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8월24일
가시연꽃이 피었어요
처서가 지나면 더위도 수그러지겠지. 내심 기대했다. 어쩌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면 ‘이제는 여름도 늙어가나 보다’ 중얼거리기도 했다. 이제 8월도 다 간다. 가라고 등 떠밀지 않아도 어느 날 홀연히 떠난다. 그때까지 버티는 거다.
주말이라서 출근하는 사람도 없고 모든 일 제쳐두고 ‘산책하러 간다.’로 마음을 굳혔다. 어정거리다가는 햇볕에 굴복하고 시원함을 택하는 나약한 모습을 봐야 한다.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산책은 나에게 행복 바이러스요 활력을 주는 비타민이다. 어쩔 수 없을 때는 그냥 즐기자고 위로하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창가에서 서성거린다. 오늘도 너무 뜨겁다 시무룩해서 거실로 들어온다.
저녁 무렵 사람들이 퇴근할 시간쯤에 아파트 단지를 걷는 사람이 있다. 반바지를 입거나 반소매 셔츠를 입은 것도 아니고 긴 바지에 긴소매 옷을 입고서 걷기 힘든 무더운 날에도 걷는다. 건강이 안 좋은가? 운동을 해야만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혼자 쓸데없는 생각을 키우면서 계단 창문가에서 퇴근하는 남편을 기다린다.
오랜만에 토산지로 갈까? 마음이 끌려서 연지못 반대편으로 걸음을 돌렸다. 골목길을 막 돌아서는데, 저 끝에 검둥개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기겁했다. 원래도 개를 무서워하는데, 작년에 덩치 큰 개가 논을 가로질러 달려와서 옷자락을 물어뜯는 수난을 당한 뒤라 본능적으로 그냥 획 돌아섰다. 연지못으로 가라는 신의 계시다 농담처럼 중얼거렸다. 아랫마을 골목길을 둘러보면서 걷는 맛은 고소한 들깨 맛이다. 담벼락의 호박 덩굴도 시들어갔다. 능소화는 8월 땡볕에도 낭창하게 피어있다. 어려서 귀걸이 놀이하던 분꽃이 한창이다. 올가을엔 분꽃 씨앗을 주인장에게 얻어서 시골집 마당에 심어놓고 싶다.
내 눈을 의심했다. 가시연잎으로 뒤덮인 토산지에 가시연꽃이 보였다. 해마다 꽃을 보지 못하고 아쉽게 넘어갔는데 올해는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가시연꽃이 동자못에 가득했다. 종종걸음으로 동자못 가까이 다가가 보니 코앞에 가시연꽃이 보랏빛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믿어지지 않는 풍경 앞에서 허둥거리며 ‘나에게 멋진 풍경을 보여주려고 나를 이곳으로 부르신 거야’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많은 꽃을 피우기는 참으로 오랜만이다. 어느 해에는 망원경을 가져와서 가시연꽃을 찾아보기도 했다. 아쉽게도 꽃이 활짝 피지 못하고 가을을 맞곤 했다. 가슴이 마구 뛰었다. 가시연꽃에 미쳐서 동자못에서 살다시피 한 열정의 시간도 있었다. 가시연꽃으로 환생한 은사님을 만나는 중이다. 선생님 가시연꽃이 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