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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끝마을 방파제에 배들이 묶여 있다. 비오는 날 땅끝마을은 더 정겹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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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박신용철 |
| "잠 못드는 이에게 밤은 길고, 피곤한 길손에게는 지척도 천리. 바른 진리 깨닫지 못한 이에게 윤회의 어둠 길은 멀고 멀어라.(법구경 제 60)"
가을이 오는 것을 알리는 신호라고 생각했던 비가 내려도 끈적끈적한 더운 날씨가 계속되던 9월 초의 어느 날, 짜증을 한 덩어리 안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책상 위에 강원도 어느 마을 주소가 적힌 한 통의 편지가 놓여 있었다. 가위를 들고 봉합된 곳을 조심스럽게 잘라낸다. '강원도에는 벌써 가을이 왔다'는 메모와 함께 봄, 여름, 가을에 우리 산하에 만발했던 자생꽃들이 가득했다.
지난 주에는 경춘선을 타고 춘천으로 향했다. 차장밖에는 누런 벼이삭들이 영글어가고 있었다. 가을이다. 그리고 마음은 전남의 끄트머리 해남으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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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바다 먼 곳을 바라보는 얼굴바위가 애처롭다. 누구를 기다리는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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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박신용철 |
| 서울살이 6년이 넘어가고 있지만 버글거리는 서울거리에 늘 불편하다. 지난해 9월에는 해남으로 향했다. 한번은 땅끝마을과 대흥사에 가보고 싶다는 계획을 매번 세워만 놓고 있던 터였다.
서울에서 광주, 해남을 거쳐 6시간은 족히 걸려 도착했던 땅끝마을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등대와 단출한 어촌마을을 꿈꾸던 땅끝마을은 오래 전부터 도시인들의 발길로 인해 상업지로 변해있었다. 그날도 고산 윤선도의 흔적들이 남아있는 보길도로 향하는 여행객들이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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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흥사 산문에서 본원까지 이르는 길은 10리길이다. 동백꽃, 왕벚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이 즐비하고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가 누구든 정겹게 맞아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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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박신용철 | 선착장에 앉아 파란 남해바다를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주보고 있는 얼굴바위 사이로 태양이 졌다. 그리고 대흥사로 향했다.
전남 해남군 삼산면 두륜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대흥사는 백제 무령왕 15년에 진흥왕의 모친 소지부인의 발원으로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대흥사는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한 권역과 아미타여래를 모신 천불사 대광명전을 중심으로 한 권역 그리고 임진왜란 때 구국의 대업을 이룬 서산대사의 유물과 진영을 봉안한 표충사가 산세를 따라 자리잡고 있다.
삼국시대 창건된 절이지만 작은 암자에 불과했던 대흥사는 서산대사가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을 앞두고 의발을 자신의 출가처인 대흥사에 봉안하도록 유언하면서 중흥의 계기를 맞았다. 이후 13대 종사와 13대 강사가 배출될 정도로 중흥도량이 되었다.
명승 제4호인 두륜산에 자리한 대흥사는 보물 제48호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을 비롯한 보물 4점, 천연기념물 제173호 왕벚나무 자생지, 전남 유형문화재 제48호 천불전 등 많은 문화유산을 품고 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 박물관이다.
'두륜산 대둔사'이라고 적힌 편액에 단청을 칠하지 않은 아름드리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산문은 대흥사로 가는 '구곡(구곡) 구교'가 시작되는 출발점이다. 현무교→이원교→운송교→홍류교(장춘교)→강화교→피안교(청홍교)→반야교(쌍왕교, 운학교)→심진교를 거쳐 북원에 이르는 아홉 계곡과 계곡마다 놓인 다리를 계곡 물소리와 열대식물 1120여 종을 벗삼아 걷다보면, 도시 일상으로 찌듯 때들이 하나씩 벗겨져 자연인으로 돌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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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박신용철 |
| '之(갈 지)'자로 난 길을 따라 30여 분 걸리는 10리의 구곡구교 길은 절집을 구경하러 가는 길이 아니라 부처의 해탈에 이르는 길이었다. 길 옆에 계곡 물소리, 새 소리와 함께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이들을 벗하고 오르다 보면 속세의 번민과 집착이 자연스럽게 옷고름을 풀게 된다.
그 뿐일까? 민주주의의 성지 '광주'가 있는 전남에 대흥사라고 따로 있지 않다. 대흥사로 가는 길에서도 5월 광주를 만나게 된다.
980년 5·18 민중항쟁 당시 이곳 대흥사는 여관이 많아 5·18 시민들이 숙식을 해결하는 장소였다. 당시 시민들 탑승차량 7~8대가 광주여관, 안흥여관(지금은 없어짐), 유선여관에 도착 이곳 주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받았으며 이곳 주민들은 5월 22일 아침 광주로 향하던 시민들에게 김밥, 음료수 등을 지원하는 등 민주화 운동에 뜻을 함께 했던 곳이다.
당시 해남으로 향하던 직행버스에서 만난 한 아주머니가 구성진 전라도 사투리로 전해주던 광주 체험기는 아직도 생생하다.
가족들은 모두 광주를 빠져나왔는데 라면을 사러간다고 나갔던 아들이 이틀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아들의 시신이라도 찾기 위해 도청 지하실을 찾았다. 즐비한 시체들을 하나씩 뒤집어 보면서 아들을 정신없이 찾다보니 구석진 자리까지 왔다. 아들은 없었다. 그런데 몸을 돌려 빠져 나오려 하자 발길 떨어지지 않더란다.
처음에 들어왔을 때는 아들을 찾겠다는 마음으로 시신들을 뒤졌지만 아들의 시신이 없음을 확인하고 돌아 나오려는 길에 놓인 시신들을 보면서 무서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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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여기의 부도와 14기의 탑비가 즐비하다. 서산대사가 자신의 발의를 묘향산에서 한반도 끄트머리인 대흥사에 봉안하도록 유언했을까? 제자 사명당이 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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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박신용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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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흥사는 북으로 월출산이 이어져 있고 동쪽으로 천의산, 서쪽으로 선은산 남쪽으로는 남해바다가 둘러싸여 있으며 골짜기는 깊고 그윽하니 이곳은 만세토록 훼손당하지 않을 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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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박신용철 |
| 5월 광주를 가슴 한 편에 움켜쥐고 대흥사로 발길을 다잡으면 최근 만든 일주문을 만난다. '두륜산 대흥사'라고 적힌 일주문을 지나 길손을 처음 맞이하는 것은 부도전이다. 국내 최대의 부도밭인 이곳에는 서산대사, 연담, 초의스님 등 50여기의 부도와 14기의 탑비가 대둔사의 위용을 웅변해준다.
다양한 형태의 부도와 탑비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대둔사에 담긴 불심과 역사가 바람결에 실려 귓전을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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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가모니를 모신 대웅보전. 대흥사 북원의 중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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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박신용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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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개의 부처를 보신 천불전. 대흥사 남원의 중심에 모셔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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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박신용철 |
| 대흥사는 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 등과 교류하며 차를 통해 우리의 정신 문화를 중흥시킨 초의스님의 유적과 유물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대흥사 곳곳에는 조선 후기 명필인 원교 이광사, 추사 김정희, 창암 이삼만, 해사 김성근, 위당 신관호 등의 서예 작품이 편액으로 남아있다.
이곳에 오면 꼭 들러야 할 곳이 있다. 대흥사에서 산길을 따라 7백m 가량을 오르면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일지암을 만날 수 있다. 초의선사가 '다선일여(茶禪一如)' 사상을 생활화하기 위해 말년에 꾸며 지은 다원이다. 이곳에서 남해바람에 차 한 잔 마시면 물욕이 사라진다.
지금도 생명력 하나없는 도시의 일상에 찌들어갈 때마다 남해바다에 이마를 맞대고 있는 그곳에 가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