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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타이(Altai), 투바(Tuva)등은 함경도(咸鏡道)지방 (제2편)
烏粱海(오량해)=兀良哈(올량합)의 正體(정체)
(제 2 편)
○ 올량합(兀良哈)에 대한 조선사(朝鮮史) 기록(記錄)은, 손으로 세기에 벅찰 정도로 많이 기록(記錄)되어 있는데, 조선의 함경도(咸境道)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주로 있었다. 아래의 예문(例文) 몇 개를 보자.
(4) 高麗史節要 공양왕(恭讓王) 2 (임신 4년(1392), 대명 홍무 25년) :《올량합(兀良哈)과 알도리(斡都里)가 와서 조회하는데 서로 윗자리를 다투었다. 옛날에 시중 윤관(尹瓘)이 우리 땅을 평정하고, 비(碑)를 세워, '고려의 땅[高麗地境]이다.'라고 썼습니다. 지금 경내의 인민이 모든 군사(軍事 관직)의 위신을 사모하여 왔을 뿐입니다." 하며, 드디어 서로 다투지 않았다. 태조가 올량합과 알도리를 자기 집에서 대접하였으니, 그들이 성심으로 봉종하였기 때문이다. 알도리는 곧 동여진이다. ○ 알도리와 올량합 등 여러 추장에게 모두 만호ㆍ천호ㆍ백호의 관직을 차등 있게 주고 의복과 마필을 내려 주었다. 또 여러 부락에 방을 써 붙여 불러서 위로하였다.》고 하였다.
(5) 왕조실록(王朝實錄) 태조실록(太祖實錄) 총서 : 《兀良哈及斡朶里來朝爭長.斡朶里曰:吾等之來,非爭長也.昔侍中尹瓘平吾土立碑曰:高麗地境. 今境內人民,皆慕諸軍事威信而來耳.遂不與爭.太祖享兀良哈,斡朶里於邸,以其誠服也. : 올량합(兀良哈)과 알타리(斡朶里)가 와서 조회하면서 윗자리를 서로 다투니, 알타리는 말하기를, "우리들의 온 것은 윗자리를 다투는 것은 아닙니다. 옛날에 시중(侍中) 윤관(尹瓘)이 우리 땅을 평정하고 비석을 세워 ‘고려지경(高麗地境)’이라 했는데, 그 지경 안의 인민들이 모두 제군사(諸軍事)137) 의 위엄과 신의(信義)를 사모하여 왔을 뿐입니다." 하면서, 마침내 윗자리를 다투지 아니하였다. 태조가 올량합과 알타리를 저택(邸宅)에서 대접하였으니, 그들이 성심으로 복종한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6) 국조보감 제11권 / 세조 2 (5년 경진, 1460) : 《1월. 올량합(兀良哈)의 대호군 김저비(金這比)가 아비거(阿比車)의 군사와 힘을 합해 1000여 명이 몰래 회령(會寧) 장성(長城) 밖에 주둔하고 있다가 목책(木柵)을 부수고 쳐들어와 노략질하였다. 함길도 도절제사 양정(楊汀)이 군영의 병사 700여 명을 거느리고 나가 크게 격파하고 500여 명의 목을 베자, 적이 대부분 우마와 기장(器仗)을 버리고 달아났다. 중략(中略)》하였다.
(7) 일성록(日省錄) 정조 23년 기미(1799) 12월 22일(을사) : 《知事 洪良浩陳箚進興王肇乘四編賜批 : 지사(知事) 홍양호(洪良浩)가 차자(箚子)를 올리고 흥왕조승(興王肇乘) 4편(編)을 올린 데 대해, 비답을 내렸다. 箚略曰洪惟我東方有國粵自邃古檀氏之起竝於陶唐箕聖之封肇自周武衣冠悉遵華制文字不用番梵或稱小中華或稱君子之國而第自王氏之世壤接靺鞨媾連蒙元故禮敎不興倫紀不明檀箕之遺風漠然不可見矣. : 차자의 대략에 : “삼가 생각건대 우리 동방은 태곳적부터 나라가 있었으니, 단군(檀君)이 왕조를 일으킨 것은 당요(唐堯)와 나란한 시대이고 기자(箕子)가 봉해진 것은 주(周)나라 무왕(武王) 때였습니다. 의관은 모두 중국의 제도를 따르고 문자는 오랑캐 문자를 사용하지 않기에 소중화(小中華)라고 일컬어지기도 하고 군자의 나라라고 일컬어지기도 하였습니다. 다만 고려 시대부터 말갈(靺鞨)과 국경을 접하고 원(元)나라와 혼인을 하였으므로 예교(禮敎)가 일어나지 않고 윤기(倫紀)가 밝아지지 않아 단군과 기자의 유풍(遺風)을 아득하게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何幸天開鴻荒運屆熙明我太祖大王以聖神之資當千一之運創業垂統立經陳紀斥 : 매우 다행스럽게도 하늘이 크게 열리고 운수가 밝아지매 우리 태조대왕(太祖大王)이 거룩하고 신령한 자질로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맞아 왕업을 일으키고 통서(統緖)를 드리우며 경법(經法)을 세우고 기강(紀綱)을 폈습니다. 佛老之異敎敷先王之大法文章煥乎商周聲明耀于寰海琉球入貢暹羅獻款兀良哈源了浚之屬相率而聽約束. : 불교와 노자(老子) 같은 이단(異端)의 가르침을 배척하고 선왕(先王)의 큰 법을 펴자 문장이 상(商)나라와 주나라보다도 빛나고 명성은 온 세상에 빛나게 되어 유구(琉球)가 입공(入貢)하고 섬라(暹羅)가 귀순하고 올량합(兀良哈)과 원료준(源了浚) 같은 무리도 서로 이끌고 와서 약속을 맺었습니다. 西連渤澥東盡瑟海橘柚之包貂豽之皮自南自北筐篚相望.中略. : 서쪽으로는 발해(渤澥 발해(渤海))를 접하고 동쪽으로는 슬해(瑟海)까지 닿아 귤과 유자 같은 과일과 담비와 살쾡이의 가죽이 남쪽으로부터 북쪽으로부터 광주리에 담겨 줄지어 진상되었습니다. 중략(中略).》
➊ 섬라(暹羅)가 귀순하고(獻款) : 정성(精誠)으로 진상품(進上品)을 보내는 것은, 곧 화친(和親)이나 복종(服從), 또는 의탁(依託)했다는 것을 나타낸다는 뜻이다. 반도(半島) 땅과 섬라(暹羅) 곧 태국(泰國)은, 수륙(水陸) 직선거리(直線距離) 3800km인 일만(一萬) 리가 떨어져 있는데, 뭍으로 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不可能)하고, 배를 타고 간다면 돌고 돌아 약 5,500km를 가야한다.
당시(當時)의 사정(事情)으로 보면 반도(半島)와 섬라(暹羅)는, 상하(上下)관계(關係) 또는 화친(和親)하여 서로 좋은 관계(關係)를 유지(維持)할 수 있는 범위(範圍)를 넘어서는 그런 먼 나라이야기다.
➋ 서(西)쪽으로 발해(渤海) : 서쪽으로 발해(渤海)란 말도 어불성설(語不成說)이요,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왜냐하면 발해(渤海)는 산동반도(山東半島)와 요동반도(遼東半島)의 북(北)쪽 바다를 말하기 때문에 반도(半島) 땅과는 전혀 관계(關係)가 없다.
또 발해(渤海)는 내륙(內陸)의 큰 호수(湖水)인 내해(內海)를 일컫는 말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바다(海)와는 전혀 관계(關係)없다.
➌ 동(東)쪽으로 슬해(瑟海) : 함경도(咸鏡道)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슬해(瑟海)가 있다고 한다. 〈수창록(酬唱錄)의 비파호(琵琶湖)를 지나면서 우연히 읊음에서〉보면 : 〈北臨瑟海南琶水 : 북으로 슬해(瑟海), 남으로 파수(琶水)에 다다르니〉라고 하였고,
〈왕조실록 숙종 41년 을미(1715) 7월 1일(갑오) : 북병사 조상주가 북방 국경 지역의 호인(胡人)의 일에 대해 논하다 : 슬해(瑟海)는 경흥부(慶興府)에서 동쪽으로 4, 50리 쯤 떨어져 있는 바닷가라 하는데, 들이 넓고 땅이 비옥하여 옛날에는 번호(藩胡)가 많이 살았다고 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당시의 함경도(咸鏡道) 북변(北邊)의 동(東)쪽 바다를 뜻한다고 보아지는데…
위의 글 (3)의 설명으로 보면 : 슬해(瑟海) : 함경도(咸鏡道)는, 중원(中原)북방(北方)과 서북방(西北方)지대(地帶)를 관할(管轄)했기 때문에, 동(東)쪽 바다란 「길이는 630km, 폭은 20~80km, 둘레는 무려 2,000km 인 바이칼 호수(Baikal 湖水)」를 칭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몽고어(蒙古語)로 '신성한 바다'라는 뜻의 달라이노르(Dalai-nor), 전한서(前漢書)에서는 패가이 호(貝加爾 湖), 백해(白海)라고도 했다고 전한다.】
※ 바이칼(Baikal) 호수(湖水)는 슬해(瑟海) / 사진출처 : 인터넷
➍ 귤(橘)과 유자(柚子) : 우리 카페에서 아주 세밀(細密)하게 다룬 주제(主題)인 바, 「반도(半島) 땅과는 전혀 관계(關係)없다.」 당시(當時)로 보면 : 〈장강(長江) 이남(以南)과 동남아(東南亞)지방〉을 말한다.
➤ 위와 같은 많은 기록(記錄)으로 볼 때 : 당시(當時) 〈조선(朝鮮)의 함경도(咸境道)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오량해(烏粱海)=올량합(兀良哈)’이 있었고〉, 이곳은 〈현재(現在)의 외몽고(外蒙古) 서북방(西北方)지대고, 러시아(Russia) 땅이며, 「벨루하 산(山)=금산(金山)=일타이산=아이태산(阿爾泰山)」에서 동북(東北)으로 뻗어 내린 당노산맥(唐努山脈)북쪽에 이들이 살고 있었다.〉는 설명(說明)이다.
이들은 3개의 부(部)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이들 세 부(部)는, “오늘날의 카자흐스탄(Kazakhstan) 동북(東北)·신강성(新疆省) 북방(北方)·외몽고(外蒙古) 서북(西北)·러시아(Russia)의 알타이(Altai)·투바(Tuva)공화국(共和國)등에 나누어져 살았다.”는 이야기다.
※ 사진출처 : 네이버
조선(朝鮮)의 함경도(咸境道)는 : 중원(中原) 대륙(大陸) 땅의 북방지대(北方地帶)와 서북방(西北方)지대를 관할(管轄)했다. 이것은 누구도 부인(否認)할 수 없다. 왜냐하면 조선사(朝鮮史)에서도, 명사(明史)에서 그렇다고, 지형(地形)지세(地勢)까지, 친절(親切)하게 설명(說明)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은, 이제 죽어야 한다.」 이런 망국사관(亡國史觀)은 이제 무덤 속으로 들어가고,〈조선인(朝鮮人)에 의한, 조선(朝鮮)을 위한, 조선사(朝鮮史)가 만들어져야 한다.〉새로운 한국(韓國)의 미래(未來)를 열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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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위의 글(1)의 ➌에서 <朶 顔. 福 餘. 泰 寧>의 삼위(三衛)에 대해, 명사(明史)를 보면 : 홍무(洪武)22년에 삼위(三衛)를 설치하였다고 하였는데,
【烏粱海 : 亦作兀良哈,明時居直隷長城外.卽蒙古東部地方,爲朶顔.福餘.泰寧三衛,後徙外蒙古西北部,其種爲突闕族,語言風俗,則以喀爾喀人,自稱東巴. : 오량해(烏粱海)는 또 올량합(兀良哈)이다. 명(明)때에 직례 장성(長城)밖에서 살았다. 곧 몽고(蒙古) 동부지방인데, 타안(朶顏)·복여(福餘)·태녕(泰寧) 삼위(三衛)로, 뒤에 몽고(蒙古) 서북부(西北部)로 옮겨갔다. 그 부족(部族)은 돌궐(突厥)족으로, 언어(言語)와 풍속(風俗)등이 객이객(客爾客)사람들로, 스스로 동파(東巴)라고 불렀다. 】고 하였는데, 삼위(三衛)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 명(明) 태조(太祖)가 설치(設置)했다는 삼위(三衛)는 ‘오량해(烏粱海)=올량합(兀良哈)’들이 살던 땅에, 세 개의 위(衛)를 만들고, 여러 추장(酋長)들에게 벼슬을 내리고, 안무(按撫)했다는 이야기다. 위에서 설명(說明)했듯이 삼위(三衛)의 부족(部族)들은, 돌궐족(突厥族)의 후인(後人)으로, 오량해(烏粱海) 곧 올량합(兀良哈)이란 자들이다.
《明史:朵顏·福余·泰寧,高皇帝所置三衛也.其地為兀良哈,在黑龍江南,漁陽塞北.漢鮮卑,唐吐谷渾,宋契丹,皆其地也. : 명사(明史) : 타안(朶顏)·복여(福餘)·태녕(泰寧)은, 고황제(高皇帝)가 삼위(三衛)를 설치하였다. 그 땅에 올량합(兀良哈)이 있었는데, 흑룡강(黑龍江) 남(南)쪽, 어양새(漁陽塞) 북(北)쪽으로, 한(漢)때의 선비(鮮卑), 당(唐)때의 토곡혼(吐谷渾), 송(宋)때의 글란(契丹)이 있던 곳으로, 모두 그 땅이다. 元為大寧路北境.高皇帝有天下,東蕃遼王,惠寧王,朵顏元帥府相率乞內附. : 원(元)때의 대녕로(大寧路) 북쪽 지경이다. 고황제(高皇帝) 천하(天下)로, 동(東)쪽 번왕(藩王)으로 요왕(遼王)과 혜녕왕(惠寧王), 타안(朶顏) 원수부(元帥府)가 서로 무리를 이끌고 내부(內附)하기를 구걸하였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그 공통(共通) 분모(分母)는, 외몽고(外蒙古) 서북부(西北部) 땅인 당시(當時)의 오량해(烏粱海) 곧 올량합(兀良哈)의 땅에 세 개의 위(衛)를 고황제(高皇帝)가 설치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곳 땅은,
〈흑룡강(黑龍江) 남(南)쪽, 어양새(漁陽塞) 북(北)쪽 땅이어야 하고, 한(漢)때의 선비(鮮卑) 땅이어야 하며, 당(唐)때의 토곡혼(吐谷渾) 땅이어야 하고, 송(宋)때의 글란(契丹) 땅〉이어야 한다.
이러한 곳이 〈조선(朝鮮)의 함경도(咸鏡道) 이북(以北) 땅이었다.〉는 설명(說明)이고, 고려(高麗) 때 윤관(尹瓘)이 이들을 토벌(討伐), 개척(開拓)했으나, 이들에게 다시 되돌려 준 땅이다.
➤ 이곳은 「우랄(Ural)산맥(山脈) ∼ 알타이 산(Altai 山) = 금산(金山) ∼ 당노산맥(唐努山脈) 사이(間)의 땅이다.」
○ 우리 카페(Cafe)는 :〈왜곡(歪曲)되지 않은, 조작(造作)되지 않은, 과장(誇張)되지 않은, 올바른 조선(朝鮮) 역사(歷史)를 위해 계속(繼續) 노력(努力)할 것입니다.〉(제 1, 2편 / 끝)
2018년 04월 01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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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발칸반도와 그 북방 동구라파, 그리고 중앙아세아!
러시아의 모스크바로부터 우랄산맥, 그리고 서시베리아분지와 극동시베리아지대!
이 모두에는 과거의 조선왕조(총칭)의 흔적들이 널려 있는 곳이다.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그게 무슨 소라야?"할 수 있지만, 과거 일백여년 이전으로 만 되돌아가 보면, 이야기는 전려 달라진다.
조선왕조의 후국이라는 대한민국은 우리들 발등위에 불도 못 끄는 주제다 보니, 세상 곳곳에서 벟어지는, 발견되는, 찾아 낸 옛 조선왕조의 흔적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뭐라고 코멘트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진실은 밝혀지기 마련이다.
시베리아 전체가 바로 대조선이라기 보다, 함경도에 속한 지방이네요. 감사합니다.^^
그지역이 함경도이고 함경도란 이름을 갖게한 함흥은 어딜까요?
태조 이성계의 고향이고 조선대대로 중요한 곳이니 궁금하네요~
지도 편달 부탁드려요 문무님^^
안녕하세요. <테리>님!
관심과 성원을 보내주시는 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사실 태조 이성계의 고향이라는 달단동과 함흥과 영흥등의 정확한 위치를 여러 문헌을 토대로 몇 군데 추려 열심히 고찰하고 있습니다.
머지 않아 그곳을 찾아낼 것으로 판단이 됩니다.감사드리며,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