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空)과 불공(不空)
장자가 자기 부인의 장례식 때 장구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놀란 문상객들에게 다음과 같은 우화를 들려준다.
옛날 어느 나라의 공주가 시집을 가게 되었다. 공주는 이 미지의 세계가 던져 주는 불안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부모님, 무엇하나 부족할 게 없는 지금의 생활에서 떠나 전혀 미지의 한 남자에게 자신을 맡긴다는 것이 불안하고 초조했던 것이다.
울며불며 시집을 안 가겠다고 했지만 불가항력이었다. 날은 다가오고, 속절없이 공주는 이웃나라로 가게 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이제 공주는 두 아이의 어머니로서 한 사람의 아내로서 최상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공주는 지금 행복을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내가 왜 결혼하지 않겠다고 망설였던가! 지금 이렇게 행복하지 않은가, 그 당시에는 미처 상상하지 못하던 보람이 있고, 남편의 깊은 사랑이 있지 않은가.
공주는 혼자 고소(苦笑)를 지었다.
장자는 이 우화를 죽음에 비유한다. 우리가 죽고 난 다음 그 때 왜 그렇게 죽음을 두려워했는지 이해할 수 없노라는 독백을 할지 누가 알겠느냐는 것이다. 장자가 장구를 치며 노래한 이유인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삶을 사랑한다. 다시 말해서 죽음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반야심경에서는 이와 같은 인간의 존재방식에 대해 '있다는 생각'을 부정하며, 또한 '없다는 생각'도 부정하고 있다. 있다는 것의 부정이 공(空)이고, 없다는 것의 부정이 불공(不空)이다.
그러니까 공(空)과 불공(不空)의 도리에서 보면 다만 삶을 절대화해서 생각하지도 않을 뿐더러 늙고 죽음을 다만 슬픈 일로 생각하지도 않게 될 것이다.
먼저 있다는 것의 부정을 보자. 공의 입장에서 볼 때, 무명(無明), 행(行), 식(識), 생(生), 노사(老死) 등 열두 가지 인과(因果), 그 하나 하나는 어느 것도 실체를 파악할 수 없다.
무명(無明)이라고 했지만 무명이라는 실체가 도대체 어디 있는가? 행도, 식도, 노사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어김없이 인간에게 찾아 드는 것이지만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요, 죽음이라는 별개의 힘이 있어서 죽도록 유도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도 조만간 죽고 병들어서 죽게 된다고 하는 실제적인 힘의 예측일 뿐 물리적으로 또는 형이상학적으로 적출할 수 있는 사실이란 없다.
그러면 반대의 경우 그런 것이 없다는 생각의 부정이란 무엇일까? 무명(無明)이라는 것의 실체가 없다고 해서 그대로 인간을 방치할 때 그 사람은 어떻게 될까? 연마도 없고 수련도 없는 상태의 인간, 결국 그는 무명의 굴레 속에서 중생이 가진 그릇됨 그대로 살 수 밖에 없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다. 없다는 생각도 편견인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무명이 없는데 무명의 다함이 있을 수 없다. 즉 인간 존재의 여러 가지 형태가 그것대로 존재할 리는 만무한 것이다.
옛 선사(禪師)들의 생사일여(生死一如)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조선의 승병장(僧兵長) 서산대사의 오도송(悟道頌)에 이러한 구절이 있다.
“지나가던 나그네와 주인이 서로 간밤의 꿈 이야기를 주고 받네. 꿈 이야기 주고받는 나그네와 주인, 지금의 삶이 꿈인지를 아는가, 모르는가?”
구태여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지 않는다. 공(空)도 불공(不空)도 아니다. 다만 여여(如如)하고 담담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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