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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난 _고난 받는 형제들을 위하여 信天함석헌
1977년 7월 8일 오후 6시 기독자 교수협의회주관으로 가진 ‘고난을 받는 형제들을 위한 기도회’에서 있었던 咸錫憲 선생의 강연을 옳긴 것이다. (씨알의소리 1977년 7월호)
사람은 모두 저마다 자기중심으로 생각을 하는 것이니 다른 분들은 모르겠으나, 나는 이 몇 년 사이, 특히 2∼3년 내에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면, 감탄을 금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매주 목요일 금요일에 이렇게 모여서 ‘고난’을 제목으로 해서 기도를 드리고‥‥‥이렇게 해온 것이 벌써 몇 해입니까?
나는 이날까지 팔십이 가까워 오도록 직업이라고는 10년 동안 오산학교에서 교사 노릇한 것 외에는 쥐어본 일이 없습니다. 그때 선생 노릇을 하면서 한동안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서 글을 쓴 것이 있는데 한마디로 얘기하면 ‘고난의 역사’입니다. 그때 젊은 마음에도 이런 말을 해도 될까, 그랬는데 생각을 하고 해도 우리 민족의 역사를 그렇게 밖에는 어떻게 달리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말을 할 때에는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원시림에 발을 들여놓는 것 같은 그런 심정이었는데 일부러 만든 말을 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민족은 이 세상에 고난을 받기 위해서 나온 민족이다, 이렇게 이야기하자니 그게 그렇게 쉬웠겠습니까. 삼십 청년에 그런 소리가 왜 나왔었나, 지금와서도 스스로 생각해봅니다만 정직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그렇게 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왜 역사를 그렇게 보느냐고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어요. 그중에서도 기억나는 분이 安炳茂박사입니다. 아마 안박사가 맞을 거에요. 피난 전에 젊은 분들이 모여서 「野聲」이란 잡지를 내었는데 거기에 누군지 확실치 않으나, 그렇게 썼지요. 우리민족은 고난을 받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하는데 이건 너무 하지 않느냐, 어떻게 고난을 받기 위해서만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할 수 있느냐, 대강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작년 말에 안박사가 감옥에서 나와서 이 자리에서 이야기할 때 첫마디가 우리는 고난 받는 것이 우리의 직업인 것 같다는 말을 했어요. 그때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하여튼 ‘고난’을 제목으로 걸고 고난 받는 형제들을 위한 기도가 매주 계속되는 것이 벌써 3년을 넘었습니다. 앞에서도 얘기한 것처럼 나는 과거에도 우리나라 역사를 ‘고 난’이라는 생각으로 보았는데, 그래서 ‘고난’이라는 문제를 늘 마음에 두고 있는데, 왜 또 이렇게 ‘고난’을 제목으로 걸고 매주 기도를 해야 되었을까, 그런 생각을 다시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기독자교수협의회 주관으로 ‘고난 받는 형제들을 위한 기도회’를 하게 되어 교육하시는 분도 많이 나오시고 해서 이야기의 주제를 ‘고난’과 ‘교육’으로 해서 몇 마디 해보겠습니다.
종교와 교육
우선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가 믿고 있는 종교를 교육과 관련 시켜서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말 할 필요도 없이 종교는 교육과 떼어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한문으로 종교(宗敎)라고 할 때 종(宗)은 마루, 즉 으뜸이라는 것이고 교(敎)는 가르친다는 것, 즉 교육입니다. 그러니까 가르침의 으뜸이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웬일인지 종교에서는 교육이라는 생각을 안하는 것 같아요. 전혀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생각이 적습니다. 다른 종교는 그만두고라도 기독교인들이 그런 문제를 상당히 등한시 하고 있습니다. 크게 반성해야 할 문제입니다. 일본에 동대(東大)총장을 두 번이나 지낸 야나이라는 분이 이런 글을 쓴 일이 있습니다. 크리스천인데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고 있는 분입니다. 예수께서 전도에 성공한 것은 예수님의 생애에서 성공이라는 말이 퍽 어색하지만 보통 쓰는 말로 이야기한 겁니다. 예언자적인 직책과 교육자적인 직책을 조화 있게 잘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참 좋은 말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나라의 기독교 신자들을 본다면 종교의 교육적인 그런 생각이 아주 박약해요. 믿는 데는 열심이라면 아주 열심이에요. 그런데 그 열심이 교육적인 요소가 결함이 되니까 그런데서 나오는 폐단이 많습니다. 밖으로 보기에는 한국은 아주 강한 기독교 나라다, 아주 신앙이 좋다, 그렇게 칭찬해 주고 그러는데 우리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그렇지 못한 점이 많이 보입니다. 참 좋은 종교란 교육적이어야 하고 참 교육이란 종교적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둘은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종교 따로 교육 따로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종교와 교육뿐만 아니라 종교와 정치도 분리할 수 없고 교육과 정치도 분리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일은 여러 가지가 있기는 있지마는 분리할 수가 없습니다. 분리할 수 없는데 현대의 문화라는 것이 전문화해가면서부터 전문분야의 여러 부분으로 갈라지면서 근본 되는 연유를 잊어버리게 됐습니다. 근본이 다 같은데서 나왔으니 까 무엇을 하든지 근본을 늘 잊지 않고 돌아와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전문으로 해 가면서도 각각 그 여러 가지가 합해서 종합을 해가야 할 것입니다. 종교야말로 그런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옳을 것인데 아무래도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를 한번 봅시다. 나라가 아주 어려울 때 들어와서 한때는 나라를 건지는 데 큰일을 한 일도 있지만 그 뒤로는 참 잘못이 많아요. 3.1운동 때에는 기독교가 얼마나 큰 역할을 했습니까. 그러나 그 뒤에는 천당만 찾는 심령주의로 빠져들어 가 버리지 않았어요? 자유당 정권 때 그리고 그 뒤로, 도대체 우리나라 기독교가 이 나라를 위해 무얼 했습니까? 왜 그럴까? 저는 교육적이 못 되어서 그렇다고 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에서 성령으로부터 오는 은사를 네 가지로 보았습니다. 첫째는 사도라는 이름으로, 둘째는 예언자라는 이름으로, 다음으로는 교사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방언하는 것으로 그렇게 보았습니다. 그런데 바울 당시에도 아마 요새 우리나라처럼 방언이 크게 유행을 한 모양이지요, 모두 방언 방언 하니까 바울이 “나도 성령 받았다. 그래서 방언하는 능력 받았다. 방언으로 한다면 나도 누구 못지않게 방언할 수 있다. 그러나 방언 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덕이 되는 예언하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생명력 있는 종교
이러한 것이 바로 지금 말한 교육적인 것이 모자란 데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방언에만 귀 기울이는 사람은 누구냐. 교육이 못된 사람이에요. 그렇지 않고 믿긴 믿되 내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남 생각도 하고 내게 덕이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덕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말 신앙 아니냐,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도까지는 몰라도 적어도 예언자까지 올라가려면 그런 생각이 있어야 될 것 아니에요?
저번 김동길 박사도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처음부터 민중 속으로 파고들었어요. 물론 가톨릭도 처음에는 상류층으로 들어 왔지만 나중에는 민중 속으로 들어갔어요. 개신교는 처음부터 민중 속으로 들어갔지요. 그런 점이 우리나라 기독교의 좋은 점입니다. 그런데 민중 속으로 들어간 그 종교가 왜 이렇게 무력한가? 분명히 따져서 말한다면 사회악과 싸워 가는 데는 왜 이렇게 무력해지고 인색해졌냐? 그것도 역시 말하자면 교육적인 요소를 등한시한데서 온 것입니다. 그리고 웬 방언만, 성령만 찾고 있지만 성령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회악과 싸워서 세상을 건질 생각을 해야 성령입니다. 이런 것이 도대체 어디서 오느냐? 교육적인 요소를 등한시했기 때문이에요.
사람은 영혼이랄까, 내가 잘 쓰는 인도식으로 말하면 자아(自我) 자성(自性)이 있고, 또한 그것 말고 넓은 의미로 마음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이성(理性)이 있습니다. 이성이 있어서 옳은 것 그른 것을 판단하며, 그것은 조직 있게 체계를 세워 가르쳐주는 교육에 의해서 사람은 개발이 됩니다. 이런 이성적인 판단이 없으면 열심으로 믿으면서도 잘못되는 일이 많습니다.
나는 칠십년이나 믿는다고 하면서도 근래에 와서야 분명해진 것이 있습니다. 상벌(賞罰)이란 것은 스스로 받는거지 하나님이 주는 것은 아니다 하는 겁니다. 그러면 아마 저런 이단자가 또 어디에 있나 할 겁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하여간 여러분이 이 다음에 어느 때 깊이 생각한다면 수긍이 갈 겁니다. 하나님이 준다 하는데서 폐단이 많이 생깁니다.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어요. 하나님은 선한 사람 악한 사람 따로 보지 않는다, 비가 올 때 아무데나 내리지, 나쁜 놈의 집에만 내려라, 그런 법 없잖아요? 그건 물론 자연을 통해서 되는 겁니다마는, 자연이 됐길 그렇게 됐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차별이 없을 때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선이다 악이다, 옳다 그르다, 이걸 판단하고 선에는 선한대로 상이 있어야 되고 악에는 악한대로 벌이 있어야 하는 그 권위, 다시 말해 그렇게 하는 명령은 하나님에서 나오는 겁니다. 사람이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구냐?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도 않고 알 수도 없는데 있긴 분명히 있는, 있다고 그럴 수밖에 없는 이가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이것이 하나님이다, 이렇게 따져서 알 수 있는 거라면 하나님 노릇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이성을 가지고 끝없이 물으면서 진리를 찾아 행해야 되는데 그저 도그마(dogma)로 교리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생명력 있는 신앙을 가질 수가 없어요. 그런 말을 하면, "너 믿음 없어서 그렇다"고 또 그럴거예요. 어쨌거나 교육적인 것을 등한시하면 아무리 좋은 선생인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해도 그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내게 좋으니까, 내게 이로와서 하는 거지 예수님이 본래 가르쳐주신 아버지의 뜻대로 산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벌을 받아도 제가 스스로 받는 거다, 옛날말로 자업자득이다. 제가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만들었어요.
그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이 생명의 바탈이 그렇다는 거예요. 더구나 인간에게 있어서는 가장 기본 되는 원리가 무엇이냐 하면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해서만 참입니다. 남의 지식을 빌려다가 하는 것은 내 지식이 아닙니다. 나는 알지도 못하고 선생님이 그러는데 그러시더라, 그건 지식이 아닙니다. 선생님이 그랬으면 내가 그걸 실험을 해보고 그렇더라, 내가 실험해 봤는데 불을 때면 물은 섭씨 100도에서 분명히 끓더라, 그게 내 지식이지 실험도 안해보고 선생님이 그러는데 섭씨 100도에서 물이 끓는다고 그러시더라, 그건 지식이 뭔지도 모르고 지식의 귀함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골동품을 가져다 붙여놓고 그것이 무언지, 거기에 써있는 글씨가 무슨 글씨인지도 모르는, 돈 있고 세력 있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예술과 관계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 집에 그런 것이 걸려있는 것은 돈 재미에, 돈 때문에, 세력 때문에 걸려있지, 예술을 좋아해서도 아니고 예술을 장려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 믿는다는 것도 내게 좋아서 믿는 거고 공연히 하나님 팔아먹는 거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을 참 안다 하는 것은 상을 받아도 내가 스스로해서 원리에 의해 오는 겁니다. 물론 권위는 하나님께 있어요.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누군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우리를 기계처럼 하시는 분은 아니에요. 내가 어디까지든지 깨달아서 노력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 속에 자유의지를 넣어주신 다음에는 제가 잘하면 상을 받을 수 있도록, 잘못하면 벌을 받을 수 있도록 되어있습니다. 이 우주의 구조가 그렇게 됐어요. 자연계도 그렇고 우리의 역사도 그래요.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나는 이것을 확신합니다. 우리가 받는 고난은 그렇게 생각해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이 터무니없는 고난·...."
이 고난은 왜 받느냐? 터무니없는 고난인가? 문익환이가 왜 거기 들어가서 죽어야겠다고까지 그러는가? 문익환이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고난을 받나?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그러나? 개전의 정이 안 보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그러는데 개전은 무슨 개전, 개전은 누가 개전해야 되는 건지 공정하게 말합시다. 나는 정부에 반대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영성까지 아니더라도, 이성 있잖아, 이성이 있는 그것, 양심을 살려서 가만 보면 이치가 그렇지 않아요?
그럼 사람에겐 내가 스스로 해서 알아야 참 앎이야. 그런데 터무니없는 고난을 받아요. 터무니없는 이 고난은 왜 받나? 내가 생각해도 분명히 내 판단이 옳고 나라 생각하는데 있어서도 그 사람보다 내가 지고 싶은 생각이 결코 없는데, 내가 뭐 잘났다고 그러는게 아니라, 왜 내가 생각해도 내 양심에 정말 다른 욕심은 없는데, 거짓말도 억설도 한일이 없는데, 왜 우리더러 억설을 했다고 그러고 나쁜 선전을 했다고 어째 그러느냐? 그리고 이것이 유죄의 판결이 되고, 더구나 우리만이 아니라 세계 각처에서도 여론이 있어서 그건 좀 안 그랬으면 좋겠다하고 밖에서 말이 많이 오는데 왜 이러나? 그러니까 터무니없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 이 터무니없는 고난을 왜 받게 되느냐, 그런 걸 생각하다 내 마음에 오는 대답입니다. 그러고 있는데 마음속에 무슨 생각이 나는고 하니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갈 때 구레네 시몬이 예수의 십자가를 지지 않았어? 그럼 터무니가 있어서 그걸 졌겠느냐? 나 아무 대답이 없어요. 왜 구레네 시몬이 지고 가야 되요?
여러분 어떻습니까? 그 사람 마땅히 져야합니까? 그렇지 않아요. 그날 농사하는 사람이 그리 지나가다가 로마 군인이 "이 사람아, 너 튼튼하니 이것 좀 져!" 그리고 지우니까 그거 지지 않았어요. 터무니없다 말입니다. 터무니없는데 그럼 왜 구레네 시몬이라는 사람이, 안 질려면 안 질 수 있었을텐데, 져야 했겠나? 구레네 시몬도 사람이거든. 그도 사람이야. 사람이니까 연약한 예수가 그 십자가를 지고 허덕허덕이고 가는게 더구나 그 예수야말로 터무니없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데 내게는 당치 않지만 내가 저걸 보고 그냥 지나가다니 나도 사람으로써 그럴 수가 없잖아, 그런 마음이 필시 움직여서 그걸 지고 간 게 아니겠어요? 짐승이면 모르겠지만 사람인 이상 그걸 보고 그냥 갈 꺼야? 좀 지고 가, 그러니까 터무니고 뭐고 지고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어 지고 가지지 않았겠어요?
짐승이 아니고 사람이니
그런 생각이 마음에 떠올랐는데 다음엔 무슨 생각이 났느냐 하면 너의 집에서는 어떻지? 너 자라나는 가정이란 데서는 어떻지? 자식이 잘못한 일이 있을 때 너 어떻하냐? 자식이 잘못했을 때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냐? 여러분 어떻게 생각합니까? 가장 좋은 방법은 잘못한 자식이 제 마음에서 우러나서 "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 종아리 때려주십시요" 그리고는 제가 가서 회초리를 꺾어와서 "아버지, 때려주십시요" 그 이상의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다른데 나가서 자식보다 더한 잘못을 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애비 에미 노릇을 하려면 자식이 잘못한 경우 "이 자식아, 왜 그랬단 말이냐?" 하면서 잘못은 자식이 했는데도 그걸 가지고 아파하고 걱정하고 타이르고 그러지요. 그래 타일러도 안되면 마지막엔 좋은 방법으로 잘하는 부모는 밥을 안 먹든지 말 안하고 며칠 지나든지 그러다가 며칠 지나서 회초리로 자기 다리를 때리면 사람자식이라면 그걸 보고 "아버지, 제가 잘못 했어요" 그러고 나서 엎어져서 회초리 가지고 "나 때려 주세요. 다신 안그러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것이 최선의 방법 아니냐? 그러니까 벌은 제가 제 손으로 해야 가장 완전한 벌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일진대 폭력을 써서 때리는 그런 하나님일 리가 없어.
그렇게 생각을 하고 보니까 성경에 모든 일이 벌을 받는다면 제가 자업자득으로 한거예요. 그 사람으로서는 그 벌 받을 이유가 있다. 그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보기에는 그 벌을 받으면서도 수긍을 안할 때는 효과가 안 납니다. 효과가 안나면 그 안난 것 때문에 다음에도 다음에도 계속해서 자꾸 그 사회에 여러 가지 불합리한 터무니없는 고난이 오게 됩니다. 그 얘긴 그만 하고 이제 우리 믿는 기독교에 교육적인 요소가 결함이 있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퍽 많이 결함이 있다는 얘기로 다시 돌아갑시다. 이 문제 때문에 조금 잘못하면 믿기는 열심으로 믿는데 그것이 미신적으로, 나의 이기심이 변태된 걸로, 그렇게 나오기가 쉬워. 그런 것이 없어질라면 아무래도 교육이 많이 돼가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결국하는 것은 선생이 해야 돼요. 물론 대부분은 성령을 충만히 받아서 사도직에 이른 베드로나 요한 같지는 않을 것이고 또 예레미아나 요한처럼 어떤 환상을 보아서 그걸 가지고 나와서 말을 할 그러한 은사도 못받았을꺼예요. 그렇지만 사람의 일은 그런 아주 초자연적인 직감에 의해서 오는 영감이라든지 놀라움 그걸로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물론 근기 잘 타고난 사람은 직접 그 길로 참여 하는 수도 있지만 보통으로는 타고나길 들판길 가는 모양으로 이성에 의해서 시비를 판단하는 능력을 이용해서, 가르치는 것 아니겠어요? 선생은 원래 영감의 움직임을 받지 않고 이성으로 시비 판단을 합니다. 시비를 옳게해서 공평한 마음으로 하기만 하면 선생 노릇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이 준비가 돼있어야, 어느 때 열심으로 기도하는 것으로 인해서 오는 영향이 좋게 되고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친 걸 보면 그 영감에 의한 그런 점도 있지만 아주 좋은 교사로서 무식 한 민중을 놓고 또박또박 알아듣기 쉽게 비유를 하시면서 그런 점이 아주 능란하게 잘하신 면이 있습니다. 이런 얘기는 교육 관계했던 분들이 계시니까, 오늘은 주로 이렇게 어려운 시국을 대하고서 교육자로서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좋겠느냐, 그런 점이 퍽 중요한 것이다. 그런 점을 같이 생각해 보자고 이 기회에 말을 끄집어냈습니다. 특히 교육에 직업적으로까지 관계가 있고 또 연구하는 분도 있고 장래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 계시니까 그런 점에 있어서 특별히 많이 생각을 해주셔야겠습니다. 우리나라의 종교에는 열심은 있지만 교육적인 점이 결함이 돼있기 때문에 모처럼 좋은 신앙을 가지고도 아주 잘못되는 일이 많이 있다, 그런 점에서 이제 앞으로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말입니다.
핑게를 대지 말라 !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문제를 하나 지나쳐 버려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진리를 쫓아 간다든지,하나님을 믿는다든지 하는 사람은 핑게를 못 댄다는 것입니다. 핑게를 댈려면 하나님 믿는다, 진리를 쫓는다고 말 못해요. 아, 정치 잘못됐으니까 그럴테지 한다면 누구든지 그릴 수 있을 수 있을 것은 핑게가 안 되는 것입니다. 핑계하려면 진리따라 간다는 말 할 것도 없고, 하나님 믿는다는 말 할 것도 없고, 그 책임을 지금 우리가 져야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지위를 떨어트렸다는 그런 점은 우리 마음속에 분명히 하나 인정하고 넘어 가야 합니다.
사실 다른 노릇은 다 그만 둘 수가 있어도, 어떤 경우가 와도 교육은 순간도 그칠 수가 없습니다. 정부는 몇 달이나, 잘되면 몇 해도 없이 할 수 있을 거예요. 정부사람들은 자기네 가 있으니까 세상이 되어 간다고 그러지만, 그건 내기를 할 수가 없으니 그렇지 내기를 할 순 있다고 한다면 할 수 있어요. 인도의 비노바가 그랬어. 한 2년간만 맡겨준다면 정부 없이도 인간이란 너끈히 사회질서를 유지해가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증명 할 수 있다고. 내가 말했다면 뭐라 또 말이 있겠지만 비노바가 그랬다면 그랬어 할꺼야. 비노바가 누구냐? 간디의 수제자이고 인도서도 지도자라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교육자들이 스스로 자기의 지위와 권위를 떨어트렸어. 교육하다가 가버려요. 난 사실 대학 총장을 내놓고 정치하러 가는 그런 사람들, 참 정신 빠진 사람들이라고 봐요. 대학총장의 지위가 어떤 지위인데 거기서 뭐 어쩌자고 내놓고, 뭘 더 좋다고 엉금엉금 기어다닙니까. 사실 정치는 몇 달 동안 공백 상태에 있어도 돼갈 수 있습니다. 왜? 사람의 맘속에 다 그래도 평등이 같이 살아가자 하는 마음은 있으니까. 일본 정부가 무조건 항복하고 정치가 공백상태로 들어가니까 어느 지방에 가서 누가 강연 하나 한일도 없는데도 자기네끼리 자치단체를 만들어서 치안유지합디다. 그러니만큼 대세가 필요하니까, 그렇게 된 것이에요. 그럼, 이것이 인간인데 정치한다는 사람들은 너무 과소평가해요. 이까짓 것들이 뭘 아나? 안 나온다고 벌금 받고 그냥 잡아다 때리고 감옥에 가두고 그러지. 내가 너무 지나친 추측인지는 모르지만 이 근래에 와서 정치를 보면 아무래도 그렇게 판단하는 게 아닌가, 나는 이렇게 생각할 때에 나도 너무 남을 깔보고 내가 과소평가하는 게 아닌가, 나야말로 남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될텐데, 그런 생각도 합니다만 그 한 일을 보면 너무도 사람을 과소평가하고 인간으로 안 알아! 그저 때려야하고, 회초리부터 먼저 집는 사람은 인간성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야!
그런데 교육이라는 것은 쉴 수가 없어. 왜? 자식을 낳잖아오? 날마다 자식이 새로 나는데 정부는 없어도 괜찮지만 하루저녁도 자식 낳기를 그만 두는 사람은 없을꺼야. 그리고는 자꾸 계속 나면 그것이 밥을 먹는 것을 가르쳐야 하고 옷을 입는 것을 가르쳐야 하고 사람되는 것을 가르쳐야 하고 쉴 새가 없어. 내 호흡과 거의 같으리만큼 거의 쉴 겨를이 없어. 유명한 영국의 칼라일에게 어떤 귀족부인이 가서 아주 제깐에는 "선생님, 저는 애를 좀 일찌감치 교육하려고 그러는데, 지금 3살 났습니다. 어떻하면 되겠습니까?" 그러자 칼라일은, "아, 삼년 늦었습니다. " 그랬단 말이 있습니다. 우리 동양말로는 3년이 뭐야. 3년 10달 늦었어. 벌써 잉태하던 그날 저녁부터 가르치기 시작했어야 했을텐데.
고난은 각오해야
사실이야 또 그래요. 그런 것도 아니야. 벌써 수만 년 수천 년 전부터 우리 속에는 가르치려는 근본이 있는데 무슨 소리야? 교육은 쉴 수가 없어. 여러분이 진화론에 흥미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나는 하나님 믿고 그럽니다만 진화론을 반대하는 하나님이라면 그런 하나님 안 믿을 겁니다.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이렇게 만드신 하나님은 결코 내정간섭을 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 세상 만들어 놓은 후에 우주는 제가 제 법칙대로 돌아갈 수 있도록 스스로 그렇게 만들어 놓았어요. 근본원리는 스스로 합니다. 물도 스스로 흐르는 거고 바람도 스스로 부는 거고 전기도 스스로 있는 거지 하나님이 여기에다 플러스를 만들어놓고 또 저기에다 마이너스로 만들어 놓고 밤낮 그것 만지는 하나님인줄 아십니까?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 「未始有物」이라, 자연이 그렇다, 시작이라는 게 없어, 당초 처음에 아무 것도 없어. 언제부터인가 알 수 없어.
이 우주 안에서 하나님 믿는다, 제법 충성스런 것 같으면서도 제 할일, 제 할 책임은 않고 그저 하나님 하나님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빨리 나가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면 발을 뽑아 밖으로 나가면서 해야지, 발은 가만 두고 앉아서 빨리 나가게 해달라고 10년 걸려 기도해 봐야 소용없어. 그래 놓고 응답이 없다고 원망하고 도무지 자기 편한 대로 하나님 믿고 있어. 천당 간다니까, 거저 간다니까 좋다, 예수님 대신 해준다니까 좋다, 절대 그런 이치가 아닙니다. 이 십자가가, 잘못 가르친 십자가가 망쳐 놓았어. 그런데 교수님네들 조차도 왜 이 모양으로 힘없이 그저 시키는 데로만 하는지? 세상이 어지러워지니까 그저 머릴 수구리고, 똑똑한 사람들은 쫓겨나고, 대부분은 그저 하라는 대로‥‥‥‥
그러니 당초 교육의 권위를 몰라요. 벌써 옛날 당나라 한퇴지(韓退之)의 사도에 「道之所存 師之所存」이라, (스승이 뭐냐? 道 있는데 스승이 있다. 나이 위고 아래고 상관이 없다.) 하지 않았습니까? 어쨌든 교육자의 권위는 교육자 스스로가 찾아야하는 것입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읽은 책입니다. 1차 대전후 서양의 문명한 사람들이 큰 시련을 겪었는데 그중에 L.P 작스(Sachs)라는 사람이 쓴 「산 우주」 (Living Universe)라는 책이 있었어요. 거기에 보면 1차 대전이 뭐냐, 너희 인간은 우주가 죽은 것인 줄 알았는데. 그래서 마구 파헤치고 정복하고 했는데 그 우주가 복수를 한 것이다. 우주는 살아있다, 그런 내용이예요. 동양에는 물론 그런 사상이 있지만 당시 서양에는 그런 사상이 없었는데 하여튼 놀라운 얘기였지요.
이 사람이 그 다음에 쓴 책이 「전인교육」 (Education of Whole-man) 이란 것이었지요. 수십 년이 지난 요즘에는 그런 얘기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때는 거의 없었지요. 거기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교육은 정치와 독립되어야 한다, 정치가 교육을 간섭해서는 안된다, 그런 것이지요. 옳은 얘기에요. 그런데 이것 뭐 교육자가 행정부의 시녀노릇을 하는 세상이 잘 될리 있어요? 그런 사회에 옳은 진보가 있을 수 없어요. 이제 할 일은 교육자가 제 권위를 찾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치는 뭐냐, 딴게 없어. 골고루 잘 먹고 잘 입게 하는 거야, 그 이상 아무 것도 없어요. 요새 뭐 복잡한 말로 뭐다뭐다 하지만 정치란 먹고 입고 일할 것을 골고루 나눠주는 일이지 별게 아닙니다. 그래 그럴려고 맡겨 놓으면 슬금슬금 먹어버린단 말이야. 또 그것만 이래도 모르겠는데 종교고 예술이고 모두 내가 한다, 행정부가 이렇게까지 되어서 세상이 어려워지게 마련입니다. 분수에 지나친 것입니다. 그러다가 거의 절정에 이르러 가지고 이제 조금씩 달라지고 있어요.
예수님 말씀에 무화과 나무잎이 푸릇푸릇해지면 봄이 온 줄 알라고 했어요. 봄이 오는 것은 누구도 못 막아. 새 시대가 온다는 이야기야. 누가 그걸 막아? 그러면 교육자는 잃어버린 제 권위를 찾아야지요. 물론 수난 받을 각오는 해야겠지요. 그런 수고 없이 그냥 됩니까? 종교 또는 교육, 이런 정신적인 것에까지 관여해서는 안되는 거예요. 그건 스스로 지켜야 해요. 그리고 내가 그걸 안 내어 놓는다면 누가 그걸 빼앗아! 그런데 잃어버린 교육자의 권위를 되찾고 참다운 교육을 하려면 어떻게하여야 하나? 나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그가 참으로 훌륭한 교육자였기 때문에 그의 생애에서 어떤 교육관을 끄집어 낼 수 있으리라 봅니다.
씨알의 교육
수십 년 전에 어느 일본인이 「인자 교육」(人子敎育)이란 책을 쓴 걸 본 일이 있어요. 교육의 목적이 무엇이냐, 교육의 근본이 무엇이냐, 다름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이 되도록 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즉 예수의 생애에서 뽑아낸 것이다, 이겁니다. 히브리서에도 그런 말이 있지요. "하나님이 이전에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로 밝혀 주었으나 마지막 날에 가서는 아들을 보내어서 온전한 교육을 하실 것이다. " 예수님도 그런 말을 하셨잖아요? "나는 사람의 아들이다"라고. 여기에서 교육의 목적과 원리를 뽑아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째서 자기를 사람의 아들이라고 했을까?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을 꺼예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나타날 때 가장 완전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 아닌가? 그래서 사람의 아들로 나타난 예수가 그런 모습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꺼예요. 또는, 나는 마리아나 요셉의 아들도 아니고 다윗이나 누구의 후손도 아니고 그냥 사람의 아들이다, 즉 어떤 특수한 인종이나 부족의 아들이 아니라 그냥 사람의 아들이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요. 어쨌거나 ‘사람의 아들’은 바로 우리 인간을 이끌어가고 교육하는 표준으로 한 것이다, 이렇게 볼 수 있지요. 그러면 그것을 요새 현대의 우리말로 표현하면 무어라 할 수 있을까? 저는 그것을 ‘씨알의 교육’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사람의 아들’의 교육, 인자교육(人子敎育)은 즉 ‘씨알의 교육’이다. 그 말씀이에요.
씨알이란 뭐냐? ‘맨 사람’이에요. 맨손, 맨발 할 때 그 ‘맨’ 사람이에요.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잃지 않은 그냥 그대로의 사람 말입니다. 한문으로는 민(民) 백성 민(民)이예요. 그럼 왜 새 말을 쓰느냐? 다른 말은 때가 많이 묻었어. 통치자들이 부려먹기 쉽게 하려고 온갖 짓을 다 하다가 보니 때가 너무 묻었어. 때가 묻으면 버려야 돼! 얼마 전 어떤 기관사람이 와서 충효사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어요. 그래, 그게 옳긴 옳은 말인데, 너무 낡고 때가 묻은 말이요. 시대가 달라졌으니 지금말로 해야지, 옛날 할아버지들이 담뱃재 털면서 하던 얘기를 지금 와서 다시 하면 누가 거기에 따라가겠느냐고 대답했어요. 옛날에도 백성 눌러먹기 위해 그 이야기를 하지·않았어요?
그런 건 스스로 해야지 누가 강요해서는 안 되는 일이에요. 단란한 가정에 가서 효도해라, 효도해라, 소용없는 짓입니다. ‘不知然而然’이라 ‘그런지 모르고 하는 것이 그게 바로 천성이다’라는 말 있잖아요? 새삼 강조하고 그러는 것은 다른 꿍꿍이 속이 있어 그런게야. 내가 훤히 알고 있는데‥‥‥ 하여튼 이 ‘씨알’이란 말은 때가 묻지 않은 새 말이에요. 씨는 단단하지만 햇볕이 쪼이고 적당한 수분만 있고 하면 그 단단한 껍질이 끝내 터지면서 싹이 돋지 않아요? 예수님이 ‘사람의 아들이다’ 한 것도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이 무슨 다윗의 자손이니, 아브라함 또는 이삭의 자손이니 그러고 하니, 아니야 사람의 아들이야, 다시 말해 씨알이야, 그런 것 아닌가 생각돼요. 예수님은 자기이름부터가 바로 혁명적이에요.
大人敎育
그래 보면 예수님의 그 모습에서 우리는 이 갈길 몰라하는 국민에게 "당신은 씨알이요"하는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씨알의 교육을 맹자의 말을 빌어서 설명을 하지요. 전국시대에 태어난 맹자는 벼슬에 오른 사람도 아니고 그걸 목적으로한 사람도 물론 아니었지만, 세상을 건져보려 여기 저기 돌아다녔지요 그런데 맹자의 교육은 ‘대인교육(大人敎育)’이예요. 큰 사람이다, 이말이예요. 맹자가 말하기를 제일 못난 사람이 누구냐, 남의 아랫노릇하면서 그저 속도 없이 상전이 좋아하면 그저 따라서 좋아하는 놈, 그런 사람이 제일 못났다는 거예요(事看人)
그 다음에 그 보다 좀 나은 사람은 누구냐? 한 나라의 일을 내가 맡았지 하는 사람이에요. 한 나라의 일 아니면 다른 일 안 하는 사람이지요. (安社稷臣)
그 다음에는 천민(天民)이라 해서 내 하는 일이 천하에 어디든지 두루 뚫려 간다. 막힘없이 간다, 하는 그런 사람이지요. (天民)
그 다음으로는 대인(大人), 즉 큰 사람이라는 거예요. 그럼 큰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居天下之廣居하며」 즉 ‘천하 넓은 집에 살고’, 다시 말해 대인은 하늘 땅을 제 집으로 아는 사람이라는 거지요. 경복궁 크다, 큰 집에 산다, 도둑질해서라도 큰 집 짓고 산다. 그런 사람이 아니라 정말 큰 집이 무어냐, 이 하늘 땅이 모두 내집이지. 겨울이면 햇볕 따뜻한 곳에 살고, 여름이면 선선한 곳에 살면서 하늘 땅 저게 모두 내집이다,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立天下之 正位’ 하면, 즉 ‘천하의 가장 올바른 자리에 서며’, 그건 무슨 소리냐? 지구중심, 자기 설 자리에 딱 서는거예요. 국회의원이니 뭐니 그런 세상의 제도적인 자리에 앉는 게 아니라 사람이 마땅히 서야할 자리에 중심을 잡고 서는 거예요. 죽을 때까지 이자리만은 놓을 수 없는 자리, 지구 중심을 잡고 딱 서는 일이지요. 그럴려면 바닥에 자리를 잡고 바닥 살림을 해야해요. 그리고도 ‘行天下之 大道’라, ‘천하를 뚜벅 뚜벅 걸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대인(大人)이라는 거예요. 그럴려면 씨알이 아니고서는 안돼. 예수님도 그래서 그냥 단순히 사람의 아들이라고 했잖아? 무슨 형용사나 수식어가 붙지 않은 아주 단순한 사람, 씨알 말이에요. 그래야 돼. 진리란 단순한 것인데, 무슨 형용사를 붙이고‥‥‥ 민주주의면 민주주의지 무슨 형용사가 붙어?
이런 씨알교육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 씨알교육은 고난을 겪지 않을 수가 없어요. 이 우주의 근본 원리가 그래요. 석가도 그러지 않았어요? 생노병사(生老病死)라, 사람은 고통을 타고 났다. 사람은 본시 편하게 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나를 다 흩어버려라, 그 다음에야 도(道)에 이른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어쨌거나 교육을 하려면 고난을 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렇게 볼 때 저는 히브리서를 특히 좋아해요. 다른 성경에서는 볼 수 없는 귀절이 있어요.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자기를 죽음에서 건지실 이에게 눈물과 간구로 기도했다는 거예요. 소리내어 엉엉 울면서 기도했다는 겁니다. 흔히 우리는 예수를 배도 고프지 않고 여자를 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그런 천사보다 더 높은 자리에 계신 분으로 아는데 히브리기자는 그렇지 않았어. 인간 예수의 모습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어요. 그도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세상에 와서는 고통을 통해 울면서 간구하는, 그래서 그 고통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고 완전한 자리에 갔다는 거예요. 깊이 깊이 음미할 점이에요. 생각해 보면 우리 씨알 전쟁터가 밖에서 움직여서 안으로 들어와요. 싸워도 싸워도 안으로 들어 와요. 싸움의 원인이 바로 여기 안에 있다, 그 말이에요. 이건 절대 패배주의가 아닙니다. 예수님도 인간의 약점이 다 있는 사람의 아들이에요. 그런데 얼마나 겸손합니까? 온갖 시련과 유혹을 받으면서 눈물로 통곡하면서, 그렇게 인간의 약점을 모두 안 분 아닙니까? 그러니 우리의 좋은 선생이지요.
産母의 苦痛
그러니까 산 교육을 하려면 고통을 뺄 수가 없어요. 씨알의 교육은 바로 고난을 통해 받는 교육입니다. 바닥자리에 있다 보면 고난 받을 수밖에 없어. 이 세상은 글 배운 사람들이 세상 주인 노릇하면서 '세상을 못 쓰게 망쳐 놓았어요. 나라를 해나가는 것은 하늘 말씀을 받아서 씨알교육 하자는 것인데, 이 국가라는 것이 생기면서 제도를 만들고 법률을 만들고 해서 사람을 못 살게 굴어요. 제도나 법률이 원래는 약자를 위해 만든 것인데 어디 그래요? 강한 자가, 권력가진 자가 자기 지위를 유지하려고 만들고, 또 고치고‥‥‥‥그런데 이 글 배웠다는 사람들이 그걸 도와주고 이론의 뒷받침을 해주고 그래요. 그래서 자꾸 고통은 늘어나게· 마련인데, 그럼 이 고통, 이 터무니없는 고통은 왜 오는가. 종교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 주신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지요. 물론 종교적으로 기도할 때는 그래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덮어놓고 하나님이 주신거니까 가만있자, 그런 게 아니에요. 인간적으로 해석해야 됩니다. 왜 이런 것이 왔느냐, 어떻게 해야 되느냐, 차원이 다른 둘을 잘 해석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왜 종교를 아편이라고 합니까? 너희 종교가진 자들은 그저 참고 견뎌라, 그러면서 그냥 가만있으니 독재군주가 마음대로 해먹기 좋지 않느냐, 그래서, 혁명을 자꾸 더디게 하지 않느냐, 그렇게 욕합니다. 그러니 아까 얘기한대로 하나님이 주신 것, 그리고 사람이 해야 될 것, 그들을 잘 해석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럼 그런 일은 누가 하느냐 ?교육자가 해야 된다는 거예요. 지금 시점이 어려운 때예요. 애기가 꿈틀거리며 자꾸 나오려고 그래요. 애기는 새 시대 아니에요? 그런데 산모는 그걸 몰라. 그냥 고통스러워해. 그래, 산모에게 네 속에 있는 애기가 나올 때가 되어서 그런데 이제 낳아야지. 낳는 건 네 책임이야. 이런 진통은 있어야 돼. 그렇게 해서 죽기 각오를 하고 낳을 작정을 하면 고통을 넘어설 수가 있어요. 그런데 그걸 막으려고 해. 막을 수가 없는 거예요. 이사야가 말했잖아요. 잉태케 한 이가 있는데 누가 낳지 못하게 그걸 막아?
그렇게 생각지 않고는 견딜 재간이 없어요. 이걸 교육자가 해야 된단 말이에요.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그렇게 해줘야 산모가 안심하고 아기를 낳지요. 견디기만 해라, 시간만 지나가면 천지창조 할 때 생명을 네게 준 이가 낳게 해준다! 너는 마음 턱 놓아라! 그렇다고 힘쓰지 말고 가만있으란 얘기는 아니에요. 마음 놓으라는 말은 죽을까봐 겁내는 그 마음 없애라는 거지, 그 힘도 안 쓰고 그냥 턱 맥을 놓고 있으면 애기가 나와요? 죽을 힘을 다해서 힘을 써서. 애기를 낳아야지요. 한 국민이 사람의 아들 예수를 잉태 했어요. 새 시대를 잉태했어요. 그 애기가 날려고 진통하고 있고, 그래선 고통이 따르고 그리는데 조금만 참아. 그렇다고 멍청하게 힘쓰지 말란 얘기 아니에요. 역사가 씨알 속에 심은 이 애기를 낳기 위해서는 죽을 힘을 다 해야지요.이게 바로 인생과 민중에게 주는 진화(進化)의 교훈이에요. 자기 갈 길을 가는 거예요.
맹자의 말씀하나 더 하고 이야기를 끝내겠습니다. 이 맹자의 말씀은 성경 말씀과 다름이 없어요. 하늘이 어떤 사람에게 큰 소임을 맡길 때 (天將降大任於是人也) 우선 그 마음을 괴롭게 만들고(必先苦其心志), 이 말은 생명의 법칙이 그렇다는 거예요. 종교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한다 이 말이에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스스로 하려 하잖아요? 그래, 그 마음을 괴롭게 만들고 그 다음에는 살을 다 빠지게 하고, 먹을 것, 입을 것 없게 하고, 그래서 지치게 하고(勞其筋骨餓其體膚空乏其身) , 가도 가도 되는 일은 하나도 없이 자꾸만 일이 안돼(行拂亂其所爲). 옳은 일인데도 안돼. 그런 연후에 그 마음을 움직이고, 천성을 끈질기게 하고(所以動心忍性), 그래서 그전에 못하던 일을 할 수 있게 한다(曾益其所不能). 기독교 신앙으로 말한다면 성령을 받게 한다, 어디서 오는지 모르는 힘, 그 힘에 의해 마음이 움직인다는 겁니다.
오늘 우리를 봅시다. 하나님이 왜 이런 고통을, 터무니없는 고통을 주시는가? 그건 특별히 훈련을 안하면 안되니까 그런 겁니다. 조금만 멀리 보아도 자칫 조금만 잘못해도 이 인류가 지구를 유지 못해요. 정치는 근시안이에요 바로 앞밖에 못 봐. 크게 보면 이 지구와 이 인류가 곧 위기에 직면해 있어요. 그래서 문제가 여기에 있다면서 우리들 마음속에 사명감을 느끼게 하고 훈련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1977년 7월 8일 오후 6시 기독자 교수협의회주관으로 가진 (고난을 받는 형제들을 위한 기도회)에서 있었던 咸錫憲 선생의 강연을 옳긴 것이다.
씨알의소리 1977년 7월 65호
저작집30; 14- 291
전집20; 12- 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