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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위로하라(사66:10-14)-2019.11.24
세상에 모든 사람은 위로가 필요합니다. 지칠대로 지친 현대인들은 위로가 더욱 필요합니다. 그래서 내 주변에 위로를 잘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행복합니다. 사실 위로도 은사입니다. 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위로는 자신의 입장을 이해해주고 헤아려주며 대변해주는 말이나 행동입니다. 누군가 내 편에 서서 들어주고 이해해주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그런데 위로는 기쁘고 좋을 때도 필요하고, 슬프고 좋지 않을 때도 필요합니다. 위로의 특징이 칭찬과 격려, 축복과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위로는 우리에게 엄청난 에너지를 제공합니다.
그런데 세상이 말세를 향하여 달려갈수록 위로가 부족합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해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하는 자가 없다’고 탄식합니다(전4:1). 예레미야도 위로할 자가 없다고 탄식합니다(애가1:16, 21). 위로가 필요한 세상에 위로가 없다는 것은 가장 큰 비극입니다. 본문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사야서는 크게 두 파트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장부터39장까지는 심판과 정죄요, 40장부터 66장까지는 위로와 구원입니다.
이른바 하나님의 공의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들을 회복해주시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공의와 사랑으로 다스리십니다. 궁극적으로는 사랑으로 공의를 이기게 하십니다. 사랑의 보자기속에 공의의 보자기를 감추시는 방법으로 말입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기 백성들에게만 유효한 방법이지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위로하십니다. 그분은 예루살렘에서 위로하십니다. 그분의 위로는 슬픔을 기쁨으로 회복하심이요(10절), 평강을 강같이 베푸심이며(12절), 그들의 영혼을 만족케 하심입니다(11절).
하나님은 바벨론 포로된 자기 백성들을 본토로 귀환하시는 방법으로 그들을 위로하셨습니다. 하지만 포로귀환보다 더 큰 위로는 죄악의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사40:2). 그보다 더 큰 위로는 없습니다. 믿음의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이라는 위로를 받은 자들입니다. 죄사함의 위로가 없으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위로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위로를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40:1)고 말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위로케 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위로의 명령을 받았으니 모든 자들을 위로함이 마땅합니다.
세상에는 위로할 수 없을 만큼 구차한 사람이 없고, 가난한 영혼도 없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는 에너지가 각 사람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위로도 잘하고 잘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위로는 타이밍이 중요한 것입니다. 꼭 필요할 때 상황에 맞는 위로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기쁠 때 위로가 다르고 슬플 때의 위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결혼식장에서의 위로가 다르고 초상집에서의 위로가 다르다는 말입니다. 위로도 어떤 사람에게 받느냐가 중요합니다. 꼭 필요한 사람에게 위로를 받으면 기쁨이 배가 됩니다.
위로는 사람으로부터 받는 위로가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위로가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받는 위로는 거짓되고 간사할 수 있으나,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는 거짓됨이나 간사함이 없습니다. 사람의 위로는 식상하고 서운하나, 하나님의 위로는 받을수록 기쁘고 행복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위로를 받으면 불편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불편한 사람은 없습니다. 때문에 사람의 위로보다 하나님의 위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위로하며 살아야 할까요?
(1) 하나님을 위로 하십시다
얼핏 듣기에는 불경건한 소리같이 들릴지 모릅니다. 감히 인간이 하나님을 위로하다니요? 아주 건방진 소리 같지만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위로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위로는 힘 있는 자만하는 것이 아니요, 가진 자만하는 것도 아니며, 윗사람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능력이나 실력을 갖춘 자만하는 것도 아니고, 조건이나 순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부모도 자식들에게 위로받기 원하고, 목사도 성도들의 위로받기 원합니다. 어르신들도 낮은 자들에게 위로받기 원합니다. 위로는 모든 인간에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도 우리 인간들의 위로를 받고 싶어 하실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도 인간의 위로를 받고 싶어 하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채워지지 않는 부족함이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위로를 기다립니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하나님은 정말 외롭고 고독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외로우신 분이십니다. 물론 전능하신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해서 외로우신 것은 아닙니다. 자기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불순종할 때 하나님의 마음이 아프고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탄식하십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하나님의 마음이 아프신 것도 위로가 필요한 이유지만,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세상 죄를 지우시고 십자가에서 죽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십니까? 그러나 그것보다 더 아픈 것은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지 못하는 인간들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얼마나 고독하실까요? 그래서 하나님이 위로가 필요하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의 위로가 무슨 위로가 되겠습니까? 하지만 어린 아이가 ‘아빠 힘내세요’라고 재롱을 부려도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 지 아십니까? 어린아이의 재롱에도 부모는 큰 위로가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위로해 드린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른바 회개가 하나님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는 것이요, 감사가 하나님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일체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으로 충분한 위로를 받으십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위로를 많이 받으셔야 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세상 누구도 받을 수 없는 가장 고통스러운 상처를 입은 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최상의 위로를 받으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위로하러 오셨습니다. 죄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천대받고 무시당하는 영혼들을 위로하셨습니다. 병든 자의 병을 고쳐 위로해주시고, 귀신들린 자들의 귀신을 내어 쫓아 위로해주셨습니다. 특별히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위로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위로를 수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위로 받기로 작정된 자만 주님의 위로를 받아들입니다. 때문에 주님의 위로를 받은 자만 주님을 위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감히 우리가 무엇으로 하나님을 위로해 드릴 수 있을까요? 우리 가진 재물로 위로해 드릴 수 있을까요? 우리 가진 능력으로 위로해 드릴 수 있을까요? 혹은 우리에게 주어진 무엇으로 위로해 드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소유로는 하나님을 위로해 드릴 수 없습니다.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을 위로해 드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오직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른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다만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는 일체의 모든 행위마저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내 것으로 하나님을 위로해 드릴 수 있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갖고 있다면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때문에 내가 무언가를 가지고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려는 발상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 행위를 중단해야 합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독하는 불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믿음 주시는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주시는 은혜로 하나님을 위로해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2) 이스라엘을 위로 하십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위로자이십니다.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위로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은 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아 제사장적 나라로 살아가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사장적 나라로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제사장적 나라는 세상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살아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국가명으로 부르는 이름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을 가진 야곱의 개명된 이름입니다(창32:28). 무엇보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총칭하는 이름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백성들입니다. 이른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입니다(벧전2:9). 때문에 성도는 모두 다 영적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위로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성도들을 위로하라는 말씀입니다. 마땅히 주안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은 위로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주안에서 위로하며 사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가정에서 자녀들이 위로하며 격려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부모의 마음이 흡족하듯이 하나님의 마음도 그러하십니다.
이스라엘을 위로하라는 말씀은 결국 믿음의 지체된 모든 성도들이 주안에서 위로하고 격려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성도로부터 받는 위로가 가장 큰 위로가 됩니다. 성도의 위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위로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사랑하는 부부사이라도 그리스도밖에 있는 배우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배우자를 제대로 위로하지 못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적이 없으므로 하나님의 위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주는 마음으로는 참된 위로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왜냐면 세상이 줄 수 있는 위로는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위로해야 합니다.
때문에 성도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위로를 받으려고 하면 안됩니다.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는 것이 원칙이요, 성도들로부터 위로를 받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때문에 주안에서 형제 된 우리는 서로서로 위로하고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외칩니다(사40:1). 성도는 주님의 위로를 받고 살아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상당수의 사람들이 교회 밖에서 위로를 얻으려고 합니다. 교회 밖에 있는 위로는 수많은 유혹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자칫하면 시험과 올무에 빠집니다. 그래서 오히려 사고를 치고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러면 성도들로부터 받을 수 있는 위로는 과연 어떤 위로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완전한 위로입니다. 성경은 위로의 교과서입니다. 기도와 찬송이 위로가 되고, 신앙상담도 좋은 위로가 되며, 성도의 교제와 나눔도 큰 위로가 됩니다. 무엇보다 예배는 가장 큰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든 것이 성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영적인 위로입니다. 물론 성도들을 통해서 육신의 위로도 받을 수 있습니다. 따뜻한 차 한 잔도 위로가 될 수 있고, 한 끼의 식사도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주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때문에 주안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좋은 동역자가 있다는 것이 행복한 일입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막다른 코너에 몰린 다윗을 위로하듯이 말입니다(삼상23:17). 그런데 오늘날 이런 위로 자가 별로 없습니다. 극심한 고난을 당하고 있던 욥에게 찾아온 친구들이 진정한 위로 자가 되었던가요? 결코 위로 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욥의 아내도 위로 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는 사람의 위로는 한계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우리의 참된 위로 자가 되십니다.
가급적이면 위로 자를 찾지 말고 내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며 사십시다. 중국 난징에 가면 마음 놓고 울고 싶을 때 찾아가서 울 수 있는 눈물 방이 있다고 합니다. 시내 호텔에 문을 연 눈물 방은 꽤나 많은 사람들이 이용한다고 하는데 자기들의 속이 후련해질 때까지 울고 간다고 합니다. 심지어 어떤 곳은 고춧가루와 마늘등 눈물이 나오도록 도와주는 최루촉진제와 울다가 감정이 격해지면 손님들이 마음대로 던질 수 있는 유리잔과 인형들이 비치되어 있다고 합니다. 솔직히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위로 방이 무슨 위로가 되겠습니까?
진정한 위로 방은 교회여야 합니다. 교회는 전체가 위로 방이어야 합니다. 누구라도 와서 위로 받는 곳이어야 하고, 아무 때나 와서 위로를 받는 곳이어야 합니다. 모압으로 이민 가서 십년 만에 남편과 두 아들을 다 잃고 청상과부가 된 나오미를 위로하는 며느리 룻과 같은 위로 자가 교회 안에 많이 필요할 때입니다(룻1:16-17). 우리 서로 서로 위로하며 사십시다. 특별히 이스라엘을 위로하십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위로가 어느 민족보다 절실하게 필요한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의 위로만 필요합니다.
(3) 예루살렘을 위로 하십시다
이스라엘이 성도를 위한 위로라면, 예루살렘은 교회를 위한 위로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을 위로하라는 것은 결국 교회가 위로를 받아야 할 기관이라는 셈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고, 이스라엘의 성도된 자들끼리 서로 위로하며, 예루살렘도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성이라는 뜻으로 오늘날 교회를 의미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고, 메시아가 나신 곳이며, 복음의 출발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은 악한 투기와 간사가 있는 곳입니다. 종교인들의 더러운 음모가 도사리는 곳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예루살렘은 종교적인 갈등을 촉발시킬 수 있는 화약고 같은 곳입니다. 가장 영광스러운 예루살렘이 가장 큰 상처를 입었고, 가장 많은 상처를 안고 있는 곳입니다. 때문에 예루살렘은 어떤 곳보다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한 곳입니다. 그것은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사실 세상으로부터 가장 많은 상처를 받은 곳입니다. 물론 교회가 세상에 상처를 입힌 것도 사실이나 세상으로부터 아주 깊은 상처를 입은 곳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위로를 먹고 자라는 곳이요, 성도들의 위로를 통해서 성장하는 기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루살렘이 위로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물론 교회는 하나님이 위로하십니다. 그러나 성도들도 교회를 위로해야 합니다. 요즘 들어 성도들이 교회를 은근히 디스(Diss)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내 마음에 들지 않을지라도 교회를 디스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가뜩이나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현실 속에서 성도들마저 교회를 공격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늘날 교회가 외부적인 공격보다 성도들의 가시에 찔리고 더 깊은 상처를 받습니다. 성도들이 교회를 흔들고 난동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공격함은 주님의 몸을 훼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루살렘을 위로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교회를 위로해야 합니다. 거짓된 교리로부터 교회를 지켜내며 교회의 어려운 살림살이를 위로하여 감당하며, 모든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것이 교회를 위로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교회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교회를 위로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교회가 아파할 때 함께 아파하고, 교회가 고통당할 때 함께 고통을 당하는 것이 예루살렘을 위로하는 것이요, 교회가 기쁘고 즐거울 때 역시 함께 기쁘고 즐거워하는 것이 예루살렘을 위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루살렘을 위로하는 방법입니다.
만일 교회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한다면 예루살렘의 위로 자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의 위로만 받으려고 하지 말고 교회를 위로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위로를 통해 성장하고 부흥합니다. 초대 교회가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졌음을 잊지 기억하십시오(행9:31). 교회도 성도들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루살렘을 위로하는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 모두 성숙한 위로 자가 되십시다. 위로의 빚진 자가 되십시다. 위로를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위로 하는 자가 되십시다. 먼저 하나님을 위로하고, 이스라엘을 위로하며, 예루살렘을 위로하십시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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