다 고단한 뿌리를 움찔거리는 너, 그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치명(致命)//너의 비릿한 아가미 속에 들던 날, 이제 그만/나를 모른 체하고 싶었네(「측백 그늘」 부분)
이 관계를 이룬 타인은 다름아닌 사랑하는 사람이다. 연인과의 사랑을 통해 시인은 “싱싱한 진물이 흘러나”오는 “오래된 상처”(「풍문」)를 위로받으며, “광물의 조흔색을 흉내내며 당신 살에 얼굴을 부비”(「얼음편지」)고 그와 한 몸이 되려는 욕망을 놓지 않는다. 그러나 사랑의 결과는 환상과는 다르게 “서로를 흉내내다가 서로에게 흉(凶)이”(「투어(鬪魚)」) 된다. 시인은 서로를 “만져줄수록 흐려지고 미천해지는 병에 걸”(「물의 방」)리는 아픔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사랑의 현실을 인식하기에 이른다.
빛나는 가시를 세우고 너에게 갈게//(…)//어쩌면 이렇게 단단하고 빛나는 것을 몸 안에 담가두었니//뼈, 거품 속에서 떠오른 얼굴. 그 얼굴은 심장에서 가장 먼 곳에 있어 네가 머물던 자리에 다른 비참이 들어선다 서로를 흉내내다가 서로에게 흉(凶)이 되는 순간. 늑골을 숨기고 촉수를 오래 어루만지면/우리는 두 개의 날카로운 비늘. 아름다운 모서리가 남겨졌다(「투어(鬪魚)」 부분)
사랑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난 시인은 연인과 “함께한 계절이 하루보다 짧았”던 시간을 이제 조용히 회상한다. 사랑이란 “엇대인 두 아가미”로 “얽혀들면”(「어비목(魚比目)」)서도 “서로의 발가락을 물고 각자의 바깥이 되어”(「거울 속 일요일」)가는 관계라는 성찰에 다다르면서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된다. 요컨대 사랑이란 고독으로 얼어붙은 시인의 세계를 녹이는 것이 아니라 그 빙하의 광활함 속에서도 시인이 자기 본연의 색으로 빛을 발하게 해주는 매개체인 것이다.
이제 새는 제가 낳은 알을 깨트리러 가는 중이다 새의 부리 속에서 시든 일력이 펄럭이고 숫자들은 하나둘 흘러내리고 소년들은 무럭무럭 자라 소녀들의 젖가슴을 탐했다 젖몽우리가 단단해진 소녀들의 성생활은 대부분 강간으로 시작된다 새의 부드러운 혀를 닮은 소음순이 자라고 비린 눈망울을 반짝이며 소녀들은 펄 매니큐어를 칠한다 손톱 속에 갇힌 달이 오열하는데 그녀들은 모른 척 서둘러 감정아이들을 낳았다 둘러보면 안개처럼 매일매일 새로 태어나는 신생아들뿐이었다 죽은 아비들은 흐려지고 눈 깜짝할 새, 땅속에 내렸던 뿌리를 거두고//어느새/날개를 털며 날아가는,(「어느 새」 부분)
사랑 속에서 꿈꾸고 상처 안에서 성장한 시인은 마침내 자신의 길을 분명하게 발견한다. 그 길은 다시 이 모든 세계의 시작이기도 하며 끝이기도 한 사랑으로 이어진다. 사랑을 탐닉하는 것이 곧 나의 세계를 찬란히 하는 것이라면 그 속에서 겪을 그 모든 것들로부터 눈을 돌려선 안될지 모른다. 이혜미의 시는 바로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아름다우면서 처연한 기록이다. 『보라의 바깥』이 그렇듯 이 시인이 또 어떤 사랑에 자신의 존재와 언어를 맞댈지 궁금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녀의 시에 또 얼마나 매혹될지…
유리로 만든 베일을 쓰고 대기권을 바라본다 나는 이곳에 색을 짊어지러 온 사람, 얼음조각 속에 우연히 들어간 공기방울처럼 스스로 찬란할 수 있을까 관여할 수 없고, 무엇과도 연관되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그것을 만져보는 순간, 세계는 투명하고 위태롭게 빛난다//이제야 나는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눈을 감고/몸 안을 떠다니는 흐린 점들을 바라본다/발밑으로 빛의 주검들이 흘러내렸다(「보라의 바깥」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