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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풍양조씨호군공파 원문보기 글쓴이: 조웅희
南門世誼會 居昌 咸陽 先賢遺蹟 踏査
“南門世誼會”는 예전 어른들이 오랜 기간 교류를 하면서 세의를 다진 남인 문중의 후예들이 만든 모임이다. 작년 가을 안동, 예천지역 답사때 동참하자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개인사정으로 참석치 못했다. 그 후 모임에 대해 잊어버리고 있던 중에 상주 우천의 柳賢佑 兄으로부터 가입을 권유받아 주로 SNS에서 주제별로 발표와 토의를 하며 세의를 다져왔다. 한번도 뵌적이 없지만 선현의 사상과 학문을 가지고 토론을 하다보면 회원들의 열의가 엄청 나다는걸 느낄수 있었다. 자신의 선조와 상대방의 선조까지 지난 연비를 들추고 고리를 맞추어 나가는 모습이 무척 신선하게 느껴졌다. 물론 지금 활동하고 있는 모임도 대다수 같은 방향을 추구한다. 다른면이 있다면 연령대가 훨씬 젊어졌다는 것이다. 회원을 보면 영양남씨 난고후손(춘근), 선성김씨 백암후손 2분(석규, 태곤), 평해황씨 금계종손(재천), 원주이씨 눌은종손(병우), 재령이씨 석계후손(장희), 풍산류씨 수암후손(현우), 진성이씨 온계후손(종문) 모두 9명이다. 모두들 젊은 연령대임에도 불구하고 조상에 대한 해박한 지식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나는 주로 말하기보다 회원들의 고매한 인품과 가지고 있는 많은 지식을 듣는 수준에 불과할 뿐이다. 한편으로는 얇은 지식이 탄로 날까 두려워 숨 졸이며 듣는 때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알아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생각하며 하나하나 공부를 통하여 나의 지식을 넓혀 나가는데 의미를 두고 있다.
수년전 방송을 통하여 유행된 광고 문구가 있었다. “1년을 입어도 10년 된 듯한 옷, 10년을 입어도 1년 된 듯한 옷”이라는 카피는 내 생각에 우리 모임의 회원들을 두고 짜낸 카피 같았다. 박약회 회원인 두분을 제외하고는 처음 뵙는데 반갑기 보다는 어디서 뵌듯한, 자주 접하며 소주 한잔 나누었던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나만의 생각인지는 몰라도 하룻밤 유숙하며 그 세의는 확실히 깊어지는 것 같았다. 아마도 수백년간 혼맥을 통하여 각자의 몸속에 흐르는 조상의 DNA때문이 아닐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사실 우리 영남 남인은 한집 걸러 혼맥이 연결되는 끈끈한 고리가 있어 남이라기보다는 형제간과 같은 우의와 교류가 있었다. 조상들의 세의가 후대를 엮어주는 디딤돌이 된 것이다.
올해 초 갑자기 춘계모임이 거창으로 결정되었다. 온라인상에서 桐溪先生(諱 蘊)에 대한 토론이 활발히 벌어졌고 선생의 유적지를 보고자 하는 마음에 그리 결정되었으리라 생각되어진다. 거창에 근무하는 관계로 동계선생을 위시한 거창의 남인문화에 대한 자료를 찾다보니 거의 없었다. 이 지역은 주지하다시피 경상우도의 남명선생 문화권이라 대부분이 북인 유적지이다. 이틀간의 일정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에 인근의 함양지역 유적지도 포함시키기로 하였다. 一蠹古宅이 있는 개평마을과 남계서원, 청계서원을 넣고 함양의 정자문화를 보여 주기로 혼자 결정하였다. 2년 전 거창에 내려올 때 이미 혼자서 답사를 다해본 곳이었다. 직업 특성상 외지 근무가 대부분이라 제일 먼저 하는 것이 그 지역의 문화를 읽는 버릇이 있다. 내 일은 접어두고 거의 일주일간 거창지역의 유적지를 찾아 다녔다. 가까운 곳은 조석으로 운동을 겸해서 접하고 먼곳은 출근하고 막바로 찾아 다니곤 하던 생각이 난다. 직업이 아파트 건설이다 보니 그 지역 주민의 성향과 소비패턴을 아는 것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며칠을 다니다 보니 이 지역은 우리네 경북과 많이 다르게 느껴졌다. 문중과의 유대감이 부족하고 지역을 대표하는 문중이 없으며 세의가 활발치 않다는 사실을 느꼈다. 산 좋고 물 좋은 지역이라 지역 토반들 보다는 외지인이 많아 그만큼 결속력이 떨어진다. 또한 우리네와 달리 향념이랄까 선현 현창에 대한 사고가 많이 부족함을 느낄수가 있었다. 고택을 방문하여도 안내와 접빈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저 혼자 구경하고 오는 것이 대다수였다. 접빈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지역의 단면을 볼수 있었다. 혼자 말로 손님이 찾아오면 우리네 문화는 찬물 한 그릇이라도 내오는 것이 예의인데 이 지역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쳐다만 보고 질문을 하여도 그에 대한 답을 얻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렇듯 문화가 다른데 과연 회원들이 답사를 하면 문화적 충격을 어찌 감당해낼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하지만 교양과 양식을 갖춘 회원들이라 충분히 이해하리라 생각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3월 21일, 22일 양일간 일정이 결정되었다. 첫날 오후는 함양지역, 숙박은 동계고택, 다음날은 수승대를 위시하여 모리재, 갈천고택, 황산 거창신씨 세거지등을 답사하기로 하였다. 두 팀으로 나누어져 서울팀 도착이 12시, 대구팀 도착이 1시 반이다. 서울팀 도착 시간에 맞추어 거창 터미널에 나갔다. 모두들 처음 뵙는 분이지만 한 번에 알아볼수 있었다. 가벼운 수인사를 하고 우리는 대구팀 도착 시간에 맞추어 일정을 진행했다. 거창의 남인문화는 동계선생을 제외하곤 사실 거의 전무한 편이다. 1시간 반정도 여유가 있어 동계선생 산소를 찾아 가북면으로 향했다. 齋舍인 龍泉精舍에 들러 선생의 신도비와 기문을 훓어 보았다. 신도비는 홍수에 떠내려가 刻字의 해독이 불가능한 지경이라 후손들이 새로이 신도비를 세워 놓았다. 동계선생이 여막살이를 하던중 조석으로 냇가에 물 길러 가는 정성에 감읍하여 재사에 물이 나왔다는 전설로 이름지어 졌다고 한다. 立齋 鄭宗魯 선생이 기문을 쓰고 중건기는 거창부사를 지낸 李晩胤 선생이 쓰셨다. 위로는 어머니 진주강씨 산소, 아래로 아랫대들 산소가 있다. 어머니 정부인 강씨는 一蠹 鄭汝昌, 동계와 같이 남계서원에 배향된 介庵 姜翼의 질녀이다. 앞으로는 문필봉을 보고 좌우로 자그마한 산들이 폭 싸고 있는 그런 지형이다. 인근에 있는 사변리 변씨고가에 들리니 문은 잠겨있고 관리가 제대로 되지않아 일행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조선초 卞季良 형제의 문집 목각판이 보관된 곳을 보고 대구팀을 맞이하기 위하여 일정에 없던 동계산소를 답사하고 급히 터미널로 향했다.
정확히 도착하여 일행 9명은 가볍게 서로 수인사를 하고 중식을 하러 안의면 원조갈비집으로 향했다. 가볍게 갈비탕으로 허기를 채운뒤 행선지인 개평마을로 향했다. “左安東 右咸陽”이라는 옛말이 있듯이 이 마을은 하동정씨, 풍천노씨, 초계정씨 3개성이 오랜기간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유서깊은 마을이다. 일두고택, 하동정씨 고가, 풍천노씨 종택, 노판서댁등 고래등 같은 瓦家가 즐비한 곳이다. 일두 기념관에서 일두선생의 생애와 업적등을 관계기관 학예사로부터 설명을 듣고 고택을 향했다. TV 드라마 “토지”의 촬영 장소이기도한 고택은 몇겹의 기단위에 “忠孝節義”라는 힘찬 글씨가 걸린 전형적인 사대부가이다. 여러번 중건을 거쳐 퇴색된 예전의 맛은 없지만 답사객들이 감탄하고 갈만한 명품 고택이다. 일두 사후 100여년 뒤에 지어진 건물이지만 예전의 사랑채 앞 蓮塘은 사라지고 石假山만 놓여였다. 설명하러 온 해설사 조차 연당의 규모나 위치를 모르고 석가산에 대한 엉뚱한 얘기를 하니 마이동풍이 따로 없다. 교육을 받고 남에게 유적을 설명하려면 기초적인 지식을 갖추어야 하는데 이런점은 아쉽다. 솔송주 한잔을 맛보고 일행은 개평마을 전망대에 올라 마을 전체의 전경을 구경했다. 새로 세운 초선대는 이 고장 19명의 시비를 세워 놓고 개평마을을 내려보고 있었다. 일행중 한분이 마을을 보존하려면 둘레를 감싸고 있는 토지부터 매입을 하여야만 타성의 무분별한 건축을 막는다는데 모두가 공감을 표하였다.
일두, 개암, 동계선생을 배향한 남계서원은 대원군 시절 훼철되지 않은 서원중의 하나이다. 서원 건축 문화가 우리네와 조금 다르고 누각에 단청이 되어있다. 서재앞에 놓인 신도비 또한 이 지방 고유의 문화인 것 같다. 다른 건축물은 우리와 거의 흡사하나 동, 서재의 한쪽 누하주가 설치되어 조금 독특했다. 바로 옆의 청계서원은 濯纓 金馹孫 선생을 배향한 곳인데 원래 탁영선생이 공부하던 없어진 건물을 남계서원측의 도움을 받아 서원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탁영, 일두 모두 佔畢齋 金宗直 선생의 문인이니 두 서원간의 세의는 알만하다, 건물은 두곳 모두 비슷한 구조로 지어지고 탁영을 닮은 낙낙장송과 연당이 특이하다.
함양의 정자문화를 보기위해 화림계곡에 들어서니 불타 없어진 弄月亭 주변은 음주가무의 유희 장소로 변하였다. 달을 희롱한다는 선비들의 풍류장소 이던 몇 백년 건물은 한순간의 화마에 사라져 선현의 유서깊은 장구지소가 한낱 상춘객들의 오락 장소로 변했다는게 슬프다. 관계당국의 조속한 복원과 주변의 시설 정리가 요구되는 부분이다. 정유재란시 황석산성 전투에 大笑軒 趙宗道를 위시하여 순국한 선현을 모신 黃巖祠에서 일행은 나라에 충의를 절개를 보여준 분들께 류현우 형의 창홀에 따라 알묘를 하였다. 居然亭은 얼마전 까지도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진입로 확장공사가 한창이다. 또한 건물 내부 마루를 현대식으로 깔아 고전미가 없어진 정체불명의 건물이 되고 말았다. 탁상행정의 실체를 보는 부분이다. 과연 그 많은 자금을 투자하고 실제 확인은 했는지 의심이 가지 않을수 없다. 인근의 君子亭, 永慕亭, 東湖亭은 시간 관계상 차창 밖으로 보며 용추계곡의 용추폭포를 구경하고 저녁식사를 위해 이동하였다. 너무 늦게 동계종택에 들어가는 것도 실례이기에 일정을 당긴 것이다.
석식은 거창의 맛집으로 소문난 위천 구구식당에서 어탕국수로 했다. 1급수를 자랑하는 고장인 만큼 신선한 재료로 조리된 어탕국수는 일품이었다. 하루를 마감하며 소주 한잔 기울이고 숙박지인 바로 옆의 동계종택으로 향했다.
宗孫 鄭完洙翁께서 삽작거리 밖에서 일행을 기다리고 계셨다. 하매나 하매나 하면서 일행을 기다렸다고 하신다. 올 때가 되어도 오지 않으니 행여 사고가 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계속 기다렸다고 하신다. 송구할 뿐이다. 일행이 묵을 사랑채로 안내를 받았다. 추사선생이 제주 귀양시절에 같은 곳에서 귀양생활을 하신 동계선생을 흠모하여 뭍으로 나와 제일 먼저 들린 곳이 이곳이란다. “忠信堂” 이라는 당호를 직접 쓰셔서 현액 하였지만 원판은 박물관에 보관하고 모조품을 걸어 두었다고 한다. 서로간 맞절로 인사를 하고 종손은 집안의 내력과 건물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주셨다. 來菴 鄭仁弘의 문인인 동계선생은 광해군 시절 “廢母殺弟”로 정인홍과 절교하고 남인과 교류를 하였던 것 같다. 노종부님도 경주에서 오시고 현 종부님도 안동 무실에서 오셨다. 어려운 무신난 때의 이야기도 거침없이 해주셨다. 자기 조상의 허물을 얘기 하기가 쉽지는 않았을텐데도 여과없이 설명을 해주셨다. 종부님이 차려온 야화상에 가양주를 곁들이며 일행은 밤이 새는줄도 모르고 이야기의 꽃을 피웠다. 종손께서 얼마전 건강의 이상으로 수술을 하셔서 일찍이 안채로 가시고 남은 일행은 가양주와 사가지고 간 주류를 들면서 이야기를 이어 갔다. 원래는 북인이지만 남인으로 전향하고 남인과의 혼맥을 통해 경상 우도에 남인 문화를 꽃피운 동계선생의 후손답게 접빈에는 한치의 빈틈도 없었다. 종손께서 젊어서 영주에서 직장생활을 하셨기에 더욱이 남인문화가 뿌리 깊이 박히신 것 같다. 일행중 효은형과 종부님은 남다른 척이 있어 반가워하고 많은 얘기를 나누시는 모습이 보기에 너무 좋았다. 이전에 박약회원들과 왔을때도 환대를 받았는데 이 지역에 손님 접대를 옳게 할줄 아는 문중은 이 집이 처음이 아닌가 하는 조심스러운 생각을 했다. 고단한 일정에 모두들 잠자리에 들고 취은형과 둘이 새벽 4시까지 담화를 나누다 잠이 들었다.
다음날 일찍이 어제의 피로는 뒤로 하고 搜勝臺 구경에 나섰다. 8시에 조반을 예약해 놓았던터라 일정을 당겨 잡은 것이다. 또한 금계종손께서 일찍이 서울로 가야하는 바람에 일정을 잡은 것이다. 거창신씨 樂水 愼權이 낙향하여 장구지소로 사용한 수승대에는 구연서원을 비롯하여 선생의 유적이 남아있다. 이곳의 제일은 아무래도 거북바위이다. 백제의 사신들이 수심에 가득차 이별하던 곳이라 불리어진 愁送臺는 퇴계선생이 경치에 취해 슬픈 명칭을 搜勝臺로 변경했다는 싯귀가 바위에 각자되어 있다. 그동안 다녀간 풍류묵객들의 이름이 빼곡이 박혀있다. 경치에 취하다 보니 이러한 낙서도 아름답게만 보이는 것은 왜일지.......
이른 아침에 방문한 탓인지 한기가 느껴져 오랫동안 보지를 못하고 일행은 종부님의 전화에 종택으로 조반을 들기위해 급히 돌아섰다.
안채에 차려진 조반은 이 집의 별미인 수란이 포함된 전형적인 반가의 밥상이다. 종부님의 요리솜씨 또한 일품이라 고단한 일정과 충분치 못한 수면에도 일행은 깨끗이 그릇을 비웠다. 칼럼니스트인 조용헌 원광대 교수가 극찬한 수란과 가자미 찜을 맛보며 여행의 즐거움이 보는것도 중요하지만 먹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일행을 위해 손수 밥상을 차려주신 종부님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드린다.
헤어질 시간이라 종손께서 일행을 위해 직접 금계종손을 터미널까지 모셔드리겠다고 한다. 덕분에 종손을 모시고 기념촬영을 한후 우리는 금계종손과 헤어지고 동계선생 기거하던 某里齋로 향했다. 모리재는 선생이 병자호란 화친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할복 하신후 노년을 보낸 곳이다. 종손께서 할복하신 동계선생을 두고 모친인 정부인 강씨께서 살아 돌아 오셨다고 아들을 나무랐다는 얘기를 해주셨다. 모정이 얼마나 깊었어면 죽은 아들이 살아 돌아오면 기쁠텐데도 나라를 위해 한 목숨 바치지 못한 아들을 나무라는 심정이 과연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차량이 오를수 없어 아침 등산겸 올라가기로 하였다. 해발 600고지에 자리 잡은 모리재는 산중턱이라 오르는데 꽤나 힘이 든다. 고사리를 캐먹고 살며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알려고 하지마라라는 뜻으로 지어진 모리재는 누각인 花葉樓를 짓고 지금은 동계의 영정을 모신 건물이다. 선생의 우국충절이 몸소 느껴지는 역사적인 장소이다.
하산 길에 종손께서 전화를 하셨다. 몸소 금계종손을 태워 주시고 일행을 위해 모리재까지 오신다는 전갈이다. 몸도 성치 않으신데 일행을 위해 나머지 일정을 안내하신다는 말씀이다. 갈천종택에 들리니 사람이 기거는 하는데 내다 보지를 않으니 이또한 낭패이다. 사들고 간 청주는 건네지도 못하고 서간소루와 종택을 동계선생 종손의 안내로 구경을 하였다. 효자로 이름난 葛川 林薰선생은 행직은 참봉이었으나 증직은 판서를 받으시고 시호까지 받으신 어른이다. 당시 조선시대의 충효가 얼마나 뿌리깊게 몸에 베였으면 나라에서도 그 보상을 하였는가 싶어진다. 예나 지금이나 충효는 우리나라에서 뺄 수 없는 기본 덕목이다. 그중에서도 부모에 대한 효는 지켜져야 한다.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패륜의 작태는 하루빨리 이런 어른들의 사례를 모아 후손들의 경계의 모범으로 삼아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거창신씨 집성촌인 黃山마을은 100여년의 짧은 역사 때문인지 정겨운 모습은 느껴지지 않는다. 민박집 간판을 내걸고 정비된 마을은 각 집마다 당호는 보이지 않고 택호를 딴 민박집 문패만이 걸려있다. 현대식 영향 때문인지 집집이 잠겨있어 내부는 구경을 할 수가 없었다. 아쉬움이 있었지만 뒤로 하고 종손의 추천으로 금원산 휴양림으로 갔다. 종손께서 직접 입장료를 내어주시고 일행은 종손과 아쉬운 작별을 하였다. 홀로 이 지방의 남인 문화 奉祭祀 接賓客을 위해 애쓰시는 부부의 모습에서 남, 북인의 근본을 따지기 전에 유가의 전통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시는 모습이 가슴에 남는다. 많은 감명을 주신 종손어른 내외분께 감사를 드리며 다음에 뵈올 때 까지 건강하시기를 마음속으로 빌어본다.
동계종손과의 아쉬운 헤어짐을 뒤로하고 막바지 답사처인 박물관으로 갔다. 동계선생, 갈천선생, 면우선생을 위시하여 거창 지역을 빛낸 어른들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이미 종택을 비롯하여 유적지를 본 관계로 일행은 중식을 해결하기 위하여 맛집으로 유명한 대전식당으로 향했다. 이곳은 갈비탕과 수육이 유명한데 정갈하게 조리된 음식이 매번 맛보던 일반적인 음식과는 달랐다. 흐름한 집에 유명세를 타서인지 많은 사람들로 붐비었다.
갈비탕과 수육으로 식사를 마치고 尹景男 선생의 가옥으로 향했다. 의병 활동을 하신 瀯湖선생은 남명의 제자이다. 문이 잠겨있어 돌아서려다 우체통에 놓고간 열쇠를 빌어 주인도 없는 집을 들어갔다. 일행중 류현우형 일가의 妹氏가 시집 온 집이라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 조금은 덜 송구스러웠다. 간소한 형태의 사랑채와 안채로 구분된 집은 아담한 사이즈로 전형적 반가의 형태이다. 우리네와 다른 것은 조상들의 휘자를 避諱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嚴勘生心 우리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이 지역에서는 버젓이 사용되고 있으니 무지의 극치라고나 해야 할까. 관계당국과 자손 모두가 문제인 것 같다. 아니면 우리와 다르다는 생각으로 그냥 넘어가야 할지는 각자의 생각에 맡길 뿐이다.
더 이상 남은 일정을 진행하기에는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북부권에서 생각하는 문화유산이 남부권 에서는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용도로 사용되기에 보여 주는 것 자체가 무리라고 판단되었다. 괜한 문화적인 괴리감만 들것 같아 江湖先生의 유적지를 마지막으로 잡았다 강호선생은 점필재 김종직의 아버지로 一善지역의 학맥을 기초하신 분이다. 추원당 구경중 후손되는 분이 찾아 오셔서 접빈을 한다. 교회에 다니시는 분 같은데도 접빈의 문화를 아시는지 알고 모르고를 떠나 마음이 고맙다. 공직을 은퇴하고 조상의 유적 근처에 자리를 잡아 남은 여생을 보낼 계획이라고 한다. 이지역 유적지를 다니며 한잔의 음료라도 동계종택을 제외하고는 처음 받아보는 접빈이라 그래도 남인의 문화가 약간은 남아 있다는 생각에 안도를 한다.
강호선생의 유적지를 끝으로 1박 2일간의 남문세의회 춘계행사를 마쳤다. 대구팀과 헤어진후 석규형, 취은형과 커피숍에서 한잔의 커피로 행사의 마무리를 했다. 거창, 함양의 유적지와 후손들을 보면서 우리네 문화 지킴이 얼마나 힘든지를 볼수가 있었다. 보여주기 위한 접근에 충실하다 보니 대부분의 유적지는 정비는 잘 되어 있어나 안내하는 사람들의 지식은 부족하고 또한 후손들의 성의 또한 부족하다. 다만 동계종택을 지키며 노모를 모시고 봉제사 접빈객 유가의 전통을 이어가는 동계종손 내외분의 행공이 가슴에 남는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보니 서울팀과도 아쉬운 작별의 시간이 왔다. 헤어짐이 섭섭하여 가는 모습을 보려 하였으나 굳이 들어가라는 말씀에 염치불구하고 대구로 향했다.
어둠이 짖게 내리깔린 고속도로를 달리며 이틀간 마주한 회원들과의 세의는 길이 계속되리라 생각이 든다. 천리 길을 마다않고 달려와 주신 모든 회원 분들께 번번한 접대도 못하고 보냄이 마음에 걸린다. 다음 추계 행사 때 건강하게 뵙기를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이틀간의 기억을 가슴속에 쓸어 담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