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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찔레꽃ME 원문보기 글쓴이: 발레리아
책 읽는 것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10권의 책을 단숨에 읽었다는 것이 참으로 대견하다. 그래서 칭찬하는 의미로 이 글의 줄거리를 요약해 보고 싶었고, 또 시간이 지나 가물가물 해지면 요약된 글을 읽으며 기억을 되살리고 싶었다.
그러나 초한지 전체를 요약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고, 내가 기억하고 싶은 인물에 관한 것을 중심으로 간추려 적어본다.
우선 초한지는 기원전 200여년 전, 6국을 통일한 진시황과 그 후 폭정에 항거해 망국의 후손들이 각지에서 군사를 일으키는데, 그중 한나라 유방과 초나라 항우의 싸우고 또 싸우는 이야기다.
남자들은 다 알고 있겠지만, 장기판의 왕이 항우와 유방이며, 초나라와 한나라의 싸움판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소득이고, 아방궁, 장자방, 진창길, 옹치, 분서갱유, 토사구팽, 다다익선, 패왕별희, 사면초가등 익히 들었던 단어들의 어원을 알게 된 것도 큰 기쁨이다.
삼국지도 읽어볼까 했지만, 한번 잡으면 만사를 제쳐두고 빠져버리는 성격과 너무나 많은 인물들이 서로 헷갈릴 것과, 이제 간신히 한나라의 건국을 이루었는데, 한나라의 망국을 읽는 것이 어쩐지 허망한 생각이 들어 뒤로 미뤄둔다.
진시황
그의 아버지 이 인은 후궁 소생으로, 조나라의 볼모로 가 있어 왕에게는 잊혀진 채 살고 있었는데, 여불휘라는 사람의 도박과도 같은 투자로 세자가 되고, 왕이 된 인물이다.
여불휘의 애첩(조희)을 아버지가 부인으로 맞아들였는데, 그때 이미 여불휘의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는 소문으로 시황제가 된 이후에도 여정이라는 굴욕적인 이름으로도 불리었다.
(결혼한지 열 두 달 만에 태어났다는데. 말이 안 되죠? 아니면 진짜 특별한 사람이든지. 어쨌든 생모인 조희는 아들이 황제가 된 뒤에도 여불휘와 놀아나고, 여불휘가 보낸 노애라는 정력가 사이에 아이를 둘이나 낳아, 몰래 키우다 반란을 꿈꾸기도 하는 등 엄청 속 썩이는 엄마다.)
어쨌든 그는 중국 천하를 통일한 인물이고, 31번째 진나라 왕이면서 최초의 황제가 되었다.
열세 살에 왕위에 올라, 10년에 걸친 싸움으로 39세에 6국을 통일한다.
중앙 집권체제를 공고히 하고, 문자와 화폐, 도량형을 통일하며, 북방 민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의 기초가 되는 성벽을 건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신에 집착하여 70만명을 동원하여 자신의 능을 짓기도 하고, 불노초를 구하기 엄청난 국고를 탕진하기도 한다.
(수은을 불로장생 약으로 믿고, 매일 먹고 발랐다 하는데 그렇다면 50세까지 산 것도 하느님의 보호하심이다. ㅎ)
또한 지나치게 법가 사상을 중시하여 사상을 개혁하려는 중에 책을 불태우고, 유학자 460명을 산채로 땅에 묻는 분서갱유를 저지르기도 한다.
이에 장남 부소가 불가함을 아뢰자 변방에 있는 몽염 장군에게 쫒아 보낸다.
황제가 된 이후에도 자주 전국 순행을 했는데, B.C 210년, 7월. 순행 중에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다.
온량거라는 집채만한 수레에 타고 다녔는데, 그 때 수행하던 환관 조고와 막내 아들 호해, 그리고 진시황의 총애를 받던 승상 이사에 의해 유서가 조작되고, 장남 부소와 천하 통일의 주역인 몽염 장군에게 죽음을 명한다. 아버지의 조서를 받자마자 아들 부소는 자신의 칼로 목을 베어 자결한다. (착한 아들???)
그 뒤로 황제가 된 호해는 조고의 꼬임에 빠져 아버지의 아들, 딸들을 모조리 대수롭지도 않은 죄목으로 함양 저잣거리에서 끔찍한 형을 받아 죽게 하고, 조고의 책략대로 일은 하지 않고 향락에 빠져 있다가, 반란군이 수도까지 쳐들어오자, 조고의 강요로 자결하니 그의 나이
24살이다.
진시황의 조카 자영이 제위에 앉았으나, 얼마 못가 항우에 의해 죽게 되니 통일 중국은 15년을 채 못 넘기고 멸하고 만다.
아방궁(阿房宮)
함양 부근 아방 땅에 지은 궁궐로 시황제 35년에 짓기 시작.
사방 300리의 땅에 지어진 궁궐의 지붕은 하늘과 해를 가리고, 대전 길이가 동서 500걸음, 남북이 50길(丈. 한 길은 어른의 키)이며, 대전 마루에 만 명이 함께 앉을 수 있고, 그 아래에는 다섯 길 높이의 깃발을 세울 수 있다. 수많은 궁실이 벌집처럼 이웃해 있으며, 궁궐 내에 두 개의 내가 흐르고, 각 나라에서 빼앗아 온 정교하고 귀중한 보물들이 첩첩이 쌓인 것이 태산과 같아, 금이나 진주가 조약돌처럼 땅에 내버려져 있었다.
원래 다 짓고 나면 좋은 이름을 지어 붙이려 했지만, 다 지어지기 전에 시황제는 죽고, 이세 황제인 호해가 이어 지었지만, 반란군인 항우에 의해 불태워졌는데, 불타는 연기가 3개월 동안 그치지 않았다 한다.
황제의 묘.
여산에 죄수 70만 명을 투입해서 사방 10리의 땅을 깊이 파, 큰 돌로 벽을 쌓고, 구리를 부어 세상에서 가장 큰 현실과 외곽을 만들었다. 그 안에 자신의 궁궐 모형을 만들고, 보배로운 물품으로 채우고, 수은으로 하천과 강, 바다를 만들어 서로 이어져 흐르도록 하고, 인어(人魚)의 기름으로 무덤 안을 밝힐 수 있게 했으며, 무덤을 파 들어오는 자가 있으면 절로 화살을 쏠 수 있는 활과 쇠뇌를 만들게 했다.
이세 황제는 이런 시황제의 허영을 효도란 이름으로 확대하여, 시황제가 죽은 뒤에 자식이 없는 후궁 수 백 명을 ‘죽은 뒤에도 선제를 모시라.’며 산채로 묻고, 무덤을 만들던 장인들과 일꾼들도 비밀 유지를 목적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여 굶어 죽거나 질식해 죽게 했는데, 그 수가 수 천 명에 이른다.
병마용
무덤이 있는 여산 동쪽 10여리 되는 곳에 능묘를 지킬 지하 군단을 흙으로 빚어 만들었는데, 동쪽에 만든 것은 진나라의 적은 모두 동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실물 크기의 토용은 머리와 몸통, 팔 다리를 나누어 빚은 다음, 말리고 구워 굳힌 다음, 끼워 맞추고 색칠도 하고 눈과 눈썹까지도 그려 넣으니 실물과 흡사했다. 보병, 기병, 궁수, 마부, 장수 등, 민족과 계급에 따라 복색도 달리 하고, 타는 말과 병기를 끄는 말도 따로 만들어 정교함을 더했다.
(2000여 년을 지하에 묻혀 있다 1974년 한 농부에 의해 발견 되었고, 아직도 발굴 중이며, 세계 8대 불가사의라고 불리운다.)
유계 (한고조 유방)
아버지, 어머니는 이름조차 없는 촌로이고, 유계 역시 유가네 막내란 뜻이다.
이렇듯 별 볼일 없는 집안 출신이고,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건달 생활을 하다, 정장이라는 한미한 벼슬을 한 것이 전부이다.
유방의 탄생설화 :어머니가 밭일을 하다 못가에서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적제(赤帝)라는 천신과 정을 통하게 되었다. 맑던 하늘에서 천둥이 울고 번개가 번쩍이더니 사방이 컴컴해졌다. 아버지 태공이 어머니에게 달려가 보니 벌건 교룡이 아내의 몸 위에 올라가 있었고, 그 뒤에 임신하여 낳은 것이 유계다
어떤 이들은 못 근처에 살던 부랑자에게 겁탈 당한 것을 각색한 것이라고 하지만, 어쨌든 유계는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고 자랐다.
희안한 건, 별 볼일 없는 가난뱅이인 유계에게 저잣거리 건달들이 그 주위를 맴돌았고, 성안 거리를 걸으면 어느새 대여섯 명이 따르고, 주막에 앉으면 근처의 건달들이 하나 둘 그리로 몰려들곤 하였다.
종사하는 생업도 없고, 넉넉지 못한 빈털터리 신세로 저잣거리에서 술을 먹고 취해 구석에 누워 잠을 자고 있으면 유계의 몸 위에 용이 나타나 어른거렸다 한다.
어느 날, 현청에 놀러와 칼과 검술에 대한 얘기를 하며 검술 시범을 보이다 하후영이란 관리를 다치게 하자, 현령이 몹시 화내며 범인을 캐묻는데, 다친 하우영이 입을 다물자, 옥리 조참을 불러 범인을 찾게 했다.
그때 공조리 벼슬을 하던 소하가 함양에 노역을 보내는 걸로 빼돌리자, 노관과 번쾌라는 동네 친구들이 소하에게 청을 넣어 기꺼이 함께 노역길에 보내진다.
노역장에서 돌아온 유계는 소하의 도움으로 정장이라는 하급관리가 되어 일하던 중, 노역자
300명을 인솔하여 함양으로 가라는 명이 떨어진다. 패현을 떠나는 날 그를 배웅하러 나온 사람들이 100여명에 이르고, 전별금도 두둑히 받게 된다.
노역자들은 함양에 이르기까지 노숙을 하며 식량을 자급해야 하는데, 고달픈 행군과 굶주림으로 달아날 틈만 노린다.
밤이 지날 때마다 눈에 띄게 줄어든 노역자들이 사흘째는 아흔 명도 남지 않게 되자, 함양까지 가 봐야 엄한 진나라 법에 저촉되어 자신의 목숨을 부지 할 수 없다 생각하고, 전별금으로 인근 마을에서 술을 사오라 시켜 낮술을 퍼마시고는,
“모두 헤어져 각자 살길을 찾으라.” 하니 몇몇 사람들은 마음 바뀔까 두려워 서둘러 떠나고, 몇몇은 무릎을 꿇으며 거두어 달라 한다.
“나는 여러분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하자, 울먹이며 따르기를 맹세하니
“좋소, 새 날이 올 때까지 고락을 나눕시다.”
이리하여 늪지에 숨어 지내던 유계가 소하에게 사정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자, 소하는 곡식과 돈을 모아 보낸다.
(그 뒤 소하는 한(漢)의 천하가 자리 잡게 될 때까지 병참과 보급을 맡게 되고, 잠시 진나라 수도 함양에 입성했을 때는 황실의 서책과 문서등을 챙겨 항우에게 쫒기면서도 지켜내, 유방이 나라를 다스림에 크게 도움을 준다. 고조 유방이 즉위할 때 논공행상에서 으뜸가는 공신으로 치기도 한다.)
시황제가 근처로 순행을 나온다는 소문이 있으니 더 깊숙이 숨으라는 소화의 전갈을 받고 깊은 골짜기 망탕산으로 옮긴 유계와 무리는 소하가 몰래 보내오는 식량과 사냥, 나무껍질 등으로 연명하고, 굶주리면서도 도적질에는 나서지 않았다.
망탕산 계곡에서도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유계를 용케 찾아내는 아내 여씨에게 어떻게 찾았느냐 묻자 “당신이 계시는 곳에는 밝고 환한 구름 같은 기운이 있어 찾아올 수 있다.” 하니 삶을 의지하기로 마음먹은 그들은 그 말이 참이라 믿고 싶은 마음에 자신들도 그걸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다.
그즈음, 천민 출신인 진승과 오광이 들고 일어나 ‘장초’라는 나라를 세웠다는 소문을 듣고 ‘때’를 놓쳐 버린 게 아닐까 걱정하고 있던 차에, 패현 현령이 부른다는 말을 듣고 무리를 이끌고 나선다.
유계가 패현으로 간다는 소문에 마을의 건달들이 무리를 모아 달려오고, 차츰 유방을 우두머리로 삼는 군사 집단의 성격을 띠게 된다.
그러나 뜻밖에 현령의 마음이 바뀌어 성문을 닫고 오히려 소하와 조참을 죽이려 하자 도망쳐 나오고, 하후영도 눈치 채고 뒤따라 나온다.
성안의 백성에게 화살 편지를 보내 ‘현령을 죽이고 우리와 힘을 합쳐 진나라의 학정에서 벗어나자.’ 하니 백성들이 현령의 목을 바쳤다.
패현의 우두머리가 되자, 자신이 적제의 아들임을 내세워 붉은 색을 자신의 색깔로 삼고, 그때부터 모든 군사의 깃발을 붉은색으로만 쓰게 했다.
주변의 성을 하나하나 점령하고, 마침내 고향 땅 풍읍까지도 점령한 다음, 옹치라는, 마음엔 들지 않지만, 고향 친구에게 성을 맡기고, 근처의 성들을 아우르는 중에 옹치가 위나라 주불의 편지 한 장으로 성문을 열어 항복했다는 소리를 듣고, 홧김에 진눈개비가 날리는 밤길을 달려와 풍읍성을 여러 날 동안 두드렸으나, 오히려 옹치에게 벼라별 험한 욕만 먹고, 결국은 철수 하고 만다.
(그 뒤 옹치는 항우의 부하가 되어 여러 번 유방을 곤경에 빠뜨렸다가, 항우가 죽은 뒤 항복하여 다시 유방에게 오는데, 훗날, 공신들의 반란을 염려한 장량이 가장 미워하던 옹치부터 벼슬을 주어야 한다는 말에 십방후에 봉한다. 유방은 옹치란 단어가 언뜻 스치기만 해도 이맛살을 찌푸리는데, 원래 고유명사였던 옹치는 ‘마음속으로 깊이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이란 뜻의 보통명사가 되어 동양 3국에서 두루 쓰이는 말이 되었다.)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한 유방은 근처 유현에 진승을 따르던 영군과 진가가 진을 치고 있다는 말을 듣고 힘을 빌러 간다. 유현에 이르러 여자가 남장을 한 듯 고운 남자 장량을 만난다.
(장자방이라 불리는 장량은 한(韓)나라의 귀족 출신으로, 나라가 진에 의해 멸망하자 진시황을 죽이려고 전 재산을 건, 반진세력으로 명망이 높은 사람이다. 유방을 도운 일등 공신이지만, 대의를 중시하고, 세속적이지 않았기에, 유방이 천하를 얻은 뒤에는 초야에 묻혀 살았다.)
‘저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아마도 별나게 쓸 일이 있어 하늘이 낸 사람이다. 어쩌면 그 쓰임은 나를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사실 유방과 장량은 전혀 닮은 데가 없는데, 둘은 서로 까닭 모르게 끌림을 느꼈고, 그날 유방은 곁에 부리는 노관, 번쾌, 소하, 조참, 주발, 하후영같은 부장들을 모두 군막으로 불러 들여 장량과 함께 술을 마셨다.
(훗날, 그들은 하나같이 왕후장상이 되어 한 시대를 다스리는데, 천하의 넓음에 비하면 간장종지보다 좁은 패현 한 곳에 당대의 인재들을 그대로 쏟아 부은 셈이다. 어떤 이들은 ‘파리가 준마의 꼬리에 붙어 천리길을 간다.’ 며 영웅에 곁붙어 출세를 한 것이라 하지만, 그들의 활약상을 보면 결코 파리에 빗댈 만한 사람들은 아닌 것 같다.
그 뒤로도 한신, 경포, 팽월등을 등에 업고 항우와 싸우면서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지만, 결국 항우를 자결하게 만든 뒤, 한(漢)나라를 세우고, 400년의 역사를 만들어. 중국 글자를 한자(漢字)로, 중국 민족을 한족(漢族)이라 일컫게 만든다.
그러나 통일 후에 심약한 세자를 위해 공신들을 제거해 나가는데, 통일의 공로자 한신을 제왕(祭王)에서 회음후로 격하시키고, 거기에 놀란 경포, 팽월이 반란을 꾀하자 그들을 잔인하게 제거하고, 유씨 일가로 그 자리를 대신하게 한다.)
첫댓글 출퇴근 하며 이문열의 초한지 10권을 두번을 읽고
독후감을 총8편으로 써서 다른 카페에 올린글 입니다.
초한지를 안 읽으신분은 잘 모르시겠지만
그 긴 소설의 독후감을 쓴 마누라(발레리아) 대단혀!
글을 퇴근후 밤에 쓰느라 밤을 독수공방한 나도 위로 받고 싶다.ㅠㅠ
나머지 글은 나중에!