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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 게시판 스크랩 유대인 역사가 요세프스(Josephus)- 마사다 (MASADA)를 말하다
최복수 추천 0 조회 15 15.10.24 21:3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유대인 역사가 요세프스(Josephus)- 마사다 (MASADA)를 말하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프스(Josephus)

요세푸스는 유대 제사장 가문의 후손으로서 가이우스가

로마제국의 황제에 오른 주후 37년에 태어나 A.D 100년 경에 세상을 떠났다.

인류 역사상 요세푸스만큼 칭송과 비난을 한 몸에 받은 사람도 드물 것이다.
유대인 동족들에게는 배신자요 변절자로 지탄을 받고 있는 반면에 그는 기독교인들,

특히 초대 변증가들과 중세 시대에는 위대한 저술가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그는 진실만을 탐구한 양심적이고도 공정한 탐구자라기보다는

어떤 인상을 주려는 고도의 목적을 가진 저술가였음이 분명하다.

고대 저술가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결점을 그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결점에도 불구하고 요세푸스는 탁월한 역사가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는 유대주의와 헬레니즘의 두 전통을 종합하였으며 로마의 세속 세계와 성경의 종교적 유산을

연결시켰을 뿐만 아니라 로마제국 치하의 여러 민족들의 멘탈리티-특히 예수님 당시의

유대 백성들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여러 정보들을 제공해 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 탄생 이전 시대와 기독교 1세기 동안에 일어났던 팔레스틴과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역사를

알려주는 유일한 역사서라는 점에서 본서 "요세푸스"의 위치는 거의 절대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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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전쟁의 전설

서기 66년 유태전쟁에 참여했던 유태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서기 73년 어느 봄날 밤에

마사다 요새에서 벌어진 일을 후세에 다음과 같이 전했다.

지휘자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가 남자들을 모두 한군데 불러모았다. 날이 밝으면 마사다는 무너질 것이다.

그는 비장하게 마지막 연설을 했다. “형제들이여,우리는 로마와 맞서 싸운 마지막 용사들입니다.

새벽이 오면 우리는 저들의 포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자유로우므로 부끄럽지 않게 죽을 기회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치욕을 당하고 노예로 끌려가지 않도록 아내와 자식들을 우리 손으로 죽이고,

우리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입니다. 자! 노예가 되기보다 자유라는 이름의 수의(壽衣)를 입읍시다!”

벤 야이르의 말이 끝나자 몇몇 마음 약한 사람이 가족을 생각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벤 야이르는 그들을 엄하게 꾸짖었다. “부끄럽지도 않소?

우리가 여기 모여 로마군에 맞선 뒤로 그들은 죄 없는 유태인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소.

다마스쿠스에서는 1만8,000명이 처자식과 함께 목이 잘렸고,이 집트에서는 6만명이 살해되었소.

우리는 험준한 요새와 넉넉한 식량을 가지고도 이 싸움에 졌습니다.

지금 로마군은 우리를 살려주겠다고 꾀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보는 앞에서 성경을 찢으며 승리를 노래하고 싶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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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야이르의 말이 여기에 이르자 사람들의 눈동자에 불꽃이 어른거렸다.

눈물을 글썽이던 사람들의 얼굴에도 결연한 의지가 감돌았다.

그들을 둘러본 벤 야이르는 마른침을 삼키고는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성을 불질러 로마군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마시오. 그러나 식량 창고 한두 군데는 남깁시다.

우리가 먹을 것이 떨어져 죽었다고 보여서는 안됩니다.

자,다들 집으로 돌아가 식구들을 적의 손으로부터 구하시오.”

남자들은 경건한 얼굴로 흩어졌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 아내와 아이들을 부드럽게 껴안고,

눈물이 그득한 채 오래도록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을 죽였다.

남자들은 다시 한곳에 모였다. 제비를 뽑아 열 사람을 가려냈다.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처자들의 주검 옆에 눕자,열 사람은 집집마다 다니며 그들을 칼로 베었다.

살아 남은 열 사람은 다시 제비를 뽑아 한 사람을 골랐다.

뽑힌 사람이 다른 아홉 사람을 죽였다.

마지막 생존자는 모두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자 성안에 불을 놓고 나서 자신의 몸에 깊숙이 칼을 찔렀다.

서기 73년 4월15일 저녁. 죽은 사람은 모두 960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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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다 요새

사해(死海)에서 서쪽으로 4㎞ 떨어져 유태광야 동쪽 끝에 우뚝 솟은 바위산.

사방을 깎아지른 벼랑으로 둘러치고 뻗쳐오르던 바위산은 해발 434m에 이르러 문득 치솟기를 멈추고,

단칼에 베인 듯이 평평해진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배(船) 같은 모양을 한 바위산 꼭대기는

평균 너비 120m에 길이 620m,둘레 1,300m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없는 그 진흙땅 위에 놀랍게도 2000년이라는 세월을 간직한 성채가

거센 바람 속에서 말없이 유태광야와 사해의 푸른 물결을 내려다보고 서 있다.

거칠고 메마르면서도 웅장한 아름다움이 깃든 이 요새의 이름은 마사다.

마사다에 얽힌 사건을 역사책 ‘유태전쟁’에 자세히 기록한 요세푸스는

서기 66년 유태인들이 로마 제국의 통치에서 벗어나려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 갈릴리 지방의 유태군 지휘관이었다.

그는 나중에 조국에 등을 돌리고 로마군에 넘어갔지만,

어느 역사책에도 나와 있지 않은 마사다 싸움을 후세에 전했다.

마사다는 배신자 요세푸스 덕분에 오늘날 이스라엘에서 ‘영웅들의 성지(聖地)’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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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바위산을 처음 요새로 만든 이는 대제사장 요나단이었다.

그 뒤 유태왕 헤로데가 기원전 35년 여기에 성벽을 두르고 무기와 식량을 저장했다.

그는 로마에 기대어 유태를 통치했는데, 유태인들은 호시탐탐 반란을 일으킬 기회를 엿보았다.

게다가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까지 유태 왕국을 자기에게 달라고

로마 집정관 안토니우스에게 졸라대는 것을 알게 된 헤로데는 로마가 자기를 배신할까 봐 두려워

천혜의 요새인 마사다를 피난처로 만들었던 것이다.

헤로데가 죽은 뒤 마사다에는 로마군이 머물렀으나,유태전쟁이 일어나자 반란군이 이곳을 차지했다.

서기 70년 로마군은 유태의 반란을 진압하고 예루살렘을 불태웠다.

모든 유태인이 고향에서 쫓겨나게 되었는데,그 중 한 무리가 마사다로 도망쳐 로마군에 항거했다.

그들은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가 이끄는 젤롯파(열심당;유태교의 한 갈래) 신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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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다에는 헤로데가 가져다 놓은 옥수수와 콩,대추야자가 엄청나게 쌓여 있었고,포도주와 기름도 넉넉했다.

과일은 신선했고,잘 익어 있었다. 그것들은 메마른 날씨와 먼지가 섞이지 않은 공기 덕분에 100년이 넘도록 썩지 않고

잘 갈무리되어 있었다.

헤로데가 만든 물탱크에는 물이 가득했으며,

무기도 1만명 정도가 그보다 훨씬 많은 공격군을 상대해 지구전을 벌일 수 있을 만큼 창고에 그득했다.

사막과 다름없는 광야를 건너오기에 지친 로마군은 가파른 벼랑 위에서 내려다보며 활을 쏘아대는 반란군을

이길 수가 없었다.

성 안에는 식량과 무기가 넉넉했으므로

마사다야말로 젤롯파 유태교인들이 로마군과 맞서 싸우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요새였다.

마사다에 모여든 유태인은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합쳐 1,000명이 채 안되었다.

로마제국의 눈에는 한줌에 지나지 않았지만,그들은 마사다를 게릴라 기지로 삼아 끊임없이 로마군을 괴롭혔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꺼져 가는 반란의 불길이 또다시 타오를 것 같았다.

이미 2년 전에 유태왕국을 무너뜨리고 ‘유태 정복 기념 동전’까지 만들어 쓰던 로마제국으로서는

마사다의 유태인이 큰 골칫거리였다.

결국은 로마 황제 베스파시안이 정예 군단으로 꼽히는 제10군단에 마사다를 함락하라고 엄명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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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다 요새의 함락


서기 72년 플라비우스 실바 장군이 제10군단과 보조 군단을 이끌고 마사다로 진군해 왔다.

군세는 병사 9,000명과 노역에 부릴 유태인 전쟁 포로 6,000명.

실바는 마사다를 빙 둘러 벽을 쌓고 곳곳에 망루를 세웠다.

그러나 반란군보다 그들을 포위한 로마군의 사정이 더 열악했다.

로마군은 먼 데서 물을 길어 왔고 보급품도 유태광야 너머에서 날라왔다.

포위 작전이 소용없다고 깨달은 실바는 무더운 여름이 오기 전에 공격하기로 했다.

마사다 서쪽 벼랑에는 희고 넓은 바위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실바는 그 바위에까지 흙과 돌을 다져 비탈을 쌓도록 했다.

꼭대기는 마사다 성벽보다 20m쯤 낮았다.

이 엄청난 흙산 쌓기 공사는 아이러니하게도 유태인 포로들이 해냈다.

마사다 쪽에서는 활을 쏘아 이 공사를 막으려 했지만 좁은 전선(戰線),

즉 성벽의 한 지점에 많은 병력을 투입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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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단계로 로마군은 망루같이 생긴 공성탑(攻城塔)을 만들어 비탈 위로 올렸다.

공성탑 높이는 마사다 성벽보다 조금 높았다.

철판을 두른 이 탑에서 로마군 궁수들이 활을 쏘아 엄호하는 사이에 다른 병사들이 투석기(投石機)를 끌어올렸다.

세계를 정복한 로마군의 투석기는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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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거리가 400m나 되는 투석기가 20∼25㎏짜리 돌들을 날려보내자 성벽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유태인들은 무너진 성벽 자리에 서둘러 또 다른 벽을 쌓았다.

그들은 나무기둥을 두 겹으로 박고 그 안에 흙을 넣어 돌이 날아와도 무너지지 않도록 했다.

그러자 실바는 박격포에서 벌컨포와 미사일 공격으로 바꾸었다.

불화살이 유성처럼 날아가 박히고 횃불이 던져졌다.

남풍(南風)마저 가세하자 나무 벽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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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5일이 기울었다. 실바는 일단 진지로 물러났다.

그는 날이 밝으면 공성탑에서 구름다리를 놓고 성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로마 정규군 9,000명과 유태 반란군 수백 명의 대결. 마사다는 로마군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로마 병정들은 유태인이 한 명도 도망치지 못하도록 밤을 새워 물샐 틈 없이 지켰다.

밤 사이에 유태인 전원이 자결한 것을 실바가 알 리 없었다.

날이 밝자 로마군은 단단히 무장을 갖추고 성벽에 나무다리를 걸쳐놓았다.

로마군 선봉이 함성을 지르며 구름다리를 건넜다.

그런데 너무나 이상했다. 적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성은 무섭도록 고요함에 잠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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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탄 건물과 960명의 장렬한 주검이 로마군을 맞았다.

그들은 뜻밖에 벌어진 일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우리들의 비겁한 패배가 저들의 승리를 더욱 영광스럽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들로 하여금 우리의 죽음에 실망하고,경탄하도록 만듭시다’라고

열변을 토한 벤 야이르의 말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비록 적군이지만 그 장렬한 죽음 앞에서 로마군은 기뻐할 수가 없었다.

병사들이 이곳저곳을 수색하자 두 여자가 숨어 있던 도랑에서 나왔다.

여자들이 간밤에 있었던 일을 자세히 말하자,실바는 두 여자와 아이들 다섯을 모두 살려 주었다.

로마군은 마사다에 40년쯤 머물렀다. 500년 가량 지나 비잔틴 수도사들이 한동안 살았지만,

이슬람 교도들이 유태를 정복하자 그들도 떠나갔다.

유태인들이 이스라엘을 세우기까지 1900년 간이나 세계 여러 곳에 흩어져 떠도는 사이에,

그들의 용기와 신앙을 상징하는 마사다는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마사다 요새의 발굴

요세푸스가 쓴 마사다 이야기는 다른 역사 기록에는 없었으므로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는 서기 73년에 마사다에 있지 않았으며,더구나 유태인을 배반하고 로마에 붙은 사람이 아니던가.

그러나 요세푸스의 기록이 사실임이 밝혀질 날은 끝내 오고야 말았다.

1838년 사해 바닷가를 여행하던 두 미국인 학자 E 로빈슨과 E 스미스가 우연히 이 장엄한 바위산 위의

폐허 흔적을 보고 망원경으로 살폈다.

그 뒤로 이스라엘 정부가 발굴에 나서기까지 125년간 많은 탐험가들이 마사다의 비밀을 한꺼풀씩 벗겨냈다.

아랍 사람들이 아스 사바(저주받은 땅)라고 부르던 기묘한 바위산이 점차 역사 기록 속의 마사다로 바뀌어 가자

이스라엘 정부는 결단을 내렸다.

1963년 마침내 유태인 고고학자 이가엘 야딘이 요세푸스의 기록을 뒷받침할 유적을 발굴하는 일을 떠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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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야딘은 이스라엘 독립운동에 참여해 군 참모장이 되었다가 나중에 부총리에까지 올랐다.

1952년 군을 떠난 야딘은 히브리대학 고고학 교수로 일하면서 1955년부터 유태 광야와 사해 근처에서 여러 유적을

발굴해 왔다. 야딘은 1963년 10월∼1964년 5월,1964년 11월∼1965년 4월 두 차례 마사다를 발굴했다.

그리고 요세푸스의 기록에 거의 틀림이 없음을 샅샅이 밝혀냈다.

그는 먼저 짤막한 신문 광고를 내 발굴을 도울 자원봉사자를 모집했다.

워낙 외진 데다 날씨가 고약한 곳이어서,스스로 나선 사람이어야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왕복 여비를 자기가 내고,두 주일간 한 천막에서 열 사람이 지내며 음식도 좋지 않다는 조건이었지만,

스물여덟 나라에서 신청서가 쏟아져 들어왔다.

지원자 5,000여명은 한 번에 두 주일씩 스물세번에 걸쳐 번갈아 일했다.

가드나(이스라엘 청소년 전투부대) 학생들과 키부츠(집단 농장)에서 온 지원자까지 합쳐

날마다 평균 300명이 발굴을 도왔다.

야딘은 그 옛날 로마 제10군단장 실바의 캠프와 맞닿는 곳에 발굴본부를 차렸는데,

내내 혹독한 날씨에 시달렸다. 아마도 세계 고고학 발굴 역사에 마사다에서처럼 어려운 발굴은 없었으리라.

남풍은 시속 100㎞로 불어 천막을 갈가리 찢었고,느닷없이 쏟아지는 장대같은 소나기는 눈 깜박할 사이에

골짜기를 채웠다. 말라붙었던 개울이 강으로 바뀌고,캠프와 캠프 사이로 흙탕물이 넘쳐흐르는 바람에

보급 물자를 헬리콥터가 날라다 준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렇지만 그 덕분에 야딘은 헤로데 왕이 만든 거대한 물탱크에 물이 가득 차 있었다는 기록을 믿게 되었다.

옛사람들은 바위산 꼭대기에서도 빗물을 잘 저장해 물 문제를 해결했던 것이다.

야딘이 제일 먼저 발굴한 곳은 마사다 북쪽 끄트머리 벼랑에 지어진 3층 건물이었다.

요새라기보다 화려한 벽화로 장식된 왕궁이었다. 헤로데 왕은 사해의 해면으로부터 340m나 되는 높은 곳,

로마 시대의 수려하고 전통적인 공중 목욕탕을 본뜬 독탕에서 찬물과 미지근한 물과 뜨거운 물을 마음대로 쓰며

사치스럽게 지냈다.

헤로데의 궁전을 발굴하느라고 자원봉사자들은 밧줄로 몸을 묶고 까마득한 낭떠러지에 매달려 거센 바람에

흔들리며 일했다. 헤로데가 그처럼 위험한 곳에 궁전을 지은 까닭은,경치 좋고 방어하기 좋다는 점도 있었겠지만

햇빛 드는 시간이 짧아 서늘하고 바람막이가 잘 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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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딘은 여기에서 처음으로 유골 세 구를 찾아냈다.

하나는 젊은이의 것이었는데,그 옆에는 갑옷에 달았던 은비늘 수백 개와 화살들이 흩어져 있었다.

또 하나는 금방 손질한 듯이 땋은 까만 머리카락이 붙은 젊은 여자의 유골,나머지 하나는 어린아이의 것이었다.

3층 왕궁 옆 커다란 창고 건물을 복원하는 데는 이스라엘군 공병대가 뜯어서 올린 뒤 조립해 준 기중기를 썼다.

창고 뒤로는 아파트와 비잔틴 수도사들이 지은 회당이 있고,헤로데의 별장인 서궁(西宮)과 큰 수영장이 있었다.

그밖에 작은 궁 세채가 더 있었다.왕은 마사다를 빙 둘러 성벽을 쌓고,군데군데 탑 38개를 세웠다.

탑 안과 성벽에 붙여 지은 방이 110개.유태인들은 이 방들을 칸막이로 막아 여러 세대가 함께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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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소 크기의 목욕탕이 나란히 발굴되자 야딘은 이것이 유태교에서 침례 의식을 할 때

사용하는 미크베가 아닐까 생각했다.밖에서 대형 욕탕으로 통하는 수로가 지붕들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을 욕탕으로 끌어들이는 데 쓰인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유태 율법에 따르면 미크베는 하늘에서 떨어져 곧바로 흘러든 ‘순수한’ 빗물로 채워야 한다.

물통 따위로 길어온 물은 안 된다.

율법학자들이 마사다의 욕탕을 제2 성전시대 미크베라고 고증하자 온 이스라엘이 떠들썩했다.

그 동안 제2의 성전시대(기원전 520∼516년·스룹바벨 왕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축한 때) 때

미크베는 하나도 발견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가장 뜻깊은 유물이 나왔다.

성벽의 한 방에서 파편더미를 2m 넘게 치우자 옷,

이불,바구니 따위와 함께 두루마리 구약성서가 나왔다.

자원봉사자들이 달려와 양피지 한 조각을 내밀었을 때

야딘은 그것이 시편 81∼85편인 것을 금방 알아보았다.

적외선 사진을 통해 판독해 보니 서기 40년 이전에 쓰여진 것이었다.

내용은 몇몇 작은 변화 외에는 오늘날 쓰이는 성서와 똑같았다.

마사다에서 나온 두루마리 구약성서는 모두 14개였다.

시편,레위기,에스겔서,신명기 부분들과 유태 민족이 해방된 기쁨을 적은 희년서(喜年書),

그리고 외경(外經;구약 성경에 들어 있지 않은 책 14권.

카톨릭에서는 이를 구약성경과 같은 무게로 다루지만

신교에서는 ‘성경은 아니지만 읽어도 무방한 책’으로 인식한다)인 ‘벤 시라의 지혜서’.

‘벤 시라의 지혜서’는 탈무드에 널리 인용되며 율법학자에게 성서와 마찬가지로 권위 있게 취급된다.

원본이 자취를 감추고 희랍어 번역이 ‘외경’에 수록되었는데,마사다에서 히브리어 원본이 나온 것이다.

보통 고고학 발굴이 느리고 지루하게 진행되는데 비해

마사다에서는 매주,심지어 시간마다 새로운 유물이 발굴됐다.

“우리는 거의 매일 뭔가를 찾아냈다.무얼 찾아내느라 며칠씩 땅을 팔 필요가 없었다.”

(고고학자 암논 벤토르) 발굴팀은 갖가지 항아리와 살림 도구,‘유대인의 자유’라고 새겨진 진귀한 동전,

세계를 통틀어 6개뿐인 은화 3개,가장 오래된 천조각 따위를 찾아냈다.

반란군이 쓴 검소하고 한맺힌 유물과 헤로데가 남긴 화려한 유물은 대조적이었다.

고고학적으로는 헤로데의 유물이 더 값졌지만 정신의 고귀함은 반란군의 유물에서만 볼 수 있었다.

마사다가 ‘영웅들의 성지’라 일컬어지는 것은 이 고귀한 정신 때문이다.

가드나(청소년 전투부대)에 들어간 이스라엘 청소년들은 마사다 꼭대기에서 이렇게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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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마사다가 함락되지 않게 하리라!”

꺾이지 않은 선조들의 고귀한 정신을 잇고자 하는 이 절절한 외침은 60∼70년대에

주변 아랍국들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승리로 이끈 원동력이 됐다.

그러나 오늘날 고고학계에서는 마사다가 ‘정치와 고고학이 결탁해 역사적 사실을 미화하는데

이용됐다’는 주장이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발굴 결과가 요세푸스의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 있다.

유골은 겨우 20구밖에 나오지 않았으며 제비 뽑기에 쓰인 이름이 새겨진 질그릇 조각은

10명보다 하나 더 많은 11개가 발견됐다.

요세푸스는 그리스·로마의 고전 설화에서처럼 영웅적 항전을 장렬하게 장식하느라고

극적인 최후를 가미해 집단 자살 얘기를 문학적으로 꾸몄다.”(이스라엘 고고학자 닐 실버먼)

실버먼은 또 “60년대에 이스라엘은 적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역사적 사건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자 고고학자들은 전혀 다른 동기와 목적을 가진

정치가들에게 발굴 작업의 역사적 가치를 평가할 권리를 빼앗겼다”며

요세푸스의 허구를 이스라엘 정치가들이 이용했다고 주장했다.

이스라엘군 신병훈련 책임자였던 대령 출신 군사 사학자 마이어 파일은 더 직설적이다.

“이스라엘의 정치·교육·군사 지도자들이 마사다를 이용했다.

그들은 군대 창설 과정에서 용기와 결사항전의 본보기로 마사다를 내세웠으며

국민에게 패배의 참혹함을 보여주어 전쟁에 지면 안된다는 생각을 심어 주려 했다.

어떻게 광신과 집단 자살 이야기를 국가의 정체성으로 삼을 수 있는가.

마사다는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이제 마사다는 잊어야 한다.”


-- 부록 --

이스라엘의 건국

19세기에 들어서자 세계 각지의 내셔널리즘이 발흥하는 가운데

동유럽 및 러시아에서 유대인에 대한 민족 억압이 드세졌다.

이에 유대인들 사이에 자신들의 조상이 하느님으로부터 약속받은 성지(聖地)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조국을 세워야만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끝난다고 믿는 시오니즘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시오니즘은 1887년 오스트리아의 테오도르헤르첼이 스위스 바젤에서 시오니스트 대회를 연 것을 계기로

정치운동화되었다. 그러나 지지부진한 진행으로 발전을 보지 못해 1882년 최초의 유대인 이민이

팔레스타인으로 들어서기 시작한 지 35년 뒤인 1917년까지 겨우 3만 2000명밖에 이민하지 못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러던 중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영국은 당시 중동에서의 영국군 작전기지 역할을

맡고 있던 팔레스타인 땅을 지키기 위해 전세계 유대인의 협력을 얻고자 ‘밸푸어 선언’을 발표하고,

전후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조국 건설을 허락한다는 약속을 하였다.

이와 함께 전후 동유럽 여러 나라에서 유대인에 대한 압박이 심해지고

1930년대에는 독일에 히틀러의 나치즘이 등장하여 유대인에 대한 대학살을 개시하면서

시오니즘 운동은 급속히 발전하였다.

팔레스타인은 1918년 영국의 군정하에 놓여 있었고 1920년에는 영국의 위임통치하에 있었으나,

그 무렵 팔레스타인에의 유대인 이민은 격증하여 제1차 세계대전 당시 7만 정도였던 유대인 인구는

세계 각지로부터 돌아온 이민을 맞아들여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약 40만으로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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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이민의 증대는 아랍인과의 대립·항쟁을 가져왔다.

소수파로의 전락과 토지상실을 두려워한 아랍인은 19년부터 종종 반(反)영국·반(反)유대 폭동을 일으켰고,

1938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는 1939년까지는 전국적으로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두 민족의 대립은 한때 가라앉기도 하였으나 대전 말기에는 다시 격화되어,

이번에는 유대인 쪽이 독립을 억제하려는 영국에 반발하여 반영(反英)·반아랍 투쟁을 하게 되었다.

전후에 대립은 한층 격화되었다.


영국은 두 민족의 대립을 진압하여 전략적 요충지인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배권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위임통치 방기를 결의, 1947년 문제를 UN(국제연합)에 이관하였다.

UN 총회는 1947년 11월 팔레스타인에 아랍·유대 연방을 조직하게 하는 연방화안(案)과 아랍·유대의 개별국가를

건설하여 예루살렘을 국제관리하에 두도록 하는 분할안중 후자를 2/3 이상의 다수로 채택하였다.

이 안(案)에는 팔레스타인을 대소전략의 일환으로 삼으려는 미국과, 시오니즘에 반대하면서도 유대,

아랍 양 민족의 민족자결을 승인하는 소련이 함께 찬성하였다.

이 안을 유대인 쪽은 찬성하였으나 아랍 쪽은 반대하여 팔레스타인 각지에서 게릴라전을 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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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5월 14일 영국의 위임통치가 끝나고 영국군의 철수완료와 함께 유대 국가건국위원회 의장

벤 구리온이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하였다.

동시에 아랍연맹에 가입한 아랍 제국의 정규군이 팔레스타인에 침입하여 제1차 중동전쟁(팔레스타인 전쟁)이

개시되었다. 이스라엘은 개전시에는 열세였으나 마침내 아랍을 압박하여 1949년 정전이 실현되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아랍 대 이스라엘의 대립은 계속되어 1956년 10월 제2차 중동전쟁(수에즈 전쟁),

1967년 6월 제3차 중동전쟁(6일전쟁),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10월전쟁) 등 모두 4차례에 걸친 전쟁을 하였다.

내용출처 : 두산백과사전 참고

이스라엘은 독립했습니다. 중동지역을 예의 주시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실때가 멀지 않았습니다.

마가복음 13장 28~ 33절


28.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29.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
30.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31.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2.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3.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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