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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소
이 문 열
……햇빛이 부드럽게 내리쬐는 동굴 어귀의 공터였다. 성년의 남자들은 모두 사냥을 떠나고 여인들도 젊고 힘 있는 축은 대개 야생의 열매나 낟알을 거두러 나가고 없었다. 보이는 것은 늙은이와 아이들 그리고 몇몇 특별히 남겨진 여인들뿐이었다.
여인들은 저마다 맡은 일에 분주하였다. 먹고 남은 고기로 포를 떠 말리고 있는 여인, 털가죽을 손질해 식구들의 입성을 준비하는 여인, 훑어 온 강아지풀이나 돌피 같은 야생의 낟알을 널어 말리고 있는가 하면 결을 삭이기 위해 동자꽃, 지네보리, 애기똥풀, 미나리, 아재비 같은 거친 푸성귀를 다듬고 있었다. 그녀들 주위에는 작은 계집아이들이 언젠가는 자기들의 일이 될 그런 일들을 눈여겨 살피며 멤돌았다.
사내아이들은 대부분 공터 쪽으로 나와 있었다. 아직 어린아이들은 늙은이들 주위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젊은 시절의 무용담이나 혈족의 신화에 귀 기울이며 용기와 뱃심을 길렀다. 그러나 곧 성년식을 맞을 나이 든 소년들은 따로 숲 가까운 공터에서 닥쳐올 성년을 대비한 단련에 열중했다. 벼락에 부러진 나무 그루터기를 향해 되풀이 작은 돌도끼를 던지는가 하면 아버지들이 만들어 준 단순궁(單純弓) 에다 촉 없는 살을 메겨 여러 가지 사법(射法)을 익히고 있었고, 날 없는 주목나무의 창을 휘두르며 숲길을 달리기도 했다. 팔과 허리에 힘을 올리기 위해 묶어 둔 산양의 뿔을 잡고 씨근댔고, 둘씩 맞붙어 풀밭을 뒹구는 소년들도 있었다.
그도 나이로는 바로 그 성년 연습을 하고 있는 아이들 축이었다. 그러나 그는 언제부터인가 그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숲가 상수리나무 아래 홀로 앉아 있었다. 그는 예리한 석영(石英) 박편(剝片)으로 골짜기에서 주운 사슴의 견갑골(肩甲骨)에 여러 가지 풀꽃들을 새기는 중이었다. 그러면서도 가끔씩 그의 열렬한 눈길은 동굴 어귀에 머물렀다. 직접 여인들의 일을 거들고 있는 좀 나이 든 소녀들 쪽이었다.
그러나 찾고 있는 ‘초원의 꽃’은 한 번도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정작 그녀가 가끔씩 미소하며 바라보는 곳은 용케 목표를 명중시켜 환호를 지르거나 풀밭을 달리는 소년들 쪽이었다. 대신 그가 번번이 마주치게 되는 것은 ‘산나리’의 공허한 눈길이었다. 멀리서도 그녀는 분명 그가 하고 있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밤 함께 모이게 되면 그녀는 또 내가 애써 새긴 이 뼛조각을 졸라댈 테지. 그러자 그는 괜히 부아가 나고 초조해졌다. ‘초원의 꽃’ 나를 봐 줘. 제발 내가 만든 것을 탐내 줘. 나는 너를 위해 이 꽃잎들을 새기고 있어…….
그때였다. 갑자기 풀잎 스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뒤쪽에서 다가왔다. 언제 왔는지 ‘위대한 어머니’가 몇 발짝 뒤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큰아버지들이 그들의 어버이들로부터 불을 나누어 받고 떠나오던 때를 기억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 혈족의 모든 위대한 용사들을 낳고 기른 여인 ― 성성한 백발과 골 깊은 주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언제나 힘차고 당당했다. 그녀는 아마도 자기의 모든 아들딸과 그 자손들을 둘러보고 오는 길일 것이다.
“무얼 하고 있니?”
그는 원인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새기고 있던 뼛조각을 등 뒤로 감추었다.
“이리 내 봐라.”
마지못해 내놓은 뼛조각을 찬찬히 살피던 그녀는 이내 약간 엄격한 표정으로 그를 살폈다.
“왜 다른 아이들과 함께 있지 않지? 도끼 던지기나 활쏘기는 재미없더냐?”
그는 더욱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사실은 그도 또래의 형제들과 함께 성년 연습을 시작했었다. 그러나 그의 창과 화살은 번번이 빗나가고, 돌도끼는 중도에서 떨어졌다. 맞잡고 벌이는 씨름에서도 그가 자신 있게 쓰러뜨릴 수 있는 또래는 거의 없었다. 그 모든 겨루기나 다툼들은 그저 그에게는 귀찮고 힘든 일일 뿐이었다.
“그저께는 왜 네 앞으로 쫓겨 오는 산토끼에게 길을 내주었지? 모두들 그러는데 네가 손만 내밀면 붙들 수 있었다면서? 또 일껏 찾은 비둘기 알은 왜 다시 풀잎으로 감추어 주었니?”
“…….”
“불쌍하더냐?”
‘위대한 어머니’가 한 말은 모두가 사실이었다. 그도 때때로 또래의 형제들과 작은 사냥을 나섰지만, 막상 꽃사슴의 새끼나 예쁜 산토끼를 만나면 차마 후려치거나 찌르지 못해 번번이 놓쳐 버리고는 했다. 그 작은 생명의 놀람과 공포가 저항할 수 없는 연민으로 그의 팔을 마비시켜 버리는 탓이었다. 그러나 ‘위대한 어머니’가 묻는 대로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었다. 그것은 조소와 경멸을 자초하는 길이라는 걸 그는 이미 몇 번의 경험으로 터득하고 있었다.
“아들이 서툴러서…… 그만 놓치고 말았습니다. 비둘기 알은 돌아오는 어미를 잡기 위해서…….”
그러나 ‘위대한 어머니’의 형형한 눈길은 이미 그의 진실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더듬거리는 그의 희고 섬세한 얼굴과 가는 팔다리를 살피는 그녀의 얼굴에 잠시 희미한 연민의 빛이 어리다가 이내 엄격하고 냉담한 표정으로 변했다.
“곧 성년식이 다가온다. 우리 혈족이 가장 존경하는 것은 용감한 전사(戰士)와 날랜 사냥꾼이다. 그런데 너는 그 준비를 게을리하고 있어. 만약 네가 힘과 용기를 인정받지 못하게 되면 너는 ‘손의 동굴’로 가야 한다.”
그것은 그에게는 가장 쓰라린 위협이었다. 그는 또래의 형제들 중 이미 ‘손의 동굴’로. 보내진 둘을 모두 알고 있다. 하나는 태어날 때부터 귀머거리였고 하나는 어릴 때 맴에 물려 다리 힘줄이 굳어버린 소년이었다. 거기다가 그는 ‘손의 동굴’ 사람들이 받고 있는 대우도 익히 보아 왔다. 그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것은 모든 용사들이 충분히 먹고도 남을 때뿐이었다. 갑자기 불안해진 그는 또래의 형제들이 모여 있던 곳으로 황급히 눈을 돌렸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도 요란스럽게 떠들며 놀던 그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늦었다. 이미 그 애들은 용사가 되기 위한 단련 삼아 자기들끼리의 작은 사냥을 떠났다…….”
그리고 다시 낭패한 듯한 그의 얼굴을 잠시 살피던 ‘위대한 어머니’는 이번에는 약간 누그러진 음성으로 말했다.
“내일부터는 결코 그들로부터 떨어져 나오지 마라. 언제나 그들과 함께 행동해라. 그들이 던질 때 너도 던지고 그들이 쏠 때 너도 쏘아라. 그들이 달리면 너도 달리고 그들이 웃으면 너도 웃어라…….”
……무슨 날일까, 아버지들은 아무도 사냥을 나가지 않고 동굴 앞 공터에서 웅성거리고, 어머니들은 분주하게 동굴을 왕래했다. 그렇다. 바로 성년식 날이었다. 모태에서 떨어져 첫 울음을 운 후부터 열다섯 번째 맞는 가을의 첫 번째 달이 차는 날이다. 해당되는 또래의 열한 명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동굴 속에서 기다렸다.
이윽고 모든 준비가 끝났다. 그들 열한 명의 소년들이 설렘 속에 밖으로 인도되어 나왔을 때 혈족의 사람들은 모두 동굴 앞 공터에 배분(配分) 순으로 서 있었다. 일찍이 그 힘과 용기로 이름을 떨쳤던 큰아버지들과 아버지들은 왼쪽에, 그리고 그 자애와 슬기로 존경받아 온 큰어머니들과 어머니들은 오른쪽에. 그 가운데는 성장(盛裝)한 ‘위대한 어머니’가 그녀의 자랑스러운 딸들 ㅡ 혈족의 가장 용감하고 날랜 용사들을 생산해 낸 어머니들 ― 의 부축을 받으며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식이 시작됐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유년의 껍질을 벗는 일이었다. 그들은 장하게 성장된 남성을 자랑하며 지금껏 그것을 둘러싸 온 조잡한 토끼털 가리개를 벗어 던지고, 그들을 위해 마련된 새 입성을 걸쳤다. 길고 두터운 곰 가죽 가리개, 성년임을 상징하는 사슴 가죽 조끼. 두터운 들소 가죽으로 만든 허리띠를 두르고 다시 염소 힘줄로 된 목결이끈 ― 이제 그들은 자기의 힘과 용기로 그 끈을 채워 가야 한다. 맹수의 이빨이나 발톱으로 가득찬 목걸이는 용사의 유일한 장식이었다.
그다음 그들에게 지급된 것은 ‘손의 동굴’에서 공들여 만들어진 무기들이었다. 참나무 자루에다 날카로운 흑요석(黑罐石)을 들소 힘줄로 묶은 돌도끼, 주목나무에다 수석(燧石) 날을 박은 창, 탄력 강한 나무에 뼈와 가죽을 합성하여 강화한 큰 활과 석영(石英) 촉이 박힌 화살 한 줌. 현무암을 갈아 만든 예리한 단도 ㅡ 모두 아버지들의 것과 크기와 위력이 똑같은 것들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이 ‘신비의 동굴’로 떠나기에 앞서 ‘위대한 어머니’의 축복이 있었다.
“하늘과 숲의 정기를 받아 맺어지고, 내 살과 피를 갈라 태어난 너희들, 너희는 숲의 전나무처럼 씩씩하고 계곡을 흘러 떨어지는 폭포처럼 힘차거라. 모든 적들은 너희들의 힘과 용기 앞에 무릎 꿇고 모든 기는 것과 나는 것들은 너희 창칼에 피를 쏟으라. 너희는 낳고 그리고 번성하여, 너희 자손은 바닷가의 모래보다 많고 하늘의 별보다 빛나거라…….”
그러는 동안 우측의 어머니들은 흐느낌 속에 젖어들었다. 어떤 어머니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하기도 하였다. 성년이 된다는 것은 바로 어머니로부터 영영 떠난다는 뜻이었다. 어머니들은 바로 그 이별을 슬퍼하고 있었다.
반대로 우측의 아버지들은 증가된 자기들의 힘을 자연과 멀리 보이지 않는 적들에게 시위라도 하듯 의기양양한 함성으로 새로운 용사들에 대한 환영을 나타냈다. 춤을 추고 위협하는 표정을 짓고 귀중한 화살을 함부로 허공에 쏘아 대기도 하였다.
‘위대한 어머니’의 축복이 끝나자 그들은 곧 ‘신비의 동굴’로 향했다. 그 동굴은 그들의 주거지로부터 한 개의 숲과 두 개의 계곡을 건너야 하는 석회암 암벽의 정상에 있었다. 그들이 아버지들의 인도로 그곳에 이르자 이미 준비하고 있던 두 사람의 사제자(司祭者)는 곧 의식을 시작했다.
‘장엄한 목소리’는 새로운 용사들의 탄생을 하늘과 숲의 정령에게 고하는 노래를 부르고 그들의 가호를 비는 기도를 올렸다. 그동안 아버지들은 그의 목소리를 복송(復誦) 하며 경건하게 서 있었다. 뒤이어 다시 축복이 있었다. ‘위대한 어머니’가 빠뜨린 것들, 산록마다 사냥감이 넘치기를, 개울마다 물고기가 가득하기를, 가지마다 열매로 휘어지고, 넝쿨마다 산딸기로 덮이기를, 적들에게 공포와 패배를 주고 형제에게는 우애와 신뢰를 주게 되기를.
또 하나의 사제자 ‘영험한 손’은 그들의 어깨에 적을 위압하고 재액을 막아 주는 문신을 넣어 주고, 동굴 벽에는 수많은 영양과 사슴, 멧돼지 따위를 그려 넣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어떤 위대한 힘이 그 짐승들을 위압하고 필경엔 그들에게 쓰러지게 만들리라는 신념을 표시했다. 그 밖에 그들은 그곳에서 일평생 멀리하고 더럽히지 않아야 할 것들과 보호하고 숭배해야 할 것들도 지정받았다.
뒤이어 1년 중 가장 풍성한 회식이 벌어졌다. 기름진 멧돼지고기며 연한 들소의 허릿살, 한창 살이 오른 계곡의 물고기와 잘 익은 열매가 나왔다.
그리고 그 끝에는 남자의 뱃심과 용기를 길러 준다는 ‘사제자의 물’이 나왔다. 그 동굴에서만 만들어지는 신비한 액체였다.
그날의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절차인 ‘이름 얻기’는 해가 하늘 한가운데 왔을 때에야 시작되었다. 그와 다른 열한 명의 소년은 ‘들소의 계곡’ 입구에 배치되었다. 그들은 다른 혈족들과 싸움 중이면 전열의 맨 앞에, 그렇지 않을 때는 맹수 사냥의 창잡이로 나서야 했는데, 그해는 들소 사냥의 창잡이로 결정이 났다. 들소는 한 마리만 해도 온 혈족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훌륭한 식량원(食糧源)인 동시에 이제 막 성년으로 접어드는 소년들의 힘과 용기를 시험하기에 가장 알맞은 맹수였다. 그 날카로운 뿔은 호랑이의 뱃가죽을 찢어놓고 체중 실린 발굽은 곰의 허리뼈를 분질러 놓았다.
소년들은 흥분과 초조 속에 멀리서 소를 몰아오는 아버지들의 은은한 함성을 듣고 있었다. 이제 잠시 후면 나타날 소들과의 싸움에서 그들은 어디엔가 숨어서 보고 있는 큰아버지들로부터 진정한 용사의 자격과 평생을 따라다닐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게 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그들이 지닌 이름은 ‘달무리’라든가 ‘붉은 노을’, ‘새벽 안개’ 따위, 태어날 때의 자연현상과 관계되는 유아의 이름이었다.
그가 맡게 된 위치는 계곡 가운데의 조그만 바위 곁이었다. 그 역시 불안과 설렘으로 방금이라도 소가 뛰어나올 것 같은 계곡 사이의 작은 숲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그를 건드리는 소년이 있었다. 눈이 작고 좀체 깜박거리지 않는다고 해서 ‘뱀눈’이라고 불리는 소년이었는데 힘은 대단하지 않아도 창과 활을 잘 다루고, 무엇보다도 영리하여 곧잘 아버지들을 감탄시켰다.
“너는 저쪽으로 가 내가 여길 지킬 테니.”
‘뱀눈’이 말했다 그는 왠지 ‘뱀눈’이 섬뜩하고 싫었다.
“무엇 때문에?”
“내가 살펴보니까 여기가 들소의 길목이야. 그런데 너의 엉성한 창질이나 활 솜씨로 지켜 낼 수 있을 것 같아? 차라리 ‘붉은 노을’ 쪽으로 가 봐. 그 애는 험이 세고 창을 잘 쓰니까 오히려 그쪽이 안전할 거야.”
그는 무언가 ‘뱀눈’에게 속고 있는 기분이 들었으나, 마땅한 반박이 떠오르지 않아 ‘붉은 노을’ 쪽으로 자리를 옮기고 말았다.
들소는 그로부터 오래잖아 나타났다. 아버지들의 요란한 함성과 나무토막 두들기는 소리에 몰려 뛰쳐나오는 들소를 맨 처음 발견한 것은 산부리 쪽에 있던 ‘큰 울음소리’였다.
“소가 온다 ― .”
이렇게 시작된 그의 목소리는 결국 그 들소의 심장이 완전히 멎을 때까지 계속됐다.
그도 곧 숲가의 관목 사이를 헤치고 달려오는 들소를 보았다. 처음 그 소는 똑바로 ‘맴눈’을 향해서 돌진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느새 바위 위에 올라가 똑바로 창을 던질 자세를 잡고 있는 ‘뱀눈’ 바로 곁에서 소는 갑자기 방향을 바꾸었다. 그 순간 그는 비로소 ‘뱀눈’에게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견 소는 ‘뱀눈’을 피해 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뱀눈’이 올라 서 있는 한 길 남짓한 바위를 피해 간 것이었다. 거기다가 소가 방향을 바꿀 때 소의 가장 넓은 옆면이 그대로 ‘뱀눈’에게 노출되었다. ‘뱀눈’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런 소에게 창을 날렸다. 창은 어김없이 소의 질긴 뱃가죽을 뚫고 깊숙이 박혔다. 결국 ‘뱀눈’은 가장 안전한 곳에서 ‘맨 먼저 찌른 자’란 명예를 확보한 셈이었다. 더군다나 그 바위는 풀숲에서 드러나 있어 큰아버지들에게는 ‘뱀눈’의 용기와 힘을 가장 잘 보여 줄 수 있는 무대와도 같았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그런 것을 한스러워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옆구리에 창을 받은 들소는 바로 그를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황급히 창을 겨누었다. 그러나 달려오는 들소의 정면은 ‘뱀눈’이 맞힌 넓은 옆면의 삼 분의 일도 안 되었다. 남은 것은 정면 대결뿐이었다. 그는 혼신의 용기로 창을 고쳐 잡았다. 하지만 그는 곧 덮쳐 오는 사나운 콧김과 거친 발굽 소리에, 고통과 분노로 불타는 두 눈과 치명적인 일격으로 고양된 생명력이 뿜어내는 엄
청난 살기에 그만 압도되고 말았다.
그는 거의 본능적으로 창을 거두고 ‘붉은 노을’ 쪽으로 도망쳤다. 참으로 위험한 순간이었다. 때맞추어 ‘붉은 노을’이 달려오지 않았던들 그의 가슴은 여지없이 들소의 예리한 뿔에 찢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용감한 ‘붉은 노을’의 창은 정확히 들소의 심장을 찔렀다. 달려온 기세 때문에 창날은 더욱 깊이 박혔다. 그리고 그 반작용으로 튕겨 나간 ‘붉은 노을’이 도끼를 빼어 들고 일어날 때쯤 달려온 ‘새벽 안개’의 창이 다시 가세했다.
잠시 후 그가 가수(假睡) 와도 흡사한 마비 상태에서 깨어났을 때 일은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 벌써 대여섯 개의 창을 받은 들소는 겉으로는 사납게 부르짖으며 날뛰고 있어도 거의 방향감각을 잃은 상태였다. 미숙한 사냥꾼들도 자신을 되찾아 빼어 든 돌도끼로 그런 들소를 함부로 찍어 대고 있었다.
그런데 그 후 오래오래 기억된 놀라운 일이 거기서 일어났다. 그때껏 그 바위 위에서 시키지도 않은 그 사냥의 지휘를 맡고 있던 ‘뱀눈’이 갑자기 뛰어내리더니 곧장 들소에게 달려가 그 날카롭고 긴 뿔을 잡았다. 소는 거칠게 떠받는 자세로 고개를 들었다. 일순 ‘뱀눈’의 몸이 가볍게 들먹했다. 그러다 이내 소의 목은 ‘뱀눈’의 힘에 늘려 꺾어지듯 힘없이 아래로 처졌다. 그걸 보며 한 손을 뺀 ‘뱀눈’은 돌도끼로 소의 정수리를 힘차게 내리쳤다. 소는 움찔하더니 부르르 사지를 떨며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멀리서 보기에는 눈부신 ‘뱁눈’의 활약이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보았다. ‘뱀눈’이 뿔을 잡기 전에도 이미 소의 무릎은 몇 번이고 맥없이 꺾어지고 있었다. 번들거리는 두 눈에 짙게 어려 있는 것도 분명 꺼져 가는 생명의 고뇌였다. ‘뱀눈’이 안전한 바위에서 뛰어내린 것은 바로 그 모든 것을 확인한 뒤였다.
하지만 그날 ‘뱀눈’이 누린 영예는 참으로 대단했다. 세 번의 성년식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뿔을 누른 자’란 칭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 밖에 다른 소년들도 각각 그들의 힘과 용기에 합당한 이름을 얻었다. 그런데 그가 얻은 이름은 치욕스럽게도 ‘소를 겁내는 자’였다. 창 한번 못 던지고 고함만 지른 ‘큰 울음소리’도 겨우 ‘큰목소리 ’로 이름이 바뀌었을 뿐이었다.
그는 으스스한 기운에 눈을 떴다. 잠들 때 이글거리도록 지펴 놓은 모닥불이 어느덧 가물가물 삭아지고 있었다. 동굴 속 입구가 구분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직 날은 새지 않은 듯했다. 그는 번갈아 드는 오한과 신열로 몸을 떨며 모아 둔 나뭇가지를 한 아름 모닥불 위에 얹었다. 이내 매캐한 연기가 동굴을 메우더니 불이 다시 활활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오환은 그 불로 곧 사라졌지만 대신 고통에 가까운 신열이 그를 엄습했다. 그러나 그 신열로 몽롱한 중에서도 그는 방금 꾼 그 생생한 꿈을 되살려 보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일찍이 늙은 스승은, 꿈이란 하늘이나 위대한 정령이 우리에게 어떤 계시로 내리는 것이라고 했었다. 그런데 이미 까마득히 사라져 버린 날들의 일이 지금에 와서 부쩍 자주 꿈속에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오랜만에 돌아온 이 동굴이 어떤 신비한 힘으로 강력한 시간의 사슬을 풀어 버린 것일까. 그러면서도 다시 마른 풀더미 위에 누운 그는 이내 어수선한 잠 속으로 떨어졌다.
……‘손의 동굴’ 안이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날렵한 손’ 곁에 그와 귀머거리, 그리고 ‘독사의 저주’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모두 ‘날렵한 손’의 지시에 따라 도낏자루에 무늬를 새기려는 중이었다.
첫 출진에서 실패한 후 먼저 그가 보내어졌던 곳은 동굴 밖의 작업장이었다. 신체에는 별 이상이 없는 그는 그곳에서 어른들이 모아 온 재료 ― 석영이나 수석, 섬록암 흑요석, 청장암 따위를 석핵(石核)과 박편으로 분리하는 곳에 보내졌다. 그러나 단순하고 쉬워보이는 그 일은 뜻밖에도 그를 괴롭혔다. 약하게 치면 화살촉을 만들 박편조차 분리되지 않았고, 강하게 치면 이번에는 석핵까지 깨져 버렸다. 타격 대신 압박을 이용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무엇 하나 제대로 돼 나오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다음에 보내진 곳이 그 동굴 입구의 커다란 연마석(硏磨石) 곁이었다. 떼어 낸 박편을 갈아 화살촉이나 단검을 만들고, 석핵으로는 도끼, 창날 따위를 만드는 곳이었다. 그곳은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돌가루와 마찰 때의 열로 두 손은 거칠게 터지고 낮 동안의 불편한 자세 때문에 자리에 누우면 온몸이 욱신거렸다. 거기다가 그 단조로운 동작의 끝없는 반복 ― 그는 결국 거기서도 쫓겨나 동굴 안으로. 보내지고 말았다.
원래 그 동굴 안의 작업장은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이 일하는 곳이었다. 그들은 그곳에 앉아서 날라 주는 창 자루나 화살을 다듬고 거기에 혈족을 상징하는 무늬를 새기거나 그 임자의 무훈(武勳)과 이력을 과시하는 장식을 달았다. 그런데 그에게는 오히려 그곳이 견딜 만했다. 새기거나 그린다는 것은 그에게는 어릴 때부더 익숙한 작업이었다. 함께 보ㅙ졌던 ‘큰 목소리’가 그렇게도 빨리 떠나버린 것에 비해 그가 오랫동안 ‘손의 동굴’에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이었다. 진작부터 멀리 산 아래에 있다는 평원 지방과 그곳의 낯선 세계에 대한 열렬한 동경을 품어 왔던 ‘큰 목소리’는 ‘손의 동굴’에서 맞게 된 첫 번째 봄에 벌써 자기의 꿈을 따라 떠나버렸다.
그가 그 동굴 안의 생활에 싫증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두 번째의 봄을 맞고서부터였다. 단순하고 공식화된 무늬와 변화 없는 기법의 반복은 점점 그를 지치고 짜증나게 했다. 그는 도형화된 사물의 부분을 그리기보다는 자기의 눈으로 본 전체를 표현하고 싶었다. 결정된 대상을 그리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여 그리고 싶었다. 그러나 ‘손의 동굴’에서는 그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날도 ‘날렵한 손’은 방금 자기가 본보기로 새긴 도낏자루의 무늬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이걸 봐라. 이것은 아버지들 중 가장 날렵한 손을 가졌던 분이 처음 그려 승자(勝者)의 표시로 남은 산월계(山月桂) 이파리다. 나도 벌써 스무 봄이 지나도록 그것을 그려 왔지만 그분보다 더 낫게 그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밑의 독수리 깃은 우리 혈족을 표시하는 무늬다. 까마득한 옛날에 우리의 선조를 해 뜨는 곳에서 이곳까지 태워 준 그 신령한 독수리의 깃을 나의 스승께서 처음 그리셨을 때 우리 일족의 어른들은 대단히 기뻐했다. 그래서 우리 혈족의 표지로 사용하는 것을 승인했을 뿐만 아니라 살찐 산양의 뒷다리를 둘씩이나 보내 주었다. 자랑 같지만, 우리는 이 두 개의 무늬만으로도 언제나 사냥에서 피 흘리는 용사들 못지않은 대우를 받았다…….”
‘날렵한 손’은 뒤이어 다른 몇 개의 무늬와 함께 도끼날과 창날을 자루에 단단하게 묶는 방법과 화살촉을 고정시키는 법 등을 설명했다 모두 몇 번이고 반복해 들은 얘기였다.
뒤이어 그들이 실제로 그려야 할 차례가 왔다. ‘날렵한 손’은 먼저 그들에게 독수리의 깃털 무늬를 물푸레나무 자루에다 새기라고 지시했다. 그는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도 모르게 깃털이 아니라 당당한 날개를, 날카로운 부리와 억센 발톱을 그려 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눈두덩에 번쩍 불이 일었다. 어느새 그의 엉뚱한 행동을 주시하고 있던 ‘날렵한 손’이 세차게 그의 따귀를 후려친 까닭이다.
“이 건방진 놈. 사지가 멀쩡하면서도 소가 무서워 도망이나 다닌 주제에 ― 시키는 짓은 하지 않고…… 이 무늬는 우리의 핏줄을 표시하는 신성한 것이야. 물론 네가 ‘날렵한 손’이란 이름을 얻게 되면 네게도 자신의 무늬를 그릴 자격이 생긴다. 하지만 그때에도 그것을 용사들의 도낏자루에 새겨 넣기 위해서는 그들의 동의가 필요해. 그런데 ― 있는 무늬조차 아직 제대로 못 그리는 주제
에, 건방진 놈.”
숨이 자주 가쁜 ‘날렵한 손’은 그러면서도 그가 그린 독수리를 다시 한 번 살폈다.
“더구나 이것은 무늬가 아니고 그림이다. ‘신비의 동굴’에서나 그려져야 할 신성한 그림을 아무 데서나 그리는 것은 거기서 행해지는 주술의 효과를 줄여 버리는 불경한 짓이야. 너는 어디까지나 ‘손의 동굴’에 속해 있어. 너는 식구들이 요:구한 것만을 그려야 해. 네 입에 냄새나는 양꼬리고기라도 처넣으려면…….”
그는 다시 눈을 떴다. 역시 꿈이었다. 어느새 동굴 입구는 희끄무레 밝아 있었다. 그는 무거운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신열은 상당히 내린 듯 조금 가뿐해진 느낌이 들었다. 모닥불은 벌건 숯덩이로 변해 알맞게 주위를 데우고 있었다. 그 이글거리는 숯불을 보며 그는 희미한 식욕을 느꼈다. 그제야 그는 어제 낮 이후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휘청거리며 동글 벽의 바위 시렁에서 ‘산나리’가 준비해 준 음식물 보퉁이를 내렸다. 아직도 육포 조금과 말린 물고기 몇 마리가 남아 있었다. 그는 그중에서 물고기를 한 마리만 꺼내 숯불에 구웠다.
그러나 물고기가 알맞게 익어도 생각처럼 식욕은 일지 않았다. 간신히 몸통 부분을 몇 점 뜯은 그는 물이 든 가죽 주머니를 찾았다. 그가 다 마셔 버렸던 것인지 아니면 간밤 내 새어 버린 것인지 가죽 주머니는 텅 비어 있었다. 그는 빈 가죽 주머니를 들고 입구 쪽으로 나갔다. 어디 가까운 바위틈에서 샘물이라도 담아 올 생각이었다.
동굴 입구로 나와서야 그는 지금이 새벽이 아니라 상당히 늦은 아침이라는 것, 그리고 밖에는 세찬 비가 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잎새의 골진 바위 틈서리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함부로 움켜 마셨다. 찬 빗물이 배 속에 들어가자 약간 생기가 났다.
그는 원래 오늘 ‘신비의 주토(朱土)’와 숯보다 짙은 흑색을 내는 이탄(泥炭), 바이올렛 빛과 청색을 얻을 수 있는 수액(樹液)을 찾으러 나설 작정이었다. 오랜 세월 전에 그는 스승인 ‘영험한 손’과 함께 그런 것들을 찾아 부근을 쏘다닌 적이 있었다. 당장이라도 나서면 그런 것이 있는 곳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줄기차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곧 출발을 단념했다. 현재 상태로는 무리였다. 그 동굴로 돌아오는 도중에 악령의 입김이 서린 계곡물을 함부로 마셨거나 날던 새도 떨어진다는 숲의 독기를 쐬었던 모양이었다. 그 후 그는 조금씩 몸이 무겁고 식욕이 떨어지더니 어제부터는 오한과 신열이 번갈아 그를 괴롭혔다. 우선은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 급했다.
그렇게 생각한 그는 다시 모닥불 곁으로 돌아가기 전에 잠시 빗속에 잠긴 숲과 봉우리들을 깊은 애정으로 바라보았다 한번 떠나간 후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것들이었다. 그러자 가까운 활엽수 잎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탓이었을까 그는 다시 자신도 모르게 어느 우울한 날의 회상 속으로 떨어졌다.
……하늘 가득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멀리 ‘사슴의 숲’도 ‘검은 전나무 산’도 빗속에 희부옇게 웅크리고 있었다.
그날 그들의 동굴은 때아니게 열기에 넘치고 왁자한 분위기였다. 남자들은 기분 좋게 타오르는 모닥불 곁에서 맛난 고기를 뜯으며 지난 사냥에서의 무용담이나 개인의 신기한 체험을 큰 소리로 주고받고 있었다. 여자들도 모두 그곳에 모여 오직 요리와 남자들의 시중에만 전념했다.
말하자면 우기(雨期)의 임시 축제였다. 그해 봄에는 유난히 사냥이 잘되고, 산과 계곡의 열매들도 풍부해 충분한 식량을 비축한 그들은 그 우기의 첫날을 느슨한 기분으로 쉬며 포식과 담소를 즐기는 중이었다. 포를 떠 말린 고기 외에도 산 채로 잠아 묶어 둔 몇 마리의 산양이 있었고, 말리거나 절인 육과(肉果)도 상당했다. 간간 비가 개일 때 설치해 둔 함정과 덫이나 살피고, 풍부한 수분으로 더욱 충실해진 야생의 열매와 푸성귀나 보태면 우기를 넘기기에는 충분한 양이었다.
‘손의 동굴’ 사람들도 그날만은 일손을 멈추고 모두 큰 동굴로 모였다. 물론 그도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따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곧 후회했다. 그들이 자랑스레 떠들고 감탄해서 듣고 있는 무용담은 그에겐 바로 고통과 수모였다. 더구나 이제는 어엿한 성년 용사로 틀이 잡힌 지난날의 친구들과는 대면 그 자체가 굴욕이었다. 그들은 이제 혈족의 가장 존경받는 용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아 그들 몫으로 배분된 기름지고 맛난 고기를 마음껏 뜯고 있었다.
거기에 비하면 ‘손의 동굴’ 사람들에게 분배된 고기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충분하지도 않은 양인 데다 태반이 노린내 나는 산양의 꼬리 부분이거나 힘살투성이인 들소의 어깨살이었다. 다만 용사들은 자기의 무늬에 멋진 무늬나 장식을 달아 준 데 대한 개인적인 감사로 그들 몫의 질 좋은 고기를 ‘손의 동굴’ 사람들에게 던져주었는데, 그것은 오히려 그를 처량한 기분에 젖게 했다. 그런 것을 감지덕지 받아먹는 동료들의 천박을 보며 그는 처음으로 자기가 일평생 기대해야 할 고기의 종류가 어떤 것인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거기다가 그를 한층 비참하게 만든 것은 이례적으로 내려온 ‘사제자의 물’이었다. 정규의 축제일이 아닌데도 ‘신비의 동굴’에서 내려온 것으로 그 양은 용사들에게도 겨우 돌아갈 정도밖에 안 되었다. 단 한 번 마셔 본 경험뿐이지만 그날따라 그는 몹시 그것을 마시고 싶었다. 왠지 그 신비한 물은 자신을 못 견디게 울적한 기분으로부터 구해 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는 용사가 아니었다. 천대받는 ‘손의 동굴’에 속한 하급 장인(匠人)일 뿐이었다.
그는 문득 그곳을 떠나 홀로 있고 싶어졌다. 마침 여기저기서 자리를 뜨는 용사들이 있어, 그도 눈에 띄지 않게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동굴 밖은 사납게 빗줄기가 몰아치고 있었다. 찬 빗방울이 머리를 적셔 올 때에야 그는 그 비가 무작정 맞고 있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참나무붙이가 밀생한 가까운 언덕 쪽으로 달려갔다. 그 어느 잎이 무성한 가지 아래 아직 비에 젖지 않은 마른 흙이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내린 비는 두터운 잎새를 뚫고 굵게 방울져 흘러내려 비를 피할 만한 곳은 거기에도 없었다. 그는 다시 그 곁 바위 비탈을 살펴보았다. 마침 한군데 비를 피할 만한 바위 그늘이 있어 우선 그리로 달려갔다.
평소 무심코 지나쳤지만 꽤 깊은 바위 그늘이었다. 그는 겨우 비를 피할 정도의 잎새에 앉아 망연히 그의 앞길에 남겨진 괴롭고 긴 세월을 상상해 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음울한 사념 중에도 무심코 주위를 살피던 그는 문득 맞은편 바위 벽에 기대 세워진 창 한 자루를 보았다. 몹시 눈에 익은 것이었다. 붉은색 띤 창날과 들말의 갈기로 만들어진 수술 ― 바로 유명한 ‘뱀눈’의 창이었다.
그가 ‘손의 동굴’에서 괴롭고 쓸쓸한 세월을 보내고 있는 동안에도 ‘뱀눈’은 눈부신 성공을 거듭했다. 성년식을 마치고 채 네 번의 봄이 나기도 전에 ‘뱀눈’은 자신의 목걸이에 벌써 맹수의 이빨과 발톱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공식적인 명칭도 ‘뿔을 누른 자’에서 ‘굳세고 날랜 자’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그는 ‘뱀눈’의 그런 성공에 대해 몇 가지 석연찮은 점을 듣고 있었다. 가장 힘세고 용감한데도 언제나 가장 큰 공은 ‘뱀눈’에게 빼앗기는 ‘붉은 노을’이 주로 털어놓은 것으로, 거기 따르면 ‘뱀눈’의 그런 성공은 간교한 꾀로 얻은 첫 번째 성년식의 성공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어찌 된 셈인지 동배(同輩)는 물론 연상의 옹사들까지도 몇 번에 한 번씩은 자기들의 공로를 ‘뱀눈’에게 양보한다는 뒷소문이 있었다. 곧 빈사의 사냥감을 ‘뱀눈’ 쪽으로 몰아 주어 그에게 결정적인 일격을 가하게 함으로써 그의 빛나는 성공 횟수를 늘려 준다는 식이었다.
“놈은 무언가 그들에게 더러운 속임수를 쓰고 있어. 그들은 자기들의 양보보다 더 큰 대가를 놈이 줄 수 있다고 굳게 믿는 것 같았어…….”
그것이 ‘붉은 노을’의 불만스러운 결론이었다.
거기다가 그가 몇 번이나 손보아 준 ‘뱀눈’의 창도 여느 것들과는 달랐다 그 붉은색의 창날은 ‘손의 동굴’에서 흔히 쓰는 현무암이나 수석 따위는 아니었다. 재질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돌보다는 훨씬 무겁고 단단하면서도 질겼다. 날을 세우기는 힘들어도 한번 세우기만 하면 다른 것들보다 훨씬 날카로워 더 깊고 치명적인 일격을 사냥감들에게 가할 수 있는 그 무엇이었다.
그가 이런저런 생각으로 창을 살피고 있는 사이에 갑자기 바위 그늘 쪽에서 이상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귀를 기울이던 그는 금세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 소리가 무엇을 뜻하는가를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처음 조용히 그곳을 피해 주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이내 그는 ‘뱀눈’의 상대가 궁금했다. 호기심을 억제하지 못한 그는 살며시 접근해 바위틈 사이로 엿보았다. 둘은 이미 맹렬하게 엉켜 있어 그런 그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뱀눈’의 넓은 등판에 가리어 당장은 밑에 있는 여자가 잘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유난히 새하얀 피부와 목께에 늘어진 조개껍질을 본 순간 그는 그녀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렸다. 바로 ‘초원의 꽃’이었다 방금 그녀의 목에 늘어져 있는 목걸이는 그가 여러 날을 공들여 만들어 바친 것이었다. 순간 그의 피는 거꾸로 치솟는 것 같았다. 분노와 슬픔이 뒤엉킨 묘한 격정으로 외마디 소리라도 지를 뻔하였다.
오, ‘초원의 꽃’. 단조롭고 몽롱한 유년에서 벗어난 이래 그의 모든 낮과 밤은 오직 그녀만을 위한 것이었다. 그가 얻은 모든 아름답고 귀한 것은 모두 그녀에게 바쳐졌고, 꽃 한 송이 새소리 한 가락도 그녀와 연관 짓지 않고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때로 그의 그런 노력은 그녀의 보답을 받기도 했다. 실제로 그들은 몇 번인가 은밀한 관목 숲이나 후미진 바위 그늘에서 어른들로부터 금지된 장난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초조(初潮)의 부정(不淨)이 씻긴 후 한 성년 여자로 선포되고부터 ‘초원의 꽃’은 변하기 시작했다.
여자가 성년이 된다는 것은 원칙적으로 어머니가 같은 형제를 제외한 동배(同輩) 의 모든 남자들의 아내가 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실제 매일 밤의 잠자리의 상대를 결정하는 데는 별개의 원칙이 필요했다. 동일 시간에 성합(性合)할 수 있는 남녀는 각각 한 사람 뿐이기 때문이었다.
거기서 매일 밤의 지정권이 발생했다. 궁극적으로 상대를 결정할 권리는 여자 쪽에 남겨져 있었다. 그러나 혈족 간의 싸움이나 큰 사냥이 있는 날은 공을 세운 순으로 용사들에게 지정권이 돌아갔다. 그리고 관례는 그런 날의 우선권에 복종하도록 여자들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손의 동굴’에 있는 그의 서열은 당연히 모든 용사들의 끝이었다. 따라서 사냥이나 싸움이 있는 날이면 그는 ‘초원의 꽃’을 단념했다. 그녀는 아내들 중에 가장 아름답고 풍만했으므로 용사들이 다투어 그녀를 지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정권이 그녀에게 있는평범한 날도 그녀가 거부 없이 용사들의 지정을 따르는 것을 보면 그의 가슴은 터질 듯 괴로웠다. 모든 아내들은 이튿날 아침의 분배에서 간밤에 잠자리를 함께한 남편과 동일한 대우를 받도록 되어있었는데, 그것이 그녀를 항상 몫이 많은 용사들을 택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손의 동굴’에 있는 그의 몫은 언제나 형편없는 하급이었다.
결국 성년식 이후 그가 ‘초원의 꽃’과 잠자리를 같이해 본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방금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그 목걸이를 바친 밤이었는데, 그나마 그를 받아들이는 그녀의 몸은 굳고 식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그의 격정은 갈수록 치열해져 갈 뿐이었다.
그가 번민에 잠겨 있는 동안도 그들 남녀의 신음과 숨소리는 높고 거칠어만 갔다. 그리고 그것은 거대한 뱀처럼 그의 정신을 옥죄고 물어뜯었다. 그런 자기의 감정이 어리석고 천한 것이라고 수없이 들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곁에 세워진 ‘뱀눈’의 창을 잡았다 원인 모를 증오로 눈이 먼 그는 한달음에 달려가 두 남녀를 그 창에 꿰어 놓고 싶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살며시 그런 그의 손을 잡아끄는 사람이 있었다. 거친 눈으로 돌아보니 언제 왔는지 비에 젖은 ‘산나리’가 서 있었다. 공허해 보이는 두 눈에 눈물이 흥건히 고인 채였다. 그걸 보자 왠지 그의 가슴도 서늘하게 저려 왔다. 결국 그는 들었던 창을 힘없이 놓고 그녀가 끄는 데로 따라갔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예요?”
그들이 다른 얕고 호젓한 바위 그늘에 이르렀을 때 ‘산나리’가 울먹이며 말했다.
참으로 이상한 여자였다. 어렸을 적부터 그녀는 까닭 없이 그를 좋아하고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가 마지못해 준 뼛조각이나 조개껍질을 그녀는 소중하게 지녔으며, 무심히 한 말도 오래오래 기억했다. 성년이 된 그녀에게 최초의 지정권이 주어졌을 때 그녀가 동침의 상대로 고른 것은 뜻밖에도 그였다. 그런데도 왠지 그는 그녀가 싫었다. 길고 음울한 코와 희고 부석부석한 피부가 싫었고 꿈꾸듯 몽롱한 두 눈이 싫었다.
그 밖에 그가 그녀를 피하게 만드는 것은 어쩌다 둘이 있게 되면 끊임없이 물어 대는 멍청한 질문과 지겹도록 반복하는 턱없는 공상이었다. 하늘 저 멀리에는 무엇이 있을까? 흰구름이 흘러가 닿는 곳은 어디일까? 우리들 최초의 어머니는 어디서 왔을까? 영혼은 정말로 영원히 사는 것일까…… 아니면 열매와 낟알이 풍부한 숲, 습기 없고 아늑한 동굴, 모든 또래가 모두의 남편이거나 아내가 아닌 둘만의 성합(性合), 그를 닮은 아이들 ― 따위의 공상.
사실 그것들은 그도 궁금히 여기거나 때로 꿈꾸는 것들이었다. 다만 그것들을 ‘산나리’가 꿈꾸거나 말하고 있다는 것이 싫을 뿐이었다. 아아, 그녀가 ‘초원의 꽃’이었다면, ‘초원의 꽃’이었다면…….
그러나 밤의 동굴에서 언제나 그를 기다려 주는 것은 ‘산나리’ 뿐이었고, 따라서 그의 몸이 이상한 욕화(慾火)로 스멀거리고 여인의 체취가 못 견디게 그리워질 때면 어쩔 수 없이 그녀와 어울렸다.
“제가 ‘초원의 꽃’만큼 아름답지 못하다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렇게 당신을 좋아하는데, 당신의 얼굴만 보아도 숨 막힐 듯 기뻐오는데…….”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산나리’는 호소했다.
“‘초원의 꽃’은 당신의 흰 얼굴과 부드러운 손을 비웃지만 저는 오히려 그것이 좋아요. 그녀는 당신의 밋밋한 가슴과 연약한 팔을 경멸하지만 제게는 그것이 아름다워 보여요.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잡은 짐승들의 고기와 가죽을 가치 있게 여기지만 저는 열 마리의 들소보다도 당신이 그 뿔에 새긴 조그만 풀 이파리 하나가 몇 배나 더 소중해요. 그런데도 저를 사랑해 주실 수 없나요? 영영 ‘초원의 꽃’을 대신할 수는 없어요?”
거기서 그는 갑자기 그녀를 껴안았다. 그리고 곧장 그녀의 비에젖은 털가죽 옷을 벗겼다. 성급하고 난폭한 손길이었지만 그녀는 저항하지 않았다. 뒤이어 자신의 입성도 벗어부친 그는 어지러이 널린 옷가지 위에 쓰러뜨리듯 그녀의 빈약한 육체를 뉘었다.
그러나 쉽게 불붙어 오르는 ‘산나리’의 몸에다 비뚤어지고 웅어리진 욕화를 내리쏟는 동안도 그의 두 눈 가득히 떠오르는 것은 엉켜 있는 ‘뱀눈’과 ‘초원의 꽃’이었다. 그는 마음속에서 울부짖듯 다짐하고 있었다. 이제 나는 ‘용사의 동굴’로 돌아가리라. 보다 자신을 단련하고 강화하여 나도 떳떳하게 ‘초원의 꽃’을 차지하리라. 누구보다 우선하여 그녀를 내 여자로 지정할 수 있게 하리라.
갑자기 한 줄기 바람이 굵은 빗줄기를 몰아쳐 회상에 잠긴 그의 얼굴을 적셨다. 오싹한 한기로 그는 쓸쓸한 추억에서 깨어났다. 쏟아지는 빗줄기는 점점 폭풍우의 징후를 띠고 있었다.
모닥불 가로 돌아온 그는 가물가물 사그라드는 불을 되살렸다. 모닥불은 금세 알맞은 열기와 빛으로 타올랐다. 그의 몸에서 가는 김이 피어오르며 한기로 굳었던 그의 몸이 다시 느슨하게 풀렸다. 그러자 그 한기로 인해 단절되었던 지난날의 기억이 다시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졌다.
그래, 나는 돌아갔었지. ― 그는 회상했다. 그가 다시 창과 도끼를 잡겠다고 말했을 때, 당시 용사들의 지도자였던 늙은 ‘회색곰’은 기꺼이 받아 주었다.
“용감한 삶과 용감한 죽음은 사나이의 자랑이다. 그런데 너는 어리석게도 그것을 포기했다. 성년식 날 네가 소에게 등을 보였을 때 사나이로서의 네 생명은 끝났다. 하지만 사람의 기억은 덧없는 것, 다시 한 번 네게 기회를 주겠다. 부디 치욕스러운 이름을 벗는 기회가 되기를 빌겠다.”
그러나 연속되는 또 다른 기억은 다시 그를 쓰라린 감회 속에 빠뜨렸다. 그는 두 번째의 출전에서 또다시 실패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비겁하지는 않았어. 그는 자신을 변호하듯이 중얼거렸다. 물론 덮쳐 오는 소는 여전히 공포였지만 나는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았어. 나는 그 거대한 공포의 실체와 정면으로 대결한 거야. 왜냐하면 내 내부에는 그보다 더 큰 공포가 나를 강제하고 있었거든. 바로 ‘손의 동굴’로 되돌아가게 되리라는 공포…….
그의 창은 실제로 소를 찔렀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소는 쓰러지지 않고 오히려 태풍처럼 그를 휩쓸고 지나갔을 뿐이었다. 예리한 뿔에 어깨가 찢어지고 소의 발굽에 두 다리가 짓뭉개진 그가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이틀 후였다. 기껏 그가 얻은 것은 비겁자의 칭호를 약자의 칭호로 바꾼 것뿐이었다. ‘소에 짓밟힌 자.’
그가 다시 몽롱한 회상에서 깨어난 것은 갑작스레 피어오르는 불꽃 때문이었다. 마른 장작 사이에 굵은 관솔가지라도 들어 있었던 것일까 모닥불에 한 줄기 검붉은 화염이 치솟더니 동굴 안이 환히 빛났다. 그러자 천장의 바위 면에 그려진 그림들이 뚜렷이 드러났다. 스승인 ‘영험한 손’이 새긴 희생의 사람을 제하면 모두 자신이 다시 돌아온 후에 그린 습작이었다. 두 마리의 산돼지, 약간의 말, 실물보다 훨씬 큰 암사슴 ― 그리고 그 가운데에 자신이 가장 힘을 쏟은 들소가 아직 희미한 선으로만 어른거리고 있었다. 다른 것들도 그랬지만 특히 그 소는 동굴의 다른 벽면에 그려진 그림들과 판이한 기법이었다. 흡사 털 한 올도 빠뜨리지 않으려는 듯, 세밀한 선으로 된 그림을 보며 그는 문득 늙은 스승의 목소리를 상기했다.
“아주 옛날에는 우리들도 사물을 실제와 일치하게 그리려고 애를 썼다. 그때는 그림 자체가 무슨 특별한 험을 가졌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점차 사람들은 그것이 불필요한 노력과 시간의 낭비라는 걸 깨달았다. 그림은 그저 우리가 자연과 위대한 정령에게 우리의 뜻을 전달하는 도구이며, 동료 인간들에게 나누어 주는 믿음과 격려의 부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즉 자연과의 교감을 통하여 그려진 이 짐승들이 실제로 우리의 험에 굴복하게 되리라는. 따라서 중요한 것은 손바닥 자국을 벽에 찍듯 정확한 모사(模寫)가 아니라 대상을 상징하는 힘이다. 그리고 그 힘은 대상이 가지는 몇 개의 특징을 굵고 강한 선으로 강조함으로써 얻어진다. 예를 들면 사슴의 뿔을 나타내는 몇 개의 선만으로 우리는 그 사슴들을 교감적(交感的)인 마술 속으로 잡아들일 수 있다.
앞으로 네가 고려하여 얻어야 할 것은 바로 그 대상의 특징을 파악하는 힘이며 그것을 가능하면 단순하고 원초적인 선으로 처리하는 대담함이다.”
그가 처음으로 이 동굴에 왔던 날 늙은 스승은 그의 그림을 보고 그렇게 말하였고 그 후 그도 대체로 그 원리에 충실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는 이미 교감적인 마술의 도구로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그림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였다. 가장 가치 있는 것의 생생한 화체(化體) ― 그렇게도 열렬하게 쫓았으나 결국은 한 번도 잡지 못한 들소 그 자체를 이제 자신의 선과 색으로 잡아 보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큰 목소리’의 경멸에 찬 눈길과 비양거리는 어조가 떠올랐다.
“나의 목소리가 노래 부르기 위한 노래에만 바쳐질 수 없듯이 너의 선과 색도 그림 그리기 위한 그림에만 바쳐질 수 없어. 이 땅 위에서 행해지는 것은 모두 무엇인가를 향해 있어. 우리는 그것을 위대한 정령(精靈)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신비한 자연이라고 부르기도 하지. 그러나 사실은 모두 동료인 인간들을 향한 거야. 우리가 무엇을 하든 그들의 이익과 관심에서 멀어져 가면 이미 아무런 가치가 없어. 아니 그 이상 ― 그것은 배반이야. 우리가 창 자루를 잡거나 숲을 달리며 땀 흘리지 않아도 그들이 우리에게 매일의 고기와 낟알을 보내오는 것은 분명 그런 의무와 책임을 전제로 하는 거야. 너의 선과 색은 절대로 너만의 것일 수가 없어.”
하지만 나는 그들을 떠났다. ― 그는 중얼거렸다. 나는 혼자다. 나는 그들과의 그런 불투명한 연계(連繫)에서 탈출해 나왔다. 이제 이 선과 색은 나만의 것이다. 오직 나를 충족시킴으로써 충분하다…….
그러나 이렇게 강렬하게 항변하고 있는 동안 문득 한 가닥 불안이 그를 엄습하였다. 두텁게 그를 둘러싸고 말 못 할 무게로 그를 죄어 오는 외로움 때문이었다. 지금과 동기는 다르지만 지난날에도 한번 그는 이와 비슷한 탈출을 시도해 본 적이 있었다. 그는 용감하게 낯익은 혈족들과 정든 땅을 버리고 떠났었다. 그러나 결국은 그 외로움 때문에 돌아오고 말았다
그때 그가 도망치려 했던 것은 두 번째의 실패로 확정된 자신의 운명으로부터였다. 몇 번의 달이 차고 기울자 쇠뿔에 찢긴 어깨의상처는 아물었지만 짓밟힌 왼 무릎은 영영 그대로. 굳어 버려 그는 어쩔 수 없이 ‘손의 동굴’과 그 굴욕적인 삶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운명에 한 번 더 맞서 보려 한 것이었을까. 그는 무턱대고 낮은 곳을 향해서 출발했다. 멀리 평원 지방과 그곳의 기름진 들에 낟알을 가꾸며 산다는 온순한 사람들을 향해……. 일찍이 ‘큰 목소리’가 커다란 동경을 품고 떠나갔던 세계였다.
그러나 채 하루가 되기도 전에 그는 새로운 종류의 고통을 경험했다. 홀로 있게 된다는 것 ― 낮선 사람들과 낯선 세계에 홀로 떨어져 살게 된다는 것 ― 바로 고독에 대한 공포였다. 거기다가 계절도 아주 나빴다. 마침 사슴이 뿔을 가는 달이어서 숲에서는 한 줄기 나무순 한 톨 밤알조차 얻을 수 없었다. 결국 굶주림과 추위 속에 혈족들의 사냥구역을 겨우 벗어난 전나무 숲 언저리를 배회하던 그는 떠난 지 닷새 만에 거기까지 사냥 나온 혈족에게 발견되어 되돌아오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 출발이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어. ―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러자 의심스럽던 혈통의 비밀이 밝혀지고 자기에게 새로운 생이 열리던 순간이 그의 눈앞에 다시 선명하게 떠올랐다.
……‘위대한 어머니’가 그를 찾아온 것은 그가 거의 빈사의 상태로 혈족들에게 발견된 지 사흘 만이었다. 그날 아직 회복이 덜 된 몸으로 후미진 동굴에 홀로 누워 있는 그를 찾아온 ‘위대한 어머니’는 그에게는 그대로 감격이었다. 한번 탈출에 실패한 후로 고독은 또 하나의 새로운 운명이었다. ‘산나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가 누워 있는 곳을 찾아 주지 않았고, 간간 밖에 나가 둘러보는 산과 숲도 문득 낯선 듯이 느껴졌다.
“사랑하는 아들아, 누가 너를 괴롭히더냐? 무엇이 너를 이 따뜻한 동굴과 다정한 형제자매의 품에서 빠져나가 눈 속을 헤매게 하였느냐?”
‘위대한 어머니’는 전에 없이 자상한 목소리로 그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남자에게는 가장 큰 금기임에도 불구하고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두 손으로 훔치며 그는 더듬거렸다.
“위대한 어머니, 그것은 바로 저 자신이었습니다. 저의 희고 약한 피부와 가는 팔다리였습니다. 왜 저의 창날은 사냥감의 심장을 찌르지 못하고 화살은 항상 빗나가 버리는 것입니까? 어째서 제 담력은 풀숲을 뛰는 토끼보다 못하고 제 머리엔 망상만이 가득한 것입니까? 떨어진 작은 새의 주검이 유독 제게만 슬픔이 되고, 숨져 가는 꽃사슴의 눈망울이 괴롭게 느껴지는 것은 또 무엇 때문입니까?
위대한 어머니, 진심으로 묻습니다. 혹 자연은 저의 출생을 꺼린 것이나 아닌지요. 숲의 정령도 저를 못마땅히 여겨 여인의 몸과 마음을 제게 그릇 점지한 것이나 아닌지요·…‥.”
그런 그를 보는 ‘위대한 어머니’의 눈은 점점 연민으로 흐려져 갔다 그녀는 그의 얇고 부드러운 손과 여윈 팔목을 어루만지며 말하였다.
“아들아, 괴로워 마라. 그래도 네가 태어났을 때 태양은 미소하였고, 숲의 정령도 동굴 가득히 그 신선한 입김을 불어넣어 주었더니라. 네가 네 형제들과 다른 점은 오직 네 몸을 흐르는 피가 그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 그것을 지금까지 알아보지 못한 것은 나의 불찰이었다…….”
그 말을 들은 그는 돌연한 호기심으로 성급하게 되물었다.
“그럼 나는 저 많은 아버지들의 자식이 아닙니까? 내 어머니는요. 그들은 모두 어디에 있습니까?”
“물론 너를 낳은 것은 나의 딸이다. 그러나 내 짐작이 맞다면 처음 네 피를 우리 혈족에 전한 자나 그것을 이어 내 딸의 몸에 너의 씨를 뿌린 자는 아무도 이곳에 없다.”
“그럼 제 피의 근원이 되는 사람은 우리 혈족이 아니었단 말입니까?”
“그렇다. 그러나 부끄러워하거나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그는 비록 우리들의 혈족이 아니지만 우리들보다는 훨씬 더 저 먼 하늘과 그곳에 계신 조상들의 영혼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한 번도 싸움과 사냥에 나서 본 적이 없지만 어떤 용사보다 더 큰 힘과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잘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어째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습니까?”
“벌써 오래전의 일이다. 네가 태어나기 훨씬 전의. 그때 우리는 대단한 재앙을 만났다 오랫동안 하늘이 비를 주시지 않아 골짜기며 샘은 모조리 마르고, 풀과 나무조차도 잎과 순을 제대로 피우지 못했다. 그 때문에 우리의 사냥감들은 모두 풀과 샘을 찾아 낮은 곳으로 내려가고 우리들도 그들 뒤를 따라 낮은 곳으로 내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평원 지방에는 벌써 오래전부터 다른 혈족들이 자릴 잡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짐승을 길들여 기르며 사는 혈족들은 언제나 이동 중이어서 자기들의 근거지에 대한 집착이 없었지만, 기름진 평야에서 낟알을 기르며 살던 족속들은 토지에 대한 강렬한 집착으로 우리에게 거센 저항을 했다.
그들은 수적으로도 우리보다 훨씬 많았고, 목책이나 흙벽으로 우리의 침입을 막을 줄도 알았다. 그러나 대체로 그들과의 싸움은 수월했다. 그들은 이미 오랫동안 숲 속을 달려 보지 않았고, 맹수들을 쫓던 기억마저도 없어 거칠고 날랜 우리 전사들을 당해 내지 못했다. 이듬해 충분한 비가 오고, 이 계곡에 다시 사냥감이 되돌아올 때까지 우리는 그들이 갈무리해 둔 낟알과 길들인 짐승을 빼앗아 살았지.
아마도 우리 혈족에 너의 피를 최초로 옮겨 온 사람은 평원의 그들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우리들에게 붙들렸으나 단 한 번의 예외로 살려 준.”
“그런데 어째서 그를 살렸습니까?”
“그의 신비한 능력 때문이었다. 그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저 하늘의 목소리를 알아들었고 땅의 몸짓과 표정을 이해했다. 그의 목소리는 바람을 달래고 비를 부를 수 있었으며, 그의 눈길은 멀리 수십 개의 봉우리 너머에서 묻어오는 비구름을 보았다. 가벼운 풀잎의 나부낌이나 작은 새의 노래마저도 그에게는 의미 있는 하늘의 속삭임 이며, 땅의 숨결이었다…….”
거기서 잠시 ‘위대한 어머니’는 까마득한 날의 기억을 더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미처 무엇을 물을 틈도 없이 그녀는 다시 하던 얘기를 계속했다.
“평원 지방을 휩쓸고 다니던 그해 여름에 우리는 한 커다란 부락을 약탈했다. 모든 것이 풍족한 곳이었지만 그들도 가뭄에 고통 당하고 있었던 모양으로 우리가 습격한 날은 마침 부락 전체가 모여 비를 빌고 있었다. 우리는 그런 그들을 마음껏 유린하고 약탈했다. 그런데 그 부락 가운데의 공터에서 우리는 언뜻 이해 안 되는 광경을 보았다. 방금 제례가 행해지던 그곳에는 거대한 장작더미가 쌓여 있고, 그 위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묶여 있는 것도 아니고 실신한 것도 아니었다. 알고 보니 그들의 기우사(析雨師)였다. 오래 빌어도 비가 오지 않자 그가 동족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 제단 위에 얹었다는 게 겁먹은 그 족속 가운데 하나의 설명이었다.
우리는 그를 장작더미에서 끌어내렸지만 아무도 그에게 창을 겨누지 못했다.
흰 양털로 짠 예복과 새깃으로 장식된 모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엄숙한 표정과 형형한 눈길에 압도당한 탓이었다. 거기다가 우리의 전사들이 둘러싸고 있는 동안에 돌연히 하늘이 캄캄해지고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우리 혈족이 그를 우리의 사제자(司祭者)로 맞아들일 생각이 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원래 전문적인 사제자를 두는 것은 소출이 많고 보관이 용이한 낟알을 재배하는 평원 지방의 관습이었다. 그들은 한 사람의 노력으로도 몇 사람분의 식량을 얻을 수 있었으므로 직접 생산에 참여하지 않고 풍요와 다산만을 기원하는 사제자를 기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관습은 자연 상태보다 훨씬 번식 잘하고 젖과 고기도 많이 내는 가축을 가지게 된 초원의 유목민에게도 번졌다.
물론 우리에게도 위대한 정령들과 우리를 중개하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러나 불확실한 사냥과 빈약한 채취만으로 살아가던 때에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우리가 가졌던 의식은 혈족의 용사들 중 약간의 솜씨를 가진 자가 즉흥적인 노래로 우리의 희망을 하늘에 전하고 서툰 그림에다 창이나 화살을 박아 넣어 목표하는 사냥감에 주술을 거는 것이 전부였다.
우리가 평원 지방의 토기와 함께 그런 사제자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약탈 때문에 생겨난 여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후 이곳으로 돌아온 후에도 만들기 어렵고 보관하기 까다로운 토기는 곧 버렸지만, 그 제도만은 존속시켰다. 바로 ‘신비의 동굴’이 그것이다.
평원에서 끌려온 그 남자는 그 동굴의 첫 번째 주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피와 영혼까지 우리의 혈족이 될 수는 없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그는 평원 지방을 그리워했고, 그곳에서 축적되고 있는 사람들의 지혜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했다. 그 때문에 평원 지방에서 그 비법을 가져온 ‘사제자의 물’에 항상 취해 살던 그는 결국 어느 폭풍우 치던 밤 동굴 앞 벼랑에서 떨어져 죽었다.
그런데 그가 떨어져 죽은 날 몹시 슬피 운 나의 딸이 있었다. 가엾게도 그 애는 결국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한 채 임신 중이던 사내 아이를 낳자마자 죽었다. 그 사내아이가 바로 네 아버지다. 그러나 그는 왠지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아버지의 고향을 동경하다가 어느 날 이 골짜기와 우리 혈족을 훌쩍 떠나버렸다.
나는 그 애가 떠남으로써 우리 혈족에서 그 핏줄은 사라진 걸로 생각했다. 하지만 너희들이 있었다. 일찍이 평원으로 떠나 버린 ‘큰 목소리’와 너, 어떤 경로인지는 모르지만 너희들의 핏줄을 도는 것은 분명 그들의 피다.”
“그렇다면 위대한 어머니, 제가 초원으로 내려가려 한 것은 당연한 일이군요.”
“그렇지 않다. 그곳은 네 큰아버지 혹은 네 아버지의 고향은 될지라도 너의 고향은 아니다. 사람은 항상 자기가 태어난 땅을 그리워하게 되어 있고, 네가 태어난 곳은 이곳이다. 만약 네가 평원으로 내려가게 된다면 너는 그곳에서 네 큰아버지나 아버지가 시달렸던 것과 똑같은 향수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아닙니다. 저를 평원 지방에 내려가게 내버려 두십시오. 이곳에서 저를 기다리는 것은 ‘손의 동굴’과 치욕스러운 고기뿐입니다.”
“아들아, 나를 보아라. 너는 흰 머리칼과 골 깊은 주름을 단순히 세월이 할퀸 자국으로 보느냐? 거기다가 나는 지금 듣고 있다. ‘큰 목소리’가 돌아오는 발짝 소리를. 아니 그 이상 부근 어느 숲을 배회하는 그의 숨소리를. 나를 믿고 그를 기다려라. 그리하여 그가 돌아오면 너희들은 날을 받아 ‘신비의 동굴’로 가라. 그곳이야말로 진작부터 너희들이 있어야 할 곳이었다.”
갑자기 동굴 입구가 환해진 것 같은 느낌에 그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요란스럽던 빗소리도 멎어 있었다. 그는 동굴 어귀로 나가보았다. 햇살이 눈부셨다. 동굴 아래로 빗물에 씻긴 신록이 싱싱하게 펼쳐져 있었다. 해는 중천에서 뜨겁게 이글거렸다.
동굴 안으로 돌아간 그는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비가 개었으니 소를 채색할 안료(顔料)를 구하러 나설 작정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소를 한 번 더 세밀하게 관찰해 볼 필요가 있었다.
석회암 암벽을 타고 내리면서 그는 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전에는 제법 훌륭한 통로가 있었으나 ‘뱀눈’과 그의 패거리가 이곳을 버리면서 허물어 버렸기 때문에 어려움은 더 컸다. 그가 간신히 계곡으로 들어섰을 때 온몸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는 기억을 더듬어 붉은색과 노란색을 얻을 수 있는 ‘신비의 주토’가 있는 골짜기를 향했다. 몇 번이나 길을 잃고 헤맨 끝에 그는 그 흙을 찾아냈다. 그리고 부근의 숲에서 바이올렛 빛을 얻을 수 있는 수액도 구했다. 윤기 있는 흑색을 내는 이탄을 얻으려면 봉우리를 하나 더 넘어야 했지만, 수지(樹脂)에 검댕을 개어 쓰기로 하고 그는 그곳을 떠났다.
동굴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다시 ‘금지된 계곡’을 들렀다 벼랑의 돌출한 화강암 위에 올라가면 가까운 거리에서도 안전하게 짐승들을 관찰할 수 있는 데가 바로 그곳이었다. 늙은 스승이 예전에 곧잘 하던 것처럼 그도 그 바위에 배를 붙이고 그 아래 계곡을 내려다보았다. 혈족들의 근거지가 부근이었을 적에도 일종의 신성한 구역으로 접근이 금지되던 그 계곡에는 잘 마르지 않는 샘과 소금기 머금은 바위가 있어 항상 크고 작은 동물들이 드나들었다.
그가 보고 있는 동안에도 몇 마리의 영양이 물을 마신 후 바위의 소금기를 핥고 지나갔다. 다음이 새끼를 거느린 사슴 한 쌍, 들소는 상당히 기다린 후에야 나타났다. 암컷 세 마리를 거느린 거대한 수컷이었다.
그는 숨을 죽인 채 소들을 관찰했다. 그들은 물을 마시고 소금기를 핥은 후에도 유유히 주변을 배회하며 신선한 풀을 뜯었다. 그런 그들을 발굽에서 뿔 끝까지 터럭 하나 놓치지 않겠다고 살피고 있는 그의 가슴은 들소와 대면했던 지난날의 그 어느 때보다도 세차게 뛰고 있었다.
그때는 기껏 고기와 가죽을 얻기 위해서였지만 이제는 네 존재 자체이다. 이제 나는 너를 나만의 선과 색으로 영원히 잡아 두고자 한다. 누구에게 바쳐지는 것도 아니고 영력(靈力)을 얻기 위해서도 아니다. 가장 가치 있는 것의 화체(化體) 바로 그림 자체를 위해서이다…….
그가 들소에게 몰두해 있는 사이에 햇살은 점점 기울고 있었다. 그와 함께 그의 몸을 오르내리던 신열이 조금씩 고통으로 변해 갔다. 그는 벌써 며칠 전부터 그런 증상을 경험하고 있었다. 이제 그 고통은 내일 날이 밝아야 없어질 것이었다.
갑자기 한 줄기 서늘한 바람에 그는 심한 재채기가 났다. 그러자 놀란 들소들이 그가 있는 벼랑 쪽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공격할 만한 곳이 못 된다고 판단된 듯 몇 번 위협적인 콧김을 내뿜더니 어슬렁거리며 숲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몹시 기분이 상했다는 투의 걸음걸이였다.
동굴로 돌아온 그는 서둘러 준비해 둔 관솔가지에 불을 붙이고 동굴 벽에 돌출한 바위 위로 올라갔다. 손만 뻗으면 천장의 들소 그림에 닿는 곳이었다. 그는 근처의 바위 틈새에 불붙은 관솔가지를 꽂고 그 불빛에 의지해 방금 보고 온 들소의 모습을 천장 벽에 옮기기 시작했다. 채색을 하기 전의 마지막 마무리 작업이었다. 어렴풋한 윤곽으로만 떠올라 있던 소는 수지에 갠 검댕으로 점차 선명한 형태를 이루었다. 날카로운 눈으로 전방을 응시하며 앞다리에 힘을 모은 수소였다.
소묘(素描)가 완성되자 그는 잠시 그 소를 들여다보았다. 문득 자기에게 덮쳐 오던 엄청난 생명력이 사라져 버린 것 같은 느낌에 불만스러웠다. 아마도 정지된 자세 때문인 것 같았다.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그는 엉덩이 쪽을 더 살리고 뒷다리를 앞으로 굽게 했다. 질주해 오다가 우뚝 멈추어 선 것 같은, 약간의 생동감이 살아났다.
그때 관솔가지가 다 타서 불이 꺼져 버렸다. 바닥으로 내려와 새로운 관솔가지를 찾아 든 그는 거기에 불을 붙이려다가 곧 단념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잊고 있었던 오한과 신열이 거대한 피로와 함께 갑작스레 그를 짓눌러 왔다.
그는 간신히 모닥불만 보살피고 그 곁에 쓰러지듯 누웠다. 오후 동안 너무 무리했던 듯했다. 식량은 아직도 좀 남아 있었지만 식욕은 조금도 일지 않았다. 무엇인가를 먹어 두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곧 혼절하듯 깊은 잠 속으로 떨어졌다.
그가 이 ‘신비의 동굴’로 옮겨 와 보낸 처음 얼마간은 역시 음울하고 외로운 세월이었다. 위치도 그들 혈족의 주된 근거지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었지만, 그곳의 일상은 더욱더 격리돼 있었다. 며칠 만에 한 번씩 공급되는 식량을 제외하면 혈족들과의 교류는 아주 드물었다. 여자들과의 동침도 극히 제한돼 있었다. 한 해에 단 두 번, 그것도 지정된 정화의식(淨化儀式)을 마친 여인과의 동침이 허락될 뿐이었다.
그러나 조금씩 그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신비의 동굴’은 다른 어떤 곳보다 만족스러운 곳이 되어 갔다. ‘늙은 스승’들은 침울하고 엄격하였으며 수련도 상당히 까다로운 것이었지만, 그 방식은 전혀 달랐다. 몇 개의 큰 원칙만 가지면 각자의 성취는 거의 자유였다. 바쳐지는 고기도 맛나고 기름졌으며, 축제 때 그들에게 지정되는 좌석도 언제나 용사들보다 높았다. 여인들도 더 이상은 경멸의 눈길로 보지 않았다. ‘초원의 꽃’조차도.
거기다가 ‘위대한 어머니’의 예언대로 돌아온 ‘큰 목소리’는 곧 그의 중요한 동료로서 그곳에서 보내야 하는 나날의 권태와 고독을 달래주었다. 그가 전해 주는 평원 지방은 그에게는 그대로 감탄과 경이였다. 그곳의 풍요한 생활과 발달한 지혜는 그의 좌절된 동경을 다시 불붙이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런 것을 표현하기만 하면 ‘큰 목소리’는 싸늘한 경멸의 눈으로 그를 보았다. ‘큰 목소리’는 무언가 평원 지방과 그곳의 생활에 대해 깊은 원한과 악의를 가진 것 같았다.
언젠가 그는 그 이유가 궁금해서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 ‘큰 목소리’는 이렇게 말했다.
“왜냐고? 네가 이해할진 모르지만 대답은 해 주지. 나는 거기서 무섭게 타락하고 변질해 가는 인간들을 보았기 때문이야.”
그 목소리는 매우 강렬하면서도 엄숙한 것이었다.
“나는 거기서 매우 불길한 조짐을 보고 왔어. 권력이 ― 인간이 인간을 명령하고 강제하고 학대할 수 있는 힘이 발생하고 있었어. 몇몇 힘세고 영리한 소수가 조직과 폭력으로 어리석고 약한 다수의 동료 위에 군림하려고 획책하고 있었어. 아무런 반대급부 없이 동료의 생산을 빼앗고 대가 없는 노동을 강제하려고 했어. 아니 그 이상 생명조차도 그들을 위해 바쳐주기를 강요하고 있었어. 그리고 그렇게 해서 축적된 힘으로 동족인 인간들을 사냥하기 시작했어. 호랑이도 곰도 동족을 사냥하지는 않아. 혹 그들은 서로 싸워도 상대의 생명까지 끊는 법은 없어. 그러나 이들 영악한 인간들은 가혹하게 동족을 살해하고 살려 두는 자도 죽은 것보다 못한 상태에 빠뜨렸어. 그런데 그런 싸움이 그 땅 어디선가 매일 벌어지고 있었어. 하늘의 진노보다 더 무서운 재앙이야. 또 나는 보았어. 우리의 목소리가 치명적으로 타락하고 악용되는 것을. 신화는 함부로 만들어지고 용자(勇者)나 영웅은 조작되었어. 자연이나 위대한 정령에게 바쳐지던 노래는 이제 그들 강하고 영악한 자들을 위해 불려졌어. 예언도 끝나 버렸어. 저 하늘의 목소리는 더 이상 그들에게 닿지 못하고 땅 위를 떠도는 것은 언제나 그들이 꾸며 낸 거짓말과 깨어지게 되어 있는 약속뿐이었어. 그들이 자기들의 압제와 폭력에 복종하는 대가로 약속하는 것은 항상 보다 풍부한 식량과 안락한 주거였지만 한 번도 이행되는 것은 보지 못했어. 혹 이행되어도 그것은 보다 큰 복종과 희생을 요구하기 위한 미끼에 지나지 않았어…….
거기다가 더욱 나쁜 것은 그런 권력이 점점 더 소수의 사람에게 몰리는 경향이야. 나는 실제로 그곳에서 겪은 적이 있어. 단 한 사람을 위해 수천 수백의 사람들이 피를 쏟고 땀 흘리는 땅을. 생각해 봐, 그 땅이 얼마나 끔찍한 땅일까를.”
그렇게 말하는 ‘큰 목소리’의 눈에는 늙은 스승들 못지않게 번쩍이는 예지가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곳에서는 벌써 네 것과 내 것이 엄격하게 구분되고 있어. 우리가 한 끼의 몫을 배당받는 것으로는 언뜻 이해할 수 없는 소유야. 그들은 필요한 시기와 범위를 넘어서 자기의 낟알과 고기와 가죽을 가졌고, 동굴이나 움막, 심지어는 땅 위에다 금을 그어 네 땅과 내 땅을 구분했어.
너는 그것이 왜 그렇게 심각한 것인가를 모를 테지만, 생각해 봐. 한 사람의 동굴에선 고기와 낟알이 썩어 가고 있는데 한편에서는 굶어 죽는 동료가 있다면 그 땅 또한 얼마나 끔찍한 것일까를. 물론 많이 가진 자는 가지지 못한 자를 게으름뱅이나 무능한 자로 비난해. 그리고 자기들의 근면과 인내를 과장함으로써 그 불평등을 합리화하려고 들지. 그러나 아니야. 몇몇을 제외하면 그들의 그 막대한 소유는 우연한 행운이나 비열한 수단, 또는 탈취에서 출발한 거야. 예컨대 우연히 열매가 풍부한 숲을 홀로 알게 되었거나 동료를 속였거나 힘으로 빼앗아 그걸 밑천으로 삼은 거야.
어쨌든 그들이 한번 확보된 여분을 축적하기 시작하자 그 뒤는 더욱 나빴어. 소유는 탐욕을 부르고, 거기서 결국 내가 말한 그런 끔찍한 결과로 발전해 간 거야.
나는 실제로 한 바구니의 과일을 꾸어 먹고 두 바구니를 갚아야 하는 경우를 보았어. 한번 꾼 자는 부지런히 따 모아도 빚을 갚고 나면 여전히 아무것도 남지 않지만 빌려 준 자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여분을 한 바구니에서 두 바구니로 늘일 수 있었어. 그리고 그다음 날은 네 바구니로 불어나기까지 했어. 또 나는 가지지 못한 자를 고용해서 한 바구니를 삯으로 주고 두 바구니를 따 들이게 하는 경우도 보았어. 결과는 꾸어 먹은 경우와 비슷했어. 불행하게도 처음 뒤떨어진 자는 영원히 가진 자를 따라잡을 수 없게 돼.”
거기서 ‘큰 목소리’는 문득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결국 ― 나는 그런 것들을 견딜 수 없었어. 그들의 지식은 축적을 거듭하고 도구의 발전도 놀라운 것이지만 그런 발전의 방향은 도무지 용서할 수 없었어. 그런데도 진실로 우려되는 것은 그런 그들의 제도와 습속이 광범위하고 급속하게 전파되는 경향이야. 내가 이 골짜기의 정령이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은 바로 그 우려 속이었어. 돌아와 그것들이 우리들의 계곡과 혈족을 오염시키지 못하도록 지키라는 거였어…….”
그런 ‘큰 목소리’의 얘기는 그에게는 생소하고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만 막연히 느껴지는 것은 어쨌든 ‘큰 목소리’의 관찰이 아주 틀리지는 않았으리라는 것, 어쩌면 ‘큰 목소리’는 자기보다 하늘에 더 가까이 다가간 사람이며, 그가 들었다는 그 부름도 터무니 없는 과장이나 거짓은 아니리란 믿음이었다.
그 밖에 그렇게도 치열했던 ‘초원의 꽃’에 대한 애집(愛執)을 어느 정도 진정시킬 수 있었던 것도 ‘큰 목소리’의 냉소에 찬 빈정거림이었다. 그가 그녀를 향한 견딜 수 없는 그리움을 호소했을 때 ‘큰 목소리’는 이렇게 말하였다.
“너는 그녀에게서 완전한 아름다움의 한 전형을 보았다고 생각하고 그 목소리에 천상의 가락이 섞여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슬프게도 네가 여인의 몸을 빌려 태어났기 때문에 품게 된 환상에 불과하다. 네가 말한 그런 여인은 이 세상에는 없어. 네가 품고 있는 환상은 따뜻하고 평온한 어머니의 배 속이나 어쩌면 그 훨씬 전에 느꼈던 어떤 상태의 희미한 기억에 불과해. 그녀는 다만 한 마리 사람의 암컷일 뿐이야. 자기의 욕망과 이익에 충실한. 세상의 어떤 여인도 너의 환상을 채워 줄 수는 없어…….”
혼수상태에서도 나지막이 고막을 찔러 오는 동물의 울음소리에 그는 본능적으로 눈을 떴다. 동굴 입구의 어둠 속에서 몇 쌍의 새파란 빛이 번득이고 있었다. 그는 오싹한 한기를 느끼며 모닥불을 살펴보았다. 불은 그새 약하게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는 곁에 던져져 있던 도끼를 단단히 잡고 왼손으로 조심스레 불꽃을 되살리기 시작했다. 불은 다시 밝고 뜨겁게 타올랐다. 그제야 어슬렁거리며 물러가는 짐승들이 보였다. 서너 마리의 늑대였다.
그는 불붙은 나뭇가지를 들어 그런 그들에게 집어 던졌다. 기세에 놀란 짐승들은 낑 하는 얕은 울음소리와 함께 황급히 달아나버렸다. 늑대가 사라지자 다시 신열과 오한이 번갈아 왔다. 전날 밤보다 훨씬 강도 높은 것이었다. 간신히 입구 쪽에다 모닥불 하나를 더 만든 그는 다시 쓰러지듯 두 개의 모닥불 사이에 누웠다.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문득 ‘큰 목소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자 ‘큰 목소리’가 몹시 그리워졌다. 그리고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를 눈물이 한 줄기 그의 볼을 타고 내렸다.
두 늙은 스승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그들이 이 동굴의 주인이 된 것은 성년식이 있고 열한 번째의 해, 그리고 그들이 사제자의 수업을 시작한 지 여덟 해째의 겨울이었다.
먼저 ‘장엄한 목소리’가 세상을 떠나고, 그로부터 채 두 달도 못돼 ‘영험한 손’마저 자는 듯 숨을 거두었다. 그 겨울이 다 가기도 전의 어느 새벽이었다. 그들은 그 사실을 곧 산 너머 혈족들에게 알리고, 그들 자신이 한 완숙한 사제자로서 스승들의 유해를 양지바른 곳에 모셨다.
그런데 ‘뱀눈’과 ‘달무리’가 그들을 찾아온 것은 바로 그날 밤이었다. 그들은 맛있고 질 좋은 고기와 크고 잘 여문 과일들을 손수 메고 왔다. 그리고 ‘뱀눈’이 말했다.
“슬픔은 잠시지만, 앞으로 우리가 살아야 할 세월은 길다. 이제 그들이 떠났으니 남은 것은 우리들의 시대다. 우리는 그것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알고 있다. 애초에 하늘의 목소리라는 것은 없고, 또 우리가 천 번 만 번 이 동굴 벽에 짐승들을 그린들 실제로는 그들의 터럭 하나 다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러나 또한 알고 있다. 너희들과 이 동굴은 조상들 중 가장 현명하고 사려 깊은 분이 생각해 낸 유용한 제도이며 장치라는 것을. 즉 하늘의 목소리에 자기들의 뜻을 가탁(假託)함으로써 그들은 쉽게 혈족들의 의사를 자기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통일할 수 있었고 그림이 가진 어떤 힘을 신뢰하게 함으로써 혈족의 전사를 용감하고 자신 있게 만들 수 있었다.
이제 혈족들을 이끄는 것은 우리들의 세대다. 나와 몇몇 동지들은 모든 용사들에게서 믿음과 우러름을 받기에 충분한 힘과 용기를 보였었고, 너희들은 이 동굴의 주인이 되었다 남은 것은 너희들의 목소리나 그림과 우리들의 뜻을 일치시키는 일이다.
우리를 신뢰해 달라. 우리에게 협조해 달라. 대신 나와 내 충실한 동료들은 약속한다. 앞으로 너희들은 지금껏 받은 그 어떤 대우보다 나은 대우를 받게 될 것이다. 혈족들은 그 어느 때보다 너희들을 우러르게 될 것이고, 이 동굴은 언제나 가장 기름진 고기와 맛난 과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사실 그는 ‘뱀눈’의 제안이 무엇을 뜻하는지 금세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만 하늘의 목소리를 부정하는 그의 불경(不敬)만이 섬뜩 할 뿐이었다. 그러나 ‘큰 목소리’는 ‘뱀눈’의 뜻을 속속들이 이해한 것 같았다 그는 잠깐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평소처럼 침착하게 대답했다.
“하늘의 목소리와 인간의 목소리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아무리 하늘의 목소리라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 혈족에게 희생을 요구하고 불리를 입힌다면 나는 그것을 전하지 않을 것이다. 또 비록 그것이 인간의 뜻일지라도 우리 혈족의 이익과 일치하고 자연의 원리에 합당한 것이라면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크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해 줄 것이다. 너의 제안에 대한 우리들의 대답은 오직 그뿐이다.”
그 말을 들은 ‘뱀눈'은 잠시 날카롭게 ‘큰 목소리’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이내 교활한 미소를 지으며 ‘큰 목소리’에게 다가와 두 손을 잡았다.
“나의 뜻 역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훌륭한 사제자를 맞게 돼 기쁘다.”
‘뱀눈'은 마치 그와 ‘큰 목소리’가 자신의 제안을 그대로 온전히 수락해 준 것처럼 말했다.
그 후 모든 것은 ‘뱀눈’의 약속대로 이행되었다. 전보다 훨씬 많고 질 좋은 고기와 달고 향기로운 과일들이 그들의 동굴로 보내졌고, 흰 수달이나 꽃사슴의 가죽으로 지은 화려한 제복(祭服)이 올라왔다. ‘큰 목소리’에 물리처지고 말았지만 아름다운 아내들이 보내지기도 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감사와 기쁨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런 느낌의 반복은 곧 자신도 모르게 그것들을 보내 준 ‘뱀눈’에 대한 희미한 복종감으로 변질돼 갔다. 그런 그를 ‘큰 목소리’는 노골적인 경멸로 대하면서도 자신은 왠지 불안에 쫓기는 표정이었다.
그때쯤 ‘뱀눈’이 다시 그들의 동굴을 찾아왔다. 그 겨울이 끝나고 잎 돋는 달이 돌아온 지 얼마 안 돼서였다 그해에 있을 혈족의 중요한 행사가 결정되는 새봄의 축제가 사흘을 남기고 있었다. ‘뱀눈’은 그들의 복종을 거의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약속의 날이 가까워 온다. 우리들은 이제 우리들의 혈족을 가장 강력하고 풍요한 집단으로 만들고 싶다. 모든 형제와 아내들을 굶주림과 목마름의 두려움에서 구하고자 한다.
나는 너희들을 통해서 하늘의 소리가 전해지기를 바란다. 너희들은 조직하고 축적하라. 최고의 결정은 최상의 인물에게, 각자에게는 각자의 몫〔分)을.
그리고 또한 너희들의 그림을 통해서 길들여진 소와 영양이 우리에게 풍부한 고기와 젖을 주고 가꾸어진 낟알이 우리 동굴에 가득한 것을 보여 주고 싶다. 나는 불확실한 수렵과 소득 적은 자연으로부터의 채취에서 우리 혈족을 해방시키고자 한다…….”
그는 그런 ‘뱀눈’의 제안을 별 경계 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큰 목소리’는 원인 모를 침묵으로 ‘뱀눈’을 대했다.
“결국 우리에게도 올 것이 왔어…….”
‘뱀눈’이 떠나자 ‘큰 목소리’는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결국 이것이 우리가 반드시 걸어야 할 길인가…….”
‘큰 목소리’는 무언가 큰 혼란과 초조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골똘한 생각으로 끼니조차 잊고 잠도 자지 않았다. 흔들리는 자신의 신념을 애써 붙들려는 노력인 것 같았다. ‘큰 목소리’가 다시 입을 연 것은 바로 새봄의 축제가 벌어지는 날 새벽이었다.
“나는 하늘의 목소리를 들었다. 인간의 의지로 조작된 것이 아닌 진정한 하늘의 목소리를…….”
깊은 잠에서 억지로 깨난 그에게 ‘큰 목소리’는 빠르고 흥분한 어조로 말하였다.
“그 목소리는 말하였다. 우리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사람의 간교한 지혜가 짜낸 조직에 얽매이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아무리 훌륭한 대의와 현명한 원리로 이루어져 보이더라도 조직은 필경 그 조직을 꾸민 자 또는 원하는 자의 이익에 봉사하게 되어 있다고. 또한 그 목소리는 경고하였다. 조직은 반드시 의사의 위임을 요구하며, 결정권의 집중을 가져올 것이라고. 거기서 반드시 한 수장(首長)이 태어나며, 처음 그는 ‘동배(同輩) 중의 으뜸’으로 출발할 것이지만 이윽고는 도전할 수 없는 절대자로 우리들 위에 군림하게 되리라고.
각자의 몫(分)과 그 축적에 대해서도 ― 그 목소리는 엄격하게 선언하였다. 각자의 몫은 필요한 때와 한도 안에서만 인정돼야 하며, 어떠한 명목으로든 그 여분을 각자의 배타적인 지배 아래 축적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축적된 여분은 먼저 그 소유자를 지배하고 이윽고는 아주 소수를 뺀 우리 모두를 지배하게 되리라고.”
그렇게 말하는 ‘큰 목소리’의 두 눈은 불면과 기묘한 열정으로 충혈되어있었다.
“그리고 나는 또 이 눈으로 그 생생한 계시를 보았다 일찍이 내가 평원 지방에서 겪었거나 예감했던 것보다 몇 배나 끔찍한 그 실례를.
그 하나는 거대한 인간의 산이었다. 맨 위에 한 사람이 서 있었고 그를 세 사람이 받들고 있었는데, 또 그 세 사람은 아홉 명의 사람이 지탱하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뚜 그 세 배의 사람이 떠받들고…… 그런데 아래로 내려갈수록 한 사람이 감당하는 무게는 늘어 갔다. 왜냐하면 첫 번째 층에서는 세 사람이 하나를 지탱하면 되지만 두 번째 층에서는 아홉 사람이 네 사람을, 그다음은 스물일곱이 열셋을, 그다음은 여든하나가 마흔 명을 지탱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겨우 한 사람이 간신히 지탱할 수 있는 곳에서 그 사람의 산은 끝나 있었다. 아니 그 이상 벌써 그 산의 하부는 휘청거리고 흔들거리고 있었다. 다만 그 산이 형태를 유지하는 것은 바로 위의 계층에서 아래 계층에 끊임없이 휘두르는 채찍의 아픔과 위협하는 으르렁거림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위로 올라갈수록 사람들은 자기가 위험한 구조물 위에 서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마도 중간 계층의 완충작용으로 최하부의 동요와 비틀거림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사람도 그 산이 무너질 경우 가장 치명적으로 상하는 것은 자기라는 자각만은 가지고 있어 그 막연한 불안 때문에 끊임없이 채찍을 휘둘러 댄다. 그 산이 그대로 지탱하든 무너져 내리든 얼마나 끔찍한 일이냐…….
지천으로 쌓인 고기와 낟알 곁에서 굶어 죽어 가고 있는 동료들과 산더미 같은 털가죽 더미 속에서 벌거벗은 채 떨고 있는 동료들, 한 줌의 낟알을 위해 자기의 마지막 한 방울의 힘까지 짜내 이미 가진 자를 더 많이 가지게 해 주어야 하는 불행한 형제들과 한 토막의 고기를 위해 아무 곳에서나 웃으며 다리를 벌려 주어야 하는 불행한 자매들. ― 그 필요의 시기와 범위를 벗어난 ‘각자의 몫(分) ’이 가져온 결과도 나는 생시처럼 똑똑히 보았다.
설령 내일 밤 이 동굴에 날아드는 것이 날카로운 ‘뱀눈’의 창칼일지라도 나는 남의 불행과 손해 위에서 추구되는 그들의 행복과 이익을 승인할 수 없다. 다수의 고통과 결핍 위에서 구가되는 소수의 풍요와 안락을 용서할 수 없어…….
나는 내일 나의 혈족들에게 내가 들은 이 목소리와 내가 본 환영을 전할 것이다. ‘뱀눈’과 그의 패거리가 약속하는 미래의 진상을 폭로하겠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큰 목소리’의 그런 걱정은 광기와 기우로 밖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뱀눈’의 그 간단한 요구와 그 끔찍한 결과가 머릿속에서 선뜻 연관 지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은근히 그를 불안스럽게 만든 것은 ‘큰 목소리’의 그런 엉뚱한 결정 때문에 자기들이 그동안 누려온 지위와 혜택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두려움이었다
거기서 그는 현실로 돌아왔다 문득 어두운 그 동굴 어느 모퉁이에서 금세 ‘큰 목소리’가 불쑥 솟아날 것 같았다. 그가 들었던 것은 정말로 하늘의 목소리였을까. 그에게 나타난 환영도 정말로 어떤 위대한 정령이 보여 준 계시였을까
그러자 갑자기 ‘큰 목소리’의 끔찍한 최후가 떠올랐다. 비통하게 절규하듯 들려오던 마지막 목소리, 그리고 끔찍하게 그을린 시체.
……그들이 처음으로 주재하게 된 제일(祭日)이 왔다 규모와 준비가 그 어느 때보다 크고 풍성했다. 그런데 한 가지 눈에 띄는 변화는 ‘위대한 어머니’와 나이 든 큰아버지의 역할이 대폭 줄어든 것이었다. 그들은 전처럼 앞에 나서서 축제를 주관하지도 않았고, 분배를 지휘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모든 것은 ‘뱀눈’과 그의 패거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혈족의 젊고 늙은 남녀 모두가 ‘뱀눈’의 눈치를 살피고 그 패거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애쓰는 빛이 역력했다. 특히 그 절정은 젊은 남녀들의 춤과 노래가 어우러진 자리였다 ‘뱀눈’의 비호 아래 사냥에 나서지 않고도 익살과 재담만으로 용사들 틈에 남아있던 ‘얘기꾼’은 거기서 장황하게 ‘뱀눈’의 신화를 읊었고 그를 칭송하는 노래를 불렀다. 그것도 조상들의 영혼에 바쳐질 때와 같은 장중한 어조와 신성한 말들로. 그러나 춤추는 남녀는 모두 환호와 열광으로 ‘얘기꾼’의 노래에 화답할 뿐이었다.
그 새벽 ‘큰 목소리’의 영향으로 의혹과 혼란에 빠졌던 그도 차츰 그런 분위기에 동화돼 갔다. 거기다가 바로 그 ‘뱀눈’이 영광스럽게도 그들의 자리를 자기와 나란히 안배해 놓았을 때는 은근한 감격까지 맛보았다. 그래서 그는 자기 차례가 왔을 때 아무런 저항감 없이 ‘뱀눈’과 그 패거리가 원하는 것을 그려 주고 말았다. 길들인 가축과 재배된 낟알에 대한 동경을, 그것을 획득하는 것이 혈족을 강력하고 풍요하게 만들리라는 신념을, 하늘의 뜻으로 표현해 준 일이 그랬다.
그러나 그런 그를 시종 분노의 눈으로 노려보던 ‘큰 목소리’는 자신의 차례가 돌아오자 단번에 그런 분위기를 흐트려 버렸다. ‘큰 목소리’는 하늘의 뜻을 빌려 혈족 안에서 나타나고 있는 불길한 조짐을 지적하고 그 끔찍한 결과를 경고했다. 그리고 맞대 놓고 ‘뱀눈’의 음모를 공격하고 그 패거리들을 비난했다.
‘큰 목소리’가 말하고 있는 동안에 몇몇 성미 급한 ‘뱀눈’의 패거리가 들고일어났다. 그들은 금세 ‘큰 목소리’를 덮칠 기세였다. 그러나 많은 혈족들의 눈에서 은은히 타오르는 분노의 불길을 깨달은 ‘뱀눈’의 제지로 소동은 이내 가라앉았다. ‘뱀눈’의 강력한 힘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혈족의 대다수는 사제자를 신뢰하고 그 권위를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그걸 보고 그는 너무 쉽게 ‘뱀눈’에게 굴복한 것이 약간 후회스러웠다. 그러나 일단 밤이 오자 그런 기분은 깨끗이 사라지고 말았다. ‘뱀눈’은 실로 그를 위해 최선의 배려를 베풀고 있었다. 그에게 ‘초원의 꽃’을 보ㅙ 줄 만큼 세심한 배려였다. ‘뱀눈’에게서 어떤 지시를 받고 왔던지 그녀도 그 밤은 그야말로 헌신적이었다. 그는 당연히 그들에게 바쳐질 그 밤의 모든 특혜를 물리치고 신비의 동굴로 돌아가 버린 ‘큰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지만 이내 그녀의 향긋한 체취와 뜨거운 입김 속에 모든 걸 잊고 말았다.
그런데 이튿날 그가 ‘신비의 동굴’로 돌아갔을 때 ‘큰 목소리’는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놀란 그가 깨끗한 물로 상처를 씻고 ‘사제자의 물’을 입술에 흘려 넣자 ‘큰 목소리’가 간신히 깨어났다. 잠시 분노와 경멸의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던 ‘큰 목소리’는 씹어뱉듯 말했다.
“‘뱀눈’의 개.”
일없이 사람들 주위를 배회하며 남긴 찌꺼기나 배설물에 눈독을 들이는 그 비굴하고 천박한 짐승에 그를 비유하는 것은 대단한 모욕이었다 그러나 ‘큰 목소리’의 상처는 너무도 엄중했다.
“너를 보고 이번엔 나를 찌르라고 하더냐?”
간신히 그렇게 말한 후 ‘큰 목소리’는 다시 의식을 잃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죄의식에 빠진 그는 그 후 이틀 동안 극진하게 ‘큰 목소리’를 보살폈다. 다시 깨어난 ‘큰 목소리’의 분노와 경멸은 어느 정도 가라앉은 듯했다. 그걸 보고 그는 조심스레 말했다.
“오해하지 마라. 솔직히 말해서 나는 네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거기다가 우리가 어른들로부터 권유받아 온 남자들의 고귀한 품성 중의 하나는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비록 우리가 제안한 것도 아니고 명백히 답을 한 적도 없지만 우리가 ‘뱀눈’과 그 패거리가 보낸 고기를 받아들임으로써 무언의 약속이 이루어졌다고 나는 생각했다.”
궁색한 변명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큰 목소리’는 그의 변명을 차분한 어조로 수긍했다.
“나는 너의 비굴이 미웠다. 그러나 이제 그것이 비굴이 아니라 무지(無知)였던 이상 너를 미워할 까닭은 없다. 너는 그들에게 협조한 이유를 약속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진실로 약속을 어긴 것은 바로 너였다. 너는 우리가 널은 고기를 ‘뱀눈’과 그의 패거리가 보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 고기는 비록 그들의 이름으로 보내졌지만 실은 우리 혈족 모두의 것이다. 우리가 이 동굴에서 몽상에나 잠기고 숯덩이나 매만지고 있는 동안 피땀 흘리며 산야를 달린 혈족 모두의.
그러므로 내가 노래를 부르는 것이나 네가 그림을 그리는 것이나 그것은 모두 혈족 전체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힘 있고 많이 가진 자를 위해 부르는 노래는 진정한 노래가 아니고 그들의 욕망을 표상하거나 주거를 장식해 주는 그림 또한 진정한 그림일 수 없어. 우리는 저 천상의 기억을 ― 아니 우리의 예지가 닿는 한의 가장 완성된 세계의 이상을 혈족 모두를 위해 간직해야 하며, 우리의 영감에 와 닿는 불길한 징후는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것을 경고해 주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 약속이며, 자기들의 시선은 항시 먹이를 찾아 지상에 박혀 있으면서도 우리로 하여금 저 먼 하늘나라와 그 희미한 기억에 시선을 줄 수 있게 보살펴 준 혈족들에 대한 보답이다. 그런데 너의 무지는 어겨서는 안 될 그 약속을 어겨 버렸다…….”
숨이 가쁜 듯 거기서 말을 멈춘 ‘큰 목소리’는 잠시 그를 찬찬히 살폈다
“거기다가 네가 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더욱 유감이다. 하지만 어쨌든 너는 나의 동료다. 나의 예감을 믿어 다오. 우리가 힘써 불길한 변혁을 막지 못한다면 우리들 대부분은 저 평원 지방에 있는 노예의 무리보다 더욱 비참하게 되리라는 것, 썩은 고기 더미 옆에서 굶주리게 되고, 털가죽 더미 곁에서 추워 떨게 되리라는 것…….”
그리고 다시 ‘큰 목소리’는 결연한 어조로 덧붙였다.
“나는 내일부터 이 동굴에서 내려가겠다. 우리의 동굴은 혈족들로부터 너무 멀고 일상(日常)은 유리되어 있다. 여기서는 그들의 변화를 감지할 길이 없고 ‘뱀눈’과 그 패거리가 꾸미는 음모의 진전도 파악할 길이 없다. 혈족들을 경고하고 설득할 길도. 이제 나는 당분간 그들 속에서 행동하겠다. 가서 끊임없이 경고하고 설득하겠다. 음모는 폭로하고 기도는 분쇄하겠다…….”
그로부터 ‘큰 목소리’는 정말로 하루의 대부분을 동굴 밖에서 보냈다. 어쩌다 대낮에 돌아올 때가 있어도 그것은 그사이에 모은 자신의 패거리들과 은밀한 회합을 하기 위해서일 뿐이었다.
의외로 ‘큰 목쏘리’에게 호응하는 혈족들은 많았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나이가 든 용사들이었고, 젊고 팔팔한 용사는 몇 되지 않았다. 늙은 용사들은 대개 사제자(司祭者)에 대한 신뢰와 존경 때문에 ‘큰 목소리’를 따르는 것 같았다. 거기 비해 젊은이들은 한결같이 ‘뱀눈’에 대한 사적인 적개심과 원한으로 모여들었다.
그 핵심이 ‘붉은 노을’이었다. 그는 실질적으로는 혈족의 으뜸가는 용사였다. 그의 창 솜씨는 오십 보 밖에서도 정확하게 목표하는 사냥감의 심장을 꿰뚫을 수 있었고, 빼어난 힘은 맨손으로 수사슴의 목을 비틀 만했다. 그러나 어찌 된 셈인지 실제 사냥에서 세우는 공은 언제나 보잘것없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붉은 노을’이 겪는 그런 불운은 자기의 패거리에 들기를 거부한 데 대한 ‘뱀눈’이 주도하는 조직적인 보복이라는 것이었다. 타고난 사냥꾼인 ‘붉은 노을'은 ‘뱀눈’과 그 패거리들에 의해 조작되는 사냥감이나 전리품의 분배를 본능적으로 혐오했다. 그리고 그런 사정은 ‘큰 목소리’를 따라 그 동굴에 모인 젊은 용사들의 대부분에게도 같았다.
어떻든 ‘큰 목소리’의 패거리는 날이 갈수록 늘어 갔다. 어떤 때는 절반 가까운 혈족의 용사들이 그 동굴에 모여 웅성거릴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양적인 증가에도 불구하고 그는 왠지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이 불안하였다. 특히 그런 불안은 언젠가 그들이 회합하고 있는 동굴 부근에서 차갑게 웃으며 지나가는 ‘뱀눈’을 발견한 후부터 더욱 심했다. ‘뱀눈’과 그 패거리도 분명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소리도 없고 자취도 남기지 않았다.
과연 그런 불안은 맞아들어 갔다. 어느 날 또 밖에 나갔던 ‘큰 목소리’가 전에 없이 침통한 얼굴로 일찍 돌아왔다.
“‘붉은 노을’이 죽었어…… 어이없이 곰의 앞발에 당했어…… 창 한번 못 쓰고……. 그런데 ― 이상한 것은 죽은 그의 몸이 시퍼렇게 부어오르는 거야. 독사에 물린 것처럼. 이상해…….”
그러나 그는 문득 불길한 상상이라도 쫓듯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우리의 세력은 변함이 없어. 나의 경고와 설득은 점점 혈족의 가슴 깊이 스며들고 있어. 내일은 아마 더 많은 사람들이 이리로 올 거야.
거기다가 나는 그들에게 약속했어. 이리로 오는 자에게는 ‘뱀눈’의 것과 똑같은 창날을 주겠다고. 나는 그 질기고 단단한 돌이 있는 곳을 찾아냈거든. 나는 또 약속했어.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이 살갗을 찢을 수 없도록 그들을 축복해 줄 것을. ‘뱀눈’이 부당하게 빼돌린 고기를 돌소금이 깔린 굴 속에 처박아 두었다가 필요할 때 자기 패거리에게 나누어 주듯.
그리고 또 약속했어. ‘뱀눈’의 음모만 막아 내면 하늘과 위대한 정령의 이름으로 공이 있는 자들에게 특별한 명예와 이익을 주기로. 이 역시도 ‘뱀눈’에게 배운 방법이다.
두고 봐. 나는 반드시 그들의 기도를 깨뜨릴 거야.”
그러나 ‘큰 목소리’의 장담에도 불구하고 이튿날 그 동굴에 모인 사람은 오히려 줄어 있었다. ‘큰 목소리’의 열변으로 간신히 가라앉기는 했지만, 모인 그들에게도 뚜렷한 동요의 기색이 엇보였다. 그리고 그날을 시작으로 ‘큰 목소리’의 세력은 눈에 띄게 줄어 갔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것은 오직 ‘큰 목소리’의 광기와 집념뿐이었다
그런데 그때껏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뱀눈’이 불쑥 그들의 동굴에 나타난 것은 ‘큰 목소리’가 거사일로 잡고 있는 ‘숲의 축제’를 하루 앞둔 날이었다. 이례적으로. 혼자였다. 방금 몇 남지 않은 자신의 패거리와 맥 빠진 회합을 마치고 홀로 있던 ‘큰 목소리’는 ‘뱀눈’을 보자마자 성난 멧돼지처럼 덮쳐 갔다. ‘뱀눈’은 그런 ‘큰 목소리’를 가볍게 동굴 밖에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허리를 다쳤는지 쓰러져 신음하는 그를 차갑게 노려보고 말했다.
“네가 한 어리석고 천박한 짓은 모두 알고 있다. 어리석다는 것은 그동안 네가 한 번도 나의 눈과 귀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이다. 천박하다는 것은 우리들보다 높이 있는 이 동굴에서 고고하게 하늘이나 쳐다보아야 할 사제자가 평지로 내려와서 평범한 우리보다 더 비열한 음모를 꾸몄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은 끝났다. 너는 실패했고 홀로 남았다. 방금 이 동굴을 나간 그 친구들도 사실은 모두 나의 눈과 귀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손끝 하나로 너를 죽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은 네게 본능적인 신뢰와 존경을 품고 있는 혈족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네게 기회를 주겠다.
어떻게 할 테냐? ‘붉은 노을’처럼 비참하게 그러나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이 죽겠느냐? 아니면 내가 주는 것으로 풍요와 안락을 누리며 협조하겠느냐?”
그런 ‘뱀눈’의 목소리는 섬뜩하리만큼 차갑게 가라앉은 것이었다. 잠시 ‘큰 목소리’의 얼굴에 고통과 굴욕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나 뒤이어 나온 대답은 뜻밖의 것이었다.
“그래, 졌다. 내가 어리석었음을 시인한다. 네게 협조하마. 대신 약속은 꼭 지켜라.”
역시 차갑고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그런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그는 안도와 함께 이상한 허전함을 느꼈다. 너무도 쉽게 꺾여 버린 ‘큰 목소리’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튿날 의식의 차례가 ‘큰 목소리’에게 돌아갔을 때 그도 ‘뱀눈’도 속았음을 깨달았다. ‘큰 목소리’는 여전히 자기의 주장을 하늘의 목소리에 가탁하여 되풀이했다. 그리고 그 마지막엔 더욱 격렬하게 덧붙였다.
“당신들의 양보와 포기는 저자들의 음모를 보다 용이하게 만들고 그 패거리의 힘을 더하고 있다. 하지만 언제나 기억하라. 내주기는 쉽지만 되찾기는 어렵다는 것을.
더구나 저자의 손에는 우리들의 진정한 용사 ‘붉은 노을’의 피가 묻어 있다. 그가 그렇게도 허망하게 죽어 간 것은 저자가 은밀하게 찔러 넣은 뱀독 때문이었다. 나는 이제 하늘의 뜻으로 저자와 그 패거리에게서 ‘붉은 노을’의 피값을 받아 낼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큰 목소리’의 그런 절규는 곧 ‘뱀눈’의 패거리들이 지르는 성난 고함 소리와 욕설로 중단돼 버렸다. 그들은 뒤이어 저마다 무기를 뽑아 들고 ‘큰 목소리’를 둘러쌌다. 여전히 ‘큰 목소리’는 이미 전달되지 않은 자신의 절규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뱀눈’의 말대로 ‘큰 목소리’를 위해 달려 나가는 용사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불만스레 웅성거리는 것은 한쪽으로 밀려나 있던 노인들과 여자들 쪽이었다.
끝내 ‘큰 목소리’의 절규는 둘러싼 무리들의 가해 때문에 무거운 신음 소리로 변했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다들 공포와 경악으로 망연히 보고만 있었다. 그때였다. 냉정한 눈으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뱀눈’이 천천히 자기의 창을 집으며 일어났다.
“멈추어라. 그리고 모두 물러나라.”
우렁차고 당당한 목소리였다. 둘러쌌던 사람의 막이 열리자 드러난 ‘큰 목소리’의 몸에서는 이미 군데군데 피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뱀눈’은 천천히 그리로 다가갔다. 그리고 날카로운 창끝으로 ‘큰 목소리’를 찌를 듯이 겨누었다가 이내 거두었다.
“너는 하늘의 목소리를 멋대로 왜곡시켰고, 우리 혈족을 이간시켰으며 사냥에서 쓰러진 용사의 피를 내게 뿌려 모함했다. 내가 지금 너를 찌르지 않는 것은 형제의 피를 나의 창날에 묻히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일어나 당장 떠나거라. 그리고 다시는 너의 사악하고 비열한 모습을 이 숲과 우리들 앞에 나타내지 마라. 네가 다시 내 눈앞에 서게 되면 이 창이 먼저 너를 맞으리라. 네가 다시 이 땅에 나타나면 숲의 정령은 번갯불로 너를 태우리라.”
그러나 ‘큰 목소리’는 상처가 심한지 숨만 거칠게 헐떡이고 있었다. ‘뱀눈’은 다시 무거운 침묵 속에 둘러서 있는 혈족들을 향해 엄숙하게 말했다.
“누구든지 나의 결정에 반대하는 자가 있으면 서슴없이 말해 주기 바란다. 저자의 거짓을 믿는 자. 내가 받은 모함을 의심하는 자도.”
여전히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어느새 ‘뱀눈’의 주위를 저항할 수 없는 위엄이 무슨 찬란한 빛처럼 감돌고 있었다. ‘큰 목소리’를 위해 혼신의 힘으로 짜낸 그의 용기도 ‘뱀눈’의 그런 위엄 앞에서 어이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 혈족들의 동태를 하나하나 확인하듯 살피던 ‘뱀눈’은 다시 새로운 제의를 했다. 전보다 더 자신 있고 힘 실린 어조였다.
“다시는 이런 위험 있고 거짓에 찬 사제자를 갖는 일이 없도록 나는 당신들에게 제의한다. 사제자를 결정하는 권한을 늙은 어머니(‘위대한 어머니’)로부터 회수하도록 하자. 보다 사려 깊고 현명한 판단을 가진 사람에게 맡기려는 것이다. 하늘의 뜻을 자의로 조작하지 않고 우리에게 보다 살기 좋은 앞날을 제시하는 사제자를 얻기 위해서이다. 어떤가? 여러분의 뜻은 어떠한가?”
그러자 그의 패거리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떠들었다.
“당신의 생각이 옳다. 그리고 그 적임자는 바로 당신이다. 당신을 빼놓고는 아무도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한다.”
그런 자기 패거리의 외침을 들은 ‘뱀눈’은 다시 그 차갑고 깜박이지 않는 눈으로 혈족들을 찬찬히 쏘아보았다. 그러자 그의 눈길을 받은 곳부터 차례대로 짜낸 듯한 찬성의 외침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제야 ‘뱀눈’의 얼굴에 희미한 만족의 표정 이 떠올랐다.
“좋다. 나는 여러분의 신뢰를 진심으로 감사하며 받아들인다.”
그리고 잠깐 말을 중단한 ‘뱀분은 혈족들의 환호가 끝나기를 기다려 다시 계속했다.
“나는 바로 이 자리에서 ‘얘기꾼’을 새로운 사제자로 추천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그의 귀가 하늘과 위대한 정령들의 소리를 들을만하다는 걸 알고 있다. 그의 시선도 우리와 함께 땅에 머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언제나 저 높은 곳을 웅시하고 있었다. 얼핏 경박스러워 보이는 익살과 재치도 ― 나는 사제자의 한 중요한 품성임을 확신한다. 오의(奧義)와 신성의 가식으로 하늘의 뜻을 애매와 추상 속에 방치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 그보다 더 나은 사제자를 추천할 수 있는가? 보다 훌륭한 우리들의 목소리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이번에는 보다 빠르고 광범위한 동의가 여기저기서 환성과 함께 터져 나왔다. 그제야 ‘뱀눈’은 다시 ‘큰 목소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사이 ‘큰 목소리’는 일어나 있었다. 그러나 몸을 지탱하는 것이 몹시 힘들어 보였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는가? 이곳에 머물고 싶다는 뻔뻔스러운 희망 외에는 무엇이든 허락한다.”
그러자 ‘큰 목소리’는 금방 불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눈길로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더니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것은 고독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기꺼이 그것을 향해 떠난다. 왜냐하면 앞으로 당신들이 맞을 것은 그 고독보다도 훨씬 고통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당신들 자신의 나약한 비겁으로 사들인 압제이다. 물론 당장은 아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날은 온다. 이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당신들에게 전하는 하늘의 목소리 다.
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것을 당신들에게 깨우쳐 준다. 그날이 오거든 반드시 기억하라. 그와 그의 패거리가 아무리 강하고 크게 보이더라도, 당신들의 동의 위에 서 있지 않는 한 그들이 잡고 있는 것은 반 토막의 칼에 불과하다. 나머지 반 토막은 언제나 당신들 손에 있다. 그러면 잘 있거라, 형제들이여. 그래도 나는 자유인으로 떠난다.”
그리고 결연히 돌아선 ‘큰 목소리’는 비틀거리며 숲 속으로 사라졌다 갑자기 숙연해진 분위기 속에서 몇몇 여인만이 소리 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그의 거짓 예언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자유란 우리가 종종 속기 쉬운 환상에 불과하다. 우리가 안전한 나무에서 내려와 함께 모여 살기 시작한 이래 진정한 자유란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은 언제나 열망의 형태로만 존재했다 왜냐하면 모여 산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어떤 질서와 규율 밑에 있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우리가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착각하게 된 것은 그 질서와 규율이 동물적인 혈연에 근거해 있었다는 것과 은밀하고 교묘한 통치 기술 때문이었다. 당신들은 그 환상에 집착하기 보단 오히려 그것들을 혐오해야 한다…….”
언제부터 준비해 온 것인지 ‘얘기꾼’의 목소리는 사제자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혈족들은 어리둥절해서 그 새로운 사제자를 바라보았다.
“― 따라서 나는 당신들의 사제자로서 최초로 하늘의 목소리를 전한다. 방금 그 목소리는 내 심중에서 속삭였다. 이제 그 낡고 불합리한 제도와 기술은 타파되어야 한다고. 우리 혈족은 보다 정연하고 조리 있게 조직되어야 하며, 경험과 직관에만 맡겨졌던 그 기술도 객관적으로 제도화해야 한다고. 그 모든 것 위에는 가장 용기있고 슬기로운 ‘동배(同輩) 중의 으뜸’이 있어 우리를 대신해 판단하고 결정해야 한다고. 그것이 우리를 강대하게 만드는 지름길이며 풍요와 안락을 확보하게 되는 최선의 수단이라고.
그리고 ― 그 목소리는 또한 나로 하여금 당신들에게 묻기를 요구한다. 그 ‘동배 중의 으뜸’으로 여기 선 이 ‘위대한 자(뱀눈)’가 어떨까고.”
그러나 ‘뱀눈’의 패거리를 중심으로 한 동의의 함성이 무슨 큰 파문처럼 혈족 사이를 퍼져 나갔다. 몇몇은 ‘뱀눈’ 앞으로. 달려 나와 위대한 정령에게나 합당한 숭배와 복종의 자세를 취했다.
“그러면 하늘의 뜻과 당신들의 희망이 일치하였음을 나는 한 사제자로서 확인한다. 이제부터는 아무도 그를 ‘동배 중의 으뜸’ 이상 다른 이름으로 불러서는 안 된다. 누구도 그의 결정을 거부할 수 없고 그의 판단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결국 ‘뱀눈’과 그의 패거리들은 ‘큰 목소리’가 그들을 타도하려고 기다리던 그날의 축제에서 오히려 모든 것을 뜻대로 이루었다. 그리고 그들의 승리감은 묘하게도 점점 다른 혈족들에게도 전파되어 그날의 축제는 그 어느 때보다 열띠고 흥겨운 것이 되어 갔다.
그런데 반쯤 불에 그을린 ‘큰 목소리’의 시체가 그들 혈족 앞으로 운반돼 온 것은 그 이튿날 아침이었다. 아직 축제 기분으로 덜 깨어난 사람들 앞에서 새로운 사제자는 전임자의 죽음을 이렇게 선포했다.
“하늘은 자기의 목소리를 왜곡한 자에게 징벌을 결정하셨다. 위대한 조상들의 영혼들이 우리를 이간시키고 분열시키려는 그에게 번갯불을 날라 주었다. 그는 벼락을 맞아 죽었다……. 오오, 사제된 자 모름지기 경계할진저.”
그러나 그는 보았다. 벼락 맞은 고목이나 짐승들과는 달리 ‘큰 목소리’의 시체에는 여기저기 재와 검댕이 묻어 있었다.
그는 그 끔찍한 추억으로. 몸서리쳤다. 그러자 그 모든 사태를 망연히 방관해 버린 자신의 무력과 비굴이 새삼스러운 회한으로 그를 짓눌렀다. 어쩐지 자기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 무슨 커다란 죄처럼 느껴졌다.
그는 스스로를 학대하려는 것같이 무겁고 고통스러운 몸을 일으켰다.
굵고 긴 관솔가지에 불을 붙이고 안료를 챙겨 든 그는 그리다 만 들소 밑의 돌출한 바위로 올라갔다.
소는 검고 선명한 선으로 조용히 서 있었다. 그 정지의 자세가 다시 한 번 마음에 걸렸으나 그는 고집스레 채색을 시작했다. 어쩌면 이 그림조차 완성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갑자기 그를 재촉했기 때문이다.
황색 기조(基調)의 초벌 칠이 끝나고 다시 붉은색을 입힐 무렵 관솔가지는 다 타 버렸다. 그는 바닥으로 내려가 관솔가지에 불을 붙였지만 마음만 조급할 뿐 후들거려 다시 올라갈 수가 없었다. 그는 맥없이 불가에 주저앉았다. 원기가 회복되기를 기다리며 그는 ‘큰 목소리’가 사라진 후의 쓸쓸한 세월을 더듬었다.
그 뒤 그들의 혈족은 많이 변했다. 자연적인 생활 집단이었던 그들은 점차 전투조직으로 변해 갔다. 그 조직을 이루는 원리는 오직 전투에서의 능률과 효과였다. 혈연적인 배분(配分)이나 연장(年長)에 대한 존경 같은 이전의 위계는 철저하게 부인되었다. 그리고 그 정점에는 이제는 ‘존엄한 분으로 승격된 ‘뱀눈’과 그 패거리가 무겁게 얹혀져 있었다.
그리고 조직을 개혁한 ‘뱀눈’이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은 그 산록에 흩어져 살고 있는 동계 혈족의 통합이었다. 그리하여 ‘큰 목소리’가 죽고 채 두 해도 지나지 않아 본시 전체가 150명 남짓하던 그들 혈족은 전사만 수백 명을 거느린 씨족으로 성장했다.
각자의 소유는 사유(私有)로 승인되어 엄격하게 보호되었다. 그리고 그런 체제의 비호 아래 원래 평등했던 혈족은 탐욕스레 사유를 늘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큰 목소리’가 우려하던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뱀눈’이나 그의 막료들은 아직도 근원적인 형제 감정을 혈족들에게 품고 있어 터무니없는 횡포나 압제를 가하는 일은 없었다. 식량이나 피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변혁 초기에는 분업화하고 조직된 노동이 가져온 생산의 확대가 불필요한 착취를 막아 주었고 후기에는 강대한 힘을 배경으로 한 약탈이 그들을 결핍에서 구해 주었다.
오히려 ‘뱀눈’의 약속대로 그들은 강대해지고 풍요해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본능적으로 그 모든 발전이 결국은 ‘큰 목소리’의 예언을 실현해 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음을 감지하였다. 실제로도 그들 혈족은 많은 피해를 입고 있었다.
그 두 해의 정복과 약탈을 위한 전투에서 죽거나 상한 용사의 수는 사냥에서 생기는 손실의 몇 배가 넘었다. 그것들이 쉽게 그들 혈족들의 의식에 표면화되지 않은 것은 다만 죽은 자의 침묵과 살아 있는 자의 탐욕 때문이었다. 더 많은 전리품을 차지하게 됨으로써 산 자는 곧잘 죽은 형제들의 고통을 잊어버렸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큰 목소리’의 예언을 생생히 기억하게 한 것은 그 몇 해 동안에 엄청나게 변해 버린 여자들의 운명이었다. 권력의 획득과 소유의 축적에 보다 유리한 신체적·정신적 조건에 있던 남자들은 점차 여자들도 소유의 대상으로 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더욱 촉진한 것은 부계(父系)의 확정에 대한 요구였다. 자기들이 애써 획득한 지위나 재산을 죽음과 함께 내놓아야 한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남자들은 한 여자를 자기의 배타적인 지배 관리 아래 둠으로써 자기의 후계자를 혈통으로 확보하고 싶어 했다.
그의 일신에 닥친 변화는 음울한 것이었다. 그는 이미 ‘신비의 동굴’에 격리된 고고한 사제자는 아니었다. 그 동굴은 폐쇄되고 그는 ‘뱀눈’의 한 막료나 지배 장치처럼 이동하는 혈족 가운데서 봉사하게 되었다. ‘뱀눈’은 대체로 약속에 충실한 편이었다. 그가 협조를 하는 한 ‘뱀눈’은 그의 권위를 확보해 주었고, 응분의 대가도 지불했다. 그러나 그런 외형적인 우대는 본질적으로 ‘손의 동굴’에서 받는 고기나 다를 바 없었다. 그는 무엇이든 ‘뱀눈’의 의사대로 그렸고, 때로는 개인적으로 그의 움막 벽이나 기둥에 장식을 그릴 만큼 전락하기도 했다.
거기다가 그에게도 여자가 생겼다. 그는 ‘초원의 꽃’을 열렬히 원했으나 그녀는 일찍부터 한 아름다운 소녀와 함께 ‘뱀눈’의 소유로 확정되어, 다시는 아내로 기대할 수 없는 여자가 되어 버렸다. 결국 그에게 돌아온 것은 그때까지도 그의 주위를 맴돌고 있던 ‘산나리’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런 그녀와 함께하는 삭막하고 지루한 일상(日常)은 여러 평범한 혈족들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참으로 쓸쓸한 세월이었다…….
그런데 ― ‘뱀눈’이 ‘존엄한 분’의 칭호를 받은 후 다섯 번째의 봄이 오면서부터 그의 씨족이 헤쳐 가야 할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무리한 통합으로 급격하게 불어난 씨족을 불확실한 사냥과 일시적인 약탈로만 유지할 수 없게 된 ‘뱀눈’이 지금껏 의지해 오던 산을 버리고 초원으로 진출할 것을 결정한 탓이었다. 하기야 그것은 어쩌면 ‘뱀눈’과 그 패거리가 일찍부터 품어 왔던 구상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초원 진출은 예상처럼 용이하지 못했다. 전과는 달리 그곳의 풀과 샘을 차지하고 있던 유목민들이 강력하게 저항해 왔기 때문이었다. 거기서 연일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지고 수많은 씨족의 전사들이 죽어 갔다. 나중에는 전사들이 부족해 이미 무기를 놓은 늙은이들이 동원되거나 소년들이 성년식을 앞당겨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거기다가 젊고 힘 있는 남자들이 모두 장기간의 전투에 매달리게 되자 씨족의 모든 생산은 여자들과 남아 있는 이들의 몫이 되었다. 그들은 일하고 또 일했다. 그러나 전사들을 충분히 먹일 식량조차 마련할 수 없었다. 굶주림과 피로는 비전투 요원의 보편적인 고통이었다.
그런데도 ‘뱀눈’과 그의 패거리는 기왕에 누려 온 풍요와 안락을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그것은 모든 씨족원들의 결핍을 더욱 가중시켰다. 그 모든 것을 보게 된 그의 가슴은 서서히 불타올랐다. 그제야 그는 지나친 격앙으로만 들어 왔던 ‘큰 목소리’의 외침이 뚜렷이 이해되었다.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자기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큰 목소리’의 절규를 자기 내부에서 들었다.
그러나 한번 행동에 착수하자 그는 자신이 원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깨달았다. 그는 틈나는 대로 전사들을 모아 놓고 그들이 가졌던 자유의 기억을 일깨웠디. 아름답고 풍요하던, 그러나 버리고 만 산록과 그곳의 만족스럽던 삶을 상기시켰다. 그렇지만 그들은 이미 옛날의 그들이 아니었디. ‘뱀눈’의 약속과 선전에, 그리고 반복되는 ‘얘기꾼’의 교훈에 완전히 옛 기억을 상실한 뒤였다 그들은 서슴없이 그가 일깨우는 옛날을 야만이라고 불렀고 ‘뱀눈’과 그 패거리가 조직한 지금의 제도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나섰다 그리고 돌아서서는 그가 한 이상한 행동을 뱀눈에게 낱낱이 고해바쳤다.
“다시 말하지만 자유란 환상이다. 우리들 중 극소수에게 열망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오히려 저들 다수를 지배하는 것은 저열한 욕망이야. 어떤 강력한 힘에 복종하고 지배받으려는 욕망. 아마도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들의 무력과 우둔을 잊고, 그 강력한 대상과 일체감을 느끼려는 것일 게야.”
그것은 언젠가 그가 또 젊은 용사들을 모아 놓고 자기의 주장을 펴고 있을 때 어디선가 듣고 달려온 ‘얘기꾼’이 그를 설득하면서 한 말이었다. 동료로서 함께 행동해 온 그 몇 년의 세월은 그들을 상당히 가깝게 맺어 놓고 있었다. ‘얘기꾼’은 그가 ‘뱀눈’으로부터 받을 보복이 두려워 그를 말리려고 달려온 길이었다.
“우리가 남보다 좀 큰 목소리를 가졌다고 해서, 혹은 남보다 더 선과 색을 잘 다룰 수 있다 해서 그게 바로 우리에게 무슨 특별한 의무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야. 물론 우리는 남보다 더 밝은 눈과 예민한 귀를 가졌을지 모르지. 그러나 그것으로 그뿐이야. 우리가 무슨 노래를 부르고 무슨 그림을 그리든 세월(역사)은 제 갈 길을 갈 뿐이야. 우리는 그저 변혁을 느낄 수 있을 뿐이지. 그것을 일으키거나 막을 힘까지는 없어. 낡은 신념에 매달려서 이미 밀려오는 것을 막으려 들거나 아직도 멀리 있는 것을 앞당기려고 서두르는 것은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일이야. 그건 이미 진실의 문제가 아니라 능력의 문제야.
결국 우리도 씨족의 한 평범한 구성원에 지나지 않아. 우리가 다른 구성원과 다른 것은 그들이 자기의 창과 칼로 먹이를 얻는 데 비해 우리는 노래나 그림으로 우리의 먹 이를 얻는 것뿐이야…….”
어느 정도 원기를 회복하자 그는 다시 그리던 소에게 다가섰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나의 소를 잡으리라.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 숨 쉬었다는 것의 증거를 남기리라. 그는 희미한 관솔불에 의지해 자기의 소에게 필생의 기력을 쏟았다 소는 점점 실물과 흡사하게 변해 갔다. 그러나 그가 아직 완성의 희열을 맛보기 전에 기력이 먼저 소모되고 말았다 갑작스럽게 꺼져 버린 불빛과 함께 그는 동굴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듯 굴러떨어졌다.
다시 일어나야겠다는 강렬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과 마음은 무거운 돌덩이처럼 깊은 무의식의 수렁 속에 빠져들었다.
…… ‘뱀눈’의 호화로운 천막 안이었다. 그는 한 모퉁이에서 ‘초원의 꽃’을 분장시키고 있었다. 이미 서른에 가깝지만 그녀의 피부는 씨족의 그 어떤 여인들보다 더 고왔다. 얼굴의 은은한 잔주름도 오히려 그녀의 아름다움에 어떤 완숙미를 더하고 있었다.
그는 먼저 선명하긴 하지만 약간 무질서한 그녀의 눈썹에 곱고 가지런한 선을 준다. 그리고 눈두덩에도 잘게 부순 공작석(孔雀石) 가루를 발라 엷은 녹색의 아름다운 그늘을 만든다. 그녀의 붉은 입술은 양 기름에 갠 주토(朱土)로 더욱 붉어진다.
그는 시종 음울한 침묵 속에 그 일련의 동작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그런 음울은 분장사로 전락한 자신의 처지 때문이 아니라, 이제 그 밤이 지나면 영원히 씨족을 떠날 ‘초원의 꽃’ 때문이었다.
‘뱀눈’도 마침내 싸움에 지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유목민 중 가장 강력한 부족과 화평을 맺고 그 정표로 아름다운 ‘초원의 꽃’을 그들 부족장에게 보내려는 참이었다. 그 부족장과 그의 전사들은 벌써 얼마 전부터 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당자인 ‘초원의 꽃’은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그런 화장을 즐거워하는 것처럼 이것저것 지시를 했다. 어쩌면 그녀는 자기의 운명을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는 문득 동작을 멈추고 음울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초원의 꽃’, 당신은 이제 당신이 가게 될 곳을 알고 있소?”
그러나 그녀는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대답했다.
“네, ‘뱀눈’에게 들었어요.”
무감동한 목소리였다.
“그래, 그런데도 아무렇지 않단 말이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마침 그 천막에는 그들 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제야 뜻밖이라는 듯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래 무슨 가축이나 물건처럼 생판 낯선 사람에게 주어져도 아무렇지 않단 말이오? 발정 난 암캐처럼 당신은 아무하고 어울려도 즐겁소?”
그러자 그녀가 희미하게 웃었다.
“딱한 사람, 그럼 내가 꼭 ‘뱀눈’하고만 잠자리를 같이해야 한단 말이에요?”
“그렇지만 당신은 이미 10년씩 이나…….”
“그래서 어떻다는 건가요? 지난 10년을 함께 살았으니 앞으로의 10년도 그와 함께 보내야 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녀는 잠시 아연해 있는 그를 보며 침착하게 말했다.
“사람은 현란하게 꾸며진 말을 벗기면 모두 저마다의 소를 좇고 있을 뿐이에요. ‘뱀눈’은 권력의 소를 좇고, ‘달무리’는 그 ‘뱀눈’이 나누어 주는 부귀의 소를 좇는 식으로……. 그런데 제가 좇는 소가 무엇인지 아세요? 그것은 풍요와 안락의 소예요. 그리고 ‘뱀눈’을 좋아한 것은 그가 바로 그것들을 줄 수 있기 때문이죠. 이제 ‘뱀눈’ 아닌 사람이 나를 데려간다 하더라도 그가 그런 것들을 줄 수 있다면 또 좋아질 수 있을 거예요. 더구나 그의 부족은 강성하고 그의 가축 떼는 들판을 덮고 있어요. 그런데 내가 무엇 때문에 슬퍼하고 괴로워해야 하죠?”
그 말을 듣자 그는 원인 모를 안도와 함께 전보다 몇 배나 더 깊은 음울에 빠졌다. 그녀는 그런 그를 한동안 적이 보더니 갑자기 다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당신처럼 무엇을 좇는지 얼른 알 수 없는 사람도 있죠. 당신은 그림을 그려 주고 ‘뱀눈’으로부터 고기와 가죽을 얻고 있지만 그게 바로 당신이 좇고 있는 소가 아닌 것은 분명해요. 당신은 무언가 다른 소를 좇고 있는데, 물론 잡을 수만 있다면 그 어면 소보다 훌륭할 테지만 사실 그것은 잡을 수 없는 환상의 소예요.
당신은 당신이 내게 보내 준 그 오랜 애정을 제가 모르고 있는
줄 아세요? 그러나 내게도 당신의 진심이 몇 번이나 가습 저리게 와 닿은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철이 들면서 나는 알았어요. 당신은 나와 다른 소를 좇고 있고, 그 소는 아마 이 세상에선 잡히지 않으리라는 걸. 그래서 당신의 인생은 쓸쓸하고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걸. 내가 당신을 피한 것은 바로 그런 당신의 운명이었어요.
만약 우리가 힘들여 먹이를 구하지 않아도 되고, 애써 이 땅 위의 더위와 추위를 피하지 않아도 된다면, 나도 누구보다도 당신을 나의 짝으로 선택하고 사랑했을 거예요. 그러면 나도 당신처럼 환상을 사랑하고 아름답고 진실한 것만 추구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환상은 반드시 깨어지게 되어있고, 아름다움과 진실도 필경엔 한 토막의 고기보다 못하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아, 가엾은 사람…….”
그녀도 결국은 자신의 감정을 이기지 못한 듯 음울하게 수그린 그의 머리를 껴안고 몇 번이고 그의 이마에 입 맞추었다. 그리고 그의 두 눈 가득 흐르는 희열의 눈물을 조용히 훔쳐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그런 감상에서 깨어났다.
“자, 모두들 기다리겠어요. 이제 그만 나가 보지 않겠어요?”
다시 침착하고 무감동한 목소리였다.
……축제의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초원의 꽃’은 떠나갔지만, 씨족은 평화와 목초지와 가축을 얻었다. 그들은 그것을 기뻐하고 춤추고 노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견딜 수 없이 음울한 마음으로 그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만족하게 웃고 떠드는 ‘뱀눈’과 그의 충실한 부하들. 구릿빛 근육을 자랑하며 춤추는 전사들과 아름다운 여인들. 오 너희들은 너무 즐겁고 행복해 보이는구나. 나도 일찍이 너희들과 같은 소를 좇아야 했다. 그것을 위해 모든 단련과 준비를 게을리하지 말았어야 했다. 저 먼 하늘에 그렇게도 자주 동경의 눈길을 보내지 말았어야 했고, 스러지고 말 아름다움에 그렇게도 무모하게 집착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나 버렸다. 무자비한 시간은 다시 지나간 날들을 되돌려주지 않는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의 쓰라린 상념 사이를 한 줄기 빠르고 예리한 빛처럼 스쳐 가는 목소리가 있었다. 바로 ‘초원의 꽃’이 속살거리던 목소리였다.
“물론 잠을 수만 있다면 당신의 소는 그 어떤 소보다 훌륭할 테지만……”
그렇다면 나의 소는 어떤 것일까. 그녀가 말했듯 내가 ‘뱀눈’에게 봉사하고 얻는 고기는 나의 소가 아니다. 산과 수렵 생활을 떠난 지금 그림이 가졌던 실용으로서의 주술도 의미를 잃었다. 그렇다고 ‘큰 목소리’처럼 낡은 이념의 희생으로 쓰러져야 할 것인가 공허한 하늘의 목소리에 의지해서 강력한 인간의 조직과 그것이 가진 힘에 부딪쳐서 깨어져야 할 것인가. 언제 싹틀지 모르는 믿음과 희망의 씨앗을 뿌린 것만으로 자신을 저 끝 모를 죽음과 허무의 심연에 던져 버려야 할 것인가.
그의 상념이 거기에 이르자 그는 다시 한 번 암담한 절망에 빠졌다. 혹 나는 너무 일찍 태어났거나 너무 늦게 이 땅에 온 것이 아닐까. 나의 소는 이 땅에는 없는 것이 아닐까…….
그리하여 그 축제의 광장을 빠져나온 그가 전혀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은 그 새벽의 으스름 속이었다. 지금까지 그가 추구해 온 것은 ‘그림 너머’의 혹은 ‘그림으로써’ 얻어지는 어떤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림은 하나의 종속적 가치로서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가 새로운 추구의 대상으로 찾아낸 것은 그림 그 자체, 표상된 선과 색의 완전성이 가지는 가치였다.
그러자 갑자기 떠나온 산록과 ‘신비의 동굴’이 미칠 듯이 그리워졌다. 내가 찾아낸 새로운 가치는 지금 이 땅에서는 시인될 수 없다. 나는 그곳으로 돌아가 나의 선과 색으로 나만의 소를 잠으리라. 그는 이상한 열정으로 몸을 떨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자기의 초라한 천막으로 돌아갔다 그 긴 여행에 필요한 물건들을 챙기기 위해서였다.
그의 초라한 천막 안에는 ‘산나리’와 그 사이에 태어난 두 아이가 평화롭게 자고 있었다. 몇 가지 도구를 챙긴 그는 잠시 불현듯한 애정과 연민으로 그런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잘 있거라, 가엾은 것들. 그는 특히 잠든 두 아들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내가 떠남으로 너희는 헐벗고 굶주리며 자라야 하겠지. 권력도 소유도 물려받지 못한 너희들은 무엇이든 스스로 고통스럽게 이룩해야 하겠지. 그러나 나는 떠나지 않을 수 없다. 아비에겐 잡아야 할 아비의 소가 있다. 이곳에서는 결코 잡을 수 없는…… 더구나 내가 이곳에 남음으로써 너희들의 나쁜 본보기가 될 수는 없다. 이 역할과 지위를 물려주어 외롭고 고통스러웠던 생을 다시 반복시킬 수는.
거기서 그는 결연히 일어섰다. 그런데 막 깊이 잠든 그들의 주거지를 빠져나올 무렵, 그는 다급한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새벽안개를 헤치고 달려온 것은 뜻밖에도 ‘산나리’였다. 그녀의 손에는 조그만 보퉁이 하나가 들려 있었다.
“이것 가지고 떠나세요. 말린 고기와 과일이에요.”
그는 서늘한 감동을 느꼈다. 알고 있었구나…….
“나는…… 나의 소를…… 잡으러 떠나오…….”
그는 감동으로 망연해져 더듬거렸다. 그 앞뒤 없는 말을, 그러나 ‘산나리’는 완벽하게 이해한 것 같았다
“네, 떠나셔야죠. 하지만 ― 꼭 돌아오셔야 해요.”
그런 ‘산나리’는 울고 있었다. 새벽빛에 희게 번질거리는 그녀의 눈물 줄기를 보며 그는 심한 동요를 느꼈다. 갑자기 그녀의 품 안이 세상 어느 곳보다도 따뜻하고 아늑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모질게 자신을 채찍질했다.
“물론 돌아오고말고.”
그는 천천히 산나리에게 다가가 그녀를 힘차게 끌어안았다. 하지만 설령 그가 돌아오려 한들 그때까지 씨족이 이곳에 머물러 있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미안하오.”
그는 포옹을 풀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과 짝지어지면서부터 줄곧 불안해하던 일이었어요. 하지만 그만큼 준비도 되어 있어요. 기억나세요? 옛적 우리가 그곳에 머물 때의 관례 ― 용사가 잡은 소는 그 잠자리의 상대인 여자의 것이기도 했죠. 당신이 잡은 소는 곧 나의 소예요. 부디 ― 돌아오기만 하세요.”
그리고 먼저 돌아선 것은 ‘산나리’였다. 그녀는 보퉁이를 넘기자마자 뛰듯이 새벽안개 속으로 사라져 갔다. 오, 그 뒤 이 동굴로 돌아오는 그 길은 어찌 그리도 멀고 험하던지…….
그래, 소를 잡아야지. 나의 선과 색은 아직도 완전한 소를 잡지 못하고 있어. 그 등허리에 내리쬐는 부드러운 햇빛도 잠지 못했고, 털끝을 불어 가는 미풍도 잡지 못했어. 따뜻한 콧김과 더 깊은 곳에서 숨 쉬고 있는 싱싱한 생명력도. 그는 다시 관솔가지를 찾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마음뿐이었다. 그 시각 그의 병들고 지친 육신은 꺼져 가는 생명의 불꽃을 지켜보며 가늘게 경련하고 있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러갔다. 금세기 초 스페인의 산탄텔 주(州)에 사는 한 젊은 기사는 사냥꾼이 발견한 부근의 한 동굴에 깊은 흥미와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첫 번째 답사에서 그는 별다른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소학생들의 서투른 솜씨 같은 그림 몇 개를 동굴 벽에서 보았을 뿐이었다. 그래서 두 번째는 좀 가벼운 기분으로 어린 딸을 데리고 갔다. 그런데 그들이 동굴 입구에서 얼마 들어가지 않았을 때였다. 그는 갑자기 촛불을 들고 뒤따라오던 어린 딸이 소리치는 것을 들었다.
“아버지, 여기 소가 있어요.”
그녀가 가리키는 곳은 측면 동실(洞室)의 넓은 천장이었다.
(1979년)
* 알타미라 동굴의 그림에 대해 사학자(史學者)들은 그것이 후기 마그달레니언기〈期) 이전의 구석기 문화라고 보고 있다. 여기서는 권력과 사유(私有)의 발생을 보기 위해 신석기 문화로 꾸몄다.
-끝-
2016년 11월 22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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